'불온인물' 노엄 촘스키를 위한 변명 "거짓 지배담론 맞선 이 시대의 참 지성"

'진실과 정의'의 토대 위에 서구 위선 고발 메이저 언론·지식인들 기피와 중상모략

2009-02-02     장 브리몽 | 물리학자

메이저 언론은 노암 촘스키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지만, 적어도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지식인중 한 명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흔히 사람들은 촘스키를 로베르 포리송이나 폴 포트와 연관시키고, 다양한 집단 학살을 최소화하거나 부정하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지식인의 '전형'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그는 1984년 <나를 중상 모략하는 파리지앵들에게 보내는 미발간 답변들>을 이름 없는 출판사 <스파르타쿠스>에서 출간하게 된다.
 
 반전 이론에 대한 오해와 논쟁 
 베트남 전쟁 동안, 촘스키의 글들은 프랑스에서 일부 지지를 받았지만,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탓에 오해의 대상이 되곤 했다. 친서방 쪽에 줄을 서든, 혹은 제 3세계의 혁명을 지지하는 쪽에 줄을 서든, 자신의 진영을 선택해야만 했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합리주의자인 촘스키는 그 같은 태도가 낯설었다. 그것은 촘스키가 '그 같은 반목·대립으로부터 초월했기' 때문도 아니다. 사실, 촘스키보다 정치 참여에 더 적극적인 지식인은 드물다. 다만, 그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그 어떤 진영을 토대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진영을 따지지 않고 '진실과 정의'와 같은 원칙을 토대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의 반전 표명은 베트남 혁명이 인도차이나 민중들에게 밝은 미래를 제공할 것이라는 예측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미국의 침략이 재난을 부를 것이라는 관측에서 비롯됐다. 왜냐 하면 미국의 침략은 그 동기가 민주주의 수호와는 동떨어진, 인도차이나 및 제 3세계에서의 독립적인 모든 형태의 발전을 저해하는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예리한 글들은 베트남 전쟁 반대자들에게 귀중한 지적 도구로 쓰이며, 촘스키와 프랑스의 그의 지지자들 사이의 시각 차이는 부수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1975년부터, 보트 피플들이 베트남에서 도망치기 시작하고, 크메르 루주가 대량 학살을 자행하자, 정치적·이념적인 반격이 촉발된 것이다. 한층 포괄적인 의미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한 사람들의 '죄책감 메커니즘'은 이 사건들의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시켰다. 하지만 촘스키는 1979년 소비에트 공화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반대한 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소비에트 군이 철수한 이후에 아프가니스탄 반군들이 자행한 끔찍함을 비난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하다고 지적한다. 왜냐 하면 이들이 침공을 반대하는 것은 재난을 막아 보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침공을 결정한 사람들이 그 재난에 대한 책임을 져야지, 그들의 적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얼핏 진부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유형의 논쟁은 서구 진영에서는 듣기조차 힘들다.
 
 현상에 대한 촘스키 특유의 지적 행보
 프랑스에서 이분법적 '편 가르기'는 수많은 식민 전쟁 반대자들에게 탈식민지 사회에서의 '밝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환상을 심어줬다. 이런 상황은 베트남 전쟁의 종전 시기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대전환점'과 공교롭게 맞물리면서 한층 효과적으로 죄책감을 전가시키게 된다. 이 시기에 프랑스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제 3세계의 혁명, 그리고 점차 '새로운 철학자들'의 움직임과 거리를 두면서, 차드와 니카라과에 관한 서구 진영의 정책에 힘을 실어주었다. 초기 유로미사일(1982-1983)에 대한 투쟁에 소극적이었던 많은 프랑스 지식인들, 특히 '68 세대'들이 걸프전 당시와 나토의 코소보 개입 때에는 대단한 투사들로 변신했다.
 환상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노암 촘스키로서는 부정할 그 어떤 전쟁도 없었다. 따라서 수십만의 희생자를 양산시킨 중앙아메리카에서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군사 개입과 엠바고 반대 투쟁의 정점에 그가 있었다. 하지만 대전환점을 주도했던 이들로부터 촘스키는 괴상하고 위험한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들은 의아해 했다. 어떻게 '착한 진영'은 '인권'을 챙기는 서구 진영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쁜 진영'은 '인간의 형상을 지닌 야만'의 진영, 사회주의와 포스트식민주의 독재 체제가 뒤섞여 있는 국가들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해답은 촘스키의 지적 행보로부터 찾을 수 있다. 촘스키는 많은 작품들을 통해 서양 사회의 이념적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어떤 역사학자가 로마 제국을 공부할 때면, 그는 당대의 지도자들의 행위를 그들의 경제적, 정치적 관심사, 또는 적어도 그것들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인식과 연결시켜 본다. 역사학자는 지도자들이 밝힌 의도에만 매달리기보다는, 공식적인 담론의 비밀을 캐내기 위하여 '숨겨진' 사회 구조(힘의 관계, 제도적인 제약)를 밝힌다. 이러한 행보는 너무나 타당하기 때문에, 심지어 그 합당성을 증명할 필요조차 없다. 사람들은 이러한 행보를 예전의 소비에트 공화국, 중국 그리고 오늘날의 이란에 적용한다. 그 어떤 진지한 전문가도 동기를 앞세워 자신들의 행위의 타당성을 증명하려는 그들 지도자의 행동을 설명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방법론적인 태도가 서구 사회를 다룰 때는 확 바뀐다. 요컨대 저들은 서방 정부 지도자들이 공표한 의도는 거의 의무적으로 그들 행동의 원동력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목표달성 능력이나 지능은 의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을 짓누르고 있는 더욱 강력한 요인을 문제 삼기보다는, 이들의 순수한 동기를 문제 삼고, 이들의 행위를 '제약 탓'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존중할 만한' 담론을 차단시키곤 했다.
 
 서방과 언론의 위선 먼저 고발
 따라서 코소보 전쟁 당시, 사람들은 나토가 작동시킨 전략과 방식에 대해 토론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인도주의적인 전쟁이었다는 생각에 대한 토론을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1980년대 미국이 중앙아메리카에 사용한 방식을 비판했지만, 미국이 소비에트 공화국과 쿠바의 위협으로 저들 나라들을 보호하려 했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정치 현상의 접근에 있어 신기한 이분법을 만들어 내는 논쟁은 우리 서구 사회가 과거 사회와 소련 혹은 중국과 '실제로 다르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왜냐 하면 서방 정부가 '실제로' 개인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걱정하고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원칙이 다른 지역에서보다 '서구에서' 훨씬 자주 존중되고 있다는 사실이, 특이한 서구 이론을 경험에 의거하여 평가하는 데는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흡사 닮은꼴인 두 비극(코소보 전쟁과 미국의 중앙아메리카 개입)이 빚어낸 전쟁, 기근, 테러 등을 비교하고, 서방 정부와 언론의 반응을 관찰하면서 위의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방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책임을 적들에게 전가 시킬 수 있게 되자, 인정사정없는 총체적인 분노를 표출했다.
 그에 반해 서방 정부 또는 그 동맹국이 져야 하는 책임, 즉 공포는 종종 최소화됐다. 그러나 만약 서방 정부의 행동이 진정 그들이 공표한대로, 그 동기가 이타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선권을 적에게 비극을 가하는데 둘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들이 저지른 비극에 대해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러나 항상 그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 위선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촘스키의 많은 저서들은 그러한 사실들을 비교하고 있다.1)
 인도차이나, 특히 캄보디아의 경우 촘스키의 글들은,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 만행, 인도네시아인들의 동티모르 침공과 대학살 등 닮은 꼴인 끔찍한 만행들 앞에서 서방 정부와 언론들이 보인 반응을 비교한 것임에도 불구, 자주 '폴 포트를 옹호'하는 글처럼 소개됐다.
 캄보디아의 경우엔 위선 만큼이나 분노도 거세게 표출됐다.2)그러나 인도네시아의 군사 작전 당시 언론과 지식인들은 미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동맹국들이 인도네시아에 조달하는 무기가 동티모르에 사용될 줄 뻔히 알면서도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다.3) 의분(義憤)을 사지 않은 이러한 유형의 긴 사건 목록을 작성하려면 어쩔 수 없이, 터키와 쿠르드족,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국제법을 들먹거리며, 사람들이 수십만의 인명을 총알받이로 내몬 이라크 사건 등을 뒤돌아보게 된다.
 이러한 비교를 수행하면서, 촘스키는 대변혁 이후 특별히 비난을 받았던 '편가르기'를 질타했다. 왜냐하면 선(서방과 동맹국)이 악(제 3세계의 민족주의와 속칭 사회주의 국가)에 맞서고 있어, 유추가 금지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촘스키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그는 표리부동하지 않고, 서구정부와 언론을 비난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정부, 이를테면 서방 정부가 저지른 범죄를 우선 고발하고, 그것을 위해 행동하기를 희망했다.
 
 촘스키 공격 구실 '포리송 사건'
 설령 그의 행보가 '혁명적인' 체제나 혹은 '다른 체제'들이 저지른 범죄를 면죄하겠다는 그 어떤 환상을 담고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러한 환상을 유지시키고 그러한 면죄를 수락했던 체제들은 촘스키를 자신들의 죄 구덩이 속에 몰아넣기 위해 불가피하게 그를 비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일부 프랑스의 지식인들의 반응, 즉 숭배했던 것을 태워 없애 버릴 것 같은 근심, 태워 없애 버린 것을 숭배할 것 같은 근심을 이해 할 수 있다. 당연히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예전에 저지른 실수를 타인에게 전가시키며 복수하고 싶어 한다. 때때로 촘스키는 이런 현상에 대해 즐거워하기보다는 성을 냈다.
 이즈음 프랑스에서 촘스키를 공격하는 가장 신랄한 구실로 삼았던 '포리송 사건'을 짚어보자. 리용 대학의 문학교수, 로베르 포리송은 그가 저지른 여러 사건 중, 2차 세계대전 중에 존재했던 가스실의 존재를 부인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1970년대 말 교수직에서 파면됐다.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기위해 500여 명 이상이 탄원서에 서명을 했고, 그 중에는 촘스키도 있었다. 촘스키는 자신의 행동이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자, 대응 차원에서 짧은 텍스트를 작성한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어떤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그 사람과 의견을 공유한다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해명했다. 미국에서는 기본적인 원칙으로 통하는 이 사실이 프랑스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촘스키가 이 사건에서 실수를 한 것이 딱 한 가지 있다. 자신의 텍스트를 당시 친구였던 세르주 티몽에게 건네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허락한 것이었다. 헌데 티몽은 그 텍스트를 포리송을 옹호하기 위해 출간한 <회고 집> 서문에 촘스키의 '의견'처럼 게재했다. 촘스키는 끊임없이 자신의 텍스트를 그 곳에 쓰라고 준 것이 아님을 상기시키며, 그 곳에 쓰지 못하게 막으려 했지만 때를 놓치고 말았다.4)
 이 사건에서 촘스키를 비난하려면 최소한 그것이 전술적인 오류 때문인지 혹은 표현의 자유를 무조건적으로 옹호한다는 원칙 때문인지, 우리가 배척하는 것을 분명히 밝혀야 하지 않을까? 후자라면 프랑스가 의견 표현 부문에 있어서, 미국의 자유주의적 전통을 지니지 못했음을 먼저 지적해야 한다.
 
 명석함, 용기 갖춘 낙관론자
 미국에서는 촘스키의 입장에 충격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때로는 인권 동맹과 비교되는 '미국시민자유연합'의 수많은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은 '큐클럭스클랜'(미국의 천주교도·유대인·흑인 등을 배척하는 백인 지상주의 비밀 결사대)이나 혹은 소규모 나치 단체들에게 흑인이나 유태인 밀집지역에서의 시위를 금지하면 법원에 제소하기도 한다.5)
 이 모든 사실은 하나는 프랑스를 지배하고, 다른 하나는 미국을 지배하는 두 개의 서로 상반된 정치적 전통이 맞서는 토론일 뿐, 프랑스 공화국에 맞서는 타락한 '울트라 좌파'를 대변하는 그 어떤 촘스키에 관한 토론은 아니다.
 경직된 지식인 단체와 노예근성을 띤 언론이 권력가들을 위해 세속적인 성직자처럼 봉사하는 세상 속에서, 촘스키를 읽는 것은 자기 방어 행위다. 그것은 지배 담론의 거짓 증거를 분별하며 분노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우리에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때로는 이익보다는 해를 더 끼치는 혁명적인 낭만주의와, 급진적인 동시에 합리적인 사회 비판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수년간의 절망과 체념을 뒤로 하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총체적인 쟁론이 다시 불거지고 있는 듯하다. 이 쟁론은 노암 촘스키의 삶과 저서가 아우르고 있는 명석함, 용기 그리고 낙관론을 한층 더 부각시켜주고 있다.

 번역 | 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에드워드 S 허먼과 노암 촘스키의 <제조 동의> 참조,  <매스 미디어의 경제 정책> 출판사: 판테온, 뉴욕, 1988년, 노암 촘스키의 < 필요한 환상.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생각 제어>, 출판사: 플루토 프레스, 런던, 1989년.
2)1979년 베트남이 폴 포트 체제에 종지부를 찍었을 때, 서양인들은 외교적으로 유엔에 크메르루주 지지 선언을 하는 동시에, 간접적으로 군사적 면에서도 그들을 지지한다. 반대로 인도네시아의 경우, 서구가 간단한 압력만 행사했어도 대학살을 분명 저지할 수도 있었다.
3)프랑스 외무부 장관 루이 귀이랭고는 자카르타에 들러 군사협정을 맺는다. 이후 그는 프랑스는 동티모르 문제에 있어 인도네시아를 궁지로 몰아세우지 않겠노라 유엔에 천명한다. 1978년 9월 14일 <르몽드>.
4)이 텍스트의 영어 버전은 <표현의 자유의 권리에 대한 일부 기본적인 의견>이며 웹사이트 www.zmag.org에서 볼 수 있다.
5)1978년 일리노이 주 스코키 지역에서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