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맹주의가 남긴 백조의 노래

1973년, 충격의 한 해

2023-09-25     아크람 벨카이드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기자

1973년 9월, 칠레에서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킨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며칠 후에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는 비동맹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회원국들을 위한 야심 찬 개발 구상이 제시됐고, 그 내용은 이듬해 1974년 유엔 총회에서도 채택됐다. 그 구상의 주요 골자는 ‘국유화, 산업화, 국가의 자원 통제, 다국적 기업에 대한 상호 대응, 외국인 투자에 대한 경계’ 등이다. 그러나 이런 ‘신(新)국제경제질서’ 구상은 그해 10월, 아랍-이스라엘 분쟁에 따른 위기와 선진국들이 추진한 전략에 밀려 퇴색되고 말았다.

 

평소 근엄한 표정을 짓던 우아리 부메디엔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커다란 하바나 시가를 든 알제리의 부메디엔 대통령은 제4차 비동맹국 정상회의 폐회식을 주재하면서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1973년 9월 5일부터 9일까지 알제리 알제에서 열린 비동맹국 정상회의에는 75개국이 참가했다. 그 밖에도 야세르 아라파트 자치정부 수반이 이끄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약 30개 국제기구와 해방 기구, 스웨덴과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비회원 자격의 11개국이 참가했다(관련 기사 참조).

그로부터 8년 전까지만 해도 알제리의 부메디엔 대통령은 쿠데타를 일으켜 아흐메드 벤 벨라 대통령을 축출했다는 이유로 진보 진영 지도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하지만 이제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 등 쟁쟁한 국가수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해당 회담을 통해 부메디엔 대통령이 거둔 주요 성과로는 이념적인 결실과 더불어 발전 문제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견해를 관철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실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친공산주의와 친소련 국가들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연설하자, 카스트로가 소련은 반제국주의와 탈식민지화 운동을 지지한다며 격분했다. 자칫하면 아무런 소득 없이 회의가 종료될 뻔했다. 하지만 자존심과 우선권을 내세운 지도자들 간의 충돌도, 천연자원 통제권을 포함한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합의를 막지는 못했다.

비동맹 세력은 반둥에서 열린 아프리카-아시아 회의(1955)와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첫 비동맹국 정상회담(1961)을 통해 세계를 양분한 거대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재확인했으며, 줄곧 세계 평화와 미국과 소련 간의 ‘평화적인 공존’을 옹호해 왔다. 제3의 세력임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비동맹 세력의 입장은 모호해 보이지만, 그 덕분에 친미 국가(사우디아라비아, 시에라리온, 싱가포르)와 다른 사회주의 진영 국가(알제리, 쿠바, 인도)가 공존할 수 있었다. 

 

“경제적 해방 없는 비동맹의 자유는 완전하지 않아”

하지만 1973년에는 비동맹 국가들이 자부하듯 냉전의 양극 체제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1973년 1월 열린 파리평화협정으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이에, 이 비동맹국들은 강대국 간 협상에서 개발도상국들과의 더욱 공정한 부의 분배를 고려하지 않는 현실을 개탄했다.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는 국제적 노동 분업과 다자간 무역 협상에서 진전이 없는 현실을 지적하며 “경제적 해방 없는 비동맹국의 자유는 완전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1) 

그리하여 알제에서 열린 비동맹국 정상회의에서는 다음과 같은 방향이 정해졌다. 비동맹 국가들은 ‘신국제경제질서’와 ‘발전을 위한 권리’를 요구했다. ‘원조’라는 단어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관건은 원조가 아니라 산업화를 이루고, 능력을 발휘해 국제 정세를 활용하고, 최상의 가격으로 수익을 창출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연자원을 상품화해 국제 관계를 재정의할 지렛대로 삼는다는 발상은 1970년 9월 잠비아의 루사카 회의에서 처음 제기됐고, 이후 비동맹 국가들의 행동 원칙으로 자리매김했다. 

리비아와 알제리는 탄화수소를 국유화했고, 원자재를 국유화하는 다른 국가들을 돕겠다고 제안했다.(2) 국유화 문제는 국가가 외국기업에 대한 보상 수준을 결정하는 유일한 주체라는 점에서, 주권 확립의 필수 조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 비동맹국은 분쟁 시 자국법을 준거법으로 적용하는 합의 방식을 고수하기도 했는데, 이는 명명백백 국제 중재를 거부한다는 표시였다.(3) ‘신국제경제질서’라는 구상을 세우기까지는 사상가 사미르 아민(1931~2018)의 이론뿐 아니라 중남미경제위원회(Cepalc)의 연구, 그리고 1세기 가까이 원자재에 관한 주권 문제로 몸살을 겪었던 비동맹국 대표단의 기여가 매우 컸다.(4) 

칠레 대표단은 (조국의 ‘심각한 상황’을 언급하는 메시지를 본회의에 전달한) 살바도르 아옌데가 불참했을 때도 외국인 민간 투자를 규제하고 초국적 기업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몇 가지 제언을 하는 등 구상을 구체화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바지했다.(5) 그 구상의 골자는 세제 혜택을 없애고, 비동맹국과 합작법인을 만들며, 다국적 기업의 관행을 감시하는 기수를 설치해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다. 아울러, 아르헨티나나 인도네시아와 같은 국가의 요청으로 관세 무역 일반 협정(GATT) 협상의 틀 안에서 비동맹국 간의 공통 입장을 채택하기도 했다.

 

비동맹운동 지도자 아옌데, 그 죽음과 칠레의 몰락

1974년 5월 유엔 총회에서 알제리의 부메디엔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하고 일련의 합의를 거쳐 ‘신국제경제질서’가 채택됐다. 하지만 이런 절정은 죽어가는 백조의 마지막 노래가 됐다. 수년에 걸쳐 비동맹 운동에 적극 헌신한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은 미국의 사주를 받은 쿠데타로 세상을 떠났다(관련 기사 참조). 군사 정권이 들어서면서 알제 회의에서 ‘보편적인 사회주의’를 주장했던 칠레는 차츰 시카고학파에서 영감을 받은 신자유주의의 실험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1960년대 말 서구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책은 이후 수년 동안 케인스주의를 몰아내고 주요한 경제 척도가 돼 알제에서 도입한 구상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1973년 10월 아랍-이스라엘 분쟁도 비동맹 운동의 추진력을 약화하는 데 작용했다. 또한 천연자원 즉 석유가 국제관계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세간에 각인시켰다. 1968년에 창설된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 회원국들은 배럴당 유가를 일방적으로 70% 인상하고 생산량을 5% 감축해, 미국과 네덜란드 등 무기 공급을 통해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국가에 금수조치를 취하기로 했다.(6) 아랍 국가들이 다수인 석유수출국기구(OPEC) 역시 이 방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1971년 8월, 미국은 일방적으로 금 태환 제도를 폐지하는 조처로 국제 금융시장에 큰 혼란을 초래했다. 이미 흔들리던 서방 경제는 이 충격으로 경기 침체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탄화수소가 없는 개발도상국의 에너지 비용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알제에서 가장 가난한 비동맹국을 상대로 가격을 인하하고 원자재 가격을 차별화하자던 쿠바의 제안은 벌써 망각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비동맹국들 역시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바빴다. 일부 회원국, 특히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은 산유국의 이기주의를 꼬집었다. 이제 막 독립을 달성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살아남으려면 프랑스든 영국이든 미국이든, 자국에서 이미 원자재를 장악하고 있는 강대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만 했다.

 

우크라이나전 이후 ‘비동맹’ 용어, 원래의 비동맹과 관련 없어

결국 원유 가격 상승과 그에 따른 일부 선진국의 대응은 간접적으로 ‘신국제경제질서’의 싹을 잘라내는 데 일조했다. 여기에는 석유 달러를 확보하는 메커니즘이 작용했다. 생산국이 갑작스러운 횡재로 이익을 얻으면 부유한 국가는 그 중 상당 부분이 자국 시장에서 재활용되기를 원하기에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저해되지 않도록 총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각국의 총리, 외교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가 모두 팔을 걷고 나섰다. 

한편, 외국 은행과 금융 기관은 중동에 유동 자산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다국적 기업의 투자나 융자 등의 방법으로 남반구 개발 도상 국가의 투자 사업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물론 ‘수혜’ 국가가 일반적인 기준(국제 중재 수용, 투자자에게 유리한 세제 혜택, 비국유화 보장 등)을 준수한다는 전제 조건이 따라붙었다. 끝으로, 가격 상승에 따라 과거에는 수익성이 없거나 수익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됐던 예금을 활용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대기업들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서비스와 전문성을 제공했다. 나이지리아처럼 대형 다국적 기업의 유혹에 저항해 편파적인 계약을 뿌리칠 만한 비동맹 국가는 거의 없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비동맹’이라는 용어가 다시 유행하게 됐지만, 지금까지 존립하는 비동맹 운동(현 의장국은 아제르바이잔)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이 분쟁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고 러시아에 대한 제재 체제에 편승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에 편입되지 않고 동맹국 간의 통합 연대 협력을 강화하려는 이상과는 무관하다. 

 

 

글·아크람 벨카이드 Akram Belkaï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기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르몽드>, 1973년 9월 7일.
(2) Georges Fischer, ‘Le non-alignement et la conférence d’Alger 비동맹과 알제 회의’, <Revue Tiers-Monde>, 제56호, Paris, 1973년 9월.
(3) Samir Amin, ‘Une remise en cause de l’ordre international 국제 질서에 대한 의문’; et Maude Barlow, Raoul Marc Jennar, ‘Le fléau de l’arbitrage international 국제 중재의 재앙’,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75년 6월; 2016년 2월.
(4) Baptiste Albertone, Anne-Dominique Correa, ‘L’institution qui a inventé l’Amérique latine 라틴 아메리카를 발명한 기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2월호.
(5) Evgeny Morozov, ‘Une multinationale contre Salvador Allende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항하는 다국적 기업’,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8월호.
(6) ‘1973, un choc pour prolonger l’âge du pétrole 1973년, 석유 시대를 연장시킨 충격’, <마니에르 드 부아르>, 제189호(에너지 분쟁, 환상, 해결책), 2023년 6~7월호.

 

잊지 말아야 할 아옌데의 교훈

에피쿠로스학파처럼 미식을 즐기던 아옌데는, 스토아학파처럼 의연하게 입에 총구를 들이대고 죽음을 맞이했다. 1973년 운명의 9월 11일, 쾌활했던 그는 로마인처럼 평온하게 생을 마감했다. 예상치 못한 죽음이었다. 아옌데는 하나의 전설이 돼,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다. 그에게는 두 가지 모습이 있었는데, 그의 생전에 사람들은 겉으로 보인 한 가지 모습만 알고 있었다.

유쾌한 급진적 사회주의자로서, 마치 ‘인형’을 조종하듯 사람들을 움직이는 능력이 있고(1) 피스코(칠레 전통 포도 증류주)를 좋아하며 미식과 농담, 아름다운 여성에게 관심이 많은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던 아옌데다. 사실 아옌데는 진지한 좌파 진영에서는 드물게 유머 감각을 갖춘 친구였다. 미래의 영웅처럼 권위를 드러내지 않았고, 수염도 베레모도 없는, ‘친구 같은 대통령’의 모습을 보였다. 커다란 뿔테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약간 기르고 상기된 목소리로 가볍게 빈정대는 친근한 사람이었으며, 동지애도 깊었다. 즉 운명의 그림자 따위와는 거리가 멀며, 사람들을 속일만한 위인도 아니었다. 

나는 볼리비아 감옥에서 출소한 후, 몇 주간 아옌데의 초대를 받았다(당시 네루다도 이슬라 네그라의 집으로 나를 초대해줬다). 그때만 해도 나는 미겔 리틴 감독의 카메라 앞에서 칠레의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며 내가 터득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훈을 가르치려 드는 오만함을 보였다. 아옌데는 ‘개혁’을, 나는 ‘혁명’을 하려는 사람이라며 구태의연하게 역할을 구분한 것이다. 이렇듯, 나는 그 시절에는 다소 과한 면이 있었다. 그에 대해 변명하자면 4년 가까이 감옥에서 공상만 품었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황당무계한 꿈을 꾸던 시기였다. 

사실 당시의 칠레는 (태평양 물이 꽤 차갑기는 하지만) 낙원과도 같은 휴양지의 이미지가 강해서 사회주의로의 체제 전환은 생각하기 힘들었다. 과한 처벌이 이뤄지지도 않고 돈 한 푼도 귀히 여기는 소박한 사람들이 모인 나라였다. 칠레 국민들은 대개 낙천적이었다. 증오나 경멸, 공격적인 태도, 어둡고 천박한 탐욕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 발마세다 대통령의 자살도 먼 옛일이 됐을 때였다. 부자 동네에서는 끓는 솥에서 굴과 성게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이내 먹음직스러운 뽀얀 국물이 만들어졌다. 이 나라의 아름다운 피조물에 더해 의회는 활발하게 굴러갔으며, 군인들도 의식 수준이 높았다. 

유럽 정 반대편에서 유럽의 향수를 선사하는 나라, 칠레에 대해 혹자는 ‘남미의 영국’이라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은밀히 전쟁을 준비하고 뒷돈을 대던 북쪽 이웃 미국의 존재를 망각했다. 특별 자금으로 초기에 마련한 돈만 무려 100만 달러였다. 포위와 봉쇄, 자금 지원, 태업, 필요하면 살인에 이르기까지 자금의 사용처는 다양했다. 화물운송업자, 구리 광산, 백악관과 CIA는 일손을 놓지 않고 부지런히 일했지만 이 사실이 밝혀진 건 한참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었다. 

 

위대한 아옌데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론도 간혹 보도가 늦었고, 활동가들도 움직임이 지체됐다. 화해와 합의를 좋아하던 이 나라에서 최악의 상황은 상상할 수 없었고, 잔혹한 참사는 예측할 수 없었다. 편히 말을 놓으라던 아옌데는 원한이나 악감정과도 거리가 먼 사람으로, 내게 종종 책상 위 체 게바라 사진을 가리키며 미소를 짓곤 했다. “다른 길을 통해 같은 곳을 가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라는 자필 서명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의 말처럼 다른 길을 통해 같은 곳을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다정하면서도 매우 비현실적인 은유처럼 들렸다. 

카뮈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겸손함의 실천”이다. 민주주의는 나이가 들수록 이해가 깊어지고, 그 기간이 단축될 수도 있다. 문제의 그날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종종 들르던 칠레에서 나름대로 쿠데타를 기대하긴 했지만, 이렇게 과격한 방식이 아닌 좀 더 온건한 방식일 줄 알았다. 하지만, 칠레는 그렇게 스스로를 과신했던 어리석은 이 프랑스인에게 신속히 교훈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단순한 겉멋이나 오만과는 거리가 먼 이 위대한 남자와 그 친구들의 목숨을 건 희생은 서구권의 우리에게도 그 같은 비극이 닥칠 수 있음을 일깨워준다. 우리를 찾아올 비극은 보다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랬듯 정치에 관심을 끊었을 때도 우리는 아옌데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잊지만 않는다면, 언제 어디서든 허투루 넘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 같은 대통령’ 아옌데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곳도 다 그렇지만 걸핏하면 과거를 잊는 유럽은 그에게 진 빚이 많다. 사후 반세기가 흘렀다고 해도, 그를 기억하는 것이 결코 과한 일은 아니다. 

- 2023년 7월, 레지스 드브레   

 

 

글·레지스 드브레 Régis Debray

번역·배영란 


(1) 칠레에서는 아옌데에 대해 ‘무녜카(Muñeca)’라는 단어를 종종 쓰는데, 이는 스페인어로 손목, 인형, 꼭두각시 등을 가리킨다. 칠레 국민들은 좌파 진영 내에서 합의를 모색하고 화해를 이끌어내는 아옌데의 탁월한 능력을 가리켜 이 단어를 사용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