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를 떠도는 두 망령

2023-09-26     프랑크 고디쇼 l 역사학 및 라틴아메리카 연구 교수

한 명은 전직 의사 출신으로 선거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고, 다른 한 명은 쿠데타를 일으킨 장군으로 기관총과 독재의 표상이다. 1973년 9월 11일의 두 중심인물 가운데 누가 칠레 역사에서 명예의 전당으로 들어갈 것인가? 오늘날 칠레에서 그 답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자유로운 인간이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걸어갈 드넓은 길은 곧 다시 열립니다. 이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의 고별 연설에서 나온 말이다. 칠레인이라면, 성향을 떠나 일명 ‘드넓은 길’ 연설이라고 일컫는 이 연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옌데가 이 연설을 한 날은 1973년 9월 11일, 즉 피노체트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날이었다. 1970년 국민 투표로 선출된 아옌데 대통령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무기를 쥐고 일부 측근과 함께 라 모네다 대통령궁 안에 갇혔다. 그날, 아옌데는 자신이 살아서 나가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고별 연설을 내보내며 “배신자와 반역자, 비열한 자에게는 응당 벌이 내릴 것”이라는 도덕적 교훈과 함께 “노동자들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충실히 따라간 떳떳한 한 사람”으로서의 증언을 남기고자 했다(박스기사 참조).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아옌데 스스로 예견했듯 그의 차분한 목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살바도르 아옌데, 남미 남단 최초로 투표로 선출된 사회주의 대통령은 20세기 세계 좌파의 핵심인물로 손꼽힌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대, 칠레에서 사회주의가 지속된 기간은 채 3년(1970년 11월~1973년 9월)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짧은 사회주의 실험은 인구 900만의 이 나라를 변화시켰고, 전 세계 활동가와 지식인 사회를 흥분케 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을 주축으로 한 좌파 진영은 1969년 ‘인민연합’이라는 좌파 전선을 결성해 민주적이면서도 혁명적인 사회주의로의 체제 변경을 제안했다.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선거를 통해 제도적인 사회주의를 구축하자는 것이었다. 즉, 총과 유격대보다는 노동자 운동과 서민 계급을 동원한다는 게 그 핵심이다. 적법성을 중시하는 군대의 역사적 전통과 정권의 유연함을 ‘과신’한 아옌데와 그 측근은 군대가 국민투표 결과를 존중해줄 것이라 기대했다. 무력충돌 없이 군대와 정계 지도부에 다수의 뜻을 관철시킬 수 있으리라 믿은 것이다. 쿠바 혁명의 전략적 선택과는 거리가 먼 이런 준법적 행보는 (미겔 엔리케스가 이끄는 신생 정당 혁명좌파운동 등의) 원외 좌파 세력에게 자살행위로 간주됐다. 

1970년 9월 4일 선거에서 아옌데는 우파 및 기독민주당 후보를 상대로 36.6%라는 득표율로 승리를 거뒀고, 나라 안은 한껏 기대로 벅차올랐다. 집권 초기 아옌데 정부가 실시한 40개 조치는 경제 성장과 (상당히 과감한) 부의 재분배 실현, 임금 인상을 추구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 정권에서 실시한 토지개혁을 심화하거나, 광물을 비롯한 국내 주요 자원도 정부 관할 하에 두고자 했다. 수십 개 대기업과 90%의 은행이 국유화됨으로써 (직원과 공공 운영위원회의) 공동 경영 체제를 기반으로 하는 ‘공공재산’도 구축됐다. 

그러나 민간 부문이 국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컸다. 사측 주도의 파업이 늘고 토지 및 공장 점거가 연이어 발생하며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의회에서 좌파는 아직 소수에 불과했다. 대규모 자산가와 자본가들은 좌파 전선의 정책에, 마늘 냄새를 맡은 흡혈귀처럼 몸서리를 치며 반발했다. 1970년 11월 6일, 당시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칠레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아옌데 대통령의 권력이 더욱 강화될 수 있다는 점, 세상이 그의 행보를 성공적이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 우리는 남미가 그 파급효과도 생각하지 않은 채 칠레를 뒤따르게 좌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옌데가 취임한 지 불과 3일 만에 나온 말이다.

 

아옌데 전복을 노렸던 미국의 음모

1971년, 보유량 세계 1위의 구리 자원이 미국 기업 손을 떠나 정부로 귀속되자 백악관은 이를 일종의 선전포고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아옌데는 비동맹국가들의 지도자를 자처하며, 피식민국가의 자결권을 옹호하고 국제 금융 시스템을 비난했다. 칠레의 국유화로 타격을 입은 거대 다국적기업과 미 대사관, 미 중앙정보국은 아옌데 정부의 급진적 사회주의 행보를 공중분해 하려는 음모를 구상했다.(1) 미 상원 보고서에서 드러나듯(2) 백악관으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지원금을 받은 칠레 우파는 집권 좌파의 권력 기반인 사회주의 진영을 와해시키고자 노력했다. 우파는 군부 쪽 반발 세력을 중심으로 지원군을 모색했고, 극우단체 ‘조국과 자유’는 테러를 일으켜 불안을 조장했다. 대기업 사측 지도부와 일부 자유 직업군은 보이콧과 사업장 폐쇄를 실시했다. 결국, 칠레 경제는 초토화됐다. 

<엘 메르쿠리오>를 비롯한 보수 언론은 우파의 방해 전술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며 “사회주의 독재”의 “폐단”을 연일 경고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 절차가 차근차근 진행되는 다른 한편에선 물가가 폭등하고 국제적인 보이콧이 이뤄지며 암시장이 성행함으로써 도심 중산층의 마음이 혁명 세력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결국 1972년, 보수 계열 기독민주당은 혁명에 대한 유보 입장을 철회하고 전면 반대 노선을 채택했다. 

물론 노동자 운동 쪽에서도 우파의 방해 전술에 저항했다. 고용주가 파업을 시도하려 할 때마다 자발적으로 작업을 진행한다거나 노동자 단체(Cordón industrial) 중심으로 연대 세력을 규합하는 식으로 집단행동을 늘리는 것이다.(3) 하지만 좌파 내부의 분열은 날로 심해졌고, 정부는 양측의 충돌을 피할 수 있으리란 헛된 믿음을 내려놓지 않았다.

 

피노체트, 16년 동안 국가주도의 테러 자행

1973년 9월 11일 아침, 미국 닉슨 정부(및 브라질 독재 정권)(4)의 지원을 등에 업은 군부는 여러 군 조직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좌파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무방비 상태였고, 칠레의 대항전은 결국 비극으로 끝났다.(5) 보수 민족주의 계열의 가톨릭 세계관과 안보 논리를 기반으로 한 민-군 연합 독재 세력은 노조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며 검열을 실시했다. 

‘사회주의 암 덩어리’에 맞서 전국적으로 국가 주도의 테러가 자행됐다. 이후 16년 동안, 군대와 경찰은 수만 명을 고문하고 3,200명 이상을 암살했다. 암살당한 이들 중 1,000여 명이 시신조차 찾지 못해 실종된 상태다. 강제 망명길에 오른 사람도 수십만에 달했다. 군부의 과격한 통치가 이뤄지던 이 시기는 - 특히 1975년부터 – 칠레를 ‘신자유주의 연구소’로 변모시킨 경제 충격요법의 진행 시기와 일치한다. 칠레는 실로 ‘시카고 보이즈’의 대표적 실험실이자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주창하던 통화 이론의 시험 무대였다. 

쿠데타 후 50년이 지난 지금, 사회 분열이 심화된 칠레에서는 과거의 기억을 등에 업고 열띤 대립이 이어진다. 물론 2021년 대선에서는 공산당으로부터 화력 지원을 받은 가브리엘 보리치(광역 전선) 대통령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론을 제기하면서(6) 극우 진영의 호세 안토니오 카스트(공화당) 후보와 맞붙어 56% 득표율로 승리하긴 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1차 투표에서 카스트 후보가 다른 유수의 정당을 제치고 선두에 올라섰다는 것이다. 공공연히 피노체트 장군을 신봉하는 카스트는 우파 계열의 강성 인사로, 유럽에서 칠레로 도피했던 전 나치 중위의 아들이다. 가톨릭 원리주의자인 그는 그 가족과 마찬가지로 독재 정부를 지지했으며, 형제 중 한 명도 독재 정부 시절 각료 출신이었다. 

반면, 보리치 대통령은 아옌데 전 대통령을 귀감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반제국주의 활동가를 고양하는 차원보다 1973년 민주주의를 유린한 이들 앞에서 민주적 제도와 인권 존중을 호소할 때 주로 아옌데를 소환한다. 보리치 대통령은 의회 다수당 소속도 아니고 민중 운동과의 접점도 없다. 게다가 그의 세력 일부는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기까지 했다. ‘극 중도’를 통치 이념으로 삼는 보리치 대통령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옌데가 꿈꾸던 “드넓은 길”과 꽤 거리가 있는 행보를 보인다.(7)

2년 전,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 유산의 청산이 가능해 보였다. 2019년 10월에 일어난 대대적인 민중봉기 덕분이다. 하지만 이후 반대파 쪽 상황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2022년 국민투표에서 페미니즘과 진보주의 성향의 개헌안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부결되자 새 헌법 구상의 주도권은 역설적이게도 공화당으로 넘어갔다. 2023년 5월 제헌의회 선거에서 공화당이 압승을 거둔 결과였다. 이제 ‘피노체트의 아이들’은 자신들의 멘토가 1980년 구상한 헌법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을 손에 넣은 상태다. 

오늘날, 칠레의 정치권에는 두 망령이 떠돌고 있다. 이 두 망령은 조국의 서로 다른 청사진을 그리고 있다. 하나는 2006년 사망한 독재자의 망령으로, 그 공과에 대한 평가는 한 번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또 하나는 평화를 추구하던 사회주의자의 망령으로, 손에 소형기관총을 든 채 죽은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세기가 흐른 지금도, 칠레는 두 망령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글·프랑크 고디쇼 Franck Gaudichaud
툴루즈 장 조레스 대학 역사학 및 라틴아메리카 연구 교수. 저서로 『Découvrir la révolution chilienne(1970-1973) 칠레 혁명의 이해』(Editions sociales, Paris, 2023)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Evgeny Morozov, ‘Une multinationale contre Salvador Allende 미국의 ITT, 칠레 군부 쿠데타의 강력한 후원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및 한국어판 2023년 8월호.
(2) 다음 2권의 미 상원 청문회 보고서 참고. <Multinational corporations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DC, 1974. 
(3) Franck Gaudichaud, 『¡Venceremos! Expériences chiliennes du pouvoir populaire 우리는 승리하리라! : 민중 권력 중심의 칠레 사회주의 실험 』, Syllepse, Paris, 2023(2판). 
(4) National Security Archive, ‘Brazil Abetted Overthrow of Allende in Chile’, 2023년 3월 31일, https://nsarchive.gwu.edu 
(5) Patricio Guzmán 다큐멘터리 3부작, <La Bataille du Chili 칠레의 항전>, Atacama production, France-Cuba-Chili, 1975-1979.
(6) ‘Tout commence au Chil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1월호.
(7) Pierre Serna, 『La République des girouettes. 1795-1815 et au-delà. Une anomalie française: la république de l'extrême-centre 엎치락뒤치락 공화국』, Ceyzérieu, Champ Vallon, 2019 / Tariq Ali, 『The Extreme Cente』, A Second Warning, Verso, 2018 

 

글·프랑크 고디쇼 Franck Gaudichaud
툴루즈 장 조레스 대학 역사학 및 라틴아메리카 연구 교수. 저서로 『Découvrir la révolution chilienne(1970-1973) 칠레 혁명의 이해』(Editions sociales, Paris, 2023)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Evgeny Morozov, ‘Une multinationale contre Salvador Allende 미국의 ITT, 칠레 군부 쿠데타의 강력한 후원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및 한국어판 2023년 8월호.
(2) 다음 2권의 미 상원 청문회 보고서 참고. <Multinational corporations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DC, 1974. 
(3) Franck Gaudichaud, 『¡Venceremos! Expériences chiliennes du pouvoir populaire 우리는 승리하리라! : 민중 권력 중심의 칠레 사회주의 실험 』, Syllepse, Paris, 2023(2판). 
(4) National Security Archive, ‘Brazil Abetted Overthrow of Allende in Chile’, 2023년 3월 31일, https://nsarchive.gwu.edu 
(5) Patricio Guzmán 다큐멘터리 3부작, <La Bataille du Chili 칠레의 항전>, Atacama production, France-Cuba-Chili, 1975-1979.
(6) ‘Tout commence au Chil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1월호.
(7) Pierre Serna, 『La République des girouettes. 1795-1815 et au-delà. Une anomalie française: la république de l'extrême-centre 엎치락뒤치락 공화국』, Ceyzérieu, Champ Vallon, 2019 / Tariq Ali, 『The Extreme Cente』, A Second Warning, Verso, 2018 

 

“역사가 그들을 심판할 것이다”

 

1973년 9월 11일 화요일, 하늘은 흐렸고 남미는 겨울이었다. 칠레에서 쿠데타는 이미 시작됐고, 해군은 태평양 연안에 있는 항구도시 발파라이소를 장악했다. 공군은 콘세프시온 공항에서 전투기 ‘호커 헌터’를 띄울 채비를 마쳤고,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육군이 세르히오 아레야노 스타르크 장군의 지휘 하에 오전 8시 30분부터 이동을 시작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은 새벽 일찍 발파라이소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오를란도 레텔리에 국방부 장관과 이야기한 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에 대통령은 믿을 만한 조력자들과 대통령궁에 남기로 결심했다. 관저 내에는 의사 아우구스토 올리바레스와 정치학자 호안 가르세스, ‘대통령의 친구들’이라 불리던 호위팀이 남아 대통령 곁을 지켰다. 

아옌데는 자신이 상당한 규모의 군사작전과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인지했다. 대통령궁에 있던 약 300명의 헌병대는 상부의 명령으로 11시 전 이미 철수한 상태였고, 아옌데 곁에는 측근 인사 몇십 명이 전부였다.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에 찍은 몇 장의 흑백 사진을 보면, 당시 대통령은 전투용 소총을 들고 헬멧을 쓰고 있었다. 그의 곁을 지키던 사람들은 결국 유례없는 전투에 맞서야 했을 것이다. 눈앞에 탱크들이 늘어서 있고, 대통령이 항복을 거부한 후 두 대의 전투기가 관저 위로 연신 폭격을 퍼부었다. 1층이 부분적으로 붕괴됐고, 건물 전체가 화염으로 휩싸였다.

최후의 연설에서 아옌데는 ‘반역’을 꾀한 장성들의 ‘배신’을 규탄했다. 제도적 질서를 무너뜨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대통령은 공화제에 입각한 법의 수호자를 자처했고, 무력을 쓰지 않은 채 사회주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를 상기시켰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는 이 나라에 민주적 전통이 살아있으며, 칠레의 군대에도 헌법 정신이 살아있다는 자신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8월 9일, 제도적 해법의 가능성을 아직 믿고 있던 아옌데는 민군 합동 본부를 두고 다시금 내각에 군부 인사를 영입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파트리시오 아일윈과도 편지를 주고받고 무수한 양보를 약속하며 기독민주계열과의 타협 지점도 모색했으나, 이 또한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8월 22일, 하원은 아옌데 정부를 위헌이라 규정하고, 군사 개입을 허용했다. 칠레군 총사령관 카를로스 프라츠 곤살레스는 압박에 못 이겨 결국 사임했다. 아옌데는 그 자리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임명했다. 피노체트가 법을 준수할 인물이라 여긴 것이다. 

기회주의자였던 피노체트는 공군 총사령관 구스타보 리에게 설득돼, 9월 8일 쿠데타에 가담하기로 결심한다. 고위 장교들 중 상당수는 발을 빼거나 체포됐으나, 3군의 총사령관과 헌병 대장이 쿠데타에 가담했다.  

 


글·프랑크 고디쇼  Franck Gaudichaud
저서 『Découvrir la révolution chilienne(1970-1973) 칠레 혁명의 이해』(Editions sociales, Paris, 2023)에서 발췌

번역·배영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