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정치범들의 거대한 감옥, 우루과이

2023-09-26     다니엘 가티 & 로베르토 로페스 벨로소 l 기자

1973년 6월 27일의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 우루과이는 인구수 대비 정치범의 수가 가장 많은 나라가 됐다. 약 11년 동안 지속된 독재정권 시절, 국민의 거의 10% 정도가 망명을 선택했다.

 

검은 땅 위에 나란히 놓인 하얀 깃발 12개가 제14 공수 보병대대 안에서 발견된 유골들을 덮고 있다. 몬테비데오에서 약 20㎞ 떨어진 이곳은 우루과이 독재정권 시절(1973~1985) 구금과 고문의 장이었다. 국가인권연구소(INDDHH) 법의인류학 팀에 따르면 군부정권 당시 실종된 197명 중 한 여성의 유골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그녀는 고문으로 인해 사망했다. 국가인권연구소는 2023년 6월 6일 10시 13분, 땅속 30㎝ 아래 도자기 조각 밑에서 석회로 뒤덮인 이 여성의 유골을 발견했으나 아직 신원을 파악하지 못했다. 정부가 쿠데타 50주년을 기념하기 3주 전의 일이다. 

 

2년 동안 우물에 갇혀 있던 무히카

1973년 6월 27일 이른 아침, 대통령은 군대의 지원을 받아 의회를 해산했다. 후안 마리아 보르다베리는 민족해방운동 게릴라인 투파마로스(MLN-T)에 맞서 싸워야 한다면서 ‘친위 쿠데타’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투파마로스는 이미 군사적으로 패배했고 게릴라 대부분은 수감되거나 망명했다.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1973~1990)(1)의 특징이 즉결 처형이고, 아르헨티나 독재정권(1976~1983)은 ‘강제 실종’으로 3만 명까지 몰살시켰다면, 우루과이 정권은 ‘대규모 젊은 수감자들의 장기적인 정치적 투옥’으로 규정된다고 역사학자 알바로 리코는 설명했다.

우선 ‘대규모’라고 한 것은, 정부가 이 기간에 전체 인구수와 비교할 때 가장 많은 수의 정치범을 공고했기 때문이다. 그 수는 인구 1만 명당 18명이며, 재판 없이 체포 및 구금된 수는 1만 명당 31명에 달했다.(2) 이 숫자에는 (몬테비데오주 농구경기장처럼) 소위 ‘유치장’이라고 불리던 곳에 수감된 사람들이나, 교도소로 송환된 미성년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51개의 ‘합법적’ 구금 장소, 9개의 지하조직, 3개의 비밀 매장지가 확인됐다.(3) 

다음으로 ‘장기적’이라고 한 것은 ‘적’을 없애기 위해 유난히 가혹했던 이 투옥의 본질 때문이다. 정권이 ‘인질’로 지목한 사람들(훗날 우루과이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호세 ‘페페’ 무히카를 포함한 남성 9명과 투파마로스 지도부의 여성 11명)의 구금 조건은 유독 가혹했다. 예를 들어 무히카는 우물 속에 2년이나 갇혀 있었다. 1974~1976년에 두 번째 탄압의 물결이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합법적으로 활동했던 조직의 투사들을 공격했다. 특히 공산당(PCU)과 인민승리당처럼 외국에서 재조직된 정당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 대부분이 실종됐다. 감옥을 선택했다고 해서 조직적인 고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문은, 때로는 몇 개월씩 그리고 항상 대규모로 자행됐다. 

 

복지국가의 위기, 사람들은 떠나고

20세기 초반 30년 동안은 우루과이는 사람들이 이민을 오는 나라였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위기와 함께 사람들이 이민을 떠나는 나라가 됐다. 1960~1985년 38만 명 이상의 우루과이인들이 모국을 등졌다. 1973년부터는 대부분 정치적인 이유로 떠났다.(4) 그들은 먼저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아직 집권하고 있던 칠레로 건너갔고, 주로 1973년 봄에 진보주의의 ‘봄’을 겪었던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일부는 베네수엘라로 향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으로 가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해 말 아옌데가 실각하면서 칠레라는 선택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1975년 극우 세력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점령했고 아르헨티나는 함정으로 변모했다. 결국 이 함정은 1976년 3월 쿠데타 이후 수천 명의 라틴아메리카 망명자들을 억류했다. 우루과이 실종 및 구금자 유가족 협회에 따르면, 실종자 총 197명 중 141명이 아르헨티나에 있었다. 코노 수르(남미 최남단의 지리적·문화적 영역. 칠레,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및 파라과이와 브라질 일부가 이에 속한다-역주)의 독재정권들이 콘도르 협력 작전(코노 수르 지역에 속한 국가의 정부들이 자행한 암살 및 첩보 등의 정치적 탄압 활동-역주)의 주요 무대로 삼은 곳이 바로 아르헨티나였기 때문이다.(5) 

1975년부터 우루과이를 떠나는 이민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서유럽, 쿠바 또는 사회주의 진영을 택했고,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멕시코로 건너갔다.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 (문화적으로 유사하고 공통의 뿌리를 갖고 있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고발 업무가 용이한 국제기구들이 자리한) 스위스가 구대륙에서 이들이 선호하는 목적지였다. 

상황은 망명국에 따라 달랐다. 동유럽은 대부분의 망명자가 공산당원이었고 망명은 규제되고 통제된 절차에 따랐다. 쿠바는 주로 투파마로스와 공산당 투사들을 받아들였다. 스웨덴에서는 보조금 혜택을 넉넉하게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 특히 스페인은 정치적 출신이 좀 더 다양하고 제도적 지원은 적지만 사회 통합의 수준이 더 높았다. 우루과이인들은 정치적 망명자들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들을 경험했다. 처음에는 망명이 짧게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동향인들과의 사적인 관계와 언어적 유대를 중시했으나, 나중에는 생각을 바꾸고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았다. 망명국이 자녀들의 출신국가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6)

 

독재는 현재진행형, 민주주의에의 열망

1976년 이후 2차 난민 물결이 밀려온 다음, 프랑스에 들어온 우루과이 난민 수는 1,500~2,000명으로 집계됐다. 적은 수에 비해 높은 구조화 수준이 프랑스 난민 정책의 특징이다. 프랑스계 우루과이 사회학자인 드니 메르클렌에 따르면(7) 파리와 일 드 프랑스에 집중된 이 ‘마을’ 공동체에는 많은 협회가 있다. 그중 1972년 우루과이 정치범 보호 위원회(CDPPU)를 창설한 알랭 라브루스는 격동의 1960년대에 해외 협력 파견원으로 몬테비데오에 머물렀던 프랑스 기자다.

우루과이 정치범 보호 위원회는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 특히 좌익 지도자들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파리는 1978년 이런 성격의 협회로는 최초인 우루과이 실종자 유족 모임(AFUDE)과, 루이 주아네와 장루이 베일이 주도한 우루과이 국제엠네스티 법률사무국(SIJAU)의 본부였다. 이들은 1970년대 말 몬테비데오에서 정치범 실태에 대한 조사 임무를 이끌었다.

독재정권 시절 살아남은 우루과이 외교부는 2014년, 프랑스에 구축된 연대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공식 인정했다. 이후 프랑스의 수도는 특히 이주 과학자들의 귀환이나 결연을 도움으로써 여러 형태의 연대를 위한 플랫폼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1973년 6월 27일부터 7월 11일까지 이어진 우루과이 노동조합 총파업은 지난 세기에 벌어진 파업 중 가장 긴 세계 3대 파업의 하나다. 우루과이 사회는 이 총파업으로 처음부터 쿠데타에 저항했다. 

새로운 경제 위기 및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맞물린 이 저항은 민주주의로의 이행과, 1985년 3월 1일 선출된 대통령의 임명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대다수 망명자가 고국으로 돌아오고 정치범들이 석방됐으나 독재의 흔적은 여전했다. 1986년 12월에 가결된 법률 15.848조는 군부에 대한 면책을 인정했다. 2005년 좌익이 집권하고 이 법률 조항을 재해석하면서 82명을 기소할 수 있었으나, 인권단체에 따르면 수많은 범죄가 처벌을 피해갔다.(8)

오늘날 우루과이인의 17%가 쿠데타가 정당했다고 생각하며, 69%는 민주주의가 최상의 정부 형태라고 본다. 핵심적 소수만이 독재정권의 복귀를 지지한다.(9) 보수 성향의 루이스 라카예 포우 대통령이 의지하는 연정의 일원인 극우 정당 카빌도 아비에르토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포우 대통령은 2023년에는 그런 거추장스러운 동맹을 무시하고 세 전직 대통령(콜로라도 당의 훌리오 마리아 상기네티, 포우 현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국민당 출신의 루이스 라카예 에레라, 프렌테 암플리오 당의 무히카)이 등장하는 민주주의 전복 50주년 기념사진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 쿠데타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재판을 받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동맹의 움직임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글·다니엘 가티 Daniel Gatti & 로베르토 로페스 벨로소 Roberto López Belloso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우루과이어판 기자 겸 편집자
(프랑스어 번역: 르노 랑베르).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Evgeny Morozov, ‘Une multinationale contre Salvador Allende 미국의 ITT, 칠레 군부 쿠데타의 강력한 후원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및 한국어판 2023년 8월호.
(2) 다음 2권의 미 상원 청문회 보고서 참고. <Multinational corporations and United States foreign policy>, Government Printing Office, Washington, DC, 1974. 
(3) Franck Gaudichaud, 『¡Venceremos! Expériences chiliennes du pouvoir populaire 우리는 승리하리라! : 민중 권력 중심의 칠레 사회주의 실험 』, Syllepse, Paris, 2023(2판). 
(4) National Security Archive, ‘Brazil Abetted Overthrow of Allende in Chile’, 2023년 3월 31일, https://nsarchive.gwu.edu 
(5) Patricio Guzmán 다큐멘터리 3부작, <La Bataille du Chili 칠레의 항전>, Atacama production, France-Cuba-Chili, 1975-1979.
(6) ‘Tout commence au Chil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1월호.
(7) Pierre Serna, 『La République des girouettes. 1795-1815 et au-delà. Une anomalie française: la république de l'extrême-centre 엎치락뒤치락 공화국』, Ceyzérieu, Champ Vallon, 2019 / Tariq Ali, 『The Extreme Cente』, A Second Warning, Verso,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