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 저항과 복종의 딜레마

Spécial 중산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012-05-14     도미니크 팽솔

중국·러시아·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정권은 중산층의 마음을 얻으려 애쓴다. 중산층은 모든 정치 전략의 중심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위기의 시기에 중산층은 민중계급과의 연대 혹은 상층 자본가 계급과의 동맹 사이에서 주저한다. 경계선이 불분명한 이 잡다한 그룹은 자신들의 이미지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을 목격했다. 사회적으로 볼 때 그 활동 범위가 좁은 소지주층은 인터넷에 푹 빠진 교육받은 신세대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70년대 초 칠레 인민연합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반대 시위에 이르기까지, 반식민지 투쟁에서 아랍의 저항에 이르기까지, 진보적 계획을 구상하기 위해 어떤 연대가 이루어져왔는가? 그리고 칠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연대가 급격한 신분 상승에 유리하게 작용할 때, 아니면 반대로 스페인에서처럼 충격적인 계급 격하를 조장할 때, 중간계층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변화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프랑스 대선이 치러지는 시점에 반(反)사르코지이거나 반자유주의, 혹은 이도저도 아닌 그저 좌파로 자처하면서 성향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동맹전선'의 추종자들에서 서민계층과 중산계층이 연대를 이룰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전략적 고찰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은 한 가지 역사적 사실, 즉 개혁이 진보를 가능하게 할 때 이런 유의 연대는 제한적 개혁을 위해 가장 진보적인 사회변화 계획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기 일쑤라는 사실을 은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연대가 오늘날 어떤 조건에서 이뤄져야 하는지 규명하려면 몇 가지 정치 경험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대혁명 초기, '구체제 완전 청산'이라는 의지를 가지고 이질적인 사회계층들이 결집했다. 민중의 압력과 대혼란의 위협 앞에서 결국 특권층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1789년 8월 4일 밤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이 혁명은 귀족과 농민 사이에 위치하는 잡다한 사회계층들의 눈부신 상승을 가속화했다. 자영업자, 판매업자, 상인, 땅이나 부동산을 보유한 소지주, 변호사, 의사, 문인, 법관 등 다양한 계층에 속한 이들이 가진 공통점이라고는 소규모 자산을 보유하고 있거나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뿐이었다.

1792∼94년 과격화 단계에 이른 혁명은 테르미도르 반동에 의해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상층 부르주아 계급'(은행가, 실업가, 고위 공무원 등)이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들은 1830년 혁명과 더불어 귀족계급을 대신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부상한다.

이런 사회적 지형도 안에서, 그리고 산업화의 영향 아래 무산계급(프롤레타리아) 수는 계속 증가한다. 신흥 노동자계급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은 새로운 '사회문제'를 제기했고, 이것은 1848년 혁명의 큰 이슈가 된다. 1789년 혁명과 달리 당시 프랑스왕정은 부르주아적이고 '자유주의적'이었다. 하지만 왕을 축출하고 2월 24일에 제2공화정을 선포한 것은 바로 노동자와 파리 학생들과 한편이 된 소시민계급(프티부르주아지)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방향은 갑자기 바뀐다. 남성보통선거로 실시된 4월 23∼24일의 선거에서 자유주의자(온건파)들이 개혁파(사회주의자)를 이긴 것이다. 혁명가들은 아르망 바르베스와 오귀스트 블랑키를 중심으로 제헌의회에 실력 행사를 하려 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것으로 여겨졌던 국영공장 폐쇄 조치는 화약고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은 역할을 했고, 결국 파리 동부(바스티유)의 봉기를 촉발했다. 6월 23∼25일 파리에서 끔찍한 전투가 벌어졌고, 새 공화정에 의해 수천 명이 잔인하게 살해됐고, 봉기는 진압됐다.(1) 남성보통선거를 정착시킨 공화국은 민주공화국이기는 했지만 사회공화국은 아니었던 것이다.

정치적·사회적 맥락이 완전히 다르기는 하지만 프랑스 밖에서도 혁명 역학관계의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아직까지 전제주의 치하에 있거나, 외세의 지배를 받거나, 민족적 문제에 당면해 있던 국가들(독일·이탈리아·폴란드·헝가리 등)에서 다양한 사회계층들은 그들의 자유주의적·민족적 주장을 앞세웠다. 하지만 이 계층들은 중도파와 급진파로 급속히 분열된다. 중도파들이 정치 개혁에 그친 반면, 급진파들은 사회적 대책도 요구한다.

피에몬테 출신으로 이탈리아 통일의 주역이 된 카밀로 카보우르가 1846년에 했던 예측은 유럽 전역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사회질서가 실제로 위협당하고, 그 사회질서가 근거하고 있는 대원칙들이 심각한 위험에 봉착하게 되면, 확신하건대, 최고로 단호한 반대자들, 가장 열정적인 공화주의자들이 가장 먼저 보수 진영 쪽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2) 그러나 '민중의 봄' 실패- 프랑스를 제외하고, 타파됐던 모든 체제가 1년도 안 돼 부활했다- 가 현상의 복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산계급(부르주아지)이 '질서의 진영'으로 합류했지만, 1848년의 이질적 경제연대(전통적 직종의 수공업자, 그때까지 산업화되지 않았던 분야의 피고용자, 노동자, 학생, 상업에 종사하는 소시민과 지식인 등)는 결정적으로 민중의 갈망을 고려하지 않은 권력 행사라는 발상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1848년의 물결은 수많은 혁명가들에게 초보 단계에 있던 노동운동이 어떤 전략을 채택해야 할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해에 '공산당선언'을 발표하고 혁명에 동참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은 자기 자신밖에 믿을 것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마르크스는 무엇보다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비난한다. "박애는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와 혁명가들의 이해관계가 상통할 때만 지속됐다. 1789년 이후 수많은 프랑스 부르주아 혁명들 중 질서에 대항하려는 시도는 한 번도 없었다. 지배와 예속의 정치적 형태가 숱하게 변화했음에도 모든 혁명은 계급지배와 노동자들의 예속, 부르주아 질서를 존속하게 내버려두었다. 6월은 이 질서를 건드렸다. 6월에 화(禍) 있으리라!"(3) 그들이 보기에는 민주적 소시민계급 역시 혁명가들을 위해 사회를 전복하는 데 어떤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결론은 간단하다. 무산계급은 동맹을 맺기 전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독일의 카를 카우츠키(엥겔스의 제자, 사회민주당의 대표적 이론가)는 19세기 말, 전반적인 교육수준의 상승과 자유전문직(의사·변호사·판사·교수·엔지니어·회사원 등)의 눈부신 발전을 염두에 두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을 이어받는다.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에 있는 '인텔리겐츠'(Intelligenz)라 불리는 이 지식계급은 과연 사회주의자들의 동맹세력이 될 수 있을까? 이 지식계층의 일부가 무산계급(하급 공무원·직원 등)과 비슷한 조건에서 생활하고 노동하는 만큼 이 문제는 더욱 고찰해볼 가치가 있다. 카우츠키는 본질적으로 동업조합적이면서 개혁적인 사회계층을 경계한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의견을 따르게 만들 정도로 정치적으로 충분히 강력하다는 조건 아래 인텔리겐츠의 무산계급화한 소수가 사회주의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카우츠키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두 진영은 서로 가까워지겠지만, 사회개혁 지지자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 쪽으로 다가가게 될 것"(4)이라고 했다.

얼마 뒤인 1902년 출간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당이야말로 프롤레타리아가 독자적 혁명세력이 될 수 있는 특별한 도구"라고 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때까지 부분적으로만 산업화된 러시아에 레닌식 전략의 성공을 입증했다. 하지만 사회주의혁명은 다른 유럽 지역으로 확대되지 않았다. 독일 사회민주당 정부는 1919년 1월 베를린 봉기를 유혈 진압했다. 같은 해 바이에른과 헝가리의 '국민의회 공화국'은 궤멸됐다. 이탈리아에서는 1919∼20년의 혁명운동이 실패로 돌아갔고, 안토니오 그람시는 1930년대 지식과 문화의 '헤게모니' 개념을 이론화하기에 앞서 레닌식 당 모델에 접근했다. 정권 장악을 시도하기에 앞서 그는 노동자계급이 그들과 연대할 사회계층의 동의를 확보하려면 노동자계급의 견해와 가치, 정치사상을 받아들이게 할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프랑스에서 계급연대 문제는 다른 식으로 제기된다. 1920년대 말부터 중산층의 발전에 대처해 취해야 할 태도에 관한 토론이 맹렬하게 전개됐다. 사회주의노동자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SFIO) 내부에서 마르셀 데아는 자작농·수공업자·상인·공무원·중소산업가들 또한 금융자본주의의 위협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해, 중산계급이 자연스럽게 노동자계급과 동맹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여기에서 이질적이고 쇠퇴하는 노동자계급과 한창 비약하는 중산계급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필요성과, 더 이상 하나의 계급만을 위한 도구로 간주될 수 없는 국가의 역할을 재정의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5) 파시즘의 인기를 분석하면서 데아는 사회주의자들이 차후 중산계급이 희망하는 '국가의 복원'과 '국민의 보존'을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옹 블룸은 신(新)사회주의와 파시즘을 비슷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렇게 답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사회주의와 계급의 당을 계급 격하된 사람들의 당으로 변화시킬까 두려웠다. 파시즘처럼 불특정한 대중을 결집하고, 성급하고, 고통받고, 탐욕스러운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이 사회당의 계급투쟁을 역사의 모든 독재를 만들어낸 '협잡꾼들'의 물결 아래 수몰시키게 될까봐 두려웠다."(6)

역사가 세르주 베르스타인이 강조했던 것처럼, 1933년 '네오'(新)들이 SFIO에서 배제됐음에도 레옹 블룸이 그토록 경멸했던 '계급 격하된' 사람들이 파시즘에 경도될 위험 때문에 프랑스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서로를 꼭 필요한 동맹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928년 이래 '계급 대 계급' 전술(부르주아 사회민주주의는 맞서 싸워야 할 주적으로 간주됐다)에 충실했던 프랑스공산당(PCF)은 1934년 코민테른의 명령에 따라 방향을 급선회한다. "우리는 중산계급을 (중략) 파시즘의 우민정치로부터 떼어내 무산계급 쪽으로 끌어오기 원한다. (중략) 우리는 중산계급의 요구가 무산계급의 이해관계에 상치되지 않는 그 순간부터 그들의 주장을 보호해주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주로 사무직, 공무원, 소시민, 수공업자, 농민이 포함된다.

1920년 투르에서 열린 SFIO 총회 뒤 분열된 프랑스공산당과 SFIO는 공산당의 이런 방향 전환으로 인해 14년이 지나 다시금 행동 통일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1934년 10월, 모리스 토레즈 공산당서기장은 반파시스트 전선을 새로운 정치사회 세력으로 확대하고 '중산계급과 노동자계급의 동맹'을 굳건히 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프랑스급진사회당, 반파시스트 지식인 감시위원회, 인권보호연맹 등에 손길을 뻗치는 것을 전제로 했다. SFIO와는 반대로,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공동 프로그램을 원한 것이 아니라 인민 연합만을 원했다. 지나치게 과격한 몇몇 제안(공공농업사무소, 비능률적 기업들의 기탁 또는 사회화)이 중산계급을 불안에 떨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1936년 인민전선은 선거에서 승리한다. 급진사회당 우파는 중산계급 보호를 목적으로 블룸 정부의 참여에 동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동맹은 지속되지 않았다. 1936년 6월 총파업으로 노동자계급은 인민전선의 프로그램에는 들어 있지 않던 각종 조치(유급휴가, 주 40시간 근무)를 얻어낸다. 경제위기를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 인민전선에 투표했던 소상공업자들은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이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것이라 주장하며 파업 참여자들과의 타협을 비난했다. 그르노블에서는 주 40시간 근무가 시행되자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시위에 나섰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려를 표하며 인민전선이 '재벌가문에 대항해 소지주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블룸에게 상기시켰다. 그들은 블룸이 중산계급의 무산자계급화를 너무 쉽사리 받아들인다고 비난했다. 파업에 열광한 SFIO의 혁명파 리더 마르소 피베르는 1936년 5월 27일자 <인민> 기사를 통해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혁명이 당면 과제"라고 주장했다. 6월 11일, 토레즈는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우선 목표가 '대중의 화합'을 유지하는 것이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노동자계급의 고립'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7) 1936년 여름, 전국적으로 중산계급의 불안이 가시화되고 인민전선 내부에 반대 세력이 증가한다. 1937년 1월 23일, 블룸은 <인민>에 "사회 진보를 위한 노력이 편파적이면서 난폭한 성격을 보이고 있는 때 일부 중산계급과 자산계급이 불안해하면서 정치적 반동으로 방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해 블룸은 2월에 '휴식'을 제안한다. 이 '휴식'은 스페인의 불간섭과 같은 이유로 '후퇴'로 간주됐다. 인민전선은 오래 존속하지 못했다. 해방이라는 예외적 상황에서 취해진 조치를 열외로 하면, 민중계급과 중산계급의 동맹은 1960∼70년대의 '적색' 시대가 되어서야 다시 문제가 된다. 일단 단기적으로 선거라는 목표를 달성한 뒤에 그런 동맹이 어떤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지 다음의 두 경우가 잘 보여준다. 1970년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당선과 1981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당선이 바로 그것이다.

1960년대 말, 칠레 기독교민주당(DC)은 대체로 중산계급을 대변했다. 기독교민주당 내 좌파는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옌데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급진파와 사회주의노동당, 공산당 등과 연합했다. 아옌데는 36.7%밖에 득표하지 못했고, 우파의 호르헤 알레산드리 후보에게 4만 표 앞섰다. 아옌데는 칠레의 민주체제 기능을 존중하는 합법적인 혁명을 내세웠다. 그의 '인민연합'(UP) 정부는 즉시 자본주의와 손을 끊는 프로그램, 즉 미국 기업들에 대한 보상 없는 구리산업 국유화(구리는 칠레의 중요 자원이다), 토지개혁 가속화, 은행들과 섬유·제지·탄광·제철 산업에 대한 국가 관리 등을 시행했다.

인민연합은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다. 국회에서는 하원·상원 모두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극좌파들은 정부의 수정주의를 비난했으며, 미국은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공작을 벌였다. 어쨌든 아옌데 정부는 유권자층을 넓히는 데 성공했고, 1973년 총선에서 44%를 얻는다. 그렇지만 의회 과반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아옌데 집권 3년 동안 노동자들의 지지 외에 대부분의 공무원·수공업자·자유직들의 지지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칠레 공산당의 호세 카데마르토리 인베르니치(국회의원이자 1973년 경제부 장관)는 아옌데 반대자들의 목표가 "중산층이 인민연합에 반대하도록 만드는 것"(8)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커져가는 사회적 불안과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인플레이션은 특히 국영기업 직원들과 소기업 경영자들의 정부 지지를 잠식했다. 이런 불만을 이용해 기독교민주당은 새로운 선거를 요구했다. 대통령 탄핵소추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고, 결국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은 인민연합 정부를 뒤엎고 평화적 혁명의 경험에 종지부를 찍었다. 기독교민주당의 예상과는 반대로, 피노체트 정권은 유산계급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동시에 더 개혁적인 정권 교체의 희망을 억누르며 장기간 지속됐다.

카를로스 알타미라노 칠레사회당 사무총장 같은 사람들은 인민연합의 실패를 통해 중산층의 보수주의를 확인했다. 그는 "그들의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그들의 물질적 요구(구매력, 금리, 세금, 사회보장, 임금, 대학 진학 등)를 만족시키는 대신, 삶을 변화시키려는 거대한 계획 속으로 그들을 통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소시민은 무엇보다 권위와 질서, 규율의 실천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9)

기존 질서에 대한 중산계급의 애착이 넘어설 수 없는 선을 설정해두고 있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이런 분석은 사회적 결정론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1789년의 경우처럼, 크게 변화를 원치 않는 사회그룹이라도 어떤 상황에서는 운동세력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역(逆) 또한 참이다. 즉, 단순한 사회적 위치 때문에 민중계급은 혁명적일 것 같지만 때론 혁명적이 되기는커녕 질서를 지키는 보병이 된다. 1968년 5월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학생과 노동자들의 진정한 화해(10)인 동시에 소시민학생파와 파업노동자파의 열망 사이에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무엇보다 5월 17일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르노 비양쿠르 공장의 파업노동자들에게 합류하려던 학생 행렬은 공장의 닫힌 문 앞에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중산층은 항상 보수주의자인 것만도 아니고, 반드시 진보적인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급진적 사회개혁 계획이 과연 어떤 상황에서 수적으로 다수인 두 그룹을 규합할 수 있는지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1972년 6월에 서명된 프랑스 좌파 정부의 공동 프로그램은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다. 중등교육 인원이 급격히 증가하고 공공영역에서 유통업종이 발전하는 상황에서, 1971년 에피네 대회를 통해 탄생한 프랑스사회당(PS)은 프랑스공산당(PCF)과의 행동 통일을 내세웠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성공에 고무된 프랑스사회당은 중산층에 다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테랑은 일시적 동맹 덕택에 장악하게 된 조직의 유권자 지지 기반과 전투적 기반을 확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테랑은 1969년 6월 대선에서 실패(5% 득표)한 케케묵은 SFIO라는 '낡은 집'과의 관계를 끊고, 당시 폭발적으로 늘어난 새로운 중산층인 회사원층을 끌어당기려 노력했다. 그 목표에 더 잘 도달하기 위해 미테랑은 68혁명의 유산 중에서 관습과 문화의 해방에 치중했다. 선거에서 단일화가 사회당에 더 유리하게 돌아갈 것을 우려한 프랑스공산당이 점차 노동자계급 중심으로 되돌아선 만큼 미테랑은 이 부분에서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1977년 공동 프로그램 단절로 두 진영 간의 간극은 뚜렷이 드러났다. 두 좌파 진영은 이제 대치하게 된다.

4년 뒤, 미테랑은 프랑스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자본주의와의 단절'을 약속했고,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계층 간의 견고한 동맹'(11)을 약속했다. 1981년 5월 10일 대선에서도 이 약속은 다시 등장했다. 그렇다면 1983년에 시행된 '긴축의 전환점'(임금 동결, 대규모 구조조정)은 중산층을 대변하는 정치그룹이 그들의 동맹인 노동자들을 배신한 것으로 해석해야 할까? 사회주의 지도자들의 사회적 얽매임을 바탕으로 한 이런 시각은 보수주의의 유행 물결에서 탄생한 국제적·이데올로기적 환경을 무시하는 게 될 것이다.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은 각각 영국과 미국의 선거에서 이겼고, '새로운 철학자들'이 프랑스 미디어를 장악했다. 1982년부터는, 지도자들이 노조나 대중의 실제적 압력을 받지 않게 되었지만, 사회주의 전략을 다시 정의하는 데 고위 공무원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12) 그때부터 권력을 잡은 사회주의자들이 "실제적 혹은 잠재적 지지자들에게 요새 공략과 후퇴 사이에서 제한된 선택을 하도록 하면서"(13) 그들의 당이 맡아왔던 국가와 사회 사이의 가교 역할을 제거해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밖 서구 세계에서 유행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프랑스 사회당 정부가 마주치는 난관이 곧 사회주의 교리가 현실에 부적응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게 만들었다. 상황이 다양한데도 민중계급과 중산계급의 연대에 닥치는 장애물은 마찬가지의 것들이다. 급진적이라 판단되는 계획- 예를 들어 사유재산이나 예금의 가치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 이 중산계급에게 야기하는 두려움은 변함없는 소재로 보인다. 하지만 심한 위기가 발생하고 현 체제가 그 위기에 대처하는 데 무능한 것으로 보일 때(비록 체제 때문에 그리 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계급 격하에 대한 두려움은 '공공의 구원'이라는 목표를 중심으로 동맹 또는 충돌을 조장한다. 약간은 실망스러운 사실적 교훈보다는 차라리 그것이 사회적인 것(경제적 이해관계로 구성된 관계공동체)이든 정치적인 것(민중계층에 유리한 힘 관계)이든 간에, 과거의 경험에 대한 고찰이 그같은 연대의 성공 조건을 파악하게 해주는 중요 열쇠를 제공해준다. 역설적으로 불평등 심화, 사회 이동의 정지, 국가를 조종하는 엘리트들의 소수화(그렇지만 민중의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 이런 것이 흔히 역사에서 볼 수 있던 이해관계의 일치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글•도미니크 팽솔 Dominique Pinsolle 역사학자. 주요 저서로 <르마탱(1884∼1944): 돈과 협박의 언론>(렌 대학 출판부·2012)이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Alain Garrigou, ‘1848년, 민중의 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5월호.
(2) Eric Hosbawm, <자본의 기원>, 아셰트, 파리, p.34, 2002. 
(3) Karl Marx, <신(新) 라인신문>, 1848년 6월 29일.
(4) Karl Kautsky,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여정’, <사회 변화>, p.269, 1895년 6월.
(5) Jean-Paul Cointet, <마르셀 데아: 사회주의에서 국가사회주의로>, 페랭, 파리, 1998.
(6) Serge Berstein, <레옹 블룸>, 파야르, 파리, 2006년에서 인용(인민전선 관련 부분과 블룸 정부 관련 인용문들은 여기에서 인용한 것이다).
(7) 모리스 토레즈의 파리지부 공산당총회 보고서, 1936년 6월 11일.
(8) Jose Cademartori Invernizzi, ‘인민연합 기간의 프로그램, 성공 그리고 장애물’, Patricio Arenas, Rosa Gutierrez, Oscar Vallespir 공저, <살바도르 아옌데, 가능한 세계>, 실렙스, 파리, p.41, 2004.
(9) Carlos Altamirano, <칠레: 실패의 이유>, 플라마리옹, <라 로즈 오 푸앵> 시리즈, 파리, pp.67∼68, 1979.
(10) Kristin Ross, ‘68혁명과 그 이후의 생활’, 아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마르세유-파리, 2010.
(11) <80년대 프랑스를 위한 사회주의 프로젝트>, Club socialiste du livre, 파리, 1981.
(12) 세르주 알리미, <좌파가 노력했을 때>, 아를레아, 파리, 2000년 참조.
(13) Steven C. Lewis & Srenella Sferza, Stanley Hoffmann & George Ross, <미테랑 경험: 연속성과 현대프랑스의 변화>, 프랑스대학출판부, 파리, p.148, 1988.


노동자와 식모 사이에서 태어난 '출세'

공장 노동자 아버지와 가정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앙투안 블루예는 조금씩 사회적 상승을 이룬다. 이 인물상을 통해, 폴 니장은 프랑스 제3공화국 프티부르주아지의 일상을 묘사한다.

"블루예의 이웃들은 부자 동네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그곳에서 억압적인 삶이 이어지고 있을 거라고 믿는 척했다. 프랑스 시골의 프티부르주아지가 삶의 즐거움과 자유에 대해 품을 법한 생각과 전혀 다른 관습적 규율과 엄격한 규칙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노동자와 대(大)부르주아지 양쪽 모두와 거리를 두는 것에 만족했다. 그들은 노동자를 경멸했고, 대부르주아지의 이상한 관습을 보면서 굳이 더 많은 권력과 재산을 욕망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었다. 그들은 부자들이 버릇 없다고 여겼다. 자신들만큼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그들은 동남부 지역에서는 호색한과 술꾼, 병자들이 활개를 친다는 식으로 모략과 비방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부자들의 불륜과 마약, 부패, 악덕에 대해 말하곤 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이들의 악덕과 근심, 불행을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서 보기 마련이다. 그들은 재물과 권력이 많을수록 화(禍)를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단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놀라울 게 하나도 없었다. 비극적인 인물들과 무위도식하는 영웅들이 사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그들은 뭐든지 할 수 있고, 모든 가능성이 앞에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곳은 '앙드로마크, 아이아스, 아트리드'(신화적 영웅들)의 세계였다. 분노한 운명은 쾌락과 재물, 오만이 넘치는 존재를 내려친다.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드라마가 펼쳐질 때마다, 누군가 죽거나 망하는 것을 볼 때마다, 고결하고 근면하고 현명하기를 원하는 프티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순진한 믿음을 재확인한다. (중략) 이런 식으로 평범한 동네의 주민들은 사회적 질투심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신들의 궁색함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분노하고 경악하면서 힘과 허영, 재물에 대한 좌절된 꿈을 보상받았다. 그들은 자신의 아들딸이 주제넘은 목표를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중용의 지혜와 제비꽃의 겸손함, 정직함의 철학, 평범함의 미덕을 가르쳤다."

- 폴 니장, <앙투안 블루예><Antoine Bloyé>, Grasset, Paris, 19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