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거하라! 런던에서 산티아고까지

Spécial 중산층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2012-05-14     라파엘 켐프

   
<경주>,2005-카를로 글로리아

윗세대보다 교육을 더 받은 젊은 세대, 더 나은 삶에 대한 그들의 꿈은 불확실한 현실 앞에 무산되고 있다. 결국 분노는 터지고 번져간다.

"제 텐트는 기술팀 텐트 옆에 있어요. 기술팀에서는 인터넷과 다른 '점거하라'(Occupy) 단체들과의 연락, 페이스북 업데이트를 담당하고 있어요. 부엌도 있어요. 아침, 점심, 저녁을 여기서 해결하죠. 여기는 '차와 공감' 텐트예요. 피아노가 있고, 무료로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죠." 영국 런던 중심부의 세인트폴 성당 앞에는 지난해 10월 15일(1)부터 수십 개의 텐트가 설치돼 있다. 아미르 임란(24)은 우리에게 자신의 집(2)을 둘러보며 소개했다.

임란은 시위 초기부터 이곳에서 잠을 자고, 매주 수업을 들어야 하는 이틀을 제외하고는 캠프를 떠나지 않는다. 말레이시아 출신인 그는 몇 달 전 언론 공부를 위해 런던에 왔다. "이곳에는 공공 질서와 화합을 깨뜨리는 혐의가 있으면 감옥에 감금할 수 있는 가혹한 법이 있어요. 말레이시아에서 표현의 자유권을 위한 운동에 참여했어요. 시위를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여기서는 절차가 훨씬 간단해요." 그가 '런던 증권거래소를 점거하라'(Occupy the London Stock Exchange)의 투사들 캠프에 합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난해 9월 17일 미국 뉴욕에서 시작된 점거운동은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과 같은 노선을 지향하며, 나름대로 '아랍의 봄'에 반향을 일으켰다. 런던과 뉴욕, 마드리드에서 텔아비브까지 점거운동의 상황은 각기 다르고 때론 그 요구 사항들이 난해하지만, 시민의 통제를 벗어난 기존 정치 질서와 부를 독점하는 소수 기득권층들에 대한 불만은 한결같다. 또한 지구촌의 사안에 소속됐다는 성취감도 공통점이다. 그러나 시위자들의 바람을 떠나 이 모든 결집과 운동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이집트 카이로에서 그리스 아테네, 칠레 산티아고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이르기까지 '투쟁하는 세계 민중'(3)의 부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위 질문을 칠레의 두 대학생에게 던졌다. 이들은 지난해 5월 이후부터 무상 공교육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칠레는 1981년(4) 피노체트 장군 체제에 의해 대학을 민영화했다. 지난해 칠레에선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큰 민중시위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시위는 가족과 고등학생들의 참여까지 이끌어냈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불평등과 세제 개혁, 또 정치체제의 대표성에 관한 문제에 의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이 '분노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아랍의 봄'과도 다르다고 말한다. 각기 다른 시위대는 자국의 상황에 따라 다른 요구 사항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칠레에만 국한되지 않는 분노를 표한다.

앙드레스 무뇨즈 카르카모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운동들은 현 경제체제의 이윤 생성 방식, 또 그로 인해 사회조직이 파괴되는 방식에 반대하는 세계적 현상이다. 칠레에서는 교육과 결부된 문제다. 어쨌든 다르다." 앙드레스의 친구 빈센트 사이즈는 조심스럽게 세계적인 점거운동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사람들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위해 싸운다는 사실에서 기본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말한다. 전세계의 점거운동에서 빼앗긴 권력을 되찾으려는 의지, 삶의 공공 영역과 사회를 지배하는 방식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려는 욕구를 찾아볼 수 있음은 사실이다. 간단히 말해, 민주주의를 통해 표출되는 의지다.

푸에르타델솔 광장, '각 지역구에서 다시 만납시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파레데스(32)는 지난해 5월 5일 푸에르타델솔 광장을 가득 채울 정도로 어마어마했던 시민들의 분노에 깜짝 놀랐다. 이후 이 시위는 '15M'이라는 운동을 태동시켰다. 파레데스는 그 첫 번째 시위를 조직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를!' 시위의 대변인 중 한 사람이다.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를!' 운동은 '15M'보다 몇 달 앞서 정치인들의 특권 폐지부터 주거권 및 선거법 개혁(5)의 실질적 이행 등 8개의 제안을 골자로 시작됐다.

그러나 여기서 정보기술(IT) 서비스를 맡고 있는 초대 활동가인 파레데스에게 도로를 점거하게 된 동기는 생각보다 더 심오하면서 앞선 몇 가지 제안들보다 덜 구체적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스페인에는 사람들의 자아성취와 직업 성공에 한계를 긋는 '유리 천장'이 존재한다.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계속 고위층에 머물러 있고, 하층에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하층민으로 떨어지고 있다. 경제적·사회적으로 더 이상 발전하기란 불가능하기에 다른 길을 찾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를!'을 발견했다." 그는 어느 정당이나 조합에도 속해 있지 않고 어떤 정치적 이념도 없다. 그러나 항상 불평등한 경제체제 말고도, 유럽 어디에서든 더 이상 시민들 어느 누구의 대의가 되지 못하는 민주주의를 비판한다. 그래서 금융계 출신의 세 인물을 직접 선출도 없이 요직에 앉힌 '금융 쿠데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세 인물은 유럽중앙은행장 마리오 드라기, 그리스 총리 루카스 파파데모스, 이탈리아 총리 마리오 몬티다.

이같은 대표성의 위기 때문에 만장일치를 통한 의사결정 메커니즘에 대한 논의가 자연히 부상하게 되었다. '분노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정치에서 소외됐기 때문에 의결권을 갖고 되도록 최대한 참여적 방식을 개발했다. 그렇게 해서 5월 15일 시위날 저녁부터 일부는 푸에르타델솔 광장에 머무를 것을 제안했다. 점거는 한 달 이상 지속됐다. 그동안 시민공회(General Assembly), 토론, 다양한 주제별 분과 모임 등의 활동이 진행됐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수천 명이 운집하는 이 점거운동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철학자 호세 루이스 모레노 페스타냐도 '공공 토론의 기쁨'(6)에 대해 말했다.

이반 아얄라(31)는 콤플루텐세대학에서 신고전경제학의 방법론적 토대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나는 이 시위에 상주하며 참여했다. 초기에는 놀라웠다. 500명의 사람들로 북적이던 분과 모임도 있었다. 솔 광장에 도착했을 때 4천여 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그리스 아고라에서처럼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감동적이다." 정당 체계를 거부하면서 '15M' 운동은 좌파운동으로 규정되길 거부한다. 그러나 아얄라는 은행가와 정치인, 신자유주의, 투기꾼들에 대한 비판은 좌파적 분석이라고 본다. 그러나 '15M'의 진정한 성공은 그의 말대로 "의결권이 있고, 대중적이고 거대했다는 점이다. 지금은 모든 구에서, 마을에서 시민공회가 결성되고 있다."

'15M' 운동은 새로운 변화에 부응해 푸에르타델솔 광장의 야영 점거 중단을 결정하면서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다른 시위에서도 이런 특징을 볼 수 있다. 이는 스페인에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더 많은 대중을 만나고 활동을 확산할 수 있던 캠프를 철거하고, 대신 지역 단위로 뿌리를 내리자는 결정을 내린 뒤부터다. 지난해 6월 12일 푸에르타델솔 광장 점거가 끝난 뒤 광장에 개개인들이 핀으로 꽂아놓은 수많은 피켓이 사라지고 대신 거대한 현수막이 등장했다. '각 지역구에서 다시 만납시다'.

운동이 지역적으로 다변화하면서 동시다발적 활동이 시작됐다. 예를 들어 철거 위협에 처한 세입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플랫폼이 조직됐다. 가족들이 '분노하는 사람들'과 연락을 취하면 많은 사람들이 철거 고지일에 찾아와서 철거를 면하게 되거나, 몇 달간 철거가 미뤄지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주거지가 필요한 가족들에겐 빈 건물에 머무를 수 있게 한다.

민주주의의 결함을 정확히 파악하다

'15M' 운동 덕에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잘 보이지 않던 문제들에 관심을 갖고 힘을 모을 수 있게 되었다. 릴리아나 피네다 변호사는 물관리를 위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다. 마드리드 지자체는 공기업인 '카날 델 이사벨 II'를 민영화할 계획이다. "이 캠페인은 플랫폼을 통한 시민운동과 일부 정당 간 협력의 좋은 예다. 5월 14일 이전에도 이미 많은 것이 조직돼 있었다. 그러나 '분노하는 사람들' 덕분에 10월 8일 시위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관련 플랫폼이 수많은 지역시민 공회에 조직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합좌파(Izquierda Unidad)와 EQUO 같은 정당들도 함께 참여했다." 그간 '15M' 운동과 견해가 비슷한 정당까지 포함해, 모든 정당과 접촉을 거부해온 것을 볼 때 이 시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난해 11월 20일 의회 선거가 임박하면서 정치와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가 아주 예민해졌다. 선거 결과는 마리아노 라호이(보수)가 이끄는 국민당(PP)이 승리했다. 중요한 선거 기한을 앞에 두고 어느 당에도 연계되지 않기 원하는 사회운동은 어떤 입장을 취할 수 있을까? 지난해 6월 일부가 제안했듯이 '양당정치의 종식'을 위해 새로운 당을 창당할 것인가? 파레데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우리는 절대 투표를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국민당과 사회당(PSOE) 중심의 양당체제에 반대해왔기 때문에 소수정당에 투표할 것을 호소했다." 이는 선거구마다 두 개의 거대 정당 후보를 이길 가능성이 있는 소수당이 어디인지 똑똑하게 계산해 가려낼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선거에서는 우파가 승리했다. 그러나 스페인 민주주의 체계의 결함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파레데스와 동료들이 '민주주의 4.0' 계획을 고안하는 것도 이런 관습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다. 민주주의 4.0 계획은 스페인 시민이 인터넷을 통해 의회에 제출된 법안을 투표하는 것이다.

이런 연속적인 기획에서 떠나 이 운동의 진정한 성공은 정치적 논의에서 획득한 무게감이다. 미국·영국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분노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이 여전히 순수하다고 확언한다. 또한 파레데스가 강조하듯이, 그들은 이 운동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월가를 점거하라'(OWS), '이스라엘의 운동'(7)은 일부 '15M'의 방식에서 파생됐다.

민중집회는 역사 속에서나 찾을 법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떻게 2011년 가을 맨해튼 남쪽의 작은 시위 캠프가 '지구촌 항거'(8)로 변했을까? 뉴욕 캠프 시위자들과 함께 활동한 변호사 알렉산더 펜리는 "2011년 초 위스콘신주의 파업과 같은 선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또한 '아랍의 봄'이 하나의 예를 보여주었다. "그런 시위가 프랑스에서 있었다면 그 정도의 파급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프랑스나 유럽에서 일어나는 시위에 대해 미국인들은 당연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동은 다르다. 이 지역 나라들은 그동안 폐쇄적인 사회로 알려졌다. 이런 지역에서도 항쟁이 일어났으니, 여기서도 뭔가 일어날 수 있다."

내슈빌 점거, 도시화가 파괴한 관계를 살려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월가를 점거하라'는 막강한 파급력을 가졌다. 처음 캐나다 기반의 인터넷 잡지 <애드버스터스>(Adbusters)가 제안했고, 이 잡지는 시위 홍보로 신랄한 비난을 사며 유명해졌다. 2011년 9월 17일 수백 명의 사람들은 시위를 위해 뉴욕 금융가에 모였고, 끝내 우연히도 월가와 그라운드제로에서 지척인 마천루 사이의 구석진 주코티 공원에서 합류하게 되었다. "누군가 그리스나 스페인처럼 시민공회를 열자는 제안을 던졌지요." 미국 예일대학에서 강의하는 문화인류학자이자 무정부주의자인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기억이다. 그는 점거운동 계획을 담당했다. 이날 사람들은 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정치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리고 다양하고 진지하고 기발한 요구들이 튀어나왔다. 월가점거 시위대의 첫 번째 공회에서 사람들은 정치권력에 대한 기업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한 미국 대법원의 '시민연합'(Citizens United) 관련 판결 취소를 논의했다.(9) 클린턴 정부의 법안 폐기 이후 통제 없는 금융 확대를 가져온 그래스-스티걸(Grass-Steagall) 법안의 재도입에 관해서도 논의했다. 또 황당할 수도 있는 제안으로, 일부는 월가 권력의 꿈을 상징하는 브로드웨이의 황소상을 철거하자고 했다.

날이 갈수록 시위자들은 점점 늘어났고, 텐트 수는 불어났다. 주코티 공원에 하나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시민공회를 열고, 작업그룹을 조직하고, '뉴욕 점거 헌장'을 채택했다. 광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학위가 있는 젊은 백인들뿐 아니라 노숙인, 사회적 소수자 등 수많은 '소외자들의 아우성'이 있었다. 장기적으로 이들을 포용한다는 것은, 해결을 장담할 수 없는 하나의 과제다. 시위에 합류한 사람들 중 어떤 이는 자신을 공산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라고 하거나, 자본주의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반대로 현재의 시장경제 체제가 유지되기 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단,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그를 뽑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점거하고 있다." 테네시주의 '내슈빌 점거' 캠프에서 만난 젊은 변호사 윌리엄 요크는 말한다. "2008년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에서 대선 캠페인에 합류했다. 당시 선거전에서 오하이오는 중요한 주였다. 나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변했고, 캠페인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오바마가 당선된 뒤 그가 다른 후보자들처럼 그저 그런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되었다. 양당은 근본적으로 같은 당이다. 두 당 모두 후보자를 통해 원하는 만큼 충분한 자금을 지원해줄 수 있는 기업들에 의해 간택된다. 사실상 정당들이 거대 다국적기업에 팔려가는 것이다." 대기업의 권력 비판은 '월가를 점거하라' 시위의 공통분모였다.

공공장소 점거는 이런 비판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행위가 정당화되고, 그들이 이루고 싶은 사회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 자체로 충분한 정치적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월가점거 운동을 함께 조직했던 셰인 패트릭의 말처럼 '한겨울인 1월 뉴욕 한복판 평등사회에 살기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난해 11월 15일 밤 뉴욕 경찰이 주코티 공원에 진을 친 시위자들을 폭력적으로 해산시킨 일은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뉴스위크> <LA타임스>의 전직 기자였고 <점거된 월가 신문>의 편집장인 마이클 레비튼은 분명히 말한다. "더 이상 우리는 주코티 공원이 필요치 않았다. 시위를 중단하기 가장 좋은 때였다. 시장이 우리를 쫓아내면서 동원한 방식도 완벽했다. 아주 폭력적이었으니까. 사람들은 맞고 제지당하고, 책은 던져지고, 기자들은 접근 불가였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의 '15M' 운동과 마찬가지로 경찰의 폭력은 월가점거 시위에 대한 동정 여론을 이끌어냈고, 강제 해산으로 인해 시위자들은 다른 형태의 행동을 고심하게 되면서 새로운 운동 단계에 진입하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월가점거 시위대와 뉴욕 등 여러 서민 동네에서 활동하던 지역 조직 간에 연대가 형성됐다. 지난해 12월 6일 '우리의 집을 점거하라'(Occupy Our Home) 플랫폼은 전 미국에서 은행에 차압돼 비어 있는 집을 쟁탈하기 위한 캠페인을 조직했다. 뉴욕 동부의 가난한 지역이 하루 캠페인의 대상이었다. 처음 브루클린 중심부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시위 참여자들은 백인 대학 졸업자였다. 그러나 시위를 진행하면서 지하철 승강장과 지하철 차량 내부에서 전단지를 나눠주었다. 시위자들은 대도시 중 최고 수준인 뉴욕 동부의 폭발적 주거비 상승률에 관해 알렸다. 어떤 사람들은 시위행렬에 합류해 1%의 부자에 빗댄 월가 점거 슬로건 '우리는 99%다'를 외쳤다.

마침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거리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그중에는 이전 '블랙팬서'(1965년 결성된 미국의 급진적 흑인결사)의 일원이자 현재는 뉴욕시 자문위원인 찰스 바론과 같은 역사적 소수 인종 투사들도 있었다. 또 다른 뉴욕시 자문위원인 이다니스 로드리게즈는 군중에게 이날 시위가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에 대해 말했다. 이것은 월가점거 시위가 '더 다양한 피부색'을 띠게 되었다는 점이다. 수긍이 간다. 이전보다 많은 흑인과 히스패닉, 소수 인종이 참여했다.

미국의 다른 40여 개 도시에서 그랬듯이, 버몬트가 702번지의 한 빈집도 포위됐다. 알프레도 카라스킬로 가족은 여기서 살려고 한다. 시위가 끝나고 며칠 뒤 돌아갈 때의 철거에 대비해, 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12명 정도의 시위자들이 함께 있을 것이다. 맥스 버저는 이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비정부기구(NGO) 일을 그만두었다.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이 집을 점거한다. 나는 항상 권력관계를 바꾸고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름으로 투쟁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싶었다. 거주 문제는 그것에 제격이다. 월가점거 운동의 자연스러운 확산인 것이다. 이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과 직결된 문제로 느끼기 때문이다. 10여 가구가 집을 찾거나 철거로부터의 보호를 원해 우리와 접촉하고 있다." 그는 덧붙여 말한다. "월가점거 운동은 이 나라의 정치를 바꾸게 될 거대한 운동을 만들 힘을 갖고 있다."

사실 점거운동은 뉴욕이나 몇몇 대도시에만 국한돼 있지 않다.(10) 미국 청교도와 보수주의의 중심인 내슈빌에서는 주의회 건물 앞에 진을 쳤다. 지난해 12월까지 10여 개의 텐트가 남아 있었다. 이 텐트들은 주법원 판결에서 승리하며 몇 달간 더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3월 공권력에 의해 끝내 철거되면서 내슈빌은 시위자들의 말대로 미국에서 가장 긴 점거지 중 하나가 되었다. 이곳에서 공공장소를 점유한다는 것은 뉴욕의 점거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자동차와 마천루, 대형 교회와 자동차 대리점으로 가득한 뉴욕이라는 도시에서 공공장소는 자동차를 위한 것일 뿐이다. 이곳에서 거리시위란 난센스다. 점거자들은 "점거를 통해 이 비인간적인 도시화가 파괴한 관계를 회복했다"고 말한다.

20세기 좌파의 실패,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내슈빌은 대형 상가와 비슷한 대형 교회들로 가득한 미 남부 지역 '바이블 벨트'(Bible Belt)의 중심부에 있다. 목사인 짐 팔머는 예전 그 대형 교회들 중 하나를 이끌었다. 그러나 더 영적인 기독교를 실천하기 위해 교회를 떠났다. "교회에서는 10%의 극빈층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현실 구도에 안주해 다른 경쟁 교회를 이기기 위해 더 큰 건물을 짓고 더 많은 프로그램을 짜는 데 안달한다. 1970년대 이후부터 목사들이 기업 모델을 차용했다. 교회는 기업처럼 운영된다. 목사는 이사진에 둘러싸인 최고경영자(CEO)와 같고, 일반 신자들은 교회 총회에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다." 기업형 교회가 확대되면서 지역적 여건에 따라 그에 대한 비판이 확산됐다. 팔머는 '예수는 99%의 편이다'라는 메시지를 상기시키면서 '종교를 점거하라'는 교파 간 모임을 조직했다.

월가점거 운동은 시작된 지 몇 달 뒤부터 동질다형성(Polymorph)과 이질성(Heterogeneity)을 띠게 된다. 팔머 목사는 그의 주변에서 다양한 시도를 모으고, 모든 문제에 대해 시위와 캠페인을 시작했다. 주거, 다국적기업의 권력, '방위의 미명하에 죽음을 수출'하는 군수산업을 통한 무기 거래, 대학생들의 부채 및 무상교육 투쟁 등의 문제다. 어떤 사람들은 농장점거를 생각해내기도 했다. 월가점거 운동은 삽시간에 불평등, 정치체제의 대표성 위기 등 본질적인 몇 가지 문제를 미국 공공 논쟁의 중심에 놓는 데 성공했다. 또한 결집 없이는 파급력을 가질 수 없던 집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운동 중의 운동'(11)이 될 것이다.

대학 및 무상교육 요구에 집중한 칠레 대학생들은 더 고전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신자유주의와 유사한 정책(피노체트가 바꾼 칠레 대학제도로 교육은 소비재가 되었고, 등록금은 올랐다)의 여파와 싸우는 한편, 정치지도자와 국회의원, 선거를 이용해 더 조직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시위의 성격은 달라도 월가점거 운동과 공통점이 있다. 동일한 메시지를 쓴다. '좌파를 만들어라 운동'(Creando Izquierda)과 함께 칠레대학생연합의 회장으로 선출된 가브리엘 보리는 "캠페인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는 99%다'라는 월가점거 슬로건을 차용했다"라고 말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와 안토니오 네그리, 슬라보이 지제크의 사상을 따른다는 법 전공의 이 대학생은 다음과 같이 명료한 정치적 발언을 했다. "우리는 좌파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좌파는 실패했다고 본다. 좌파가 상상했던 세상이 오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실수에서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2011년 12월 집회 1년이 끝나가고 여름방학이 다가오면서 그는 이 점을 강조한다. "학생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패배하지도 않았다. 다음 기회가 있다." 칠레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다음과 같은 전략을 세웠다. 그들은 천연자원의 국유화와 대학 재정의 지원을 위해 금융 개혁을 제안하려 한다.

글•라파엘 켐프 Raphaël Kempf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영국, 스페인, 미국, 칠레 등 긴 여정을 거치며 각국의 '점령하라' 시위 현장을 취재했다.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남극보호연합(ASOC) 한국 어드바이저.


(1) 이 기사를 쓰기 위해 기자는 영국 런던, 미국 뉴욕·내슈빌, 칠레 산티아고, 스페인 마드리드에 다녀왔다.
(2) 세인트폴 성당 앞 캠프 시위는 지난 2월 28일 철거됐다.
(3) François Cusset, ‘민중이 일어날 때’(Quand le peuple se rebelle), <르몽드>, 2011년 11월 5일자 참조.
(4) Victor de la Fuente, ‘피노체트의 시대를 종식하다’(En finir (vraiment) avec l’ère Pinoch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8월호 참조.
(5) Raúl Guillién, ‘Alchimistes de la Puerta del So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7월호 참조.
(6) José Luis Moreno Pestana, <15M 운동: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세대주의와 ‘공회주의-그 증언>(Le mouvement du 15-M: social et libéral, générationnel et assembléiste. Un témoignage), <Savoir/Agir> 17호, 2011년 9월 17일 참조.
(7) Yaël Lerer, ‘이스라엘 거리의 선별적 분노’(Indignation sélective dans les rues d’Israë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9월호 참조.
(8) Keith Gessen, Astra Taylor, Eli Schmitt, Nikil Saval, Sarah Resnick, Sarah Leonard, Mark Greif, Carla Blumenkranzrk이 말하는 ‘Occupy! Scenes from Occupied America’, 뉴욕, 베르소, 2011.
(9) Robert W. McChesney, John Nichols, ‘미국의 미디어, 권력과 돈이 야합하기에 이르다’(Aux Etats-Unis, médias, pouvoir et argent achèvent leur fusi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8월호 참조.
(10) Olivier Cyran, ‘미시시피에서 불거진 미국 사회의 분열’(Dans le Mississippi, les fractures de l’Amérique profond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4월호 참조.
(11) Prachi Patankar, Ahilan Kadirgamar, ‘Wither Wall Street: The Challenge of the Occupy Movement’, www.criticallegalthinking.com, 2012년 1월 2일 참조.


부르주아지의 미래, 길 없는 길

제임스 발라드의 작품 속에는 항상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문화적 혜택을 누리면서도 불만에 찬 부르주아지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공허하고 순응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때로 그들은 아래 인용된 작품에서처럼 자기파괴와 폭력의 악순환에 빠지기도 한다.

"첼시 마리나의 반란은 급속도로 확대됐다. 이제 전체 주민의 절반 이상이 항의 행동에 나섰다. (중략) 활동가들 중 상당수는 전문직에 종사했다. 새로운 주차료 도입에 반대해 첼시 시청에서 열린 연좌농성에서 사실상 주도적인 역할을 한 건 의사, 건축가, 변호사들이었다. (중략)

내가 돌아온 지 일주일 됐을 때, 경찰과 주민 사이에 첫 충돌이 벌어졌다. 집행관들이 회계사와 그 아내, 네 자녀들이 사는 집의 현관문을 강제로 열려고 했다. 회계사 부부가 터무니없이 높은 관리비를 못 내겠다고 버티자 집을 압류하려고 온 것이다.

그러나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나타나 집행관들에게 화를 내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들의 자동차를 공격했다. 20분쯤 지난 후 경찰이 도착했다. 프랑스 텔레비전 기자들도 왔다. 그들을 맞이한 건 우박처럼 쏟아지는 짱돌이었다. 세이셸군도, 모리스섬, 유카탄반도 등에 여행 가서 소중하게 챙겨온 것일 터였다. 경찰은 철수했다. 내무부의 높은 사람이 여동생이 마리나 첼시에 산다며 철수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회계사 자녀들이 방 창문에 매달려 울부짖는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쳤다. 그 장면은 벨파스트 과격파들의 폭력에 대한 불쾌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상당수 부모들은 교육 윤리를 포기하고 순종적인 시민을 양성하려는 거대한 음모에 동참한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더 이상 보내지 않았다. 많은 주민들은 가족의 안전을 염려하여 무급휴가를 신청했다. 그들은 생각할 시간을 벌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은 슈퍼마켓이나 킹스로드의 고급 식료품점에서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붙잡혀 법정에 끌려가기도 했지만 벌금 납부를 거부했다. (중략)

전산직 핵심 책임자들이 파업을 일으켜 풀럼 세무서가 부득이하게 문을 닫는 사태가 발생하자 당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비사회에 대한 중산층의 장기간 보이콧은 세수 감소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