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전쟁의 희생양, 아프리카 용병

2012-05-14     알랭 비키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세계 전역으로 군력을 파병해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미국이 전투병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인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에 열광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군은 용병을 모집하고, 용병들에게 미국 여권을 약속했다. 또한 군에서 용병 모집 업무를 위탁받은 사설 보안업체들이 ‘토사구팽용’ 용병을 아프리카에서 직접 모집하고 있다.

 이라크에 진출한 한 미국 사설 경비업체에 고용된 베르나르(1)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최대 실수를 저질렀음을 즉각 깨달았다. 그러나 때늦은 후회였다. 난 1년 파견계약에 서명한 남자답게 굴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전쟁 지원 병력으로 모집한 이 우간다 청년은 '보이지 않는 군대'(Invisible Army)(2)에 배속됐다. 지난해 말 그는 질병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왔만, 사회복지와 건강보험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펜타곤이 위임한 업체들(2003년 이후 대략 1200억달러를 투자해 파견병을 모집)이 모집한 미국·이스라엘·남아프리카공화국·영국·프랑스·세르비아 출신 백인들은 보통 매월 1만 달러가 넘는 꽤 많은 임금을 받는 데 비해, 베르나르 같은 외국인들, 이른바 '제3국 국민'(TCN·Third Country Nationals) 출신의 용병들은 노동법이 무시된 채 학대나 다름없는 횡포에 시달렸다. 부상당하면 가차 없이 본국으로 송환되는 이들은 현재 과거 고용주들로부터 아무런 도움이나 지원도 받지 못하고 있다.

아프리카 전역서 마구잡이 헐값 모집

2008년 6월 워싱턴이 이라크에서 철수를 시작했을 때, 이라크 주둔 미군 정규군 15만3300명 중 7만167명이 TCN이었다. 2010년 말엔 이들과 미국 정규군의 수가 4만776명 대 4만7305명으로 엇비슷했다. TCN들은 개발도상국에서 모집됐다. 수천 명에 달하는 이들은 이라크 주둔 25개 미군기지에서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바그다드 인근에 건설된 '작은 미국 도시'로 유명한 캠프 리버티는 전성기 때 병사 10만여 명을 상주시켰다. TCN은 이른바 '기본 업무'인 요리·청소·건물관리·패스트푸드·전기수리 등을 비롯해 여군들의 미용까지 책임지고 있다. 일부 TCN은 이따금 정규군인과 짝을 이뤄 위병 업무를 수행한다. 아프리카 신병이 그 경우인데, 이들은 주로 캠프 건물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다. 사하라 이남 출신들이 펜타곤의 민간 용병위탁업체가 모집한 위병의 1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값싼 위병의 대부분은 우간다인이고, 이들의 수는 거의 2만 명에 달한다. 잔인한 역설은 이들이 이따금 자기 동료들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2010년 5월 캠프 리버티에서 동남아 출신 TCN 1천여 명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이들이 진압에 동원됐다.

우간다인들의 과도한 이라크 진입은 2000년대 초반 중앙아프리카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당시 우간다는 우간다 동부, 아프리카의 대호수 빅토리아호 주변에서 발발한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이른바 저항반군 '주님의 군대'를 진압한 것이다. 그리고 인접국 수단은 내전을 종식시키고 남수단을 분리 독립시켰다.(3) 이 여파로 6만 명이 넘는 우간다 남자들이 군에서 제대했다. 요컨대 이라크가 이들에게 (구직의) 돌파구가 된 것이다. 또한 캄팔라 정부(우간다 수도)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다. 2003년 이라크전쟁이 발발했을 때, 캄팔라는 아프리카에선 보기 드물게 부시 행정부를 지지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우간다 군대는 공조하고 있다. 언론인이자 파워 블로거로 활동 중인 우간다인 안젤로 이자마는 이렇게 말했다. "2005년 용병과 안전요원에 대한 미국의 수요가 폭발했다. 펜타곤이 전쟁 경험이 있는 유능한 영어권 인력을 찾기 때문에 우간다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게 당연했다."(4)

2011년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당 후보 노버트 마오는 우간다인의 이라크 파병의 또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실직한 재향 군인들이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정부는 이들의 불만을 달랠 묘안으로 이라크를 생각했다."(5) 그는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근거를 제시했다. "미국 재향 군인들이 설립한 회사들은 우간다 군대의 전직 고위 관계자들이 설립한 회사들과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요웨리 무세베니 대통령의 친동생이자 우간다 보안업체 사장들 중 유명한 사람인 살림 살레 장군의 제수 켈렌 케욘야까지 용병 모집 업체 '아스카르'(Askar)를 차렸다. 2005년 말부터 케욘야는 두 예비역 미군 장교가 네바다주에 세운 용병 모집 회사 '특별작전컨설팅'(SOC·Special Operation Consulting)의 (용병 모집) 위탁 업무를 맡고 있다. 이 회사의 주요 경쟁사는 파키스탄의 '드레샤크 인터내셔널'(Dreshak International)이 같은 해 캄팔라에 세운 계열사다. 이 회사는 이라크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미국 민간 용병업체 EODT를 위해 일하고 있다. 마오가 '분쟁(해결) 청부업자'라 일컫는 인물 10여 명은, 2006년 이후 우간다에 진출한 자들이다. 이라크는 캄팔라 서민지역 케요스(Kyeyos·이주노동 희망자)들의 새로운 개척지가 되고 있다. 전역한 군인이 다시 입대할 경우 매월 1300달러(약 993유로)까지 벌 수 있어, 캄팔라에서 성행하는 민간 경비업체가 제시하는 임금보다 훨씬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다.

2007년 3천 명이 넘는 우간다인들이 이라크로 파병됐다. 2008년에는 이들의 수가 1만 명에 달했다. 이들을 이라크로 파병한 주요 고용주는 미국 업체, 예를 들어 토레스, 딘코프, 트리플 캐노피, 세이버, SOC 등의 사장들이었다. 이자마는 "이로 인해 가격 전쟁이 시작됐다"며 케요스 시장의 포화상태를 구실로 "미국 업체들은 케요스들의 임금을 깎기 시작했다. 더구나 해외 취업에 대한 우간다 정부의 규제가 없어, 저들은 비리(불법 임금 삭감)를 쉽게 자행했다. 또 당시엔 저들이 전투 경험자만 용병으로 모집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이라크로 갈 수 있었다"고 했다. 우간다 노동부가 이 문제에 수수방관하는 사이 덤핑이 활개를 쳤고, 케냐와 시에라리온과 같은 새로운 인력 경쟁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2009년 말, 케요스들의 임금은 700달러 이하로 떨어졌다. 이 시기에 세이버가 고용한 우간다 용병들은 미 정부로부터 1700달러(약 1298유로)를 받았다. 아스카르는 이라크 베오울프 미군기지에 용병 264명을 파견하고 미국 정부로부터 42만 달러(약 32만1천 유로)를 챙겼다.

2008년 우간다 언론은 처음으로 케요스들의 임금 착취 사례를 수집해 폭로했다. 그러나 캄팔라 정부는 언론의 지적을 계속 무시한 채, 몇 차례에 걸친 언론사 탄압으로 (임금 착취 논란을 잠재우고) 힘있는 업체와 무세베니 대통령의 최측근이 운영하는 업체들의 입지를 공고히 다져주었다.

마오는 "이라크에 가는 것은 익사 직전의 당신을 악어가 구해줄 것이라 믿고 악어에게 매달리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2월 이라크에 파병된 케요스들의 월급은 400달러(약 305유로)로 떨어졌다. 이들은 하루 12시간씩 주 6일 근무했다. 우리가 인터뷰한 이들(21~32살 남녀)은 모두 2009년 12월부터 이라크에 파병된 사람들이었다. 대부분 시골 출신인 이들은 이라크로 오기 전, 캄팔라에 위치한 경비업체에서 일한 전력이 있다. 이들 중 2명은 마케레레대학 출신이다. 이들은 인터뷰 도중 간간이 말을 끊고 견디기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리자 몸서리치며 긴 침묵에 빠지기도 했다.

캄팔라 중심가에 진출한 드레샤크 계열사에서 케요스들의 이라크 파병에 관한 모든 것이 시작됐다. 케요스는 드레샤크에서 2개월간 군사 적응 훈련을 받았다. 훈련 기간에는 봉급이 없고, 식사만 제공됐다. 훈련이 끝난 뒤 드레샤크는 귀가하는 케요스들에게 연락을 준다고 했다. 일부 케요스는 3개월을 기다렸다. 일단 소환 통보를 받으면 계약 조건을 따져보기도 어려웠다. 한 케요스는 이렇게 말했다.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출국 전까지 버는 돈 없이 돈을 써가며 버텨야 했다. 어떤 이는 가지고 있던 물품 중 앉아 있을 의자만 빼고 다 팔아치웠다. 우리는 파견 계약서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저들은 우리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케요스들은 저들이 제시한 11장짜리 계약서를 단 15분 만에 읽고 사인해야 했다.

이날 비로소 케요스들은 자신을 고용한 고용주가 SOC란 미국 업체임을 알게 된다. 베르나르는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망설였다. "한 업체의 인터넷 사업부에서 근무했다. 난 저들이 우리에게 제시한 임금을 보고 '이걸 벌자고 이라크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을 했다. 현재의 내 임금과 겨우 30만 실링(약 89유로)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베르나르는 친구들의 권유와 '미국 쪽 책임자'에게서 걸려오는 집요한 전화에 굴복해 결국 이라크행을 결정했다. 이틀 뒤, 그는 7시간 비행 끝에 바그다드 국제공황 활주로에 발을 내디뎠다.

이중 계약에 저임금 위험노동 난무

이라크 수도에서 헬리콥터로 45분 거리에 위치한 알아사드 공군기지는 아랍 땅에 있는 또 다른 작은 미국 마을이다. 케요스들은 800여 명의 동포가 복무하고 있는 SOC 부대에 합류했다. 이들을 지휘하는 사람들은 미국 상관의 명령을 받은 소수의 같은 우간다인이다. 신병들은 이곳에서 무급으로 한 달간 훈련받은 뒤 견디기 힘든 모래폭풍과 혹한의 겨울밤으로 내몰린다. 황당한 사실은, 이들은 SOC가 약속한 장비를 수개월 뒤에나 지급받는 것이다. 추운 밤기운을 막아주는 장갑은 겨울 끝 무렵에야 도착한다. 일부는 박봉을 쪼개 알아사드 기지의 PX(군 매점)에서 25달러(약 19유로)를 주고 바람막이 외투를 산다. 심지어 이들에게 지급되는 AK47소총을 비롯한 탄띠, 철모, 케요스들이 '중국산'이라고 비웃는 방탄조끼 등의 군사장비도 정상이 아니다. 정규군보다 중장비로 무장한 이들은 매일같이 알아사드 기지를 드나드는 500여 대의 차량을 검문·검색해야 하지만, '저격수들이 수백m 밖에 있는' 정규군보다 못한 보호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몇 주 뒤, 이들은 부대 안에도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상관들은 이들에게 계약상에도 없는 극한의 업무를 시킨다. 일부는 하루에 15시간씩 일해야 한다. 1년 복무 끝에 고국으로 보내주기로 한 휴가 약속은 끊임없이 연기됐다. 많은 전직 용병들이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심지어 어둠 속에서 압박을 받으며 살았다. 저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들은 우리 목숨을 비롯해 근무처까지 결정할 수 있기에 만약 우리가 반항하면 우리를 가장 위험한 근무지로 발령낼 수도 있었다"고 했다.

SOC는 말을 잘 듣지 않는 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무보상 계약 해지를 통한 본국 송환'이라는 방법을 썼다. 취재진이 입수한 회사 쪽의 21가지 징계 조항이 담긴 2장짜리 계약서에는 이른바 '복무 해지'가 원칙적인 서면 경고와 감봉 5일 처분 등 4단계에 걸친 징계 조치 뒤에 내리는 것으로 명시돼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훨씬 잔인했다. SOC는 '기타 징계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권리 조항을 내세워 계약서상에 없는 징계 처분을 내렸다. 한 전직 용병은 "예를 들어 근무시간 외에 헬멧을 쓰지 않아 서면 경고를 받으면 감봉 2주 처분을 받아야 했다. 우리는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 입도 벙긋 못했다"고 했다. 게다가 SOC의 행동강령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SOC는 TCN들에게 "우간다 공화국의 이상을 잘 보여주고, 해외에서 우간다의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말 것"을 당부한다. 또한 SOC의 계약서에는 케요스가 4개월간의 복무 기간 중에 적어도 30일 동안 질병이나 부상, 사고로 일할 수 없는 경우 당사자를 해고한다고 명시돼 있다. SOC의 행정병으로 근무한 베르나르는 SOC가 임의로 평가한 건강 문제를 트집 잡아 동료 수십 명을 가차 없이 해고하는 것을 목격했다. "장기간의 모래폭풍 속에서 용병들은 귓병과 비염 등에 걸렸다. 이들은 눈병, 심지어 폐병에도 걸렸다. 이들이 치료를 받으러 가면, SOC는 아스피린만 처방해줬다. 병이 낫지 않아 다시 치료를 받으러 가면 SOC는 이들을 해고했다. SOC는 약값이 얼마든 간에 아픈 우간다인을 위해 비용을 지출할 뜻이 없었다. 이들은 우리에게 이라크에 사업하러 왔다면서 끊을 수 있는 모든 지출을 끊었다."

2011년 여름 동안, 베르나르는 무릎 관절을 앓았다. SOC는 그에게 부신피질호르몬제를 처방해줬다. "이것은 최악의 처방이었다." 그의 얼굴 피부가 비늘처럼 일어났다. "난 다른 의사를 찾아갔다. 예상한 대로, 그는 구글에서 병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몇 주 뒤, 베르나르는 해고됐다. 이후 그는 홀로 20일간의 여정을 거쳐 캠프 바그다드에 도착한 뒤 캄팔라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가 귀국한 지 10여 일 후인 2011년 가을에 그와 인터뷰했다. 그는 심각한 자신의 얼굴 상태를 보고 어머니가 놀랄까 두려워 그때까지 어머니를 찾아가지 못했다. "의사에게 SOC가 처방해준 약에 대해 말하자, 의사는 최악의 처방이라면서 회복하려면 병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내게 일련의 약을 처방해줬다. 내 평생 가장 비싼 약이었다. 30만 실링이나 했다. 난 치료하기 위해 약값을 구해야 했지만, 드레샤크는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고, SOC쪽과는 소식이 모두 두절됐다."

노예처럼 끌려왔다 소모품처럼 버려져

펜타곤이 위임한 미국 민간 용병업체를 위해 일하는 모든 외국 용병처럼, 이라크에서 귀국한 케요스들은 원칙적으로 군사기지 산재보험에 가입돼 있다. 이 산재보험은 고용주들이 케요스에게 지급하는 의료비용 배상을 보장해줬다. 불운한 장애인들에겐 장애연금도 지급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미국 여성 변호사 미셸 C는 "많은 우간다인들이 이같은 혜택을 보지 못한다"며 개탄했다.

2000년대 말, 이라크 현지에 파병된 미군 병사를 돕는 기독교 단체에 고용된 미셸 C는 미군 병사들 곁에서 근무하는 우간다인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는 의뢰인들이 소송서류에 필요한 건강진단서를 뗄 돈조차 없자, 자비를 털어 이라크에서 부상으로 인해 귀국한 케요스 30명의 소장을 작성한 뒤, 현재 미국 노동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고 있다. 많은 우간다인들이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닌 탓에 근골격 질환을 앓고 있다. 미셸 C는 미국 민간 용병업체 4곳(SOC·트리플·캐노피·세이버·EODT)과 거대 보험회사인 아메리칸인터내셔널그룹(AIG)을 필두로 한 보험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보험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궁극적으로 이 회사들이 장애 로 귀국한 내 의뢰인들한테 의료비와 장애연금을 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전에 우간다를 두 번 방문한 적 있는 미셸 C는, 현재 우간다에서 한 전직 이라크 파병 케요스의 도움을 받으며 까다로운 작업을 은밀히 수행하고 있다. 우선 그는 피해자들을 찾고 있다. "많은 우간다 부상자들이 도시에서 살 수 있는 여건이 안 돼, 곧장 시골 고향마을로 내려간다. 이들은 미국 사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이들의 수는 최소한 수백 명에 달할 것이라 본다." 이어 그는 이들이 낯선 외국인이나 무중구(Muzungu·백인을 일컫는 말)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때 갖는 의구심과 불신, 수치심을 잠재우는 게 급선무라고 했다. "대다수의 의뢰인들이 부상당한 뒤 고용주에게 협박을 당했다. 심지어 고용주들은 만약 의뢰인이 입을 벙긋하면 주검이 되어 귀국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게다가 의뢰인들이 본국으로 귀국하기 전, 이라크에서 치료받은 진료 기록을 상관들이 압수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맨땅에서 시작해야 했다." 소송도 서둘러야 한다. 왜냐하면 이라크에서 귀국한 케요스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이 1년으로 국한돼 있기 때문이다.

미셸 C는 우간다까지 진출한 거대한 기계, 보험회사들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AIG는 몰타 회사인 '탠지어스 인터내셔널'(Tangiers International) 같은 회사의 조사관들을 채용해 미셸 C 쪽의 모든 이의 제기를 무력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젊은 여성 변호사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힘든 업무 중 하나는 저(조사관)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저들은 직업윤리를 뻔뻔하게 위반한다. 예를 들어 법으로 엄격히 금지돼 있음에도, 내 의뢰인들을 빼돌려 자신들이 지정한 의료기관으로 데려가 검진을 받게 한다. 이라크에서 귀국한 이후 노동이 불가능한 장애를 앓고 있는 의뢰인에게 접근해 일자리를 구해주겠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의뢰인이 이런 약속을 수락하는지 떠보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다. 우간다에는 의료 전문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이따금 내가 저들에게 매수된 복병을 만날까 걱정된다."

우간다 노동부는 2005년부터 이라크 파병 우간다 용병이 가족에게 송금한 금액이 9천만 달러(약 6800만 유로)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액수는 우간다가 주요 수출 자원인 커피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많다. 하지만 우리가 만난 전직 용병들이 중동에서 1년 이상 복무한 뒤 손에 쥔 돈은 겨우 몇백만 실링(약 1천 유로)이었다. 몇 푼 안 되는 이 돈도 이들이 귀국한 뒤에나 찾을 수 있도록 캄팔라 '크레인 은행'(Crane Bank)에 지급 정지된다. 이런 상태에서 2011년 환율 인플레이션이 우간다를 강타하자 이들의 은행 잔고는 40% 이상 손실을 입었다. 한 전직 용병은 "드레샤크는 우리를 모집해 거액을 받고 SOC에 팔아넘겼다. 그런데 우린 땅콩 부스러기만 챙기며, 현대판 노예제도를 체험했다"고 했다.

2011년 8월 전시 계약 문제를 조사하는 미 연방의회의 독립위원회가 미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계약을 주도하는 회사가 저지르는 범죄와 범법행위 때문에 해외에서 미국의 명성이 실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 나아가 이 보고서는 "만약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 병사가 줄어들수록, 이 국가들에서 군사작전이 완전히 종식되기 전까지는, 적어도 단기적으로 혹은 향후 십수 년간 민간 용병회사의 병력이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6) 요컨대 '폭력 시장'(7)이 금세 고갈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라크 국무부는 1만6천 명의 자국 대사관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국 민간 용병업체 8곳에 100억 달러를 주고 경비를 맡겼다. 이 8개 회사가 용병 5500명을 채용해 군대를 조직한 셈이다. SOC는 외교관들의 보안을 책임지고 있는 트리플 캐노피를 측면 지원하며, 지난 5년 동안 대사관 경비인력 수출로 9억7300억 달러의 소득을 올렸다. 현재 아프가니스탄까지 진출한 아스카르 여사장 케욘야는 우리에게 보낸 전자우편을 통해 케요스를 모집할 뜻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라크의 전직 파견 용병들은 바그다드와 카불은 물론이고 향후에는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까지 이같은 '검은 힘'(용병업체들)을 벌어 먹여살리는 우간다인들이 진출할 것이라고 했다. 왜? "치솟는 학비와 식료품 인플레이션 때문에 (중략) 용병 생활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글•알랭 비키 Alain Vicky 언론인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보안상의 이유로, 기사에 거론된 모든 이름은 가명이다.
(2) Sarah Stillman, <The Invisible Army>, The New Yorker, www.newyorker.com, 2001년 6월 6일.
(3) 1997년 조셉 모부투의 사망 이후,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는 우간다를 포함한 인근 국가들과의 격전장으로 전락한다.
(4) http://angeloizama.com.
(5) www.norbertmao.org.
(6) www.wartimecontracting.gov.
(7) Cf. Deborah D. Avant, <The Market for Force: The Consequences of Privatizing Security>,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Press, Washington DC,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