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아레그족의 고독한 투쟁

2012-05-14     아와드

1960년대부터 말리의 아자와드와 아이르, 니제르의 아자와그, 혹은 알제리의 아제르 지역에서 분출된 투아레그족의 무장봉기는 예외적이고 우연적이고 예견치 못한 사건이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무장봉기는 식민제국에 대해 투아레그족이 저항해온 역사의 연장선상에 있다.

"오! 끔찍한 세상이여, 참으로 침통하다/ 혼란 속에서 봉기한 내 민족은/ 메딘(1)행 보따리 짐 위에 올라탄 나의 민족은/ 우리를 굴종시키는 국가들 속에 내버려둔다/ 거기서 나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움츠러든다/ 모든 저격병을 동원한/ 사령관이 보낸 부대 때문에…"(빌라의 시, 1900년경)(2)

현재 투아레그족은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 리비아, 알제리에 흩어져 살고 있다. 터키·프랑스·이탈리아의 식민제국 군대는 투아레그족 국가를 짓밟아서 무자비한 군사통치로 수많은 투아레그족 군사·정치 엘리트들과 주민들을 살해했다. 투아레그족은 이 사건을 '티우타'(Tiwta·참사)라 부른다. 그 뒤 군사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사회적 측면에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하는 새로운 저항 방식이 생겨났다.

새로운 유형의 저항 방식은 1900년부터 모습을 드러냈다. 1916년 투아레그족은 새로운 저항 방식으로 총봉기를 선택했다. 카우센(Kawsen)이 총봉기를 '나선형 장정'이라고 명명하고 지휘했는데, 그 이유는 비대칭 전력에 적합한 교묘한 우회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투아레그족 서사시로 찬양된 영웅적 전쟁은 게릴라, 매복, 전투원의 기민성뿐만 아니라 망명과 현대적인 군사적·기술적 지식의 탐구로 대체됐다. 1919년 폭동이 실패해 카우센이 교수형을 당한 뒤 엄청난 탄압이 이어졌다. 그러나 탄압이 나선형 장정을 말살하기는커녕, 투아레그족의 내면 깊숙이 나선형 장정의 정신을 연장하는 데 기여했다.

1950∼60년대에 말리, 니제르, 알제리, 리비아, 부르키나파소라는 국가들이 탄생했다. 투아레그족은 "신생국가들이라는 인위적인 씨실 위에 짜깁기된 조각들"(3)로 나눠지는 것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들의 항의는 묵살됐다. 그래서 '테슈마라'(Teshumara)라는 새로운 저항 방식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프랑스어 '쇼뫼르'(Chȏmeur·'실업자'란 뜻)에서 파생된 테슈마라는, 더 이상 자기 집에서 살 수 없고, 다시 망명해야 하고, 또 다른 존재 방식을 찾아야 하고, 그러나 언젠가 '사막 지역을 재건하고 국가를 다시 건설하러' 돌아오기 위해 약함과 패배의식을 떨쳐낼 새로운 지식을 획득해야 하는 투아레그족들의 소외된 상황을 가리킨다. 저항한다는 것은 역경과 패배에도 불구하고 자기 민족을 긍정하고, 정복자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며, 정복자의 거대한 함대(艦隊)에도 기 죽지 않음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 도로포장용 롤러 밑에 깔려 있어도 다수가 계속 살아남는 것이다. 그렇게 탄압받는 기간에도 예술적 창조성을 발전시켜야 하고, 예술적 창조성은 그 준거 가치로 소외의 삶을 또박또박 노래하고 받아들여 투아레그족의 고전 시와 음악 장르를 부활시킬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1980년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당시 병사가 부족했던 무아마르 카다피의 부름에 호응한다. 젊은이들은 처절하게 실패한 예전의 폭동과 독립하려 했다는 죄악의 짐을 지고서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난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어떤 역할도 주지 않는 세상과 맞서기 위해 새로운 수단을 찾아 떠난다. 그들의 신조는 한마디로 '군사지식과 자신의 피를 물물교환'하는 것이다. 그들이 리비아 병영에 합류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도, 리비아의 대의명분을 지지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들은 반베르베르주의적이며 범아랍주의적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카다피가 투아레그족을 도와 그들의 땅을 결코 해방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1980∼90년대 투아레그족의 시(詩)에 표현된 것처럼,(4) 자신들이 언젠가 해방시키려는 국가를 위해 스스로를 단련할 필요가 있었다.

최근 리비아에서 돌아온 이 젊은이들의 여정은 조상의 여정과 비슷하다. 조상은 1900년대에 지금의 차드 북부, 수단, 동부 리비아, 페잔(리비아 서남부)에서 식민제국 군대들에 대항해 사누시 부족을 위해 싸웠고, 프랑스 점령군에게서 '투아레그족의 국가'를 다시 찾기 위해 총과 대포를 소지하고 16년 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

다양한 종류의 무기를 들기로 선택하든, 자신의 연약함을 인식해 침묵하든 간에, 이들 모두는 조상의 땅에서 자신이 하려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고통과 저항의 기나긴 경험을 가슴에 품고 있다.

오래전부터 투아레그족은 자신의 고독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미 비만증에 걸렸음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강대국들이 욕심내는 광산 자원이 존재하고, 여기에 접근하기 위한 세계적 경쟁이 벌어지는 가운데, 다양한 이익그룹에 집착하는 몇몇 반군 지도자의 조작과 현실정치의 왜곡 때문에 투아레그족의 장정은 많은 방해를 받고 있다. 나선형 장정은 방사능, 우라늄 먼지, 유독가스 방출, 광물 추출에 따른 대기와 수질 오염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래도 나선형 장정은 돌면서 계속 진행될 것이다.

글•아와드 Hawad 투아레그족 작가·미술가. 최근 저서로 <지평선의 거친 물결>(농리외·파리·2011)이 있다.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1) ‘메딘’(Médine)은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인 ‘동쪽’을 뜻한다. 동시에 시레나이크(리비아 동북부 지역), 수단, 이집트, 아랍 지역에서 조직화되기 시작한 저항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이 지역으로 향하는 투아레그족 망명자들을 뜻하기도 한다.
(2) 시인 빌라는 1916∼19년 카우센을 중심으로 일어난 투아레그족의 총봉기에 참여했다.
(3) 투아레그족은 1957년부터 샤를 드골 대통령에게 탄원을 올리고 편지를 썼지만 헛된 일이었다. 엘렌 클로도아와드, <투아레그족 역사의 정치지도자>, 이레맘, 엑상프로방스, 1993 참조.
(4) 엘렌 클로도아와드 & 아와드, ‘현기증 나게 갈기갈기 찢긴 국가’, <투아레그족의 저항시와 노래 선집, 1980∼85년>, 아마라, 라부이아디스,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