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카라과 좌파의 변신, 민심을 사로잡다

2012-05-14     모리스 르무안

지난해 11월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의 대선 성공은 남미 지역에서 굳건히 자리잡고 있는 좌파의 대세를 보여준다. 하지만 여성 인권 문제와 관련해 최근 산디니스타 정권이 보여주는 변화의 모습은 권력 유지를 위해 때론 진보의 원칙까지 일부 포기하는 현 정권의 논리적 한계를 드러낸다.

어떤 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또 다른 이들은 플래카드를 흔들며, 또 몇몇은 전방에 있는 대오의 행진을 호소했다. 지난해 12월 3일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의 최고선거위원회 부근에서는 별다른 사고 없이 시위대가 행진을 계속했다. 얼마 전 선거에서 패배한 파비오 가데아가 마이크를 잡자 상대적으로 조용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독립자유당(PLI) 대표로 대선에 출마한 그는 11월 6일의 투표에서 31% 득표율로 2위에 그쳐 다니엘 오르테가(62.46%)에게 패배했다. 자칭 지지율 62%의 가데아는 집권당인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 소속 다니엘 오르테가의 당선을 부정했다. 그는 "선거 무효를 선언하고, 전세계 참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선거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는 '국제사회'로 대표되는 전세계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니카라과 내에서도 승부는 그의 완전한 참패였다. 선거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10만 명으로 밝혀졌고, 그 가운데 5천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 최대로 집계하면 1만 명 정도였다.

현 정권에는 반대하지만 산디니스타파라고 밝힌 <엔비오> 편집장 마리아 로페스 비힐은 '가데아 62%'설은 이뤄지기 힘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선 투표 전 모든 여론조사에서 가데아 후보의 지지율은 30% 정도였다.) 그는 "두 후보의 지지율이 비등했지만 박빙의 승부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선거 부정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투표일에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가장 심각한 건 이미 그전에 벌어졌다"고 설명한다. 니카라과 커뮤니케이션 조사연구소 국장인 소피아 몬테네그로는 더 강경한 어조로 피력한다. 그에게 오르테가는 독재자일 뿐이다. '오르테가의 어떤 점을 비난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간단히 "전부"라고 말했다.

오르테가는 독재자인가?

흑은 흑이고 백은 백이며, 선과 악이 분명히 나뉘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겐 니카라과는 혼돈의 나라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좌우 대립뿐 아니라, 서로 적이 된 옛 동지들 사이의 과격한 싸움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 사실 어느 쪽도 완벽하게 무고함을 주장할 수는 없다.

1979년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의 독재정권을 타도한 뒤, 1980년대에 FSLN은 미국이 우익 반군 '콘트라스'(Contras)를 이용해 끌어들인 분쟁에 맞서야 했다. 무장투쟁과 대중봉기로 얼룩진 반정부 폭동으로 국가 전체가 황폐화됐고, 1990년 2월 25일 대선에서 니카라과 국민은 유혈 사태가 빚어질 때까지 서로 물어뜯으며 싸웠다. 만일 또다시 산디니스타 정권에 투표하면 전쟁은 무한 연장될 상황이었다. 결국 우파 진영의 비올레타 차모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면서 니카라과 국민은 우파의 귀환을 허용한다. 우익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단지 지쳐서 우익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보수 세력에게 정권을 빼앗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산디니스타 쪽이 받은 충격은 견디기 힘든 수준이었다. 산디니스타 내부에서 격렬한 논의가 오고 갔다. 게릴라전도 수행하고 미국의 공격에 군사적 저항도 한 뒤, 결국 산디니스타는 필요에 의해 중도정당이 되었다. 토론의 전통이 사라진 수직적 구조의 정당이었다. '평화로운 니카라과'라는 새로운 상황이 도래하면서 일부는 변화를 꿈꿨다. 1994년 오르테가가 이끄는 '정통파'가 당권을 장악하자, 예술가와 지식인 등 간부급 당원들이 당을 떠났다. 당에서 축출된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 과정이 고상하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해서 1995년 전 부통령 세르히오 라미레스와 게릴라 지도자 도라 마리아 텔레스가 만든 산디니스타혁신운동(MRS)이 출범한다. 이후 '오르테가파'에게는 '카우디이스모'(총통정치), '권위주의', '산디니스타 사유화' 등 비난 섞인 꼬리표가 따라다닌다.(1)

정권 뺏긴 뒤 산디니스타 몰락

FSLN에 대해 돌아다니는 속설은 보통 여기까지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이는 그저 방향을 잃고 헤매다 몰락한 어느 정당의 서글픈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실제 현실의 일부에 불과하다.

산디니스타에서 물러난 '퇴역 게릴라'들이 마나과의 한 서민 동네 산후다스에 마련한 허름한 건물 위로 열기가 내리쬔다. 소모사 시절 도심 게릴라 대원이었고, 이후 콘트라스 반군과 싸울 때는 기습조로 활약한 마리오 호세 시엔푸에고스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1990년 대선에서 패배한 직후, '역사적인 전투원'이던 우리는 오르테가를 불러들였다. 그는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몸으로 왔다.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니엘 사령관'일 뿐이었다. 그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장시간 논의한 끝에, 우리는 정권 재탈환을 위해 계속 투쟁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무엇을 기반으로 투쟁한단 말인가? 현재 대통령의 사회 분야 자문을 맡고 있는 오를란도 누녜스가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모든 게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와 맞물렸다. 산디니스타 내부에서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소모사 시절 경험해본 적 없는 민주주의에 대해 부르주아적이라고 규정해버린 이들은 산디니스타의 역사적 과업을 이루기는 이제 다 틀렸다고 결론지었다." 사회주의와 반제국주의가 존재 이유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저들에게 문제는 산디니스타를 중도좌파 성향의 현대적 정당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것이었다. 산디니스타 내부는 이렇듯 한 파벌이 당권을 장악하면서도, 그 와중에 불거진 이념적 대립은 당의 분열을 초래했다.

'혁신파'에 속하는 라미레스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이때부터 "다니엘은 시련 속에서 악착같은 면모를 보여주었다. 결국 당이 찢어지고 말았지만, 그는 자금까지 집행부도 없이 홀로 남았다. 오르테가는 마을과 동네를 직접 찾아다니며 발로 뛰었고, 그렇게 리더십을 구축했다".(2) 사실 산디니스타의 서민 세력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져버리지 않았다. 그의 뒤를 따르면서 마음을 굳건히 먹어야 할 때도 있었다.

1996년 대선에서는 자유헌법당(PLC)과 아르놀도 알레만이 혜성처럼 등장해 51%의 지지율을 얻었다. 미국의 대변인 역할을 하던 알레만이 어두운 미래로 나라를 위협했기 때문에 오르테가는 37.7%의 지지율밖에 얻지 못했다. 다른 정당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참패였다. 산디니스타혁신운동도 1.33%의 지지율에 그쳤다.

화해 전략을 구사하던 FSLN은 과거 가장 적대적이던 상대에게 다가가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가톨릭교회와 과거 주로 농민 출신으로 콘트라스 반군에 참여한 사람들과 손잡은 것이다. 오르테가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자유헌법당(PLC)과 논의하며 연립정당 체제를 구축하는 합의(혹은 계약동거)에 이른다. 학자인 앙헬 살도만도는 지탄이 섞인 논조로 이렇게 얘기한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신의 영혼을 팔았다. 신자유주의자들이 공공부문을 없애거나 보건 분야를 자유화하면서 시장 개혁을 강화했을 때, FSLN은 동맹에 발이 묶여 이를 저지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당내에서는 사업가 출신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교회, 콘트라스 반군과 손을 잡다

누녜스는 이와 다른 관점에서 설명한다. "의회에서 우리는 소수파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우리와 적대적 관계에 있던 저들은 우리를 파괴해버릴 의지와 힘이 있었다. 동맹을 맺지 않았다면 당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 방식이 딱히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역학관계의 문제였다. 언젠가 우리에게 다시 다수당의 자리를 안겨달라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첫 번째 과제는 일단 계속 살아남는 것이었다."

이런 '적과의 동침'은 실제 당의 생존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연립체제의 최대 수혜자가 비록 부패한 대통령 알레만이긴 했지만, 어쨌든 정치적 안정도 보장됐다. 산디니스타 쪽이 노조를 통제하고 경찰 및 군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물론 당의 성격과 반대되는 '실용주의 노선'에는 그 대가가 따른다. "전세계의 좌파 진영에서 변절이니 자격 상실이니 하는 맹공격을 받았다"는 점에는 누녜스도 인정한다. 이같은 FSLN의 행보는 니카라과 내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2001년 또다시 대선 실패를 경험해야 했기 때문이다.

알레만 정부 시절 부통령직을 수행한 엔리케 볼라뇨스는 보수 세력으로서 알레만의 뒤를 이어 2001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볼라뇨스 대통령은 민영화 작업을 속행하고, 자본의 집중과 함께 구조조정을 했다. 이로써 국민의 46%는 가난에 허덕였고, 15%는 극심한 빈곤 상태에 빠져들었다. 게다가 볼라뇨스는 전임자인 알레만에게 부정 축재 혐의로 20년형을 선고하며 그를 감옥으로 보내버렸다. 이는 우파 내부에 심각한 균열을 야기해 우파 세력을 약화시켰다.(3) 상황이 이러하니, 2006년 대선에서 표심이 FSLN 쪽으로 기우는 건 당연한 귀결이 아니었을까?

오르테가는 자유주의자들과도 결탁했다. 자유주의자들이 낙태 처벌 관련 법안을 들고 나왔을 때, 그 처벌 대상에는 임신으로 목숨이 위태롭거나 강간에 의해 임신한 여성들의 낙태까지 포함돼 있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에서 모두 일제히 법안 찬성 운동을 벌였고, 이는 후보자들에게 압박으로 작용했다. 여기에서도 정치적 계산은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한다. 교회 쪽 표를 잃지 않기 위해 FSLN이 법안에 동조한 것이다. 니카라과 커뮤니케이션 조사연구소의 일원이자 니카라과 비정부기구 '여성권위운동' 창단 멤버 중 한 명인 소피아 몬테네그로는 이에 대해 분노를 삭이지 못하며 열변을 토했다. "니카라과에서 치료 목적의 낙태는 독립 이후 계속 있어왔다. 소모사도 이 부분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오르테가가 이를 없애버렸다. 정말로 원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에 따른 건지 모르겠지만, 오르테가는 기독교 원리주의로 개종했다. 미신을 숭배하는 기회주의자인 그의 아내 로사리오 무리요는 하루 종일 '하느님'이니 '성모님'이니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 사건은 꽤 시끄러운 반향을 이끌어낸다. 특히 국제 진보 진영 내부에서 반발이 극심했다.

오르테가, 마침내 정권을 탈환하다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2006년의 대선 결과, 오르테가는 37.99%의 지지율로 1차 투표에서 당선됐다.(4) '기독교, 사회주의, 연대'를 내세운 오르테가는 2011년 말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지지율로 연임에 성공했다. 12살 소녀가 강간으로 임신해 출산했을 때, "이 아이의 탄생은 기적이다! 이렇게 광영을 베풀어주시고, 이토록 믿음과 사랑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라!"며 열광했던 무리요 여사의 발언도 지지율 하락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FSLN 소속의 한 사람은 우리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교회는 매우 보수적이고, 언제나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동네마다 있지 않은가. 교회와 뜻이 같지 않다고 해도 사람들은 교회에 존경심을 표한다. 우리도 이런 교회와 함께해야 한다. 국민의 뜻에 질질 끌려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국민보다 너무 앞서갈 수도 없다."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말이 무척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마나과 라레이나가 마을의 당 간부 루시 바르가스는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많은 나라에서 낙태는 자유롭지만, 여성과 아이의 건강에는 신경 쓰지 않으며, 그로 인해 상당수가 목숨을 잃고 있다. 여기에서는 여성들을 돕고 있다. 이는 무상의료 제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낙태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권리다." 피임이 필요한 여성이라면 보건소에서 무상으로 이를 지원받을 수 있다. 게다가 (문제의 최소화를 위한 건 아니지만) 정부는 딱히 법 적용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병원에서는 임신한 여성의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 의료진 위원회가 구성돼 해당 상황에 필요한 결정을 내리며, 이 과정에서 정부에 허가를 요청하지는 않는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않은가"

마나과 외곽에 위치한 교외 주택가 시우다드 산디노에서는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분위기다. 보건 문제도 많이 해결됐다. 이제는 쿠바의 의료진이든 약이든 모두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도움을 필요로 할 경우, '미주 지역을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의 동지들이 친히 여기까지 와준다." 교육도 이제는 무상으로 이뤄진다. "이제 학교에 가기 위해 돈 한 푼 내지 않아도 되며, 아이들은 간식을 제공받고, 빈곤한 가정에는 책가방·신발·교복까지 지원한다." 기분이 좋은 사람들은 서로 농담을 주고받고, 거리에서는 웃음이 끊이지 않으며, 사람들은 서로 툭툭 치고 얼싸안으며 즐거워한다. 정부 지원을 받은 가격으로 1차 생필품을 파는 작은 식료품 가게 앞에서는 갑작스레 환호성이 쏟아진다. "쌀도 있고, 콩도 있고, 기름과 설탕도 있다. 전에는 이것 아니면 저것 하나씩밖에 살 수 없었다. 강낭콩 1파운드에 18코르도바오로(약 0.75유로)였는데, 이제는 8코르도바오로 정도다."

우파는 계속 우파의 자존심을 지키고 '혁신파'는 '시민사회', '국민적 합의', '시민의 민주적 정체성', '폭넓고 다원적인 동맹', '통치 가능성', '제도화 가능성' 등과 같은 표현에 도취돼 있었지만, 오르테가 정부는 무리요 여사와 연계해 40여 개 복지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로써 무리요 여사는 '초(超)장관급' 존재가 되었다.

이에 대해 살도만도는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게 사소한 것 좀 나눠준 걸로 소란 떨 것 없다. 이 모든 게 정치적 계획의 일환이라면, 이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빈곤계층에 속하는 수만 명의 주민들 생각은 그와 좀 다르다. 이들은 정부에서 지원받은 아연판 86만4천 개 덕분에 각지에서 열대 폭우를 피해 집을 보호할 수 있었다. '빈곤 제로' 정책의 혜택을 받고 있는 로살리아 수아레스도 그와는 생각이 좀 달랐다. 다른 여성 8만 명과 마찬가지로, 수아레스 역시 소 한 마리와 돼지 한 마리, 그리고 닭 여섯 마리를 받았다. "소가 벌써 송아지를 두 마리나 낳았다. 먹지 않는 우유는 내다 팔고 있고, 아이들은 달걀을 먹는다. 전에 우리는 가진 게 없었다." 다른 여성들은 또 다른 정부 지원을 받았다. 대개 편모로 살아가는 여성은 '고리대금 제로'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되는 정부 지원 대출을 받아 정육점이나 작은 전통 과자 가게, 또는 토르티야 가게를 차릴 수 있었고, 나아가 서로 연합 조합까지 세울 수 있었다.

"정부가 해준 건 최소한의 도움이었다. 그것도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다. 정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 무엠베의 복잡한 시장통 속에서 만난 시민 하나가 불만을 토로했다. 현지의 복지 계획 운영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산디니스타 여당 조직 '시민권위원회'가 맡고 있는 역할 때문에 자주 제기되는 문제점이다.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씩 차이가 나는 실상이 그려진다. 예라 마요르는 1972년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 살고 있었다. (산디니스타에 동조하지 않는 4분의 1을 포함해) 주위 360명 정도의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마요르도 다시 집다운 집에 들어가 살 수 있었다. 그는 "이 집, 정말 아름답지 않은가!"라며 기뻐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합당한 주거 플랜' 정책에 따라 마련된 집이었다. 젊은 여성인 로사리오 가르시아는 "나는 산디니스타파도 뭣도 아니었다. 정치에는 관심 없다. 하지만 지도자가 무엇을 했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강조한다. 다른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가게를 꾸려나가며 농업을 겸하고 있는 발테르 실바는 이렇게 토로한다. "솔직히 말해 나는 자유주의 노선에 찬성하는 쪽이었다. 저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은 우리를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나도 생각을 바꿨고, 주위의 적잖은 친구들이 이에 뒤따랐다." 사람들의 이런 지지 덕분에 오르테가의 지지율은 2006년 38%에서 2011년 62.46%로 '엄청나게' 증가했다. 이는 선거 부정의 가능성보다 훨씬 합당한 지지율 상승의 이유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 운운하며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해외 투자자, 그리고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 같은 기구들은 오르테가 정부의 지난 5년간 국가 운영에 흠잡을 게 아무것도 없다. 오르테가 자신은 물론, 산디니스타파의 부유한 기업가들이 포함된 민간 부문은 단순한 노력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외 전략 부문 역시 오르테가에게 이롭게 작용한다. ALBA에 들어가고 남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오르테가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구조적으로는 나라가 달라진 게 없으나 정부는 국가의 우선 과제를 변화시켰다. 흔치 않은 일이다. 이와 동시에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은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규모 확대와 성공적인 실시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겉으로만 좌파의 탈을 쓴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비생산적·반동적·권위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혁신파'의 아드레날린 수치 상승을 급격하게 부추긴다.

"오르테가는 결국 차우셰스쿠가 될 것"

부통령 자리를 꿈꾸는 에드문도 하르킨은 산디니스타혁신운동 대표로 출마해 2006년 대선에서 6.29%의 지지율을 얻었고, 이번에는 독립자유당의 가데아 후보와 손을 잡았다. 보수적인 인물로, 과거 코스타리카 콘트라스 반군(그러나 진지하게 이를 정정하는 로페스 비힐의 지적에 따르면 '시민반군')을 이끈 경험이 있는 가데아는 사실 제2의 에두아르도 몬테알레그레에 불과하다. 알레만 전 대통령 및 볼라뇨스 전 대통령 시절 은행가 및 장관직을 지낸 몬테알레그레는 2006년 대선에서 28.30%의 지지율로 오르테가에게 패한 뒤, 금융 스캔들에 연루돼 재기가 힘들어졌다. 더욱이 그럴 의도도 전혀 없었다. 당이 패배한 것으로 판명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선거 전, 로페스 비힐도 "이같은 독립자유당-산디니스타혁신운동 사이의 동맹은 공동의 복지계획이나 사회정책, 정책적 프로그램, 혹은 이념 면에서 공통분모를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다"고 인정한다. "둘 사이 동맹의 목표는 오직 집권당인 FSLN과 오르테가의 독재적 탈선을 저지하는 것뿐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계약동거'인 셈이다. 1990년부터 2006년까지 16년간, 멈추지도 않고 완화되지도 않은 상태로 지속돼온 신자유주의 바람으로 지칠 대로 지친 니카라과 국민 다수는 선택을 했다.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코만단테(지도자)를 지지한다. 지도자가 계속 이 길을 갔으면 좋겠다'는 게 저들의 생각이다.

미국 대사의 총애를 받으며 '시민사회'의 환상에 사로잡힌 소피아 몬테네그로 국장은 이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몬테네그로는 "어쨌든 6개월 뒤면 (과거의 병이었든 현재의 병이든 암을 갖고 있는) 차베스가 세상을 떠날 것이고, 오르테가와 무리요 부부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그날이 되면 제2차 세계대전 뒤와 마찬가지로, '부역'을 했던 여자들의 머리를 밀어버려야 하는가? 지난 11월 6일 총선에서 당선된 산디니스타 소속 의원들은 모두 62명이고, 그 가운데 34명이 여성이다.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1) Maurice Lemoine, ‘과거로의 회귀 유혹에 사로잡힌 니카라과’(Le Nicaragua tenté par un retour au pass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6년 9월호.
(2) <El pais>, Madrid, 2011년 11월 4일.
(3) 이같은 실형 선고는 2009년 1월 16일 최고법원 판결에 의해 파기된다.
(4) 오르테가-알레만 사이의 ‘계약동거’ 이후 수정된 헌법에 따라 40%의 득표율을 얻거나, 1위와 2위의 격차가 5%포인트 이상일 경우 35%의 득표율을 얻으면 당선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