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 분노한 석유노동자들

2012-05-14     레지스 장테

2011년부터 카자흐스탄의 석유회사에서 노동운동이 확산되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정부는 폭력적인 탄압으로 맞섰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저항은 식을 줄 모른다. 한 줌의 소수가 엄청난 부를 긁어모으는 모습을 보며 분노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이번 사태는 억압적인 카자흐스탄 내부에 자신들의 힘을 자각해가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2011년 5월, 카자흐스탄 서부 지역 석유노동자 수천 명이 파업에 돌입했다. 1991년 독립 이후 가장 큰 규모다. 프랑스보다 5배 넓은 카자흐스탄의 지하에는 풍부한 천연자원이 매장돼 있다.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나오는 이익의 좀더 큰 몫을 요구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7개월 후, 12월 16일 소도시 자나오젠에서 경찰은 흥분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공식 사망자 수는 17명인데, 모두 민간인이었다. 현지 정보에 따르면, 실제 사망자 수는 40여 명에 달한다.

온갖 압력에 시달리고, 동료 2500명이 불법 해고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이들은 평화주의를 고수했다. 음주를 삼가고, 지난여름부터 농성 장소로 쓰고 있는 자나오젠 중앙광장을 매일 저녁 청소했다. 유혈사태 이후 파업자들의 기세가 한풀 꺾이고 나서야 당국은 해고 문제와 임금 인상 요구에 대한 협상에 나섰다.

수십 명이 사망한 노동자 파업

옛 소련에서 독립한 후 카자흐스탄의 권력자들은, 정치학자 마를렌 라뤼엘의 표현을 빌리면 '의견을 듣는 권위주의'의 형태를 통해 1600만 주민들에게 지지를 구해왔다. 지난해 12월 16일의 비극적 사태 이후 새로운 사회·경제 정책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책들이 실현될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노동자들은 외국 정부들이 학살을 규탄하고 나서면 카자흐스탄 정부가 자극받아 부패와 독재를 청산하리라 기대했다. 국내 안정과 해외 투자 유치를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변화도 없었다. 카자흐스탄 곳곳에서 개발 사업을 벌이는 석유회사(토탈, 엑손모빌, ENI 등)와 거대 광산회사들(아레바, 아르셀로미탈 등) 대부분은 1989년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직을 고수하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의 권위주의에 이의를 제기하기는커녕 그의 정책을 찬양하기에 바쁘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감시단에게 강력한 비판을 받은 총선 3일 후, 일간지 <카자흐스탄스카야 프라우다>는 프랑스 상원의원 에이메리 드몽테스키우(중도연합)가 선거 감시단원으로 자나오젠을 방문한 자리에서 한 말을 전했다. "선거기간에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 모든 투표소에서 투표가 질서 있게 합법적으로 잘 진행됐다."

학살이 있던 날, 카자흐스탄 정부는 독립 2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역 정부가 농성단을 중앙광장에서 쫓아내려고 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 경찰은 지난해 8월 농성자들에게 텐트 설치를 금지했다. 대륙성 기후 때문에 여름에는 기온이 40°C까지 올라가고, 겨울에는 영하 30°C까지 곤두박질치는 곳이었지만 경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나오젠 시청이 행사용 유르트(전통적인 텐트형 건물)를 제멋대로 설치했다. 카자흐스탄의 정치 방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그 일로 노동자들은 극심한 분노에 사로잡혔다.

정권에 밉보이거나 고위층 인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두려웠던 자나오젠 시장 오락 사르보페예프는 행사를 취소할 마음이 없었고, 노동자들에겐 그것이 일종의 도발로 받아들여졌다. 시장은 마치 모두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듯이 둘러댔다. 러시아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민 모두가 즐거움을 만끽하기 원했다. 우리는 행사 준비를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 광장에 유르트를 설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농성자들에게 국민 정서를 생각해서 양보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7개월 전부터 중앙광장을 차지하지 않았나."(1)

망기스타우주에는 카자흐스탄 원유 매장량의 상당 부분이 집중돼 있다.- 2020년 이전에 카자흐스탄은 세계 10대 원유생산국에 포함될 것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요구는 주로 임금 인상과 관련 있다. 오젠무나이가스(OMG)는 카자흐스탄의 100% 국영 석유회사 카즈무나이가스(KMG)의 탐사·생산 업체 KMG-EP의 계열사다. OMG 노동자들은 같은 지역의 다른 회사, 카라잔바스무나이(KBM)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 표시로 파업을 결의했다. KBM은 KMG-EP와 (2006년부터) 중국국제신탁투자공사(CITIC)가 지분을 갖고 있는 회사다. KBM 노동자들은 OMG 노동자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다.

산유국임에도 낮은 임금에 불만 폭발

파업 당시 이미 몇 달 전부터 두 가지 임금률(지역별 대 부문별)의 적용 방식을 놓고 노사 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옛 소련에서 사용하던 지역 임금률은 1999년 폐지됐지만 몇몇 기업에서 여전히 급여명세서에 명시하지 않은 채 유지해왔다. 2009년 법 개정으로 지역 임금률이 부활됐지만 사람들은 계산 기준을 알지 못했다. KMG-EP 인사과 관계자는 노동법을 근거로 들면서 노동자들이 착각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회사의 한 관리는 경영진 쪽에서 충분히 "소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직원들이 "임금률 적용 방식을 잘 못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노동자들은 경영자들이 임금 일부를 빼돌렸다고 의심한다. 퇴직 후 독학으로 법률가가 된 알렉산드르 피아스톨로프가 그들의 대변자로 나섰다. 법정에서 노동자들을 변호해줄 사람은 그뿐이었다. 다른 변호사들은 압력을 받거나 지레 겁먹고 개입을 꺼린다. 피아스톨로프는 "그 석유회사들이 임금률 관련 법률을 왜곡해서 해석한다"고 지적한다. "가령, 공식 임금이 25만 텡게(약 1250유로)라면 실제로 노동자가 받는 금액은 13만 텡게(약 650유로)에 불과하다. 그 차액은 분명 높은 자리에 있는 누군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갈 것이다. 아직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기업 지출에서 임금으로 지급된 총액수를 보여주는 자료를 보면 직원들이 실제로 받은 금액과 일치하지 않는다."

지역의 주요 석유회사 인사과에서 오랫동안 법률가로 일한 나탈리아 소콜로바는 임금 산정 과정에 어떤 편법들이 사용되는지 잘 알고 있다. KMB를 떠나면서 소콜로바는 사정을 잘 아는 자신이 노조 편에서 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의 남편 바실리는 소콜로바가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임금률과 관련된 법규를 지키지 않는다고 설명해줌으로써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KBM에서 소콜로바와 함께 일한 동료 중 한 사람은 "KBM이 고용계약을 연장해주지 않자 노동자들에게 잘못된 임금률 계산 방식을 제시해, 그녀가 회사에 복수할지도 모른다"고 반박했다. 소콜로바는 '사회 무질서 조장'이라는 애매한 죄명으로 6년형을 받았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징역 3년의 집행유예로 감형되어 지난 3월 8일 석방됐다.

바실리가 말을 잇는다. "나탈리아는 세무 당국, 고등검찰청, 재정부에 편지를 보내 임금률 적용 방식을 문의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고용주들과 정부가 의도적으로 법률을 왜곡되게 해석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게 되었다.

파업 기간 중 노동자들은 때로 치사한 방식까지 동원된 지속적인 압력에 시달려야 했다. 2011년 봄, 이탈리아 회사 ENI가 지분 43%를 소유한 석유회사 에르사이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임금률 산정 문제보다 노동자와 외국인 노동자 간 동일임금 지급, 단체협약에 관한 협상을 요구사항으로 내걸었다. 사 쪽은 파업 참가 노동자들을 한 명씩 사무실로 불렀다. 불법적인 개인 면담을 통해 겁을 주려는 것이었다. 비정부기구(NGO) 휴먼라이츠워치의 미라 리트만은 "경찰도 이 일에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2011년 5월 KBM 노조가 중재위원회 구성에 참여할 전문가들을 지명할 때- 카자흐스탄에서 파업 돌입 전에 거쳐야 할 단계- 사 쪽은 소콜로바가 참여하는 것을 거부했다. 바실리는 사 쪽이 "당시 노조위원장 에르보신 코사르하노프에게 전문가 명단을 수정하고 나탈리아를 제외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한다. 노동자와 노조원들 대부분은 당시 코사르하노프 위원장이 매수됐다고 믿는다. 노조 지도자 켄제갈리 수예우오프는 "2005년까지는 주 지사가 노·사·정 삼자위원회가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그러나 새 주지사는 삼자위원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그 후로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한다.

카자흐스탄 법률은 사용자들에게는 유리하지만 파업 개시를 어렵게 만드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도 이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노동조합은 사용자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절차를 자체적으로 규정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사용자에게 요구사항을 전달할 때마다 노조 총회를 소집하도록 강제하는 법률을 통해 노조 활동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2)

노동자의 파업을 막는 법률들

2011년 파업은 온갖 공작이 판치는 무대였다. 옛 소련에서 '소유즈 선생'으로 불린 자문위원들은 협박받거나 감시당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노동자들이나 노조원들을 위협하기 위해 조폭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2011년 8월 2일에는 OMG 계열사(MounaiFiltrService)의 노조대표로 출마한 젊은 노동자 작실리크 투르바예프가 살해되었지만 범인을 찾지 못했다. 몇 주 전부터 파업 참가자들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끔찍한 협박을 받아오던 터였다. 비슷한 시기에 한 파업 주동자의 딸이 강간당한 후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아버지의 활동과 관련 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카자흐스탄 사법 당국은 KBM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사법부가 다 무슨 소용인가? 상당히 보수적인 미국의 NGO '프리덤하우스'는 카자흐스탄 사법부에 7점 만점에 6.25점을 줬다. 7점에 가까울수록 권력에 대한 사법부의 의존도가 높다는 뜻이다. 사법부의 결정에 고무된 기업들은 지난해 여름 불만에 찬 직원들을 대부분 해고했다. KBM과 OMG에서 각각 1천 명, 에르사이에서 500명이 해고됐다. 파업자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가령 5월에 OMG의 파업 참가자는 전체 9500명 중 7500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분노와 파업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반정부 성향의 NGO '자유' 대표 갈림 아겔루로프는 이런 압력과 모욕 때문에 "일부 파업자들이 갑자기 급진적 성향을 띠게 되고, 심지어 단식 투쟁에 나서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7개월 동안 사용자와 정부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귀를 막았다. 지난해 10월, OMG 대표 키크베이 에시마노프는 <BBC> 특파원에게 "신비주의를 믿는가?"라고 물었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광장에 있는 저 사람들은 최면에 걸린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봉급을 여섯 차례나 인상해줬다."(3) 석유노동자들의 임금이 카자흐스탄 평균임금보다 높은 건 사실이다(약 6만5천 텡게, 약 240유로). 따라서 그들의 파업을 단순한 생존권 투쟁으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OMG에서 운전사로 일한 무라트는 지난해 5월까지 매달 13만 텡게(약 665유로)를 받았다. 시내에서 일하는 운전사들보다 30% 정도 더 버는 셈이다. "그 돈이면 카자흐스탄에서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빠듯하다. 자나오젠은 물가가 비싸다. 더구나 여긴 모든 게 멀리 있다. 윗사람들이 많은 보수를 받으니까 물가도 그만큼 빨리 오른다." 무라트는 '크루치초프키'라 부르는 건물(옛 소련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 시절 지은 4~5층 건물)의 4층에 있는 주방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카스피해 연안 지역의 주도 악타우에서 동쪽으로 150km 떨어진 인구 100만의 도시 자나오젠에는 비상사태 선포 이후 거리마다 경계를 서는 경찰들로 가득하다.

정권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사법부

이처럼 파업이 급진적으로 발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권력 내부에서는 무크타르 아블리아조프가 파업자들에게 뒷돈을 대고 있다는 말이 있다. 그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에 반대하는 인물로 2009년 영국으로 망명했다. 하지만 증거는 없다. 파업자들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다. 누구도 나자르바예프 정권을 타도하려고 나서지도 않는다. 일부는 자신을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여긴다. 다른 이들은 부족적인 정체성을 내세운다. 20세기 초 볼셰비키와 맞선 투쟁으로 유명해진 아다이 부족이 그중 하나다. 정치학자 에드워드 샤츠는 "다른 이들과 대립되는 '우리, 아다이'라는 말은 불만을 표현하고 세력을 규합하기 위한 한 방식일 뿐"(4)이라고 지적한다.

옛소련 전문가인 스웨덴 경제학자 안더스 아르슬룬드는 이를 사회적 문제로 본다. "나는 이 사태가 계급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카자흐스탄은 5살 이하 유아 사망률이 1천 명 중 29명에 달한다. 경제 수준이 비슷한 불가리아는 10명, 라트비아는 8명이다. 경제적으로 훨씬 힘든 키르기스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과 비슷한 수다. 우연이 아니다. 보건 예산이 GDP의 2.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반면 불가리아는 4.2%, 라트비아는 3.62%다."

"오십이 다 되어서 자식들에게 매일 가진 돈이 충분하지 않다고 설명해줘야 한다." 무라트는 분노에 차서 말을 잇는다. "언제쯤 돈이 좀 모일까? 정부에서 말하듯이 20년 후에? 그들은 우리를 인간이 아니라 가축으로 취급한다." 그는 커튼을 걷어 젖힌다. "보라, 참 못생긴 도시다. 사방이 먼지투성이다. 건물은 낡고 학교는 다 쓰러질 지경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수돗물이 4시간 이상 나오지 않았다." 올해 초부터 원유 배럴 가격이 100달러를 훌쩍 넘어서자 정치 지도자들은 돈방석에 앉았고, 무(無)에서 아스타나와 같은 신도시를 지어 올리는 일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다. 망기스타우주 거리 곳곳에 미래주의적 아름다움을 뽐내는 신도시 광고가 눈에 띈다. 마치 OMG와 KBM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오일 달러를 어디에 쓰고 있는지 상기시키는 것 같다.

"부패는 만연하고 복지는 전무한 사회"

공산주의 활동가 누리야시 압드라이모바가 말한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도자들은 구름 위에 살면서 수십억 달러를 만진다." 그녀의 남편도 석유회사 노동자다. "그들은 이곳에 '악타우 시티'라는 최고급 신도시, 이른바 새로운 두바이를 건설하고 싶어 한다. 그곳에서는 물가가 너무 비싸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파트 하나 장만할 엄두도 못 낸다. 그럴 돈이 있으면 차라리 제대로 된 수도관이나 설치해주면 좋겠다."

"이 나라 지도자들은 잔뜩 해먹는다." 파업에 참가한 많은 여성 중 한 명이 입을 연다. "대통령 사위인 티무르 쿨리바예프를 보라. 그는 억만장자가 되었다. 그 돈이 다 어디서 왔는지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 그가 지난해 9월 말 와서 한다는 말이, 우리 때문에 국가가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둘째딸과 결혼하고 부정을 저지른 덕에 갑부가 됐다고 손가락질당하는 쿨리바예프는 오랄만(Oralman·정부 지원 아래 카자흐스탄으로 되돌아와 정착한 해외동포)들이 계속되는 파업을 부추긴 장본인이라고 비난했다. 지난 3월 열린 재판에 '공공질서 위협, 폭력과 고의적 방화' 등의 혐의로 출두한 피고자 37명 중 20명이 오랄만이었다.

이런 식으로 권력은 위험한 장난을 치고 있다. 자나오젠 시내에는 동양풍의 흰색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지난해 12월 16일 불이 난 OMG 본사 건너편이다. 글씨가 지워져 잘 보이지 않지만 '1989년 6월 17일'이라는 날짜를 확인할 수 있다. 민족 간 충돌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은 날이다. 희생자 중에는 체첸과 아제르바이젠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옛 소련이 1968년 석유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 건설한 도시 노비오젠의 석유회사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카자흐스탄 노동자들보다 더 많은 보수를 받았다. 스텝 지역의 구석진 이 도시에서 소득, 임금 격차, 삶의 조건과 관련된 모순은 이미 치명적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2006년에는 미국 회사 셰브론(50%)과 엑손모빌(25%)에 의해 개발 중이던 대규모 유전 텡기즈에서 임금 차이 문제가 불거져 터키 노동자와 카자흐스탄 노동자 간에 충돌이 발생했다. 당시 터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고용한 한 하청업자들에게서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었다.

카자흐스탄 정치문제연구소가 2009년 12월 자나오젠에서 벌인 조사에 따르면, 설문 대상자의 40.7%가 현재 수입으로 기본적인 공공서비스 요금(전기·가스 등)과 식비를 충당하기에 빠듯하다고 응답했고, 32%는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이 부상하는 원인으로 사회적 문제를 꼽았다. 그로부터 2년여가 흐른 후, 2011년 5월부터 카자흐스탄의 고위 인사들을 겨냥한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와 폭력행위가 연이어 발생했다.(5)

12월 학살 이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석유 관련 책임자들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그 분야 인사들을 대부분 경질했다. 그중에는 이미 그의 후계자감으로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던 쿨리바예프도 포함돼 있었다. 그는 12월 말까지 국영 석유회사들을 거느린 지주회사 삼루크 카지나의 사장을 맡고 있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몇몇 인물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일까?

대규모 학살로 처벌받은 경찰은 5명뿐

대통령은 카자흐스탄 석유산업계에 만연한 부패를 모를 리 없다. 어떤 이들은 석유를 트럭째 빼돌리기도 한다. 카자흐스탄 서부의 대규모 유전을 관리하는 고위층 인사들은 이윤을 빼돌릴 목적으로 설립된 KMG 계열사에 개인 지분이 있다.(6) 카자흐스탄의 부패는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다. 이론적으로만 보면 흥미로운 법률도 있다. 가령, 카자흐스탄 공공기관과 일하는 외국 기업들은 의무적으로 지역 상품을 구매하고 지역민을 고용해야 한다. 그러나 외국 사업가들의 말을 들어보면, 족벌체제와 부패 때문에 지역 산업 육성을 위해 제정된 이 법은 긍정적 효과를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자나오젠의 교훈을 발판 삼아 카자흐스탄에도 변화가 찾아올 것인가? 새 주지사 바우잔 무하메자노프는 지역 주민이 '일자리 부족, 주택 문제, 부패'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대통령은 자나오젠의 사회·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사원복지관리 면에서 좋은 평을 듣는 국영 석유회사 책임자들을 위원으로 임명했다. 그중에는 KMG-EP의 신임 사장 알리크 아이다르바예프도 포함됐다.

한편으로는, 12월 16일의 폭동을 주동한 '폭도들'을 찾아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경찰·정보부·검찰은 자신들의 불찰을 숨기기 위해 낡은 수법을 동원한다. 리트만은 "파업 주동자들은 큰 혐의가 없는데도 체포됐다. 12월 16일 이후 고문이 자행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한다. "블라디미르 코슬로프 같은 정치적 반대파도 체포됐다.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계속하도록 종용했다는 게 이유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일 아닌가."

비극이 발생한 후부터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 파업을 저지하고, 다른 지역과 다른 부문으로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는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들이고, 폭력 주동 혐의로 붙잡힌 37명의 노동자들에 대한 재판을 본보기로 삼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반면 12월 16일 학살로 처벌받은 경찰관은 5명뿐이다. 2500명의 해고자들은 복직되지 않을 것이다. 대신 특별히 설립된 회사에 재고용될 것이다. 그것으로는 별 위안이 안 될 듯하다.

글•레지스 장테 Régis Gent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Novaia Gazeta>, 모스크바, 2011년 12월 20일.
(2) ‘Individual observation concerning freedom of association and protection of the right to organise convention’, ILO, 1948(n°87), Kazakhstan(ratification: 2000), 2011.
(3) ‘Deadlock in Kazakhstan as Oil Workers Strike’, www.bbc.co.uk, 2011년 10월 25일.
(4) <Clan Politics: The Power of ‘Blood’ in Kazakhstan and Beyond>(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4)의 저자.
(5) Régis Genté, ‘카자흐스탄: 2011년의 전례 없는 이슬람주의 테러에 대한 분석’, <Religioscope>, www.religion.info, 2012년 1월 4일.
(6) Wojciech Ostrowski, <Politics and Oil in Kazakhstan>, Routledge, 런던,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