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 덫에 걸린 무슬림형제단

2012-05-14     알라 알딘 아라파트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이 기존 입장을 바꿔 대선에 후보를 내기로 한 결의안이 당 지도부 내에서 찬성 56, 반대 52로 가까스로 가결됐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이미 군과 경쟁관계인 살라피스트(이슬람원리주의 집단) 그룹과의 복잡한 관계로 인해 타격을 입은 조직의 분열을 심화하고 있다.

2011~2012년, 이집트 총선은 무슬림형제단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무슬림형제단은 과반수의 득표율로 의석 498석 중 235석을 차지한 반면, 살라피스트 계열의 정당들은 30%의 득표율로 123석을 얻는 데 그쳤다. 현재 국회에서 막강한 입지를 구축한 무슬림형제단은 조직을 위협하는 4가지 중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첫째는 자신들의 정치 입문에 따른 '중대한 현안'이고, 둘째는 정치적·지적 변화에 따른 난관, 셋째는 조직의 내홍, 넷째는 살라피즘의 압박이다.(1)

1928년 하산 알반나(1906~49)가 창설한 무슬림형제단은 과거 다양한 세력, 정부와 실용적 제휴관계를 맺었다. 1936년 왕위에 오른 파루크를 비롯해 1952년 파루크 왕권을 전복한 '자유장교단'(Officiers Libres,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은 1954년부터 자유장교단 수장이던 가말 압델 나세르 정권과 맞서며 견디기 힘든 압박을 받음), 그리고 1970년 이후부터는 무하마드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과 제휴관계를 맺었다. 사다트는 무슬림형제단을 나세르와 좌파 지지 세력을 타파하는 도구로 삼았다.

1981년 호스니 무바라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무슬림형제단과 통치자 간의 관계는 타협과 부분적 관용, 선별적 탄압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이같은 곡절로 2005년 총선 때, 한 번도 합법적인 정당 대접을 받아본 적 없는 무슬림형제단이 의석의 20%를 차지할 수 있었다(이들은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이들은 2010년 12월 총선 때, 모든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이들의 출마권 박탈이 전술적 타협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전 무슬림 최고지도자인 모하메드 마디 아케프(2004~2009년)도 이를 직접 시인했다. 이런 타협이 이 조직의 강한 유연성을 보여주긴 하지만, 강력한 야당 이미지에 먹칠도 했다.

이같은 타협 전통은 지난 2월 무바라크의 실각 이후, 군대 최고위원회(CSFA)가 정권을 잡았을 때도 지속됐다. 민주주의에 적대적인 구세력 CSFA는 무슬림형제단처럼 혁명 기간에 모호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두 단체의 밀월관계는 지속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은 세 가지 주요 이유로 대립각을 세웠다. 첫째, 지난해 11월 부총리 알리 알살림이 군대에 대한 면책특권 부여 법안을 제출하자 무슬림형제단은 이를 거부했다. 둘째, 이들은 헌법기관의 주요 정치적 역할을 향후 장성들에게 맡기자는 의견을 놓고 서로 맞섰다. 끝으로 거리시위 압박에 이들은 전직 대통령 무바라크를 재판정에 세우자고 요구했지만, CSFA가 유명무실한 재판으로 다수의 CSFA 회원들의 책임을 애매모호하게 처리하려 하면서 대립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장군들에게 당의 주요 역할을 맡겼다가 이후 이들을 토사구팽한 터키의 '정의와 개발당'(AKP)의 방식에 유혹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그럴 깜냥이나 되던가? 무슬림형제단은 '다와'(Daawa·이슬람 포교)에 주력하고, 다와 메시지를 통해 이슬람 칼리프(수장)의 지위 확립을 꾀했다. 지난해 무슬림형제단이 역사상 처음으로 전국 정당인 '자유와 정의당'(PLJ)을 출범시키기로 했다. 이들은 더 이상 안락한 야당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 뿐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 중 일부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취업·교육·보건·부패방지·교통 등의 분야에서 일부 지지자들의 열망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당 창당은 어렵게 됐다. 옛 원칙을 고수하는 일부 진성 및 일반 당원들 간의 갈등과 세대 간 갈등이 조직 내홍으로 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슬림형제단엔 새 시대를 생각할 만한 역량 있는 인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사상가보다는 조직자에 가깝던 무슬림형제단의 창설자 알반나가 사망하고, 1966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이드 쿠트브(무슬림형제단의 주도적인 이론가이자 오사마 빈라덴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가 교수형을 당한 이후, 남은 인물은 <알자지라방송> 강론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늙은 지도자 셰이크 유수프 알카라다위(1926년 출생)뿐이다. 하지만 알카라다위는 몇 달 전부터 무슬림형제단의 독단적인 정책과 권력 독점에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슬림형제단의 또 다른 문제는 조직 내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집트 다원주의다. 조직 구성원들의 소속이 보수적인 구세력과 이보다 개방적인 신세대로 갈리고, 종교적 성향은 수피교와 살라피즘으로 갈린다.(2) 더군다나 조직은 내분을 항상 부정한 터라, 그간 터놓고 논쟁을 벌일 수도 없었다.

내분의 주요 이슈 중 하나는 주권 문제다. 주권은 국민의 것일까, 신의 것일까? 민주주의는 무슨 뜻일까? 무슬림형제단의 젊은 층과 개방파는 민주주의와 시민권을 지지하는 데 비해, 구세대는 '신에게 주권이 있다'는 하키미야(Hakimiyyah)를 지지한다.

신권과 시민권의 대립 양성

무바라크의 실각 이후부터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내홍이 (조직의) 무원칙에 따른 불협화음은 아니지만, 내부 계파의 다양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분파들이 조직의 존재를 위협할 수도 있다. 나세르가 1960년대 극좌에서 극우까지 주요 정치세력을 총규합해 출범시킨 아랍사회주의연합(USA)의 진화를 연상케 한다. 1970년대 사다트 대통령이 개방정책을 약속하자, USA는 여러 당으로 쪼개졌다. 무슬림형제단 사이에서도 최소한 지난 15년 동안 계파 분열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분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지난해 2월 이집트 혁명 때, 무슬림형제단이 공식 정당화한 게 계기가 됐다. 지난 20년간 때를 기다리고 있던 '중도'를 표방하는 아부 엘알라 마디의 알와사트당, 즉 터키정당 AKP의 이집트판이 등장했다. 이 정당은 혹독한 탄압 시대 이후, 1970년대에 정치에 입문한 세대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이 정당은 민주주의·시민권·여권신장 등의 가치를 지지하고 현대성과 호환 가능한 이슬람 개념을 옹호하고 있다. 알와사트는 1928년 무슬림형제단이 출범한 이래 발생한 첫 번째 분열이었다.

지난해 7월, 조직의 최고 지도자 모하메드 바디의 수석 보좌관 모하메드 하비브가 르네상스정당(PR)을 창설했을 때, 두 번째 분열이 발생했다. PR은 마디의 정당과 유사한 정치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하비브는 비록 예순을 넘긴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정신적으로 동시대를 대변하고 있다. 2009년 그는 최고 지도자 자리를 두고 바디와 경쟁했지만, 부정선거 논란에 휩싸인 이 선거에서 패했다. 바디와 하비브가 무슬림형제단에 합류한 시기는 같지만, 이들의 사상이나 정치적 성향은 판이하게 다르다. 바디는 '문명화된 이슬람'을 표방하고, 하비브는 쿠트브이즘(Qotbisme·사이드 쿠트브의 정치적 가르침)을 추종하고 있다.

2012년 대선 때 무슬림형제단의 정책실 직원, 아브델 모나임 아불 포토후가 조직의 허락도 없이 대선에 출마하며 세 번째 분열이 발생했다. 아불 포토후는 무슬림형제단에 남아 있으면서 대선 때 자신을 위해 캠페인을 벌인 조직 내 '비둘기파'(물가보다는 성장을 중시하는 온건파)와 함께 소수의 반발 세력을 대변한다.

아랍의 봄, 당야한 정당 출현의 맹아

따라서 무슬림형제단의 붕괴를 방지하려면 조직 내 파벌과 분당한 조직 간의 공조가 절실히 요구된다. 하지만 이같은 곡예는 현재 이 지도자들에겐 없는 고도의 정치적 기술을 필요로 하고, 아울러 구세력이 지니지 못한 미래에 대한 비전도 필요하다.

살라피스트들이 자진해서 무슬림형제단의 지침을 따르고 이들의 정치적 비전을 지지하고는 있지만,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 원리주의화(Salafisation)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현 지도자를 비롯한 일부 옛 지도자들은 독실한 살라피즘 추종자였다. 혁명 전에 최고 지도자로 당선된 바디가 다와를 강화하겠다고 선언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런 방향 설정으로 인해, 1970년대 이후 살라피스트들은 무슬림형제단의 보호 속에서 정치적 역할을 키웠다. 이들은 무바라크 시절 무슬림형제단의 성공에 공헌했다. 특히 시골 지역선거 때 조직에 크게 공헌했다. 이들은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많은 이슬람 사원들과 같은 자선단체들의 강력한 파워를 무슬림형제단이 (지역 선거 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살라피스트들이 무바라크 시절 정치에 무관심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2011년 혁명 이후, 살라피스트들은 자신들의 정당을 창당하며 무슬림형제단의 지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무슬림형제단과 살라피스트 정당 간에 선택을 못한 채 갈팡질팡하는 자들이 있다. 특히 올해 치를 대선에서 셰이크 하젬 아부 이스마일을 지지하는 계파가 이에 속한다. 아부 이스마일 스스로도 무슬림형제단과 살라피스트에 양다리를 걸친 지도자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마일 추종자들의 무슬림형제단 이탈은 최소한 20%의 그룹 회원 손실을 유발하고, 이 수만큼 무슬림형제단의 농촌 지역 기반도 사라질 것이다.

무슬림형제단 조직원의 지지를 받고 있는 대선 후보 알아와는 또 다른 분당을 부추기고 있다. 요컨대, 대선 때 3명의 후보가 어떤 식으로든 무슬림형제단과 살라피스트들의 표심 향방을 놓고 다툴 공산이 커졌다.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아불 포토후, 살라피스트와 쿠트브주의를 추종하는 자신의 세대를 대변하는 아부 이스마일, 이스마일처럼 구세대를 대변하는 알아와가 대선에서 격돌할 참이다. 그러자 바디는 무슬림형제단과 공조할 수 있는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주요 변화는 좀더 실용적인 노선을 추구하는 살라피스트 그룹에서 생길 공산이 크다. 총선에서 107명의 의석을 차지한 강력한 살라피스트 정당 알누르당이 등장한 데 비해, '자마 이슬라미야'(이슬람 급진단체) 계파인 건설 및 개발 정당을 비롯한 다른 정당들은 지하디즘(성전주의)을 추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누르당 지도자들인 나데르 바카르, 모하메드 누르, 요사리 함마드 등은 무슬림형제단의 젊은 세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같은 PLJ와 알누르당 간 유사성이 양당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실용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는 처지인 두 정당은 지지 기반을 비롯해, 지난 총선 때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신들의 경제·복지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칼리프'(정통 이슬람)와 '팔레스타인 영토 해방', 그리고 이슬람 율법 샤리아(Sharia)의 적용을 위해 자신들에게 표를 준 지지층을 실망시킬 위험이 있다. 이로 인해 두 정당은 총선에서 자신들을 승리로 이끌어준 추진력도 잃을 공산이 크다.

글•알라 알딘 아라파트 Alaa Al-Din Arafat 경제 및 법률 자료 연구소(Cedej) 소장. 저서로 <호스니 무바라크와 이집트 민주주의의 미래>(이집트 카이로·Palgrave·2012)가 있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1) Francois Burgat, ‘무슬림형제단에 대항하는 살라피스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6월호.
(2) 살라피즘(Salafisme)은 하나의 조직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세력이다. 이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와 그의 초기 동료들이 걸은 노선을 따르고 있다. ‘살라프’(Salaf)는 아랍어로 ‘조상’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