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차이나 드림, 기나긴 겨울잠 속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상흔이 깊은 중국의 엘리트층

2023-10-31     데이비드 오운비 l 독일 할레 소재 막스 플랑크 인류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코로나 팬데믹은 어떤 경험으로 남았을까? 3년에 걸친 봉쇄조치, 시진핑 주석이 돌발적으로 단행한 코로나 제로 정책 해제 사태에 대해 어떻게 느꼈을까? 캐나다의 저명한 대학교수이자 중국의 사상 및 사회문제에 정통한 데이비드 오운비가 반체제 학자나, 정권에 포섭된 지식인이 아닌, 일반 개인 연구가들을 찾아 나섰다. 잠시 그의 여정에 동참해보자.

코로나19 팬데믹 사태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중국은 꽤 가까운 나라였다. 몬트리올과 베이징 사이에 북극을 경유하는 직항로가 있어서, 12시간이면 날아갈 수 있는 나라가 중국이었다. 2023년 봄, 중국 정부는 지난 3년간의 봉쇄조치를 전격 해제했다. 하지만 기존의 직항로가 사라졌다. 그 바람에 나는 장장 3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을 감내하며, 몬트리올-토론토-취리히-홍콩 티켓을 예매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 사태의 여파가 미친 곳은 비단 항공 노선만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차이나 드림’을 찾아 나섰다. 2018년 개설한 블로그, ‘차이나 드림을 읽다’에 나온 그 ‘차이나 드림’을 찾아서 말이다. 나는 평소 중국 지식인들의 삶을 따라가고자, 정권 선전에 포섭된 부패한 작가 혹은 정권에 등을 돌린 반체제 작가가 아닌, 일반 지식인 작가들의 글을 다룬다. 그들의 글을 읽고 번역하고, 또 그런 글의 배경을 분석하거나 소개해왔다.(1) 물론 신장 위구르, 티베트, 홍콩, 시진핑 주석 등 일부 금기시되는 주제도 있다. 하지만 이런 민감한 문제들만 제외하고 현안을 다루는 논쟁과 토론의 장이 중국에도 존재한다.

여기서 ‘작가’는, ‘중국적 색채가 짙은 대중적 지식인’을 뜻한다. 대부분은 학문 연구만이 아니라, 대중 대상의 글도 쓰는 대학교수들이다. 그들은 오늘날 중국 전역에 들어선 고속열차나 최신식 공항들과 마찬가지로, 개혁·개방 시대의 순수한 산물로 간주된다. 이런 종류의 공간에서는 지적 다양성과 독재정권이 실로 기묘한 공존을 이룬다. 다원주의와 그 토대인 사상의 자유는 내가 몇 년 동안 교류해온 이들 사상가들이 말하는 ‘차이나 드림’의 일부다.

하지만, 시 주석은 이들과는 정반대 비전을 추구한다. 시 주석은 다원주의에 단호히 반대하며, 집권 초기부터 일종의 사상적 규율을 강제해왔다. 이에 대해 지식인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저항해오고 있다. 우리 블로그에 게재된 글들이 그런 사실을 여실히 입증한다. 지난 3년간 철저한 봉쇄조치와 고립정책을 실시한 중국은 그동안 어떻게 변했을까? 코로나19 사태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은 2018년 12월이었다. 그리고 올해 5월 1일부터 23일까지 베이징에서 한 주, 상하이에서 한 주, 그리고 홍콩에서 며칠을 체류할 기회를 얻었다.

 

‘제로 코로나’ 정책 중단이 남긴 고통스런 상처들  

간만에 만난 중국의 모습은 좋아 보였다. 베이징은 내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청결했다. 우리는 시안 종루 인근, 한 아기자기한 골목길에 자리한 근사한 호텔에 투숙했다. 사방에서 쾌적한 기운이 풍겼다. 상하이도 봉쇄의 시련을 딛고 일상의 리듬을 회복했다. 거리와 식당은 활기에 넘쳤고, 지하철은 매일 족히 1,000만 명은 돼 보이는 승객들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지하철은 어느 역이나 쏟아지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체 어떻게 저 많은 승객들을 실어 나를까?’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지하철은 별 이상 없이 운행됐다.

나는 팬데믹 사태 전에 10년짜리 비자를 받아놓았었다. 그 비자의 유효기간이 남아 있어서 중국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만나려던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초면인 인터뷰이들도 있었는데, 이메일이나 위챗 메신저를 통해 인터뷰 승낙을 얻은 후 만나러 갔다. 중국은 가는 곳마다 곳곳에 카메라가 설치돼 있었다. 특히 상하이 공항은 안면인식기술을 활용해 탑승 수속 절차를 진행한다. 그럼에도 감시당한다는 불쾌감은 들지 않았다. 내가 만난 사람들도 굳이 카메라를 피하려 애쓰지 않았다.

하지만 곧, 나는 중국의 개방적이고 역동적인 얼굴 뒤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을 발견했다. ‘제로 코로나’ 정책 해제의 후유증은 상당히 깊었다. 우리는 지금껏 바이러스를 상대로 벌인 중국의 무자비한 사투의 역사를 고스란히 곁에서 지켜봤다. 첫 해는 매우 혹독했지만 정부의 엄격한 방역조치가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은 한 해였다. 두 번째 해에는, 통제 시스템이 확연히 허점을 드러내는 와중에도 중국 정부가 첫 해와 거의 동일한 모델을 고집했다. 그러다 세 번째 해에 들어서면서, 세계 전역이 오미크론 변이와 ‘공존’을 선언한 가운데 중국은 돌발적인 격리와 엄격한 봉쇄조치에 열을 올렸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모든 봉쇄조치를 해제해버렸다. 

그다음은, 공포영화가 상영됐다. 순식간에 모든 통제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줄줄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이다. 수십만 명, 수백만 명. 어쩌면 그 이상의 사망자가 줄줄이 속출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선언했다. 당시 다른 모든 이들처럼 우리도 ‘제로 코로나’ 정책을 돌발적으로 중단한 중국 정부의 실로 놀라운 무능함과 극단적 냉소주의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이 사건이 중국인의 정신에 미친 영향까지는 파악하지 못했다.
하루는 베이징에서 두 중국인 청년, X와 Y를 만났다. 민간기업에서 기자와 에디터로 일하는 30대 청년들이다. 우리는 생면부지의 사이임에도 인터뷰 구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철저히 준비된 밀실로 인도됐고, 그곳에서 두 청년은 1시간 반에 걸쳐 심경을 털어놓았다. 어떤 이야기였을까? 일종의 참사처럼 체험된, 코로나 방역 해제 사태에 대한 이야기였다. 성난 표정의 Y는 아주 직설적으로 말했다. “선생님은 평소 정부가 선생님을 보호해줄 것이라 생각하시지요? 최소한이라도요.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선생님이 어떤 일을 겪든 정부는 전혀 무관한 상황을요.”

방역 해제 조치가 정치적 결정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중국인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해당 조치가, 2022년 10월 중순 개최된 제20차 당 대회처럼, 공산당의 중요한 행사 이후를 겨냥한 맞춤형 정책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제로 코로나’ 정책이 시 주석의 이미지, 그의 자아(Ego)와 긴밀히 연관돼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난해 시민들이 봉쇄 및 방역 조치에 불만이 높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2022년 11월 말 시위가 그 사실을 여실히 입증한다. 

 

“완전히 균형감각 잃어버려”

그럼에도 중국 정부가 한겨울에 심지어 고령층에 대한 사전 백신 접종 프로그램도, 의약품 재고 확보도 없이, 무작정 돌발적으로 180도 노선을 변경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미크론 변이가 그저 단순 감기를 일으킬 뿐이라고 확언하며, 중국 정부가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선언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신의 할아버지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사망했다는 사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말처럼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죽을 운명이니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청년층의 눈에는 중국 정부를 가장 적절하게 규정하는 가치가 바로 능력이라는(이었다는) 점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청년 세대도 중국 정부가 권위주의(전제주의)적이라는 사실을, 특히 시 주석 정권에서 이런 성향이 더욱 심화됐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권위주의는 비단 어제 오늘의 현실이 아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지만, 여하튼 중국인은 권위주의 현실에 이미 익숙하다. 더욱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의 환골탈태를 이끈 것도 바로 이 권위주의 정권이었다. 덕분에 젊은 세대는 할아버지 세대에서는 절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눈부신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세대는 냉소적인 면과 애국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들은 첨단 기술을 자랑하는 번영한 중국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느낀다. 적어도 2022년 12월 중순까지는 그러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심각한 보건 혼란 사태를 부채질하며 그동안 쟁취한 모든 정권의 정당성을 제 손으로 허물었다. 중국 정부가 이기적인 결정을 내린 지 이미 5개월이 지났지만, Y는 여전히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X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살면서 이런 종류의 사태에 대비한 교육은 전혀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막막해요. 완전히 균형감각을 잃은 것 같습니다.” X는 직장이나 정부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돌연 “시스템의 일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라며 일을 그만둔 이야기를 길게 들려줬다. 흔히 중국어로 ‘납작 엎드리다’라는 표현이 있다. 타격을 피하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머리를 수그리는 행위를 뜻한다. 

X의 친구들 중, 아예 중국을 등진 이들도 많았다고 한다. 중국에 남아있다고 해도, 코로나 사태의 여파로 직장생활은 물론 일상까지 힘들어진 친구들도 많다. 흡사 이라크 전쟁 참전 후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미군 병사들처럼 말이다. 그는 외국인인 내게 이 모든 이야기를 낱낱이 들려주고 싶어했다. 중국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려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거론한다는 것은, 곧 바이러스와의 ‘승리’를 문제시하는 것이고, 결국 온갖 잠재적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는 특히 중소기업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상적인 노동분쟁 상황에 대해서도 들려줬다. 3년 동안 문을 닫았던 기업들이 온갖 경영난에 허우적거리며, 여전히 정부 정책의 후유증으로 깊이 시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청년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새 중국인은 분노와 혼돈, 불행, 환멸, 이 모든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듯 보인다. 분명 중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일 것이다. 나는 문득 X와 그 친구들이 무엇인가를 애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예기치 못한 강렬한 만남에 심경이 복잡해졌다. 

다음날, 한 대학교수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나는 그 교수에게 전날 X와 Y에게 들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내 말을 들은 교수는, 주저 없이 동의를 표했다. 그러면서 개인별 차이는 있겠지만, 현재 중국인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린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내가 만난 모든 이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다. 모두가 ‘제로 코로나’ 정책 중단이 회복하기 힘든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겼다고 확신했다. 그나마 노인 세대는 그럭저럭 이 커다란 상처를 견뎌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나와 교류하는 지식인들 중 상당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 중 한 명은 “우리는 이미 6월 4일을 경험한 적이 있다”라며, 1989년 발생한 천안문 사태를 환기했다. 천안문 사태는 국가의 정당성과 신뢰를 뒤흔든 대대적인 사건이었다. 사실상 당-국가의 역사는 이런 종류의 수많은 위기로 점철돼왔다. 하지만 이런 온갖 풍파에도 여전히 불굴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내가 번역한 글들을 저술한 저자들은 돌발적인 방역 해제 사태보다는, 오히려 시주석이 이끄는 오늘날 중국의 일상적인 현실을 더 괴로워했다 “아무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중국 정부의 키워드 검열 시스템을 지적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토로하는 말이다. 최근에는 심지어 ‘종교’라는 극히 평범한 단어조차 금기어로 지정되는 바람에, 어떤 글에서도 이 단어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중국판 페이스북 혹은 트위터에 해당하는, 위챗이나 웨이보에 게시된 글들 중 상당수도 아무런 해명 없이 삭제되는 일이 빈번했다.

이들 중국 지식인들은 내가 그들과 교류한 지난 10여 년 전부터 줄곧 똑같은 불만(“아무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다.”)을 제기해왔다. 그런 만큼 그들의 말을 차분히 거리를 두고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시 주석이 집권 이전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일지 모른다. 공산당이 “이제는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야 할 때”라는 말을 그들이 공공연히 할 수 있었던 시절을 말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말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중국에는 양서들이 꾸준히 출간되고 있고, 나도 번역거리를 찾는 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나의 지식인 친구들이 그 어느 때보다 중국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더 이상 어떤 글도 읽을 수 없다고 토로하거나, 혹은 이제는 위챗 그룹 간 교류에만 만족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말한다. 나도 ‘중국에서 누가 어떤 글을 쓰는지’에 대해 때로는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누리고 있다는 느낌을 수차례 경험했다. 과거에는 경험한 적이 없었던 일이다. 여전히 ‘바짝 엎드리기’를 거부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은 정부의 통제가 가장 심각한 대학 캠퍼스를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들은 가급적 대학 밖에서 직업 활동을 영위하고자 한다. 가령 강연료를 두둑하게 주는 기업인들의 모임에 나가 개인 강연을 한다. 이는 학문의 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나의 지인 한 명에 따르면, 이들 기업가들은 대개 반미주의에 사로잡혀 있어서, 아주 작은 문제도 전부 미국 탓으로 돌리곤 한다. 모든 문제의 원흉은 트럼프가 주도하고, 바이든이 계승한 중국 봉쇄 정책이라고 말이다. 과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한편 나는 이번에 이미 베스트셀러를 한 권 출간한 데 이어 두 후속작을 구상 중인 한 자유주의 성향의 젊은 작가를 만나봤다. 그는 훨씬 더 낙관적인 비전을 가진 인물로, 그의 연구도 면밀히 살펴볼 가치가 충분해 보였다. 한편 나는 평소 즐겨 참고하는 잡지인 <문화종횡>의 편집진과 어느 오후를 함께 보내기도 했다. 중국 정부에 대한 가벼운 비판이 담긴 글들을 포함해, 나는 그 매거진에서 25~30편의 글을 선별해 번역한 적이 있었다. 사실 중국인이든 서양인이든, 내가 알고 지내는 많은 언론인 친구들은 대개 정치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하지만 이번에 만난 <문화종횡>의 경우는 달랐다. 그런 만큼 나는 <문화종횡>의 언론인들이 당-국가의 노선에 철저히 동조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재의 상황을 아주 여실히 보여주는 최근의 일화가 있다. 한 자유주의 성향의 지인이 내게 그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성격을 지닌 또 다른 자유주의자들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그들 중 일부는 트럼프를 지지하기까지 하는데, 그들은 공산당을 무너뜨릴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대만과의 전쟁에 우호적이라고 했다. 친구는 다소 냉소적인 말투로, 이들 급진주의 세력의 대다수는 부유층이고, 일부는 미국에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내게는 그런 정도의 재산이 없다네. 그래서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아. 가급적 오래 중국에서 살고 싶다네. 적어도 감옥에 갇히기 전까지 말일세.” 

이제, 우리의 차이나 드림은 기나긴 겨울잠에 들어간 것일까.

 

 

글·데이비드 오운비 David Ownby
독일 할레 소재 막스 플랑크 인류학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지식인의 삶을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중국의 비상과 중국의 대중적 지식인(L'Essor de la Chine et les intellectuels publics chinois)』(Editions du Collège de France, Paris, 2023)이 
있다.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David Ownby, ‘Cette Chine qui pense en marge des discours officiels 표리부동한 중국’,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