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원이 브렉시트를 지지했던 시절
노동당원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노동당 지도부 해럴드 윌슨은 영국의 유럽공동체가입을 비준시켰다. 이로써 정치적 재편의 길을 열었고, 2020년 1월에는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귀결됐다.
다시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1973년은 약속과 함께 시작됐다. 언론은 1월 1일 영국의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거의 만장일치로 환영했다. <옵저버>는 ‘유럽 가이드’를 발행해 EEC 가입과 관련된 현안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더 타임스>는 이를 ‘화려한 모험’이라고 묘사했다. <데일리 미러>는 “영국인들만으로 충분하고, 신이 외국인들과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관습으로부터 영국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해협을 만들었다는 믿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오늘 그 믿음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1) 인플레이션이 9.2%에 달하고 1인당 부의 창출이 세계 11위를 차지하는 등 상황이 계속 악화됐기 때문이다.(2) 영국이 유럽에 기대하는 경제적 구원은 없을 것이다. 유럽으로의 통합과 브렉시트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 견고한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3)
ECC 가입으로 시작된 정치의 재구성
반면에 정치적 재구성은 EEC 가입과 함께 시작됐다. EEC는 오랫동안 좌파의 비판적 세력에 부유한 국가의 자본주의적 집단으로 인식됐고, 우파 주권주의자들에게 프랑스-독일의 침입으로 간주되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후 몇 달, 또 몇 년 동안 유럽 문제는 보수당과 노동당 진영을 재편하고 새로운 정당의 출현에 기여했으며 대중매체에서 끝없는 논란의 불을 지폈다.
1957년 로마 조약이 체결됐을 때, 경계심이 많은 영국인은 이웃한 유럽 국가들에 단순한 연합을 제안했었다. EEC는 이를 거부했는데, 처음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둔 해럴드 맥밀런 보수당 정부(1957~1963)는 긴밀한 유대관계의 이점에 더욱 주목했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에드워드 히스가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산 필수품에 대한 특혜 관세와 새로운 공동 농업정책에 관해 2년에 걸친 어려운 협상 끝에,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1963년 거부권을 행사했다. 프랑스 대통령은 영국이 미국의 ‘트로이 목마’가 아닐까 경계했다. 1967년, 그는 이번에는 해럴드 윌슨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가 새롭게 접수한 가입 신청을 거부했다.
1970년 영국 보수당이 재집권했을 때, 프랑스의 대통령은 영국과 대화를 재개할 의향이 있는 조르주 퐁피두였다. 또한, 영국의 수장은 친유럽주의자인 에드워드 히스였다. 영국의 히스 총리는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도 없었고,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에 대한 애착도 없었다. 영국 토리당은 ‘유럽의 정당’을 자처했고 노동당은 전반적으로 ‘공동 시장’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유럽 문제는 좌우 분열과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71년 10월 28일 의회에서 EU 가입 원칙에 대한 표결이 실시되면서 각 진영에서 처음으로 불협화음이 드러났고, 유럽 예산 중 영국의 분담금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다.
1974년 선거에서 영국 노동당이 가까스로 이겼다. 그들은 EEC 가입조건을 근본적으로 재협상하고, 집권 후 1년 이내에 협상 결과 비준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해럴드 윌슨 총리는 일부의 동의만 얻어냈다. 1975년 4월, 노동당 의원 145명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고 하원에 제출된 협의안 비준을 거부했고, 의원 138명만 협의안에 동의했다. 영국 정부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지원 덕분에 체면을 차릴 수 있었다.
안건은 ‘영국이 유럽공동체에 잔류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였다. 국민투표는 1975년 6월 5일에 실시됐다. 노동당, 가장 극우파의 카리스마 넘치고 반(反)이민을 주장한 인물인 에녹 파월 전 하원의원과 가까운 보수당 일부, 다수의 노동조합, 스코틀랜드 및 웨일스 민족주의 정당 등이 참여한 ‘국민투표캠페인(National Referendum Campaign, NRC)’은 보수당, 자유당, 노동당의 우파 세력 대부분을 결집한 ‘유럽 속의 영국(Britain in Europe)’에 맞서 반대를 지지했다. 재계와 언론의 지지 덕분에 ‘찬성’파가 67%라는 큰 득표율로 승리했다.
유럽 잔류라는 선택은 경제 상황 악화와 맞물려 처음으로 진보 진영 내 힘의 균형에 변화를 가져왔다. 당장 4월부터 데니스 힐리 재무부 장관은 긴축 재정을 실시해야 했다. 그리고 6월 10일, 총리는 개입주의 성향이 강한 앤서니 벤 산업부 장관을 보다 신중한 에릭 발리로 교체한다고 발표했다. 이 개편은 벤이 열렬히 지지했던 ‘반대’파가 패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이뤄졌다.(4) 노동당은 고용주에게 계획경제를 강제하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노조에 적정한 임금안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하는 등 경제에 전환점을 마련했다.(5)
1976년 윌슨이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자 후임으로 제임스 캘러헌이 외무장관이 됐는데, 그는 전년도에 EEC 가입조건을 최소한으로 재협상한 바 있다. 새 총리는 정부 내 ‘반대’ 지지자들을 배제하고 긴축정책을 지속적으로 강행했다. 심지어 1976년부터는 영국 정부가 도움을 청한 국제통화기금(IMF)의 요청에 따라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야 했다. 좌파 정당과는 확실하게 결별하게 됐다.
Since 1979: 마거릿 대처의 승리 이후
3년 후인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영국 보수당이 승리했다. 신임 총리는 광대한 시장과 자유주의의 약속으로 보이는 유럽을 받아들였다. 대처는 1975년 2월 당 대표가 된 후 전후 합의, 복지 국가, 케인스주의 정책과 결별할 것을 약속하며 ‘유럽을 위한 위대한 찬성’을 촉구했다. 대처는 1983년 재선 이후까지 이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제임스 캘러헌을 이기면서 진보 진영을 두 번째로 재구성하는 또 다른 정치적 격변을 일으켰다.
1980년 가을 블랙풀 전당대회에서 EEC 탈퇴 동의안이 채택되고, 이 안을 지지했던 마이클 풋이 같은 해 11월 당 대표가 되면서 좌파는 노동당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또한 노동당 우파의 주요 인사 3명인 데이비드 오웬, 윌리엄 로저스, 셜리 윌리엄스는 EEC 탈퇴에 반대하는 공개서한을 <가디언>에 발표했다. 이들은 노동당 출신 전 재무장관인 로이 젠킨스와 함께 ‘4인조’를 결성해 1981년 1월 25일 사회민주당(SDP) 창당을 공식화하는 ‘라임하우스 선언’에 서명했다. 보수당 의원 1명을 포함한 하원의원 14명이 유럽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에 동조하며 이 당에 합류했다.
그들은 1983년 6월 선거에 후보를 출마시켜서 노동당의 완패에 기여했다. 그러나 노동당 패배는 1982년 마거릿 대처가 아르헨티나와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얻은 명성이 큰 역할을 했다. 300만 명 이상의 실업자가 발생하고 실업률이 다른 EEC 회원국 평균의 두 배에 달하는 등 유독 비참한 경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 군사 개입의 성공은 일방적인 핵 군축을 지지하고 트로츠키주의 무장 세력에 가까운 마이클 풋에 비해 대처가 결정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줬다. 1983년 10월 브라이튼 전당대회에서 닐 키녹이 풋의 뒤를 이어 당수가 됐다. 새로운 지도부 아래 노동당은 점차 유럽 차원의 대의를 위해 결집했다.
우파는 점차 유럽 차원의 대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수사학적으로만 보였던 이런 거리 두기는 이후 10년 동안 더욱 뚜렷해졌고 보수당 진영 내 힘의 균형을 뒤흔들었다. 마거릿 대처는 첫 임기 동안 노동당 전임자인 윌슨과 캘러헌의 전철을 밟았는데, 그들은 온건한 유럽주의자였고 영국의 유럽 예산 분담금 감축에 큰 관심을 가졌다. 1984년 유럽 예산에 대한 영국의 분담금을 60% 삭감하는 데에 성공한 대처는 1986년 단일유럽의정서에 서명해 유럽단일시장 실현을 가능하게 했고, 1990년 10월 8일 영국의 파운드 스털링이 유럽통화시스템(EMS)에 가입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았다.(6)
그러나 대처는 마지막 임기 때 유럽 프로젝트에 대해 급진적 비판을 펼쳤다. 당시 자크 들로르가 의장을 맡던 유럽위원회가 추진한 유럽 사회 모델의 원칙은 영국 노동조합의 지지를 얻었지만, 대처는 유명한 1988년 브뤼헤 연설에서 훨씬 더 자유롭고 정부 간 관계 중심적인 유럽을 찬미하며 연방주의와 유럽공동체의 기술관료주의적 일탈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연설은 친유럽파인 제프리 하우와 마이클 헤슬타인을 비롯한 정부 핵심 인사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내부 불화는 1990년 11월 대처의 실각으로 이어졌다. 재무장관 존 메이저가 대처의 후임이 됐다. 1992년 2월 7일 마스트리흐트에서 유럽연합에 관한 조약에 서명한 인물도 존 메이저다. 그러나 대처의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조약이 의회에서 비준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당시 영국의 일부에서는 유럽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대중언론, 특히 루퍼트 머독의 신문사와 수십 개의 단체가 결집했다. 그중 일부는 프랑스계 영국인 억만장자 제임스 골드스미스 등 사업가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영국독립당(UKIP)이 창당됐다. 이 당은 유럽의회에 후보를 출마시켰고, 20년 후 유럽의회에서 첫 번째 영국 정당이 됐다.
국민투표의 결과는?
앤서니 블레어(1997~2008년)와 고든 브라운(2008~2010년)의 노동당은 비록 단일 통화를 채택하지 않고 별다른 열의도 없이 유럽연합에 동조했지만,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내건 원칙은 우파 내에서 꾸준히 성장하는 운동의 출발점이 됐다.(7) 2010년 보수당이 정권을 되찾았을 때, 데이비드 캐머런 신임 총리는 전례 없는 유럽연합 반대 시위에 직면하게 됐다. 그래서 그는 2015년 5월 재선에 성공하면 영국의 유럽연합 잔류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를 약속해야 했다.
‘잔류파’와 ‘탈퇴파’로 양극화되고 보수당이 노동당과의 관계보다 더 적대적인 두 진영으로 내부가 나뉘는 등 좌우 분열이 사라진 거 아니냐는 엉뚱한 현실 인식을 제공한 선거운동 이후, 이 국민투표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8) 1973년, 유럽은 국가적 논쟁의 중심에 섰다. 유럽은 항상 영국 정당을 심하게 분열시켰던 두 가지 현안, 즉 세계에서의 영국의 위치와 경제 및 사회에서의 정부의 역할과 연관이 있었기에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됐다. 그 과정에서 유럽은 창당, 정치 참여자 간의 경쟁, 내부 불화의 요인이 됐다.
브렉시트 이후 노동당 좌파는 혼란에 빠졌다. 유럽연합 탈퇴론자로 알려진 급진적 지도자 제러미 코빈 때문에 난감해진 도시의 청년활동가들은 유럽연합 ‘탈퇴’ 투표를 외국인 혐오로 해석한 반면, 2019년 보리스 존슨의 연설에 마음을 움직이기 전까지 노동당에 충성했던 영국 북부 유권자들은 ‘탈퇴’를 지지했다.(9) 보수당의 경우, 이 국민투표를 거치면서 친유럽 성향으로 남아있던 의원들이 퇴출되고 대의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새로운 의원들이 선출됐다. 이제 브렉시트는 어느 정도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았고, 이 결정을 환영하든 이 상황에 체념하든 2023년 영국의 정치 논쟁에서 유럽은 더 이상 현안이 되지 않는다.(10)
그러나 오늘날 이민 문제나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의 미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체성에 관한 분란은 지속적인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
글·아녜스 알렉산드르 콜리에 Agnès Alexandre-Collier
부르고뉴대학교 현대영국문명학과 교수
번역·서희정
번역위원
(1) Dominic Sandbrook, 『State of Emergency. The Way We Were: Britain, 1970~1974』, Penguin, London, 2010.
(2) Jim Tomlinson, 『The Politics of Decline. Understanding Post-War Britain』, Longman, Harlow, 2000.
(3) Alexander Zevin, ‘Malgré le Brexit, introuvable souveraineté britannique 브렉시트에도 불구하고 행방불명인 영국의 주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2월호.
(4) Anthony Benn, ‘Quand la gauche travailliste dénonçait Bruxelles 좌파 노동당원이 유럽연합을 비난할 때’, <마니에르 드 부아르>, n°153, ‘Royaume-Uni, de l’Empire au Brexit 영국, 제국에서 브렉시트까지’, 2017년 6~7월호.
(5) J. Denis Derbyshire & Ian Derbyshire, 『Politics in Britain. From Callaghan to Thatcher』, Chambers, Edinburgh, 1990.
(6) ‘Euroscepticism under Margaret Thatcher and David Cameron: From Theory to Practice’, L’Observatoire de la société britannique, n°17, 2015, https://journals.openedition.org/osb/
(7) 『La Grande-Bretagne eurosceptique? L’Europe dans le débat politique britannique 유럽에 회의적인 영국? 영국 정계의 논란의 대상이 된 유럽』, Editions du Temps, Nantes, 2002.
(8) 브렉시트 이후 양극화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Pauline Schnapper & Emmanuel Avril (2019), 『Où va le Royaume-Uni? Le Brexit et après 영국은 어디로 가는가? 브렉시트와 그 이후』, Odile Jacob, Paris, 2019 / Maria Sobolewska et Robert Ford, 『Brexitland Identity, Diversity and the Reshaping of British Politic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9) Chris Bickerton, ‘Pourquoi le Labour a perdu 노동당은 왜 실각했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0년 2월호.
(10) Marc Lenormand, ‘L’été indien du mécontentement britannique 영국의 불만스러운 인디언 섬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