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 당원에게 보내는 편지
Corée | 특집 | 대선을 향하여
저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홍세화와 홍세화식 정치에 대한 칸트적 비판'이라는 다소 기이한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홍세화에 대한 칸트적 비판이라는 말도 그렇지만, 이미 등록이 취소돼버린 진보신당에 대해 무슨 관심이 아직도 남아 있기에 이런 글을 청탁했는지 의아했으나, 묻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이 청탁이 진보신당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아직 끝나지 않은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에 응답하는 것이 당의 강령을 기초하고 홍세화 대표 체제를 수립하는 데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당원으로서 저의 할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책임이 있다는 것은 제3자로서 비평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현재의 진보신당의 상황에 대해 중립적 비판을 할 자격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당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훈수를 늘어놓는 비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형성하고 책임을 져야 할 한 사람의 주체적 당원으로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동료 당원들에게 공개적인 편지 형식으로 말을 건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진보신당은 지난 4·11 총선 결과로 정당 등록 취소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습니다. 법적으로 보면 지금 진보신당은 사망 선고를 받은 정당입니다. 설령 재창당하더라도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으므로, 이제 진보신당이란 이름의 당은 공식적으로는 소멸한 정당입니다. 그리고 진보신당 당원으로서 우리 역시 모두 존재를 부정당한 유령과도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아마 진보신당에 조금이나마 애정을 가진 분들은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민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이 등록 취소되었으니 우리가 할 일은 떠나거나 그만두는 일밖에 없습니다. 통합진보당도 있고 민주통합당도 있고 새누리당도 있으니, 여전히 정치에 관심 있는 당원이라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싫다면, 이제 정당의 당원으로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도 가능한 선택입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당원으로 살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떠날 곳도 없고 그만둘 생각도 없다면, 까닭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당원이 당에 남는다 하더라도 이는 습관이나 관성에서 비롯된 맹목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 그런 당원들이 모인 정당이 무슨 의미 있는 일을 하겠습니까? 관성과 맹목에 기초한 정당 활동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남는 까닭이 있어야 하며, 우리가 재창당하겠다는 정당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까닭은 한두 사람의 의견이 아니라 모든 당원이 원칙적으로 자각하고 공유하는 뜻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 뜻을 묻고 찾는 것이야말로 떠날 수 없는 자들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입니다. 지난 총선에 대한 비판이나 평가도 좋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토론도 좋으나, 이런 것들이 진보신당이 이름을 바꾸어 계속 존속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이루어지는 토론이라면, 이는 자기 처지를 망각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당의 존재 이유를 말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그 이유가 어떤 경우에도 정당 자신 속에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당이 존재하는 까닭은 오직 세상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떤 정당이 자기 존재 이유를 자기 속에서 찾는다면, 이는 세상을 위한 정당이 아니라 정당을 위한 정당을 지향한다는 것으로서, 세상과 민중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가 권력을 얻기 위해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나 품을 수 있는 욕망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흩어지지 않고 새로운 진보정당을 다시 창당하겠다면 그래야 할 이유는 오직 세상이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어떤 의미에서 세상이 우리를 필요로 한단 말입니까? 통합진보당이나 민주통합당이 아니고 굳이 또 다른 야당이 있어야 할 까닭이 무엇입니까? 물론 저도 이 물음에 대해 그 정당들은 더 이상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희망이 아닌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동적으로 우리가 희망이라는 것은 증명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재창당하려는 뜻이 있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지를 먼저 명확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재창당하는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정당의 수명을 운동의 관성으로 이어가는 것일 뿐, 우리를 위해서도 세상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남들 다 떠나도 떠날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제가 이렇게 모질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지난번 처음 진보신당을 창당할 때, 우리는 한국 사회에 왜 새로운 진보정당이 필요한지 치열하게 묻지 않고 당을 창당하고 선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선거에서 참패하고 한 해가 지난 뒤에야 당은 강령을 제정하는 절차를 밟았습니다. 물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으나 그것은 우리 사정이요, 객관적으로 따지면 저는 진보신당 실패의 근본 원인은 바로 이 순서의 전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함석헌은 '혁명'에 대해 말할 때마다 세 가지 필요조건을 채울 것을 요구했는데, 첫째가 철학과 이념이요, 둘째가 그것에 공감하여 모인 사람들의 조직이며, 셋째가 그들을 이끌 지도자입니다. 동학혁명은 우리 역사에서 이런 필요조건이 충족된 전범이라 하겠는데, 최제우와 최시형이 동학을 창시하고 퍼트리자, 그에 호응하여 전국 각지에서 동학교도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 가운데서 전봉준이라는 영웅이 나타나 새로운 이념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한 혁명적 실천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재건에 앞서 진정한 성찰을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순서입니다. 정당은 어떤 일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서로 무관한 사람들이 모여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같이 할 일과 뜻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문서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정당의 강령은 한 정당의 건설을 위해 필수적인 최소한의 문서입니다. 그런데 그 최소한의 문서조차 없이 창당을 했으니, 이는 심하게 말하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창당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게 뜻을 소홀히 하고 시작했으므로, 한 해 뒤 강령이 제정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한낱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랬으니 진보신당이라는 배가 지금처럼 좌초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회당 동지들과 새 집을 지어야 할 지금 이런 일을 다시 반복해야겠습니까?
행여, 이념이나 철학을 따질 것 없이 이번에도 진보 진영에 남은 세력을 규합하여 막연하게 좌파정당을 건설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박정희를 보고 배우기 바랍니다. 그가 1961년 5월 쿠데타를 감행한 뒤 제일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책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1962년 2월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이란 책을 펴낸 것도 모자라, 1963년에는 다시 <국가와 혁명과 나>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저는 박정희 자신이 책을 썼는지 아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하나의 정당을 창당하고 정치에 뛰어들기 전에 먼저 사람들에게 자기의 뜻을 알릴 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책은 지금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인, 보수우익의 교과서입니다. 군인이던 박정희도 자기의 뜻을 책으로 먼저 쓰고 정당을 창당했는데, 학벌이나 공부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 땅의 좌파 인사들이 새로운 정당을 만들면서 몇 장짜리 강령조차 외상으로 시작했으니, 그러고도 우리가 성공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다시 새로운 정당을 만들겠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뜻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다른 모든 일은 이 일이 끝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며,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일이 무익할 뿐입니다. 뜻이란 마음에 품은 공허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일과 실천으로 표현될 수 있는 새로운 현실에 대한 객관적 전망과 주관적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우리가 세력을 규합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각 분야에서 세상이 객관적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하며 또 그렇게 바꾸기 위해 우리는 주체로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를 분명히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고민이 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노동자 당원이라면, 비정규직이 넘쳐나는 시대에 노동자를 자본의 예속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기업의 지배구조가 어떻게 변해야 하며,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또 어떤 방식으로 싸워야 할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내가 농민 당원이라면 도시와 자본주의 문명의 식민지로 전락한 농촌을 살리고 농업을 다시 모든 생산 활동의 모범과 근본으로 만들기 위해 농촌사회와 농업경제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며, 이를 위해 농민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교육자 당원이라면 청소년 자살과 학교폭력의 생지옥에서 학생들을 구해내기 위해 학교와 교육제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며, 학생과 교육자들은 또 무엇을 해야 할지 물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내가 있는 현장을 바꾸기 위해 현장의 동료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국가기구와 의회정치의 매개를 통해 촉진하고 실현하기 원하는 정당의 당원이라면, 우리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제시된 다양한 대안을 하나의 전체상 속에서 통일하여 새로운 나라의 이념으로 제시하고 그런 나라를 향해 같이 가자고 동료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말하기는 쉬우나 실제로는 엄청난 정신의 노동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오직 이런 정신의 주춧돌을 먼저 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정당을 건설할 수 있습니다.
진보의 언어, 민중과 멀어지면 안돼
이 과제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저는 과연 우리가 재창당할 역량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인지 두렵고 염려스럽기까지 합니다. 마음의 뜻은 언어를 통해 표현되어야 하는데,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의 말투는 민중의 언어와 너무나 유리되어 있기에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염려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당에 남아 있는 까닭은 자주 말씀드렸듯이 제가 여러분을 믿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믿는다는 말입니까? 제가 곳곳에서 만났던 당원 여러분의 가난한 마음과 깊은 슬픔과 간절한 선의와 건강한 양식을 저는 믿습니다. 이 믿음이 의심스러운 분이 있다면, 홍세화 대표를 보기 바랍니다. 그분이 우리의 대표인 까닭은 그분이 우리를 지도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이 우리의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고, 우리가 그분입니다. 그분의 삶과 말과 발길은 우리 자신의 가난과 슬픔, 선의와 양식의 모범이요 거울입니다. 우리가 진보와 보수 정당을 막론하고 익숙하게 보아온 탐욕과 추태와 몰상식은 그 거울 앞에선 설 자리가 없으니, 그분은 잡귀를 물리치는 부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속 진리의 빛이 꺼지지 않고 빛나는 한 우리가 절망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나 같이 갑시다. 여러분은 저의 희망입니다.
글•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