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인의 가우초
페론은 찬양하고 보르헤스는 비판했던
가우초 마르틴 피에로는 호세 에르난데스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로, 한 세기 반이 넘도록 아르헨티나인들의 상상력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 왔다. 가우초는 아르헨티나의 토착민이자 영웅이다. 후안 도밍고 전 페론 대통령은 자신이 가우초의 후예라고 주장했고, 교황 프란치스코 1세도 자주 인용하는 이른바 ‘아르헨티나가 낳은 자식’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비롯한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독일이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고국 베를린에 돌아온 선수들은 환영식에 모인 관중들 앞에서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조롱했다. 이들은 구부정한 자세로 무대에 올라 한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가우초는 이렇게 걷지요. 이렇게요.” 그러고는 어깨를 활짝 펴고는 의기양양하게 같은 곡조를 되풀이했다. “독일인은 이렇게 걷지요. 이렇게요.” 관중들은 환호와 함성을 쏟아내며 다 함께 노래를 불렀다.(1)
2014년 7월, 월드컵 결승전 이튿날에 일어난 일이다. 분노의 물결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휩쓸었다. 가우초를 감히 조롱했다고 여긴 수많은 팬이 모욕감을 씻어내기 위해 거리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페론주의자 언론인 빅토르 우고 모랄레스처럼 이른바 빛의 속도로 고드윈의 법칙(Godwin’s law, 온라인 토론이 길어지면 나치나 히틀러에 비유하는 말이 나올 확률이 높아진다는 법칙으로 미국의 변호사 마이크 고드윈이 1990년에 언급했다-역주)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독일 선수들은 ‘더러운 나치’다!” 대체 가우초가 어떤 인물이길래, 아르헨티나인들이 그 명예를 지키려고 그토록 애쓰는 것일까?
독일 선수들은 가우초를 ‘아르헨티나인’과 동의어로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사실 가우초는 라플라타강 유역에서 가축을 키우는 고독한 반(半)유목민으로, 남미의 카우보이라고도 할 수 있다. 들판과 소, 낭송시, 술, 난투와 관련된 이 지역의 전통적인 인물상이기도 하다. 가우초는 2022년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호세 에르난데스(1834~1886)의 서사시 『마르틴 피에로』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2) 이 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사랑받는다.
아르헨티나의 국경일, ‘가우초의 날’
어떤 정치 성향을 보였든, 시골 사람이든, 도시인이든 마르틴 피에로의 모습은 모든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가우초는 정치 연설에 흔히 언급되고, 문학이나 영화로 재해석되며,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권위가 높은 영화상을 일컫는 이름이기도 하다.
12월 6일은 ‘가우초의 날(Día nacional del Gaucho)’로 아르헨티나의 국경일로 기념할 정도다.
에르난데스의 시 『마르틴 피에로』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난롯가 옆에서 낭송되면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이 시는 아르헨티나 영토 정복에 동원돼 군대에 강제 징집된 어느 불행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당시에 정부는 원주민으로 알려진 인디오(인디언)들을 박해하는 군사 작전을 폈다. 피에로는 상관의 부당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국가에 대한 사명마저 희미해져 결국 부대를 탈영하고 만다. 그리고 가족한테서도 버림받은 그는 ‘인디오들’ 사이에서 살기로 한다. 당시의 시대적 맥락을 생각하면, 무척 정치적인 내용으로 읽힌다.
당시는 아르헨티나는 중앙집권론자들과 연방주의자들이 서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중앙집권론자들은 정치권력을 중앙집권화하고 자유무역을 강행하고자 했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귀족들이었고, 연방주의자들은 보호무역주의에 편승하는 토호 체제적 보수주의자들이었다. 연방주의자들은 『마르틴 피에로』를 지침서로 삼았지만, 중앙집권론자들은 해당 작품을 문명과 야만 간의 대립으로 해석했다. 중앙집권론자들에게 지침서가 된 책은 『파쿤도 혹은 아르헨티나 팜파스의 문명과 야만』이다(이하 『파쿤도』).(3) 아르헨티나 17대 대통령을 역임한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가 집필한 책이다. 1845년에 출판된 이 책은 첫 문장 “On ne tue point les idées(아무도 사상을 죽일 수는 없다)”라는 프랑스어 문장으로 시작하며, 유럽을 문명으로 묘사한다.
역사학자 에세키엘 아다모프스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중앙집권론자들의 담론은 식민지에 대한 유럽인의 담론에서 영감을 받았다. 사르미엔토는 저서 『파쿤도』에서 아르헨티나 역사를 이와 같은 프리즘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러한 생각에는 상호 대립하는 두 국가가 있다는 전제가 있다. 그중 하나는 도시, 백인, 유럽인,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국가며, 다른 하나는 농촌, 크리오요(Criollo, 서인도제도를 포함한 남북아메리카의 에스파냐 식민지에서 태어난 백인. 본래는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럽인의 자손을 일컫는 말. 크리올이라고도 함), 평민, 비백인의 국가다.”(4)
가우초는 스페인 정착민, 원주민,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크리오요다. 최초로 이 시를 프랑스어로 완역한 아르헨티나 문학 전문가 폴 베르데보예(1912~2001)는 크리오요를 ‘국가의 자식’이라고 번역했다. 가우초들이 아르헨티나의 문명화 사업에 동원돼 겪어야 했던 애환을 이 시골 출신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고, 동시대인들의 관심을 환기하고자 했던 작가의 정신을 충실히 반영한 셈이다.
에르난데스는 상권 『마르틴 피에로』가 발표된 지 7년 후, 하권 『마르틴 피에로의 귀환』을 출간했다. 하권의 시는 전작에 비해 더 길고 모호하며, 가우초의 반항적인 성격도 한층 수그러든 것으로 묘사된다. 가우초는 권력과 화해했다. 이러한 반전은 작가가 겪은 정치적 변화를 반영한다. 『마르틴 피에로의 귀환』이 출간된 1879년에 에르난데스는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던 단방당(Partido Unitario)의 의회 의원이 됐다.
유순해진 가우초는 도시인들에게 융화됐다. 반면 인디오들은 야만적으로 그려졌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1878년 원주민을 말살하는 군사작전 ‘사막 정벌’에 착수했다. 작가 카를로스 가메로는 이렇게 평가한다. “상권과 하권 사이의 이념적 격차로 인해 에르난데스는 서로 다른 정치적 서사를 조화시키고 사르미엔토가 제시한 이분법적 도식을 뛰어넘는 업적을 이뤘다. 그러나 상하권에서 일관되게 드러난 생각이 있다. 바로 인디오를 통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5)
투쟁의 상징, 마르틴 피에로
이후 마르틴 피에로는 더 극심한 당파적 논쟁에 끌려들어 간다. 1904년에 무정부주의 신문 <라 프로테스타(La Protesta)>는 가장 유명한 이 가우초의 이름을 따서 문화지 부록을 만들었다. 어제의 소외된 사람들은 동시대 사람들을 이끄는 기수다. 1904년 3월 3일자 부록지 <마르틴 피에로>에 실린 글에 따르면 “마르틴 피에로는 한 시대를 거쳐 간 인간 삶의 상징이자 관습, 제도, 신념, 악덕과 미덕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자신을 억압하는 사회의 상류층에 맞서 투쟁하는 계급의 외침이며, 불의에 대한 항거이기도 하다.”
1870년에 아르헨티나 인구는 188만 명에 불과했으나, ‘대이민의 시대’로 불리는 1860~1930년 사이에 600만 명이 넘는 유럽 이민자들이 몰려들면서 아르헨티나는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20세기 초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부분 이런 유럽 정착민들의 후손으로, 크리오요로 인정받고자 했다. 아르헨티나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이 작품은 유럽 정착민 사회에도 비슷한 영향을 미쳤다. 정착민들은 선의의 표시에서 이 시를 자신들 모국어로 옮겼다. 아르헨티나는 1902년에 거주법을 만들어 사회·정치 질서의 급격한 변동을 선동하는 ‘외국인’을 추방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아르헨티나 국민이 된다는 것은 거주법에 더 이상 저촉되지 않고 거주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반면, 10년 후 보수적 민족주의 작가 레오폴도 루고네스는 『마르틴 피에로』를 ‘대이민’의 물결과 이민자들이 몰고 온 세계주의 사상, 사회 보장 제도, 무정부주의, 페미니즘과 사회 전복적 요소를 막아줄 정체성의 장벽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1913년 오데온 극장에서 열린 여러 강연에서 루고네스는 지배계급을 향해 그링고(Gringo, 외국인)가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밀려드는 상황에서 크리오요가 아르헨티나 정체성을 공고히 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르난데스의 동시대 작가 리카르도 로하스의 비유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마르틴 피에로』는 프랑스로 치면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중세 무훈 시의 걸작-역주)요, 스페인으로 치면 『시드의 노래(El Cantar de Mio Cid)』(스페인의 영웅 엘시드의 무용 찬가-역주)다. 이렇게 해서 과거에 민족 동질화에 대한 저항으로 읽히던 가우초는 이방인을 위협하는 민족 순수성의 화신이 된다.
페론주의의 상징이 되다
그리하여 가우초는 이념적 스펙트럼 극단을 넘나들며 여러 정치적 구호에 활용된다. 1939년에 당시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였던 민족주의가 마누엘 프레스코는 호세 에르난데스의 탄생일 11월 10일을 국경일로 지정하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표결에 부쳐 지역 의회의 만장일치를 얻었다. 이후 후안 도밍고 페론의 대통령 재임 시기인 1949년 11월 9일에 법령이 제정돼 에르난데스의 탄생일이 국경일로 공식 지정됐으며, 그의 시는 “아르헨티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1993년에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12월 6일을 ‘가우초의 날’로 지정해 국경일로 삼았다. 공기업을 모조리 사유화한 메넴 대통령은 자신을 크리올로 영웅이라고 칭했다.
양면적이고 파악하기 어려운 마르틴 피에로는 이념적 교차점이자 긴장의 결정체다. 국가 정치에서 마르틴 피에로 중요성이 더할 나위 없이 커진 것은 가장 막강하고 정의하기 어려운 정치적 흐름인 페론주의의 상징이 되면서부터다. 페론주의가 최초로 만들어낸 가장 인상적인 가우초 신화로는 1944년 소작농 법(대지주로부터 농장 노동자를 해방한 법) 도입을 꼽는다. 당시 군사 정부의 노동기획부 장관이었던 페론 장군이 가우초라는 인물을 언급한 것이다. 소작농 지위는 독재정권(1976~1983년) 시절에 폐지됐다가 2011년에 페론주의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키르치네르가 다시 도입했다.
『마르틴 피에로의 말처럼(Como dijo Martín Fierro)』의 저자이자 역사학자인 마티아스 에밀리아노 카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마르틴 피에로는 애초부터 페론주의의 일부였다. 20세기 동안 마르틴 피에로를 ‘유용’한 사례는 총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 후안 도밍고 페론은 시 구절 전체를 인용하고 심지어 시구를 만들기도 했다. 페론 정부는 1946~1955년에 문화 행사를 조직해 이 작품을 선전하도록 독려했으며, 같은 시기에 수십 권의 책을 출판해 가우초와 관련된 상상력을 함양하도록 했다. 군사 쿠데타로 페론을 축출한 이후 독재정권은 마르틴 피에로에서 페론주의의 색을 지우려고 시도했지만 헛수고였다.
페론은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르헨티나의 자식’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신화를 구축했던 것이다. 페론은 군사학교를 졸업한 1913년에 아버지로부터 에르난데스의 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해는 루고네스가 가우초 시를 아르헨티나 민족 문학의 정전으로 격상시킨 해이기도 하다. 1946년 첫 대선에서 페론이 승리를 거뒀다. 당시 페론은 북미 제국주의의 위협에 맞서 국익 수호를 강조했고 미국 대사를 겨냥해 “브래든인가 페론인가”라는 문구가 적고 적힌 포스터가 부에노스아이레스 곳곳에 나붙었다.
이후 페론주의는 집권 여당이든 야당이든,, 가우초 신화와의 연결고리를 절대로 내려놓지 않았다. 1978년 아르헨티나 축구 월드컵에서 독재정권은 작은 가우초를 뜻하는 ‘가우치토’를 마스코트로 삼았다. 군대에 맞섰던 페론주의 게릴라 조직 몬토네로스는 독립 전쟁 시절에 가우초로 구성된 군사 조직 몬토네라스의 이름을 땄고, 월드컵 기간에는 가우초를 억압받는 사람들의 영웅으로 내세웠다.
최근에는 아르헨티나 태생의 또 다른 국가 원수가 일반적인 영웅과 다른 가우초의 보편성을 강조해 호소력을 높였다. 프란치스코 1세 교황은 2015년 유엔 연설에서 “형제들은 단결해야 한다”라는 이 서사시의 기본 원칙을 인용했다. 단결과 분열의 동력인 가우초는 흔히 페론주의와 동일시됐다. 1970년대에 이러한 정치 경향에 격렬하게 반기를 든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파쿤도』를 국가 서사시로 채택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마르틴 피에로』의 일독을 권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시는 사람들을 야만주의로 이끈다.”라고 경고했다. 지식인 엘리트들 사이에서 한 세기 반 동안 이어져 온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자유주의 성향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 집권기(2015~2019)에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 관장을 역임한 알베르토 망겔은 보르헤스를 따라하다가 야당 페론주의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국립 도서관에서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지주들의 항의는 마르틴 피에로의 정치적 계보와 정파를 더욱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 농업 기업가들은 페론주의에 따라 부과된 수출 제한 정책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지만, 가우초 신화에서는 좀체 벗어날 수 없었다. 이에 관하여 카사스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마르틴 피에로가 국가의 표상이라면, 그 누구도 그를 거스를 수 없다. 어떤 정치 집단도, 어떤 정권도, 좌파도 우파도, 민주주의도 독재정권도 마찬가지다. 아르헨티나를 통치하고 권력을 행사한다면 언젠가는 꼭 한 번 가우초를 마주하고, 그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글·파비엔 팔렘 Fabien Palem
<부에노스아이레스> 기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2014 월드컵, 우승을 자축하는 독일’, www.youtube.com
(2) 2008년 프랑스어로 출판된 작품(Régis Brauchli역, Ivry-sur-Seine).
(3) (프랑스어판) L'Herne, Paris, 1990.
(4) Ezequiel Adamovsky, 『El gaucho indómito, de Martín Fierro a Perón, el emblema imposible de una nación desgarrada』, Siglo XXI, Buenos Aires, 2019.
(5) Carlos Gamerro, 『Facundo o Martín Fierro. Los libros que inventaron la Argentina, Sudamericana』, Buenos Aire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