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중년 로맨스의 판타지

2012-05-14     이승욱

영화 <은교>를 거론하면서 '중년 남성의 로맨스 심리'에 관한 글을 청탁받았다. 청탁 글은 '사랑'이 아니라 '로맨스'. 사랑과 로맨스는 엄연히 다른 것임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사랑과 로맨스는 어떻게 다르기에, 우리는 중·노년의 사랑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고 유독 '로맨스'라고 부르는가? 왜 사랑이 아니고 로맨스인가.

어떻게 애도하셨나요?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은교>를 잠깐 열고 들어가자. 박범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은교>는 17살 소녀의 젊음과 관능에 매혹된 노시인의 욕망을 다룬 영화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시인 이적요의 노욕은 은교를 향한 것이 아니다. 그의 노욕은 제자 서지우를 자신의 아바타로 붙들어 두려는 데 있었다. 심지어 은교와의 섹스까지도 서지우를 아바타로 내세워 대신하게 한다.

이적요의 '은교'는 18살 누이였다. 그를 인민재판의 죽음에서 구해준 누이 말이다. 은교를 적요의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편적인 이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17살 소녀 은교를 통해 50년도 더 지나 그의 누이가 복원된 것이다.

사실 은교는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깔렸다. 은교는 헐떡이며 말한다. "여고생이 남자와 자는 이유는 외로워서"라고. 그런데 외로워서 남자와 자는 여자가 여고생뿐일까? 아직 17살의 철딱서니 없음을 지닌 40대나 50대 여성이 여느 집에 한 명씩은 있다. 그들의 이유도 은교와 같다.

서지우도 많다. 너무 많다. 당신이 속한 직장에, 학교에, 단체에, 심지어 동문회나 향우회에 한 명씩은 꼭 있다. 적어도 바로 당신. 사르트르가 말했다. "지옥은 타인이다." 내가 바로 타인의 타인이다. 멀리 가지 말자. 그래서 은교도, 서지우도 둘 다 지겹다. 매일 반복 상영되는,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적요는 멀리 있다. 그를 통해 우리 욕망을 들여다봄은 안전하다. 늙었지만 자기 영역에서 권력이 막강하다. 그가 가진 집과 안정된 노년의 삶은 누구라도 꿈꿀 만하다. 그럼에도 그가 욕망한 것은 무엇일까? 젊음을 붙잡아두고 싶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것은 은교가 아니다. 그는 은교와 섹스하면 다시 젊어질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은 노인은 아니다. 다만, 그보다 좀더 많이 어리석었는데,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지우를 포기하지 못하고, 그의 몸과 이름을 빌려 세상에 영생하려 했다. 비존재로의 전락에 대한 두려움을 견딜 수 없었으리라. 서지우는 적요의 그림자였고, 또한 적요는 서지우의 그림자였다.

앞에서 말했듯, 적요에게 은교는 18살 누이였다. 그래서 적요는 은교에게 어떤 성적 접촉도 할 수 없었고, 끝내 하지 않았다. 그를 죽음에서 지켜낸 누이의 긴박함과 간절함이 몸으로 녹아 들어와 그의 몸에 잠겼고, 그는 그것을 50년 동안 품고 살았다. 은교는 적요의 20살을 소환하는 하얀 깃발이다. 동백 꽃잎 색깔의 웃음, 일깨우는 바람 소리다. 마지막 장면에서 적요가 은교를 향해 "잘 가라, 은교야" 하고 토해내는 순간, 마지막으로 적요는 자신의 삶을 구성했던 가장 중요한 한 사람을 읽어내고, 또 그를 잃게 된다. 그것이다. 인생이란 자신을 읽는 데 한평생, 그것을 잃어버리는 데(애도하는 데) 또 그만큼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나와 부딪혔고, 그래서 내 삶의 한 시간을 결절하게 한 그녀를(또는 그를) 당신은 어떻게 애도했는가?

여기서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영화 <은교>를 보는 내내 우화 하나를 생각했다. 한 사람이 가로등 밑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이 다가가 물었다.

"무엇을 찾으세요?"

"지갑을 찾고 있습니다."

"여기서 잃어버리신 모양이죠?"

"아뇨, 지갑을 잃어버린 곳은 저기 골목 끝 후미진 곳입니다."

"네? 그럼, 그곳에서 찾아야지 왜 여기서 찾습니까?

"그곳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서요."

우리는 넘어진 그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지 않고 자꾸 뒹굴기만 한다. 실패한 그 자리에 답이 있는데 말이다. 잃어버린 곳에서 찾지 않으려는 바보스러움. 하지만 그 정도까지만 본다면 반만 이야기한 것이다.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은 정말 지갑을 찾고 싶었을까? 어두운 골목 끝 후미진 곳에 가야 지갑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당연히 그는 알았을 것이다. 다만, 그는 두려운 것이다.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지갑을 찾았음에도 그 지갑 안에 돈이 한 푼도 없으면 어떻게 할까, 아니 지갑 안에 처음부터 돈은 없었던 것 아닐까. 그러나 지갑을 찾는 시늉은 해야 한다. 그것이 지갑에 대한 예의, 아니 자기 삶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정신분석이라는 것이 지독스럽다. 그는 지갑을 잃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실수는 무의식의 본심이다. 그렇게 그는 모른 척하고 가로등 밑에서 지갑을 찾고 있다. 모른 척하기, 또 '무지에 대한 열정'이 실은 로맨스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로맨스에는 있고 사랑에는 없는 것

'불륜', (혼인 상태를 유지하는) 중년의 로맨스를 다르게 부르는 이름이다. '윤리가 아니다'라는 뜻의 이 말은, 사실 의미가 없다. 우리의 정치적 입장이 일부일처제에서 일부다처제나 일처다부제로 바뀌면 불륜도 달라지게 된다. 수십 년 동안 좌측보행하라더니 어느 날부터 우측보행해야 문화인이라고 개나발을 불어대는 '빅브러더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회적 혼인관계를 지지하는가 하는 상황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실체가 모호한 타인들이 들이대는 윤리에 대해서는 <나꼼수> 잡놈들 말마따나, "쫄지 마!" 중요한 건 우리의 로맨스다.

로맨스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기본은 에로스다. 중년의 로맨스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혈기왕성함으로 치면 훨씬 더 통제하기 어려운 20대보다 빠르게 육체적 결합을 이루는데, 이는 놀랍지 않다. 로맨스는 아다지오나(Adagio)나 라르고(Largo)로 흐르던 피를 매우 빠르게(몰토 알레그로·Molto Allegro) 돌아가게 한다. 어느 순간 심장의 메트로놈이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멈춰버리기도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내 육체를 살려낸 그 사람. 이것만으로도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당분간은 말이다).

중년의 몸은 어떠한가. 술, 담배, 회식, 과도한 업무 등으로 몸은 찌들어간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가까워지고 몸뚱아리의 회춘은 요원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워 운동하고 관리할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여자하고 스킨십을 통해 혈액순환을 꾀한다? 지갑 잃은 자와 다를 바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라 지칭하는, 이른바 문명국의 인간들이 우울감을 가장 깊이 느낀다는 43.4살. 불면, 식욕 저하, 의욕 상실, 어떤 결정도 겁내는 우유부단함,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죄책감, 장래에 대한 불안. 이제 부모들은 세상을 뜨고 내가 제주(祭主)가 돼야 한다. 아이들은 사춘기라는, 인간과 짐승의 어중간한 지점에서 악다구니를 써대니 바야흐로 사춘기와 '사추기'의 전쟁이다.

나이 오십이 되어도 이놈의 인생은 나아지지 않는다. 노후 대비를 위해 먼저 자녀들의 밥벌이를 시급하게 해결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놈들이 언젠가 내 퇴직금에 침을 바르거나 내 집을 담보로 돈 내놓으라고 눈을 흘길지 모른다. 이런 일은 이미 1998년, 2008년으로 10년 걸러 한 번씩 겪어보았으니 엄중한 현실이다.

그렇다. 사랑에는 없지만 로맨스에는 반드시 있는 것이 '불안'이다. 좀더 나가면 '공포'다. 늙음에 대한 불안, 암과 성인병과 돌연사의 지뢰가 만연한 일상, 이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그것으로부터 로맨스는 기름 부음 받는다. 물론 그 발화점은, 이적요의 누이처럼 수십 년 전부터 품고 있던 작지만 살아 있는 불씨다.

사랑에는 있고 로맨스에는 없는 것

언제, 어디선지 모르지만 잃어버렸고,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사적(私的) 공간과 시간. 그것을 잃어버린 자들을 위해 로맨스는 사적 삶을 가능하게 한다(요즘 아버지들은 마음 편히 마스터베이션할 장소는커녕 담배조차 마음 놓고 피울 공간이 없다. 아들은 자기 방에서 마음 놓고 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로맨스는 총체적 불안과 불만의 불꽃이 아닐까 싶다. 지갑을 잃은 자가 정말 지갑을 찾고 싶지 않은 그 이유 때문에 엉뚱한 곳을 헤매듯이, 자기 삶의 불안을 희석시키려 하룻밤의 불꽃놀이에 넋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론부터 말하면 '책임'이다. 남자든 여자든, 즉 누군가의 아내이든 남편이든 그들이 배우자 이외에 다른 사람에게 몸과 마음을 줄 때, 그들이 어디까지 책임지는 사람인지 보게 된다. 죄책감은 이 상황을 설명해줄 중요한 감정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외도(편의상 이렇게 부르겠다)에 대해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 않는다. 최소한 상담실에서 만난 여성들은 그러했다. 외도 문제로 상담실을 찾는 남성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 물론 처음에는 남편에게 어느 정도 미안함을 느끼지만 몸과 마음의 사랑(?)이 깊어지면 죄책감은 그리 중요하게 자리잡지 않는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정서적 기대를 완전히 거두어버린 여성들은 물론, 여전히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는 여성들도 대체로 죄책감을 중요한 갈등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분명히 밝히지만, 이들이 죄책감을 갖지 않음에 대해 질책 비슷한 것이라도 할 권리가 필자에겐 없다. 하지만 그래도 죄책감을 느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좀 그래야 한다고 답하겠다.

상담실에서 만난 여성들은 대체로 자신의 외도가 가정을 지키는 데 크게 일조한다고 말한다. 외도가 가정을 지켜주는 버팀목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기도 한다. 과연 외도가 가정을 책임지는 일인가, 아닌가? 애매하고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의 인생처럼 말이다. 일부일처제를 지독스럽게 옹호하면서 자신은 일처다부제의 삶을 사는 그들의 혼란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육체적·정서적 혼인관계를 유지하는 아내들 중에 남편과 법률적 관계를 끝내겠다고 생각하는 여성은 드물다. 이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이미 많은 '희생'을 했다고 항변할 것이다. 이들은 '희생'을 말하지만 '책임'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남편과 애인에게 극악스럽게 의존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최소한의 책임으로 최대한의 의존을 거래한 사람들에게 책임을 운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면 남자들은 죄책감이 충만하느냐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왜 그 짓(이른바 외도)을 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물론 전혀 죄책감 없이 룸살롱 접대부와 '2차'를 나가는 남성도 많다. 그건 성매매이니 해당 사항이 아닐 듯하다. 또 하나, 이른바 상습적 바람둥이들도 빼야 할 것 같다. 그들은 그냥 강박적 자기애 환자에 지나지 않으니 여기서 다루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남성들은 오히려 이 죄책감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작게는 자신의 외도가 아내에게 발각될 단서를 무의식적으로 누출하는 데에서부터, 과도한 죄책감 때문에 오히려 정작 중요한 책임을 지지 못하는 데 이르기까지 남성들의 죄책감은 터무니없을 때가 많다. 물론 남성 중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한 외도'를 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도 이들이 느끼는 죄책감 지수는 여성들보다 현저히 높은 것 같다. 노심초사, 전전긍긍, 들키는 것에 대한 불안, 한 번이라도 더, 잠시라도 더 애인을 만나고 싶은 간절함, 이 모든 것과 정비례하는 만큼의 죄책감이 있다. 그 죄책감이 자녀들에게 이르면 오히려 더 겁을 먹고 자녀들에게서 멀어진다.

호기롭게 아내와 결별하고 사랑(?)하는 그녀와 새 출발을 한다고 해서 가족에 대한 책임과도 결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그 여성을 사랑한다면 자신의 삶에 대해 가능한 한 완전한 책임을 져야 한다. 경제적·정서적으로, 그리고 끝까지 자녀들의 의지처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냥 환상적 로맨스로 입장해 평생 어린아이로 남는 셈이다.

빈 지갑, 그렇다. 그가 로맨스가 아니라 사랑하기로 작정했다면 그의 지갑은 빈 지갑이 될 확률이 높다.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결국 시간과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빈 지갑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사랑 대신 로맨스라는 것을 하는지 모른다.

'책임'이란 무엇을 안 했는지에 관한 것

로맨스가 '청춘'보다는 '중년'이나 '황혼'이라는 단어를 더 선호하는 이유는 이것이 대체로 환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상은 욕망의 스크린이며, 욕망은 어떤 욕구에서 비롯된다. 그 욕구는 대체로 존재에 대한 인정이다. 신체적·정신적 존재의 인정이 연애의 숨은 의도라면 로맨스라고 부를 만하다.

문제는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그곳처럼, 로맨스의 욕망이 비추는 그 환상의 대상은 결코 우리에게 지갑을 되찾아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짐작하겠는가? 그 빈 지갑은 바로 당신 내면의 상징이라는 것을, 비어 있다고 믿고 있기에(사실 비어 있는지 아닌지 아직 모른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더 두려운, 우리의 내면 말이다. 화려할수록 공허한 불빛 아래서 지갑을 찾는 일이나, 욕망을 상영하는 색색의 텅 빈 빛으로 명멸하는 로맨스의 허망함은 같은 것이다. 차라리 지갑이 정말 비어 있는지 확인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지점에서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읽지 못한 과거와 잃고 싶지 않은 것들

만약 중년의 내가 로맨스에 빠졌다면, 그(녀)는 나의 무엇을 욕망하게 했는지 살펴보자. 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애절함일 수도, 동생만 예뻐하고 나는 결코 사랑해주지 않은 어머니에게 향한 애증의 마음일 수도 있다. 전학 간 첫날 수업 준비물을 빌려주던 짝꿍은 아니었을까, 너무 고귀해 가까이 갈 엄두도 낼 수 없던 교회 대학생 누나는 아니었을까, 자신의 무뚝뚝함을 일거에 녹아내리게 하는 여성성의 화신은 아니었을까?

자신이 욕망하는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결핍이며 왜곡이며 내적 허기의 현신이다. 아직 읽어내지 못한 자신의 어떤 과거를 눈앞에서 똑똑히 목격하는 것이다. 잃고 싶지 않은 그것은, '기회'다. 늙어가고, 죽어가고, 그래서 이제 '기회'에 대한 절박함이 턱까지 차오르면 욕망은 더 은밀해지고 더 간절해진다. '죽어도 좋아', 이런 감정은 아주 충동적이고 단발적이지만 로맨스의 기본이다.

자신을 읽어내고 또 그렇게 삶을 애도해낼 수 있다면 로맨스라 한들 뭐가 나쁠까. 다만, 로맨스의 속성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원한다면 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배우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권리가 없다. 자크 라캉의 말을 빌려 한 가지만 말하고 싶다. "사랑은 없는 것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내 연애를 로맨스라고 부르든 사랑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지 않은가?

글•이승욱 심리분석가. 뉴질랜드에서 정신분석과 현상학 전공으로 철학 석사를, 심리치료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마쳤다. '닛부타의숲' 상담 클리닉을 운영 중이다. 저서로 <상처 떠나보내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