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포드, 할리우드 영웅 시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미국의 유명 감독과 배우들은 전통적 가치관에 순수 진보주의를 결합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존 포드 감독의 행로가 산 증거다.
뉴딜정책이 추진되던 1930년대 할리우드는 좌파를 자칭하거나 공산주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에 우호적이었다. 당시 유성영화로 넘어가면서 동부 출신의 작가가 많이 등장했는데, 이들 대부분이 유럽 이주민이거나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피란 온 유럽인이었다.
이런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던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재빨리 보고서를 통해 존 포드 감독을 반동분자로 규정지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포드 감독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연출한 영화의 대담한 색채를 기억하는 이들에겐 FBI의 그런 행태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했다.
FBI가 포틀랜드 민주당 창당자의 아들인 존 포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35년 미국감독조합(SDG)이 등장한 이후부터였다. 포드 감독이 감독조합의 창설 멤버였기 때문이다. 그가 20~30대 시절인 1910∼20년대 영화에서는 정치적 성향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19세기 민중사상가 윌리엄 코빗이 표현한 '대도시의 유약한 경박스러움'(1)과 대조적으로 시골의 강건함을 찬양한 '중서부' 이데올로기를 엿볼 수 있다.
1929년 발생한 대공항으로 포드는 재산을 잃었지만 계속 영화를 찍으며 생계를 꾸려갔다. 당시 할리우드가 심각한 재정 압박에 시달리게 되면서 수익성만을 추구하는 영화가 등장하자, 포드는 이를 비판하며 급진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미국 공산당 당수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드러낸 당시 최고의 배우 제임스 캐그니만큼 적극적이지는 않았다.(2) 포드는 한결같이 반공주의를 지지했지만 좌파 성향의 시나리오작가 필립 듄을 비롯한 동료들에게 뉴딜정책을 추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털어놓았다.
1935년 12월, 1920∼30년대 영화계의 거장 킹 비더 감독의 집에 동료들이 모였다. 포드를 포함해 이곳에 참석한 유명 영화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라고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포드의 표현에 의하면 '영화계를 지키기 위해' 1인당 100달러씩 투자해 감독조합을 창설했다. 비더가 위원장을 맡았다. 영화 제작사 쪽은 조합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경기가 침체돼 있던 시기였다. 어떤 나라에서든 고용주는 노조에 적대적이었고, 노조의 세력화를 비난했다. 할리우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4년 3월 영화제작자협회는 영화아카데미와 연합해 임금을 50% 삭감하기로 했다. 반발한 노조는 3월 13일 최초로 파업에 돌입했다. 투쟁 기간은 짧았지만 파업노동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결됐다. 이런 성공이 몇몇 감독을 결집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배우조합과 시나리오작가조합보다 늦게 창설된 감독조합은 앞의 두 단체보다 좌파 성향이 약했지만, 심기가 불편한 메이저 제작사들은 공산주의자들이 감독조합을 선동한다고 비난했다.
포드는 감독조합 창설 초기에 회계까지 맡아가며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제작사의 노동자들과 연대해 영화계의 높은 실업률과 할리우드 거물급 제작사를 뒤에서 조종하는 은행들을 규탄하고, '임금을 1910년 수준으로 되돌리기 위해' 조직적인 투쟁을 벌였다. 1935년 포드는 짧지만 실질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포드는 언제나 기득권층에 대한 적개심에 따라 움직였다. 여기에 진보주의자인 시나리오작가 더들리 니콜스와 필립 듄의 영향과, 인디언 지역 출신으로 독특한 정치 성향을 지닌 영화배우 윌 로저스와의 관계도 한몫했다. 자신을 인디언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며 미국 도시인들의 삶이 변해가는 것을 비판한 풍자가 로저스는, 1932년 미국 대선 후보로 출마할 뻔했다. 마른 체구와 반백의 머리에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는 로저스는 1918년 영화계에 진출한 이후 셜리 템플 다음으로 인기 많은 배우로 성장했다.
할리우드 이끈 좌파 거장들
로저스가 내세운 가치는 19세기 말 창당됐다가 해체된 이후 일부 '좌파 성향의 보수주의자'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던 인민당의 가치와 비슷했다. 이상적 선구자들에 심취해 반자본주의이자 반인종차별주의, 반독재주의를 표방한 인민당은 경제성장과 임금제를 불신하고 미국 민주주의와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소지주와 협동조합이 존재하는 공화제와 실질적인 평등의 강화를 주장했다. 같은 노선을 따른 로저스는 대중의 상식을 깨우치는 데 힘쓰고, 전통과 순수한 윤리적 가치를 존중해야 하며, 국민과 동떨어진 정치를 불신하고, 청교도주의를 배척하며,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기를 갈망했다. 로저스는 드라마와 코미디가 섞인 포드의 영화 <닥터 불>(1933), <프리스트 판사>(1934), <굽이 도는 증기선>(1935)에 출연했다. 그는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했다. <프리스트 판사>와 <굽이 도는 증기선>에서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흑인 배우 스티핀 펫칫이 로저스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는데, 둘은 유머가 통하는 절친한 벗이 되었다. 로저스는 1935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포드는 그 뒤 얼마 동안은 동료와 동일한 사상의 지지자로 남아 있었다.
다음해 포드는 아일랜드 출신의 사촌이자 좌파 성향의 리암 오플래허티의 동명 소설을 각색해 영화화한 <밀고자>와 <쟁기와 별>을 마지막으로 RKO영화사를 떠나 폭스(20세기폭스)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폭스의 권위주의적인 사장 대릴 자눅과 마찰을 빚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친해졌다. 자눅은 포드를 존중하고, 포드는 공화주의자이면서도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자눅이 이끄는 폭스에 잘 적응했다. "포드는 자눅과 함께 솔직하고 감동적인 영화를 여러 편 만들었다. 원하기도 했지만 의무감 때문에라도 미국의 역사와 사회성 짙은 소재를 주로 다루었다. 1935∼41년 제작된 <역마차>와 <젊은 링컨> <분노의 포도>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는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3) 포드는 <역마차>에서 인디언을 무참히 학살한 부패 은행가를 희화화하며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젊은 링컨>을 통해서는 관용의 이상형 에이브러햄 링컨을 찬양했다. 또한 존 스타인벡의 유명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분노의 포도>를 통해 사회적 불의를 비판했고,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는 광부를 매개로 노동자계급을 찬양했다.
영화 속에서만 민주주의와 노동자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가톨릭교회가 1936년 선거를 통해 출범한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를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킨 극우파 군부를 지지하자, 이에 맞서 가톨릭 신자인 포드는 스페인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한 영화인 위원회 설립에 참여했다. 포드의 친구 더들리 니콜스와 시나리오작가이자 소설 <말타의 매>와 <붉은 수확>의 작가 대실 해밋도 이에 동참했다.(4) 1948년 친공 활동 조사를 거부해 실형을 선고받게 되는 10명의 시나리오작가·감독·작가(할리우드의 10인) 중 한 명인 레스터 콜도 포함돼 있었다.
공화주의자 요리스 이벤스가 촬영한 <스페인의 대지> 내레이션 작가를 맡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기부금을 전달하고, 포드는 구급차를 기부했다. 포드의 조카 밥 포드는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파를 지원하기 위해 구성된 국제여단에 합류하러 스페인으로 떠난 뒤 포드와 서신을 주고받았다. 포드는 조카의 용기를 칭찬하며 자신은 "영원한 좌파로서 사회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라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 소련에서 벌어진 대숙청과 반혁명 재판을 지켜본 포드는 공산주의가 더 이상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존 포드의 꿈과 좌절
1938년 포드는 파시즘과 인종주의를 척결하고 민권운동을 지지하기 위해 설립된 영화민주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선출됐다. 해밋은 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자 위원회가 두 파로 갈리면서 할리우드 좌파의 입지는 약해졌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우파 보수주의가 다시 세력을 구축했다. 반미활동조사위원회가 설치되고, 또다시 전쟁의 위협이 야기됐다. 포드는 처음에는 반파시즘 때문이었지만, 나중에는 애국심에 의해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미 전략정보국(OSS)의 요원으로 맹활약한 뒤 사령관 계급장을 수여하고 은퇴했다.
우파 성향이 짙은 영화연합이 설립되자 포드는 1944년 곧바로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등과 함께 연합에 가입해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반공주의를 추구하며 1930년대의 친구들에게 등을 돌렸다. 작가 조지프 맥브라이드는 "포드는 선임 장교들과 함께 4년을 보내고, 전략정보국과 공동전선을 폈다. 이를 계기로 포드의 정치 성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5)고 기록했다. 하지만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공산주의자를 겨냥한 '마녀사냥'만은 거부하며 철저한 반공주의자 세실 데밀을 비롯해 공범인 동료들을 비난했다.
글•에두아르 뱅트로 Edouard Waintrop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 집행위원장. 블로그 '시노크'(cinoque.blogs.liberation.fr)를 운영하고 있다.
번역•배영미 petite0222@hotmail.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범죄심리>(2011)가 있다.
(1) Christopher Lasch, <단 한 사람과 진정한 이상향: 진보와 비평의 이데올로기 역사>, Champs Flammarion, 파리, 2006(1991)) 인용.
(2) Paul Buhle, David Wagner, <Radical Hollywood>, The News Press, 뉴욕, 2003. 패트릭 맥길리건, <Cagney: The Actor As Auteur>, Barnes & Co, 샌디에이고, 1975 참조.
(3) Joseph McBride, <존 포드를 찾아서>, Actes Sud/Institut Lumiére, 아를/리옹, 2007.
(4) Jerome Charyn, ‘해밋, 자동권총과 스타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4월호 참조.
(5) Joseph McBride, <존 포드를 찾아서>, op.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