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로 결집한 부르주아 동맹

이스라엘보다 더 이스라엘적인 정치세력

2023-11-30     프레데리크 로르동 l 경제학자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폭력의 원칙이 있다. Ex nihilo nihil. 그 무엇도 무(無)에서 나오는 것은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언제나 선행 사건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안타깝게도 단 하나의 규칙만을 따른다 : 부정적인 상호 응징의 규칙이 바로 그것이다.

불의가 극에 달했을 때, 집단이 대량 학살을 경험했을 때, 더 최악의 경우, 그러한 대량학살이 눈에 드러나지 않게 행해지고 있을 때, 어찌 복수심에 불타는 증오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있을까? 물론 이들은 좀 더 합리적인 전략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관계 정상화를 방해한다든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을 국제무대에 재등장시키는 것 등 – 그러한 전략은 현실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현실적 전략을 가동시키기 위한 가용 자원 가운데 살인적 복수 이상의 효과적인 연료를 찾아낼 순 없었던 것이다.

 

‘테러리즘’, 막다른 골목의 단어

FI(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좌파 정당-역주)당은 그들이 말하는 그 실수(1)를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다른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고, 그중 한 가지는 큰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에서 사람들은 공포와 경악, 혐오감을 내비치지 않으며 곧바로 냉철한 분석을 내놓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최소한의 형식적 동정심을 표하는 것으론 충분치 않았다. 공식적으로 내뱉는 한두 마디 말로 가볍게 지나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서방 세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동정심조차 전하지 않았다 해도, 이런 경우 FI당은 피해자에게 심심한 동정을 표하는 의무를 수행해야만 했고, 양쪽 모두에 동정심을 표하지 않은 이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했다.

FI당이 저지른 이 같은 실수가 실제로 파악되어, 공개 토론에 소환되고 심지어 발언 철회까지 요구받았다. 그러나 이번에 FI당이 물러서지 않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테러리즘’. 뱅상 르미르(Vincent Lemire)가 단언했듯, “테러리즘은 이 공개 토론의 출발점”이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테러리즘은 도착점도 아니다. 그것은 막다른 골목이다. ‘테러리즘’은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의 단어이다. 다니엘 오보노(Danièle Obono)(2)가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며, 그녀의 말은 옳다. ‘테러리즘’은 오직 근절되어야 한다는 전망만을 갖게 하며, 다른 모든 정치적 분석을 막아서는 비정치적 범주에 속한다. 바로 그 증거를 마크롱이 제시했다. ‘국민의 단결’, 그와 비슷한 선동의 말들이 10분 동안 8번이나 반복됐다. 갈등의 줄다리기는 멈춰 섰고, 분쟁은 무력화되었으며, 법령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그들의 논리를 따르자면,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위는 테러를 지지하는 시위이며, 심지어 테러리스트 시위가 되므로, 결과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3)

이번 사태를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 정치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가장 높은 수준까지, 그 정치가 전쟁의 형태를 띠고 있더라도 군사전략가 클라우제비츠(4)의 말처럼 다른 수단을 통해 계속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전쟁 중이다. 그들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이번 전쟁을 주도하는 단체는 그들 내부에서 형성되었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나다브 라피드 (Nadav Lapid)(5)는 “가자지구를 괴물로 만든 것은 바로 우리”라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굳이 ‘테러리즘’이라는 단어 없이도, 전쟁과 전쟁 범죄만으로도 충분히 공포의 극치를 말할 수 있다. 민간인 학살의 끔찍함을 말할 때도 이 단어들만으로 충분하다. 원칙적으로 살인 행위인 전쟁에서 ‘전쟁 범죄’라는 범주를 만들어 냈다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잔혹한 일들 가운데 또 다른 범주의 잔혹 행위를 지칭하기 위해서다. 어쨌든 지금은 폭력의 일반론이 필요한 순간이다. 범죄가 또 다른 범죄를 야기하고- 앞서 저질러진 범죄가 새로운 범죄의 씨가 되는 법이다. 기어이 이 사태를 테러리즘이라 부르려 하는 (서방 세계의) 악착같음은 오직 감정적 요구만을 만족시킬 뿐, 그 어떤 지적 해법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테러리즘과 전쟁 범죄는 서로 끊임없이 넘나드는 두 가지 범주이며, 그 어떤 안정된 이율배반도 드러내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히로시마에서의 원폭 투하는 유엔의 테러리즘 정의에 부합하는 행위였다. 적대 행위와 직접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을 살해하여 주민들을 위협하거나 정부로 하여금 특정 행위를 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작전이었다는 면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 폭탄을 테러리즘으로 규정하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드레스덴(6)은 또 어떠한가? 그 또한 히로시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치 독일의 항복을 얻어내기 위해 독일 주민을 공포에 빠뜨린 행위였다.

그러나 현 상황을 직시하길 거부하는 이들에게 테러리즘은 대체 불가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앞서 행해진 폭력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그 행위의 원인도 사라지게 한다. 그것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순수한 폭력이며, 즉각 절멸시키는 것 이외 그 어떤 종류의 대응도 필요 없다. 테러 세력을 절멸시키는 방식에서 일종의 십자군 전쟁과 같은 형태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명의 충격(le choc des civilisations)(7), 선의 축(8) 따위의 이런 방식을 취할 경우, 어떤 질문도 필요 없어진다. 

우리는 지금, 사태 전반을 이해하는 것이 현 상황에 분노하지 않는 것이 되며 경악에 동참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아니라, (테러 세력에 대한) 호의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서구(부르주아)의 흐름 속에서 항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어리석음의 제국은 유출된 기름이 번지듯 확장되길 멈추지 않고 있다.


이해를 거부하는 집착 

그들은 특히, 이해를 거부한다. 너무도 명백한 현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오로지 눈을 크게 뜨는 것뿐이다. 하나의 민족 전체가 점령자로 인해 박해를 당했다. 그런 지가 곧 80년이 되어간다. 그들은 출구를 차단당했고, 미쳐버릴 때까지 갇혀 지내야 했다. 그들은 굶주려야 했고, 죽임을 당했으며 이 상황에 대해 지적하는 공식적인 목소리는 사라졌다. 지난 10개월 동안 200명이 죽었다. 거기에 대해 한마디 말도 없었다. 세상은 이런 일을 벌이는 이스라엘인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생생한 이스라엘인들의 범죄 영상 증거가 있지만, 그에 대해선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2018년, 국경선을 평화롭게 걷고 있던 2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살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무릎을 땅에 대고 사람을 조준 사격하는 저격수들이, 어느 날 오후 42명을 저격했다. 여기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들을 향해 이런 말이 들려왔다.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군대”. 바로 그 “세계에서 가장 도덕적인 군대”의 퇴역 군인들은 이스라엘 정부가 그들로 하여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행하도록 한 일들의 혐오스러움과 비인간성에 대해 비판하였지만, 그들의 발언에 대해 서구 언론은 한 줄도 싣지 않았다. 10월 초, 하마스가 혐오스러운 행위들을 이스라엘에서 저질렀다면, 그에 비할만한,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한 범죄들이 (이스라엘) 군대나 (이스라엘) 식민지배자들에 의해 행해져 왔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강물에 떨어진 가는 물방울 정도만큼만 다뤄졌을 뿐이다.

이스라엘에서 벌어진 비극은 가슴 아픈 증언으로 구체화되었고,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비극은 통계로 집계될 뿐이다. 통계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이번 하마스에 대한 공격에 가담한 남자들 가운데 가까운 이의 시신이나 산산조각 난 아기의 몸을 두 팔에 안았던 자, 그래서 더 이상 복수 이외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된 자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다.

아니, 이것은 테러가 아니다. 복수의 용광로에서 녹아내린 금속이 무력 투쟁에 흘러내린 것이다. 그것은 전쟁과 잔혹함을 촉발하는 영원한 모터다.

바로 이것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불의의 감정이다. 어떤 삶은 또 다른 삶과 같은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더 큰 불의는 없다. 

이보다 더 심각한 불의는 없다. 이것을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단히 멍청해야만 할 것이다. 인간적인 이해까지도 필요 없다. 단순한 전략적 신중함(언젠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거라는)만 가진다 해도 현재의 불의를 인정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집단적으로 행해져 온 박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아랍인의 생명에 대한 가치를 온전히 부정하는, 이 같은 상황이 무한정 계속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식민지배자의 착각일 뿐이다.

 

부르주아 동맹(Bloc Bourgeois)과 ‘수입된 갈등’

현시점에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서구 진영의 모든 공식 채널들이 이 같은 환상에 동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프랑스에서 보여지는 수준은 놀라울 정도다. 우리는 ‘수입된 갈등’의 위험에 대해 우려해왔다. 이미 대규모로 외부로부터 분쟁들이 수입되어왔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물론, ‘수입된 갈등’은 ‘아랍인’ ‘이민자’ ‘변두리(banlieue)’ 같은 단어들을 에둘러 말한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실제 수입의 경로는 전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눈앞에 파나마만큼이나 넓게 펼쳐져 있으며, 거기엔 수압관처럼 거품이 일고 있다 : 갈등의 수입 경로는 바로, 부르주아 동맹(Bloc Bourgeois)이다.(9) 정치인, 그들과 긴밀히 연결된 데스크들, <특집>을 발행하고 있는 미디어들 등 그들의 모든 조직들은 즉각, 갈등 수입을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왜 이들은 <테러리즘>에 집착하는 걸까? 이는 물론, FI당의 관점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다. 다시 이 문제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다른 관점이다. 이번엔 특정 이해관계가 있는 갈등의 수입이다. 부르주아 동맹이 해외에서 이스라엘 뒤에 집결하면, 국내에선 그들의 적에 맞서 집결할 기회를 포착한다.

 

부르주아 동맹, 이스라엘보다 더 이스라엘적인 행보

이 대목에서 필요한 것은 부르주아 동맹과 ‘이스라엘’(그것이 이스라엘인들이든, 국가든, 정부든) 간에 이뤄진 반사적인 연대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유사성에 대한 분석이다. 부르주아들이 갖는 이스라엘과의 유사성 : 타락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에 대한 동일한 취향, 지배자로서의 동일한 구조적 위치(국가적 지배, 지역적 지배),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선동적 미디어의 소유,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서구 부르주아 사회처럼 대변된다. (스타트업 업체들이 넘쳐나는 활력있는 텔아비브의 이미지로) 이 모든 것이 부르주아 동맹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실체에서 자신들을 발견하게 하고, 이스라엘이 내세우는 명분을 옹호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프랑스의 부르주아 동맹은 이스라엘인들보다 더 이스라엘적이다. 이스라엘의 공식 채널조차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여온 행위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프랑스 부르주아들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표현을 거부한다. 이스라엘의 일부 좌파 정당도 자신들의 정부를 ‘인종주의 정부’라 부르지만, 그들은 이 표현도 거부한다. 이스라엘 언론 <하레츠(Haartz)>까지도 현 사태에 대한 이스라엘 정부의 명백한 책임을 말하고 있지만 프랑스 부르주아 동맹은 이스라엘 정부의 책임을 거론하지 않는다. 많은 이스라엘 고위 장교들 역시 자신의 정부의 지속적인 살육 정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프랑스 부르주아 동맹은 이 또한 부정하며, 유엔과 국제법이 하마스의 행위를 ‘전쟁 범죄’라고 부르고 있음에도 이들은 ‘전쟁 범죄’라는 표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테러라고 부르길 고집한다.)

이스라엘 언론인 기돈 레비는 “2백만 명이나 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감옥에 가둔 이스라엘은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의 전 외교관 다니엘 레비는 “가자지구를 전멸시키기 직전에 이른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 BBC 기자에게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은 정말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프랑스 부르주아 동맹은 여전히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모든 자원을 차단했을 때는 ‘폭정’이라고 말했지만,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모든 자원을 중지했을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동맹은 스스로를 이스라엘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 무엇도 그들을 제어할 수 없다.

그들에게 있어선, 외부의 부르주아 형제들이 적을 향한 투쟁에 나서는 동안, 내부에 있는 부르주아 동맹의 반대자들에 맞선 투쟁이 서로를 강화시키는 상황이기에 더욱 강렬하게 이스라엘과의 연대감을 느낀다. 그것은 비판의 대상인 부르주아 동맹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는, 유기적 위기 상황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무의식적 공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주변을 살핀다. 그들은 유일하게 의미 있는 하나의 적을 발견한다. 그것은 FI(굴종하지 않는 프랑스당)이다. 사회당, 유럽녹색당, 공산당은 모두 무력화시켰다. 그쪽으론 어떤 근심도 생길 것이 없다. 그들은 중요한 조력자 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도 어떤 위험도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FI는 이들과 다르다. 그리고 마침 이들을 절멸시킬 기회가 찾아왔다. 한순간도 망설일 시간은 없다. 영국 노동당의 제레미 코빈 전 당수와 미국의 진보적 정치인 버니 샌더스 경우가 그러했듯(10), 반유대주의라는 억측은 이미 순항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기회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내려준 기회인 FI의 첫 실수 이후, 공공연한 거짓말, 발언에 대한 뻔뻔한 왜곡, 그들의 성명에 대한, 혹은 날조된 성명의 부재에 대한 엉터리 여론 조사, 반이성적인 비판 등 모든 것들이 이 벌어진 틈을 향해 몰려갔다. <BBC>는 (하마스를 향해) ‘테러리스트’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만, FI당은 그것을 말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 권위를 인정받는 대학교수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이번 분쟁에 대한 분석을 내놓고 있지만, FI가 내놓은 같은 내용의 분석은 정치 스캔들이 되어버린다. FI가 내놓은 입장은 유엔이 취하는 입장과 매우 유사하지만, FI의 입장은 반유대주의로 치부된다. “장 뤽 멜랑숑은 대체 뭘 하자는 건가? 이슬람 테러집단을 용인하기라도 하겠단 말인가?” 라뉘앙스지(11)는 이렇게 묘한 뉘앙스를 띄우며 묻고 있다.

진실의 순간은 언제나 몇 가지 좋은 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제 공화당 진영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반대 의견을 금지하고, 공개적인 표현을 금지하며, 시위를 금지하고, 만장일치나 침묵을 강요한다. 그들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정치에 계속 참여하려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경찰을 통해 위협을 가하도록 한다. 이들은 각 대학들로 하여금 학생회가 발행하는 보도자료에 대해 경고하도록 조장하며, 은밀히 반자본주의신당(NPA)이나 영속적 혁명(Révolution permanente) 같은 조직을 제소할 것을 검토 중이며, 이러한 극좌 정당들의 해산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실제 벌어진 일들은 정국의 경직 그 이상이다. 원칙대로라면, 경직은 이완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결집시키며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평범한 국면이 아니다.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강압을 통해 만장일치를 이끌어내는 모든 정치적 기도가 필연적으로 도달하는 정치 체제의 범주다. 협박, 동조에의 강요, 범죄 사실의 공표, 조직적인 사실의 왜곡, 모든 동의하지 않는 의견들의 악마화 등이 그들이 사용하는 주된 작전 도구이다. 그다음엔 금지와 처벌이 따를 것이다. 팔레스타인 민족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는 것은 미친 짓이 되어버린다.

팔레스타인 깃발을 다는 행위에 대해선 135유로의 벌금을 물게 한다. 그들은 이 벌금을 정당화할 법적 근거를 애써 찾고 있다. “자유 팔레스타인(FREE PALESTINE)”은 반유대주의 슬로건이다. 이 분야에서 우아한 심판의 역할을 맡은 <CNews>(12)의 말이다. 이 또한 반역의 시대를 상징하는 일이다. 반유대주의자들과 공모한 자들이 반유대주의에 대한 고발을 전파하고, 나치즘의 전 공모 세력들이 나치즘에 대한 고발을 퍼뜨린다. 나머지 정계나 언론계는 <CNews>의 이러한 해석 앞에서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으로 승인한다. 집권당 LREM과, <France Inter>(공영라디오), 그리고 <France 5>(공영TV 방송) 등등에서 이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 상황을 두고, 볼로레(Bolloré)(13) 제국의 복도에선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지경일 것이다. 공화당 진영은 정치와 자유, 기본권을 모두 멈춰 세우는 진영이다. 이들은 반아랍 인종주의와 모든 비백인 진영의 삶에 대한 경멸로 뭉쳐진 진영이다.

아랍 세계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이 모든 부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모든 이들의 뇌리에 아로새겨지고 있다. 하지만 네메시스(인간의 오만·불손한 행위에 대한 신의 노여움·벌을 의인화한 여신)가 되돌아온다고 해도 서방 지도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리석은 백인 남성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프랑스 경제학자이자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와 유럽사회학연구소(CSE)에서 연구팀장을 맡고 있다. 금융위기, 사회학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특히 저서 『언제까지?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Jusqu‘à quand? Pour en finir avec les crises financières)』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최근 저서로는 2009년에 출간된 『넘쳐나는 위기: 파산한 세계의 재건(La crise de trop. Reconstruction d’un monde failli)』이 있다.

번역·정수리
번역위원


(1) 이스라엘을 향한 하마스의 공격이 시작된 직후, 프랑스의 좌파 원내 정당인 굴종하지 않는 프랑스 당(FI)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하마스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군대의 무력 공격은 가자지구, 서안지구, 동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이 강화된 배경에서 비롯된 일이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망자들에게 모두 애도를 표한다”. 특히 루이 보야르(Louis Boyard) 같은 FI당의 일부 의원은 프랑스 정부가 “이스라엘이 행한 팔레스타인 식민지화와 부당한 수탈”을 외면해 왔다며 현 상황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책임을 비판하기도 했다. FI당의 이러한 태도는, 테러를 저지른 하마스를 규탄하고 피해를 입은 이스라엘 시민들을 향해 애도를 표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일방적 지지를 표한 우파 정당들로부터 일제히 비난을 받았다.
(2) Danièle Obono : FI 당의 국회의원이자 대변인 
(3) 이 같은 이유에서 팔레스타인 지지 집회를 금지시키려던 프랑스 정부의 의도와 달리 행정법원은 이러한 금지에 반기를 드는 결정을 내렸고, 프랑스 전역에 걸쳐 수차례 팔레스타인 지지 집회가 이어졌다.
(4) Carl Von Clausewitz (1780~1831) 프로이센 출신의 군사전략가 
(5) Nadav Lapid (1975~ ): 이스라엘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작가 
(6) 독일의 한 도시로, 2차대전 말, 연합군이 사흘간 약 3,400여 톤의 폭탄을 떨어뜨려, 민간인 22,700~25,000여 명이 숨지고 중세 바로크 건축과 예술로 유명하던 도시의 유적들을 파괴했다. 현재까지도 당시 행해진 폭격의 의도와 실효성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7) 1996년 출간된 정치학자 사무엘 헌팅턴의 저서 『문명의 충돌(The Clash of Civilizations)』의 프랑스어 제목이기도 하다. 옛 소련이 무너진 이후, 점증해 가는 이슬람 세력과 중국의 힘에 맞서 서방세계의 전략을 제시했다.
(8) 2002년 조지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이라크·이란·북한을 지칭하면서 사용한 표현 <악의 축>에 빗댄 표현
(9) 경제학자인 브뤼노 아마블(Bruno Amable)과 스테파노 팔롬바리니(Stefano Palombarini)가 그들의 공저 『부르주아 동맹의 착각(L'Illusion du bloc bourgeois)』에서 처음 사용한 표현.
(10) 영국과 미국 정가가 공유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일반적 정서에 반하는 이성적이고 비판적 의식을 지닌 이 두 정치인은 주류 미디어들로부터 반유대주의자라는 해묵은 공격에 직면해야 했다 
(11)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기독교 계열의 월간지 
(12) 뉴스 전문 채널로 극우적 성향, 즉,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가진 매체로 알려져 있다. 
(13)Vincent Bolloré(1952~ ): 방송사 <Canal+>, <CNews>를 비롯, 10여 개의 방송, 신문, 잡지 등을 소유한 프랑스의 미디어 재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