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동 걸린 사우디-이스라엘 관계 정상화
수개월 전부터 미국 국무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전쟁에 돌입하면서 이러한 미국의 노력은 물거품이 돼 버렸다. 그 와중에 중동 지역과 전 세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의 국제적인 위상만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가자지구 봉쇄 장기화,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법적인 권리 박탈, 종교적 가치에 반하는 언행 등으로 팔레스타인의 불만이 곧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이스라엘에게 지속적으로 해 왔다.” 10월 7일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몇 시간이 지난 뒤에 발표된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부의 보도자료는, “양 측의 갈등이 조속히 해결”되기를 촉구하는 동시에 팔레스타인을 향한 지지 의사를 명확히 밝히고 있었다.
그래도 가자지구의 이슬람 단체를 오랫동안 재정적으로 지원해 온 카타르에 비하면, 사우디아라비아가 선택한 어조는 그나마 온건한 편이었다. 카타르는 이번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현재의 갈등이 일어나게 한 주범은 바로 이스라엘”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응은 아랍에미리트의 반응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아랍에미리트는 하마스가 “가자지구 인근에 위치한 이스라엘 도시와 마을을 공격한 것”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민간인 납치는 경악스럽다”라고까지 평했다.
중동역사의 새로운 장, 물거품 되나?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에 돌입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이 몇 주 전부터 꿈꿔온 중동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은 조 바이든의 임기 초반 몇 개월 동안 서로 삐걱대던 시기가 있었고, 그 뒤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유가 급등에도 불구하고 감산을 결정한 데 대해 미국이 불만을 품으면서 또다시 냉랭한 시기가 찾아왔지만, 올해 4월부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과 이스라엘 간에도 비슷한 기류가 흘렀다. 그렇다면 이 3개국 간의 교류가 증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가 ‘정상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불화라는 ‘장애물’이 제거되자, 1948년부터 불안이 만연하던 중동 지역에 비로소 협력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일부 평론가들은 하마스의 공격을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간의 화해를 막으려는 시도로 성급하게 해석하기도 했지만, 이는 설득력을 갖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한 추측이다. 그러나 이번 갈등이 사우디아라비아, 미국, 이스라엘이 최근 몇 개월 동안 유지해오던 좋은 관계에 찬물을 끼얹은 것만은 분명하다. 여름 내내 삼자 간의 대화를 진전시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미국 행정부는, 전쟁과 상관없이 이 대화가 계속되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나 가자지구가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을 받고 있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하는 시위가 아랍 세계와 그 외 지역에까지 확산하는 상황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 및 이스라엘과의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10월 14일 토요일에 사우디아라비아 측 두 명은, 비록 정부가 공식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 간의 대화는 현재 중단된 상태라고 로이터 통신을 통해 은밀하게 전했다. 같은 주말에 미국의 안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전쟁 위협에 놓인 중동 지역을 미국이 지지하고 있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중동을 순방하던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인 리야드를 두 차례나 방문했다.
이집트(1979년), 요르단(1994년), 모리타니(1999년과 2010년), 그리고 아브라함 협정(2020년)에 서명한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모로코, 수단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랍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실 이스라엘의 존재를 단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다.(1) 그러나 최근 들어 외교 협상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또한 각국의 정상들이 긍정적인 발언을 내놓으면서,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조만간 평화의 시기가 찾아오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냉전 이후 가장 중요한 협정”인 아브라함 협정 덕분에 “중동 국가들은 매일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지난 9월 20일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총리 무함마드 빈 살만(MBS)은 말했다. 2017년에 차기 왕위 계승자로 지명된 이후 처음으로 미국의 뉴스 채널 <폭스 뉴스>와 가진 영어 인터뷰에서였다.
바이든, 내년 대선 앞두고 중동 외교에 조바심
그로부터 2일 뒤에 뉴욕에서 열린 UN 총회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관계가 “놀라운 진전을 앞두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평화가 새로운 중동을 탄생시킬 것”이라면서, “갈등과 혼란의 영토가 번영과 평화의 장으로” 거듭나리라고 예측했다. 9월 29일, 존 커비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기자들에게 “각국은 ‘기본 구조’의 구상을 이미 끝냈다”고 말했다.
미국 언론은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관계 개선이 갖는 의미와, 특히 이스라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 측에 제시한 조건에 관해 호들갑을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러한 상황은 미국,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에게 모두 이익이지만, 그중에서도 미국에게 특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2024년에 대선을 앞둔 바이든 행정부는 이러한 외교 정책을 엄청난 외교적 성과로 포장할 필요가 있다.
설사 사우디아라비아가 모든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미국으로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도널드 트럼프 때의 아브라함 협정보다 중동 지역에서 훨씬 더 중요한 성과를 이루어낸 셈이 된다. 이는 2023년 3월에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간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면서 중동 지역에 대한 야심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는 중국을 견제하는 한편, 중동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함을 재확인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다음 대선 이전에 관계 정상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미국의 조급함과 외교적 압박으로 인해 악동 ‘빈 살만(MBS)’의 위치는 핵심적 교섭 상대로 격상됐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요구 조건은 더욱더 많아졌다. 예멘 전쟁, 언론인 자말 카슈지크 암살 등 과거 국제 사회에서 저지른 실수에서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보이는 빈 살만은, 이제 젊고 열정 넘치는 조언자들 대신 사우디아라비아 정계를 잘 아는 노련한 정치인들을 주변에 두었다.
사우디 빈 살만이 제시한 4가지 협상조건
그중 한 명인 무사이드 알 아이반 국방 자문관은 과거 이란과의 관계 회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빈 살만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정치적인 측면과 경제적인 측면 모두에서 세계 최고의 강대국으로 만들기 위해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다. 이란과의 관계 개선뿐만 아니라 예멘 내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수단 내전의 중재를 시도하고, 7천억 달러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를 다양한 분야에 투자하고 있다.
빈 살만은 애초부터 아브라함 협정에 중도 승차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자신의 야심에 걸맞은 새로운 판을 짜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기를 원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크게 네 개의 조건들을 제시했지만, 미국은 그 전부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첫 번째 요구 사항은 자국의 우라늄을 농축해 민간 핵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미국이 지원해달라는 것이었다. 세계 2위의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에너지 전환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논리였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준하는 상호 방위 조약을 미국과 체결하기를 희망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호황기를 맞은 미국 군수산업에서 생산된 첨단 군사 장비를 거의 무제한으로 공급받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빈 살만은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측의 양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몇 마디 단어들로 보았을 때 ‘거래식 외교’의 추종자인 빈 살만은 현재 팔레스타인인들의 요구 사항을,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수백만 달러의 오일머니를 투자하고 그 대가로 팔레스타인인들의 통행 조건 완화와 주민들의 노동 허가서 발급을 골자로 하는 경제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제2차 인티파다가 한창일 2002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이 베이루트에서 열린 아랍연맹 정상회의에서 제안했던 ‘아랍 평화안’과는 전혀 다르다. 이 평화안의 기반은 ‘영토-평화 교환 원칙’으로, 이스라엘이 1967년부터 점령해 온 영토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그곳에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가 건설된다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라는 내용이었다.
메가딜 원하는 미국, 여유부리는 사우디
사실, 지금은 고인이 된 국왕의 이 제안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사우디아라비아 외교부는 “아랍 평화안에 근거해 평화를 진전시키겠다”라고 발표했다. 초반에는 소심한 입장을 보였던 빈 살만도 10월 20일에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에 필요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이번 갈등을 계기로, 인권 문제에 관한 논란에도 명성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빈 살만의 국제적인 입지는 더욱더 올라가고 있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사형 집행 건수는 2022년에 196건으로 2020년보다 7배나 증가했다. 또한 2023년 1월부터 9월까지 총살당한 사람은 100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잔인한 현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파트너들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빈 살만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갈등을 해결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를 멀리했던 미국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으며, 대대로 적대적인 관계였던 이스라엘과 미미하게나마 교류를 시작했다. 9월에는 이스라엘 장관 두 명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했는데, 이는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었다.
38세의 빈 살만은 아직은 세계의 중심이 아닐지 모르지만, 매일 조금씩 게임의 법칙을 터득하면서 세계의 변두리에서 중심 쪽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미국이 원한 ‘메가딜(mega deal)’에 관해서는 시간이 좀 더 지나 봐야 성사 여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이 흔히 쓰는 표현이 있다. “아직 시간이 있어.”
글·하스니 아비디 Hasni Abidi
정치학자
앙젤리크 무니에쿤 Angélique Mounier-Kuhn
제네바 Cernam(아랍지중해연구센터)의 대표, 『Moyen-Orien. Le temps des incertitudes 중동. 불확실성의 시대』의 저자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Akram Belkaïd 아크람 벨카이드, ‘Idylle entre les pays du Golfe et Israël 미국이 왜 아랍 국가들과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에 나서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프랑스어판 2020년 12월호, 한국어판 2021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