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뒤덮은 분노를 투시하다

오큐파이 1년

2012-06-12     라파엘 켐프

네 명 중 한 명이 실업자인 스페인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지난 5월 15일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분노한 사람들' 운동 1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영국과 미국, 칠레, 스페인 등지에서 불의한 체제에 반대하는 이 시위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모이게 되었는가?

미국 남부 맨해튼의 마천루가 모여 있는 곳은 월가에서 몇 블록 떨어진 브로드웨이 50번가이다. 수많은 투자금융 회사와 변호사 사무실들이 이 멋진 주소지의 건물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몇 개월 전 12층에 새 이웃이 들어오면서 건물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이름과 직업, 방문 목적은?" 컴퓨터에서 거의 눈을 떼지 않은 채 티셔츠 차림에 수염을 기른 청년이 기자에게 묻는다.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 사무실의 안내원이다. 그는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수많은 출입자들을 기록한다. 방문객들에게는 번호표와 함께 '점거 사무실'(Occupied Office)이란 글귀가 새겨진 배지를 교부한다. 사무실 이름을 얼핏 보면 착각할 수 있다. 사무실을 점거한 것은 맞지만 모든 과정은 합법적이다. 이들은 한 '익명의 관대한 기부자' 덕분에 2011년 10월 말부터 이 공간에 둥지를 틀었다.

사무실에는 여러 개의 작은 방과 회의실, 거실이 있다. 벽면에는 2011년 9월 17일 맨해튼 남부의 주코티 공원을 처음 점거한 날부터(1) 만든 수많은 포스터가 빼곡하다. 점거자들은 이제 이곳으로 옮겨와 일한다. 차기 시위를 준비하고 언론, 지역 시민단체 등과 교류한다. 일부는 매일 상주하며 월가 점거운동을 위해 '상근직'으로 일하고 있다. 상근활동가라니? 모든 종류의 서열과 위계를 거부하고 지도자를 원치 않는 운동의 선도자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상근직?

'유럽 역사'에 대한 박사 논문을 준비 중인 마크 레이는 자신을 월가 점거운동과 '함께하는' 조직 활동가로 정의한다. 그는 이 사무실을 '사령부'로 묘사하는 미국 기자들을 비판한다. "기자들은 기사를 쉽게 전달하려고 운동의 중심인물이나 사령부를 찾는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이 사무실은 우리 운동원의 사무실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여느 공간 중 하나일 뿐입니다"라고 말한다. 그 자신도 구태의연한 관행은 전혀 없음을 강조한다.

영국이나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점거운동 구호의 핵심은 지도자나 중앙집권주의, 조직화에 대한 거부다. 그렇게 지역에서 새로운 연대를 실천하는 것이다. 캠프나 점거, 시민 공회, 그리고 실무조직의 운영 방식은 적어도 여러 요구사항을 수용하고 고려해 이루어진다. 어떤 투쟁에 참여하면서 획득한 물질적·상징적 성과를 새로운 관료주의가 점유하게 되는 일을 피하려는 것이다. 집단 결정 과정에서 특정 그룹이나 인물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면서 등장하지 않도록 '분노한 사람들'과 점거자들은 즉각 공회나 캠프의 일상에서 준수해야 할 총체적 절차와 지침을 세웠다.

만장일치와 효율성, 둘 중 무엇을 좇을 것인가?

지난해 11월 말, 영국에선 60대의 안나가 린스버리 광장 캠프의 IT 텐트 유지를 맡고 있었다. 세인트폴 성당 광장에 이어 런던 증권거래소가 두 번째로 점거한 곳이다. "스페인과 미국에서도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만장일치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캠프를 위해, 운동 전체를 위해 발언하지 않습니다."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은 시민 공회 활성화를 위한 신속 지침을 마련했다. 예를 들어 이런 지침 사항이 있다. "개인적 감정을 시민 공회에 전염시키지 않도록 조용한 몸짓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긴장되거나 부정적 감정이 드는 순간에(2) 웃음의 가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구상하는 바가 실제 매우 복잡한 문제일 수 있고, 그 외에 이런 규칙이 영원히 지켜질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미국 뉴욕에서는 작업반을 하나 결성해 시민 공회의 운영 규칙 개선을 담당하게 한다. 2011년 12월 7일 점거자들의 회의 장소던 월가 60번지 도이치뱅크 안의 일반에 공개된 내부 홀에서 30여 명이 토론을 벌였다. 시민 공회의 사회자가 공회 진행에 개입할 권리가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존재감이 없어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였다. 문제는 복잡하다. 주최자가 자신의 주도적 입장을 이용해서는 안 되지만, 공회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토론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꽤 오랜 시간 토론했지만 문제는 명료하게 해결되지 못했다.

미국의 점거대는 효과적인 의사 전달을 위해 특이한 기법을 하나 고안했다. 시위대는 확성기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 확성기'(3)를 이용해야만 했다. 한 사람이 군중에게 말하려 할 때, 그가 한 문장을 말하면 그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그 문장을 반복하고 이는 즉각 다시 더 멀리 떨어진 이들에 의해 반복된다. 발화자의 연설은 그를 둥글게 둘러싼 군중을 통해 퍼져나가 모든 사람이 듣게 된다. 이 방식이 실제 가능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주 간단한 방식이었기에 누구든지 마이크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뉴욕 빈민가 출신의 집에서 쫓겨난 한 흑인 여성도 2천여 명의 시위대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 며칠 전에는 화려한 링컨센터(뉴욕의 오페라극장) 앞에서 정치 예술 퍼포먼스가 있었다. 인간 확성기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관람객들은 시위대에 합류했고, 그중 한 사람이 이렇게 외쳤다. "이 오페라극장은 시민의 것이기에 무료여야 한다." 즉흥적인 시위에서 전체가 함께 방향을 결정해야 할 때도 인간 확성기를 사용했다. 물론 이런 방식이 의견의 불일치나 언쟁을 피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일부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쓰기도 했다. 그러나 마이크나 확성기가 자신의 앞에 오기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점이 있다. 점거 시위자들에게는 하나의 오락이었다.

칠레 학생들은 지난해 피노체트 독재가 무너진 후 대규모 저항 시위를 벌였다. 여러 측면에서 학생들의 시위는 성공이라 볼 수 있다. 비록 '교육 민영화 반대' 등 학생들의 주요 요구사항이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지만, 그들은 교육 문제를 '부의 분배' 같은 큰 문제들과 대등하게 공공 의제화하는 데 성공했다.

학생들은 학생 공회의 절차 규정을 정해 문서화하지 않았다. 이같은 운동 방식에 반대하는 일부 목소리도 있었지만, 운동은 서열화된 구조에서 카리스마 있는 학생 지도자들이 이끌었다. 이들은 정부와 협상하고, 기자회견을 열고, 언론과 접촉했다.

공산주의 운동가인 카밀라 발레호는 학생운동을 이끈 최초의 리더일 것이다. 2011년 칠레대학생연합회(FECH) 회장인 그녀는 시위와 협상, 기자회견의 선봉에 섰다. 길거리와 언론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었다. 그녀의 유명세 덕에 피노체트 때 시작된 교육 민영화 제도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비중이 쏠리면서 대학가를 뒤흔든 논쟁은 가려졌다. 사실 칠레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는 발레호의 카리스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의 기반이 된 활발한 학생운동 때문이었다. 학기가 끝날 무렵인 지난해 12월, 법학과의 두 학생 안드레스와 루코는 그동안의 학생운동을 평가했다. 이들은 대학 공회에서 내린 일부 결정을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따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2011년 칠레 가톨릭대학생연합 회장이자 공학을 전공하는 지오르지오 잭슨 또한 학생운동 유명 인사 중 하나다. 24세의 이 젊은 학생을 만나는 이들은 그의 손을 꼭 잡고 칭찬한다. 그는 갑작스러운 유명세를 감사히 여기고 가시적인 운동 방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칠레에서는 지도자가 있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능숙히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발레호가 없었다면 학생운동이 크게 확산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녀는 훌륭한 지도자입니다.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사람들은 그녀를 신뢰합니다. 그녀는 대중과 운동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지도자는 명확하고 교육적으로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공회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말하고, 이어서 또 다른 사람이 말하고… 결론이 쉽게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필요합니다. 메시지를 단순화해서 전달해야 합니다."

"흑인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지요"

칠레의 운동 목적이 월가 점거운동보다 더 명료했음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칠레 운동은 효율성에 합의했다. 이런 논리에서 지도자들의 의견이 모든 학생들의 의견을 대변한다고 간주된다. 한편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과 월가 점거운동은 반대 논리를 펴고 있다. 이들은 인내심을 갖고 가능한 한 모두 포용하고, 모두가 평등한 운동을 건설하려고 한다. 그러나 '소외된 자들의 의견'을 포함해 개개인을 모두 참여시키자는 이 목표가 실현 가능할까?

월가 점거운동의 시위 가운데 지난해 12월 1일 뉴욕 오페라극장 앞에서 벌어진 시위는 예술과 정치, 신체적 퍼모먼스를 결합했다. 시민 공회는 이날 간디의 삶을 다룬 필립 글라스의 오페라 <사티야그라하>(진리의 파악) 공연이 끝난 후 열 계획이었다. 작곡가가 시위에 동참하고 이를 지지한다는 사실을 통해, 뉴욕시가 비폭력 저항에 관한 오페라를 기획하면서 동시에 월가 점거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모순을 지적하려 했다. 시위는 경찰들의 감시 아래 열렸고, 경찰들은 광장에서 시위대들이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봉쇄했다. 사회자는 여러 번에 걸쳐 모든 사람이 발언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시민 공회에서 우리는 진보적 가치의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발언권을 행사할 사람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날 뉴욕의 추운 밤, 시민 공회는 몇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왜 월가 점거운동을 지지하는지를 밝혔다. 그러나 그날 저녁 오페라극장 앞에서는 진정으로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는 없었다. 그보다는 명문대를 다니며 학자금 대출에 짓눌려 힘들어하는 학생, 임금 인상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공감을 얻지 못하는 합창단원, 아니면 몇백 달러를 내고 <사티야그라하> 공연을 관람할 능력이 안 되는 젊은 음악애호가들이 있었다.

소수자들과 '소외된 목소리'의 참여를 어떻게 이끌어내느냐는 월가 점거운동 앞에 놓인 과제다. 에릭 리처드슨은 '중산층' 출신이라고 말한다. 음악을 공부한 그는 삶의 우연을 통해 부유한 생활, 마약, 뒤이어 교도소, 재활 비정부기구(NGO), 그리고 점거운동을 알게 되었다. 점거운동이 시작되기 전 여름, 그는 브롱크스의 빈 건물에서 살았다. 9월 주코티 공원을 찾은 뒤 '엄청난 기쁨'을 느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나는 점거 시위자들의 전형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소수자이고, 소수자는 없었습니다. 흑인 수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지요."

다르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마니사 마하라왈은 "그동안 봐온 것보다 훨씬 많은 유색인과 함께 주코티 공원에서 행복을 나눌 수 있었다"라며, "시민 공회에서 위원회 지도자나 선언문을 작성한 이들은 주로 백인들이었다"(4)고 말했다.

리처드슨은 이 현상을 나름대로 설명한다. "크게 2개 캠프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정보기술(IT)과 미디어를 위한 좋은 텐트가 모여 있었고, 부엌 텐트 너머 다른 쪽에는 흑인과 라틴계가 모여 있었죠. 밤에는 의자 위에서 자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종의 분리였습니다. 물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동부 주코티와 서부 주코티가 분명히 나뉘어 있었습니다. 각각 제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주코티 공원에서 쫓겨난 이후, 리처드슨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 점거한 맨해튼 북부의 한 교회에서 머물렀다. 이어서 다른 이들과 함께 그는 뉴어크를 점거하기로 했다. 맨해튼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인 뉴저지 거대 외곽 도시의 훨씬 가난한 곳으로 많은 소수자들이 살고 있다. "뉴어크 점거자들 중에는 특히 서부 주코티 점거자들이 많았습니다. 이 도시는 그들과 닮았죠. 여기서 우리는 소수자 집단과 접촉해 운동하려 합니다. 이번주 브루클린(5)에서 월가 점거운동이 성공시키지 못한 일입니다."

뉴어크 점거가 초라한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12월 그곳에는 많아야 20여 개 텐트가 있었다. 점거자들은 확연히 소외된 자들이었다. 브로드웨이 50번가 점거자들처럼 고학력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캠프를 활성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월가 중앙 조직과 연락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곳 점거자들이 맨해튼 점거운동 공회에 참석차 기차표를 사기 위해 기자에게 5달러를 달라고 했을 때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월가 점거운동은 본질적 의미가 있다. 이 운동은 많은 지지와 기부를 이끌어냈다. 주코티 공원 현장에서 이같은 지지는 즉각 현금으로 바뀌었다. 런던 증권거래소 점거에서도 시위를 보던 사람들이 중앙 텐트로 들어가 몇십 파운드를 기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효과적인 모금 체계로 기부는 주로 온라인을 통해 했다. 지난해 10월 말 집계된 점거운동 모금액은 4억4천만 원 정도였다. 페테 두트로는 회계 작업반 책임자 중 한 명인데 여러 조직에 기금 배분을 맡고 있다. 브로드웨이 50번가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작업반별로 통신기기 구입이나 교통비 명목으로 하루 11만 원가량의 예산이 할당된다"고 했다. 기금은 시위자들이 연행될 경우 소송비나, 미국 내 다른 점거지에 대한 지원비 등으로 사용된다.

스페인에서 2011년 5월 15일 시작된 이른바 15M 운동의 '분노한 사람들'은 단호하게 돈을 거부한다. 스페인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 회장인 리카르도 가르시아 잘디바르는 "우리는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본다"고 발끈한다. "단, 적어도 명확한 목표가 있는 모금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대가 없이 주고 있고, 돈을 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불신도 있습니다." 그 결과 모든 기부는 현물이다. 15M 운동 초기 이에 적극 참여하기 위해 마드리드에 정착한 뒤 현재 <15M News>를 담당하는 청년 페드로 아코스타는 "일하는 방식을 포함해 모든 것을 바꿔보겠다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

자금 부족으로 <15M News>는 중앙집권적으로 인쇄되지 않는다. 이 신문은 인터넷에 PDF 파일로 배포되고, 자원봉사자들이 알아서 인쇄할 수 있다. 이런 광범위한 배포를 통해 신문이 좀더 효과적으로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15M News>의 목적은 '반(反)정보'입니다. 우리는 미디어가 말하는 것과 어긋나는 진실을 얘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15M 운동이 하는 일을 알리고 위원회의 제안을 알립니다. 운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의 신문을 세워 대안 저널리즘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운동가들에게 자기들만의 정보 수단 창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보면 기존 언론에 대한 불신을 가늠하게 한다. 취재 중 만난 대부분의 '분노한 사람들'이나 점거자들은 흔쾌히 인터뷰에 응했지만, 인터뷰를 꺼리거나 자신의 의사를 왜곡할까봐 두려워 기자를 불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페인 15M 운동의 주요 활동가들은 원칙적으로 모든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뉴욕에서는 조직책들과 이메일을 10여 통 주고받은 뒤에야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인터뷰하려면 취재 계획과 인터뷰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고 심지어 기자의 출신 배경까지 알려야 했다. 브로드웨이 50번가에서 일부 영향력 있는 점거자들은 기자가 사무실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다. 사무실을 방문하려면 분명한 취지의 서면 요청이 있어야 했고, 추천자의 보증에 이어 만장일치 동의가 있어야 했다.

연재 만화와 르포, 정치 이론

그제야 점거운동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담기 위해 이들이 편집한 수많은 간행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점거된 월스트리트 저널>(The Occupied Wall Street Journal) 편집장 마이클 레비튼은 신문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점거 후 둘쨋주에 주코티 공원을 찾았습니다. 누군가 신문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우리 의견을 말하고, 운동의 참모습을 알리고, 우리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수단이었죠. 언론은 믿을 수 없기에 우리는 스스로 이 점거를 다뤄보기로 했습니다. 처음부터 크리스 헤지스나 나오미 클라인 같은 훌륭한 필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공식 시민 공회에서 독립적으로 모금한 기부 덕에 8면짜리 1호 신문 2만 부를 인쇄했다. 레비튼의 말에 따르면 5호는 25만 부를 인쇄했으며, 이 중 일부는 스페인어 번역까지 들어 있다고 한다. 미국 좌파의 엄청난 가입 덕분에 비정기적으로 간행되는 이 신문은, 운동 신문으로서는 놀랄 정도로 프로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오클랜드 시위에 관한 기사에선 자신의 운동을 스스로 비판(6)도 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독립 중앙지 외에 <보스턴 오큐파이어>(Boston Occupier), <점거된 워싱턴포스트>(The Occupied Washington Post) 등 수많은 지역 신문이 생겨났다. 그뿐만 아니라 <TIDAL: 오큐파이 이론과 전략>(TIDAL: Occupy theory, occupy strategy)이나 <점거하라!>(Occupy!) 같은 좀더 이론적인 분석을 하는 잡지도 있는데, 주디스 버틀러나 가야트리 스피박의 글을 싣는다. <An OWS: 인스파이어드 가제트>(An OWS: inspired gazette)는 진지하게 운동의 진행 과정을 상세히 보도하고, <오큐파이 코믹스>(Occupy Comix)는 '99%의 이야기'(7)를 이미지로 보여준다.

가장 제대로 보도하고, 가장 열심히, 가장 정기적으로 점거운동 신문이 발행되는 곳은 아마 런던일 것이다. 핀스베리 광장에서 만난 매튜는 스스럼없이 말한다. "우리 숙모 집으로 같이 가요. 내 명함을 주겠습니다!" 그는 <점거된 런던타임스>(The Occupied Times of London)지의 사진작가다. 런던의 점거시위를 취재하러 온 그는 이 운동에 합류하게 되었고, 캠프에 머물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신문은 공식 시민 공회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래서 소작업반은 시간에 맞춰 신문을 발행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말부터 올해 5월 초까지 모두 13호가 발행되었다. 가장 최근호는 20면이나 된다. 신문에는 런던의 점거운동 현황뿐 아니라 전세계 점거운동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가로세로 낱말퀴즈까지 싣고 있다. 무엇보다 호마다 '대토론'을 제안한다. 다음은 지난 1월 20일 발행된 신문에 실린 토론 주제다. "점거운동은 경제·사회·환경 정의라는 근본 원칙 위에 성립된다. 그러나 우리 중에 어떤 이들은 체제를 전복하기 원하고, 또 다른 이들은 이보다 개혁을 선호한다. 이번 주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혁명이 필요한가, 아니면 체제 내 개혁의 길을 따를 것인가?"

글•라파엘 켐프 Raphaël Kempf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위원. 남극보호연합(ASOC) 한국 어드바이저.


(1) 포스터와 표어를 보려면 http://occuprint.org.

(2) 에두아르도 로마노스의 말을 인용했다. ‘분노하는 자들과 사회운동 민주주의’, 2011년 11월 18일 Laviedesidees.fr.

(3) 이 방식은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수천 명이 모인 정치 집회에서 이미 사용된 방식이다.

(4) Manissa Maharawal, ‘Standing Up’, <Scenes from Occupied America>, Verso, 2011년, 런던과 뉴욕.

(5) 2011년 12월 6일 ‘Occupy Our Homes’ 시위. 2012년 5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된 ‘점거하라! 런던에서 산티아고까지’ 기사 참조.

(6) <The Occupied Wall Street Jouranl> 2011년 12월 12일자에 실린 마이클 레비튼의 ‘Sending a message: Occupy shuts down ports in Oakland and Pacific Northwest’.

(7) “우리는 99%이다”는 ‘1%의 최상류층’에 빗댄 월가 점거운동의 슬로건.


월가 점거가 가져온 변화

점거시위 초기에는 '구체적 요구가 없었다'는 점 때문에 시위자들이 비판받았다. 그러나 시위자들 관점에서 이런 비난은 근거가 없다. 그들은 금융 권력과 미국 사회가 겪는 불평등 확대, 극빈층에 미치는 자본주의의 악영향 등에 반대하며 포괄적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요구사항을 명확히 밝히지 않으려 한 데는 점거운동이 특정 문제로 축소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점거운동 이론 전문지에 이렇게 썼다. "충족될 수 있는 요구는 필연적으로 이를 들어줄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게 된다."(1) 전 지구적 문제라는 점을 보여주기 원하는 이들로서는 특정한 요구사항을 들어달라고 특정 권력에 요구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 견고한 이 입장은 실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월가 점거운동이 실제로는 수많은 특정 문제에 개입했기 때문이다. 담보 대출(2) 위기 끝에 집에서 쫓겨난 가난한 가족들을 돕는 데 나서기도 했다. 이제 점거운동이 힘을 모으고 있는 주제는 학생들이 진 무거운 빚이다. 이외에 여러 문제에 대한 활동을 확대하면서 이 문제들과 관련된 '요구'를 내세울 것이다. 브로드웨이 50번가 사무실에서 만난 상근 조직책인 레베카는 이렇게 말한다. "점거운동은 다른 여러 단체와 기존 시위에 대한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 모든 운동을 서로 이어주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 점거운동은 미국 사회에 이미 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점거운동은 미국 내에서 '대화를 바꾸었다'. 이제 불평등은 공공 논쟁의 한 주제가 되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011년 12월 캔자스에서 있은 연설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부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고 재정을 건전화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점거운동에 의해 좋은 이미지로 다시 인기를 누리게 되면서, 그는 최상의 1% 부자들의 수입이 지난 10여 년간 2배 상승한 점(3)을 말했다.

언론인 존 니콜은 미국 사회에 근본적 변화가 왔다고 한다. "캔자스 연설 석 달 전, 대통령은 공공부채 문제만 거론했다. 그는 긴축정책을 옹호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미국인들도 자신의 계급 위치가 어디쯤인지 아는 유럽처럼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