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힌두 간 증오,인도 '테러 천국'으로

이슬람 혐오증 확산에 이슬람 공동체 '반테러 칙령' 수습나서 이슬람 소외·차별 '테러' 유혹… '힌두민족주의'정당 반이슬람 선동

2009-02-02     웬디 크리스티아나센 | 영어판 편집인

델리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뭄바이 테러 1주일 후, 연립정부를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수도를 포함한 5개주 중 3개 주의 보궐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현 정부의 4년간 통치로 국민들이 지쳐 있고, 경제, 재정 상황이 최악인 상황에서 11월의 유혈사태로 만신창이가 된 국민회의파가 승리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12월 8일 국민회의파가 라자스탄 주(州)에서 인도민족주의 정당인 인도인민당(BJT)을 물리쳤다. BJT는 테러 특히 이슬람의 테러에 대한 중앙정부의 무능을 선거 이슈로 삼았다.
 
 유권자들 '대결보단 실용' 선택
 "BJT는 핏자국으로 둘러싸인 '테러리즘'이란 대형 활자와 'BJT에 투표하는 것이 바로 안전에 투표하는 것입니다'라는 슬로건이 적힌 전면광고를 게재했다. 그러나 그런 선전이 먹혀들지 않았다. 이슬람교도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우려 했다. 유권자들은 빵과 버터라는 실용을 선택했다." 세속 이슬람 투사이며 작가인 자베드 아난드의 지적이다.
 유권자들은 지역과 사회문제(식품가격, 물 공급, 일자리 등)를 풀 수 있는 정당에 투표를 한 것이었다. 불가촉천민 정당인 대중사회당(BSP)도 이것 때문에 약진했다. 뉴델리에서 BSP의 지지도는 2003년 5%에서 지난해 12월 15일 14%로 상승했다. BSP를 창당한 카리스마 넘치는 쿠마리 마야와티는 불가촉천민, 상층 힌두교도인과 이슬람 인도인 사이에 전례 없는 연합을 결성하여 우타르 프라데시 주(인구 1억7천만 명)의 총리가 되었다. 이 연합은 다른 계층에 까지 확장될 수도 있다.
 다가오는 봄 총선 때에도 이런 결과들이 되풀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BJT의 계책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인도 극우민족주의 공동체가 바라지만 이슬람 공동체가 우려하는 공동체간의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슬람 공동체는 테러 후폭풍을 염려하며 결집하고 있다.
 
 이슬람 공동체 '테러 후폭풍' 염려
 뭄바이 테러 발생 10일 후인 12월 7일, 종교 지도자들, 교전(敎典)해석가들, 일반 이슬람 교도들은 자베드 아난드와 그가 이끄는 '세속(世俗)민주주의를 위한 이슬람' 단체가 주관한 희생자 추모 침묵집회에 참석했다.
 그들은 '통치시스템의 붕괴'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으며, 알카에다, 탈레반, 라쉬카레 타이브 같은 파키스탄 테러 단체들과 몇몇 인도의 지방 테러조직 등 '대량학살에 연루된 모든 조직들'을 규탄했다. 그들은 뭄바이 테러가 '이슬람의 이름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1)고 주장했다. 방갈로르, 아마다바드, 인도르, 하이데라바드, 뉴델리 등지에서 집회가 개최되었다. 이슬람 교회 당국은 9명의 자살 특공대가 진정한 이슬람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슬람 공동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거부했다.
 뭄바이 연속테러는, 희생자 163명이 대부분 인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인들이 사망한 연유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분리주의 운동의 요람인 아삼에서 폭탄 테러로 2008년에만 200 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뉴델리(2008년 9월 13일과 30일, 19명 사망), 말레가온(9월 29일, 5명 사망)2), 아마다바드(7월 26일, 49명 사망), 방갈로르(7월 25일, 2명 사망), 자이푸르(5월 13일, 63명 사망) 역시 테러의 표적이었다. 그 당시 의심의 눈초리는 전통적 혐의자인 파키스탄보다 지역 테러조직인 '인도 무자히딘'과 현재 활동이 금지된 '인도 이슬람 학생운동(SIMI)' 단체로 쏠렸다.
 대부분의 미디어는 흥분된 분위기를 조장했다.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나 정보부서에서 흘러나온 '기밀정보들'이 진실로 여겨졌다. 세속 지식인 계층이며 좌파인 이슬람 인사들은, 테러리스트 '지도자들'이 밝혀지고, 수백 명의 이슬람교도들이 체포되고, 고문으로 작성된 '자백'보고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우려를 했다. 이슬람 공동체는 주요 테러 용의자들이 코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아니라, 세속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란 사실 때문에 더욱 곤혹스러웠다.
 "우리의 정치지도자들이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당성의 위기가 존재한다. 게다가 인도에는 테러리즘 같은 중요문제에 대한 정치적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뉴델리 자미아 밀리아 이슬라미아 대학의 미디어 전문가 오바드 시디키는 말했다.
 
 테러 반대 '종교 칙령' 선포
 그러나 이슬람 혐오증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이슬람 연구센터인 '다룰 울름 데오반드'는 2008년 2월부터 테러반대 종교칙령3)을 선포했고, 3월 31일 뉴델리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는 하비부르 레흐만 소장과 부소장 3명이 내린 종교칙령에 찬성하는 주요 이슬람 조직들이 참석했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데오반드'는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다. 다수를 차지하는 대부분의 수니파 이슬람 교도들은 파키스탄과 서구의 많은 이슬람 교도들처럼 데오반드의 가르침을 따른다.
 이 이슬람학교는 뉴델리에서 자동차로 6시간 떨어진 작은 시골의 사탕수수밭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다룰 울름의 이슬람 학교에는 약 3천 500명의 학생들이 재학 중인데, 이들은 졸업장을 받을 때까지 13년 동안 기숙한다. 매년 1만 명의 지원자 중에 800 명의 후보자가 선발되어 무상교육을 받는다. 홍보담당 팀장인 아딜 시디크는 "이 지역 농업노동자들이 우리를 매우 좋아해, 학생들에게 밀을 그냥 준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설립하거나 또는 가르치는 방대한 학교 네트워크를 통해 다룰 울름의 가르침을 전파한다.
 2001년 9월 11일 테러 발생 후, 이 학교는 오사마 빈라덴, 탈레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아딜 시디키는 "실상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1866년 설립된 이 학교는 온건 노선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존경받고 있다. 학교 설립자들은 1857년 대영제국에 반기를 든 세포이 폭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4). 이 학교는 항상 인도의 세속 민주주의를 옹호해 왔다.
 이슬람 교전(敎典) 해석가들은 폭력을 거부하는 솔선 행동을 보였다. 가입자가 1천만 명인 데오반드와 연관된 조직인 자미아트 울레마 힌드(이슬람 학자조직, JUH)의 권유에 따라, 2008년 11월 2일 하이데라바드에서 열린 테러 반대집회에 6천 명 이상의 교전 해석가들이 참석했다.
 이슬람의 이름으로 폭력을 금지하는 새로운 종교칙령이 공인되었고, 10만 명의 이슬람교도들이 폐막식에 참석했다. 인도 상원의원이며 JUH 사무총장인 마우라나 마흐무드 마다니는 '소외감에 대한 모든 토론의 기본 바탕인 국가 통합'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그는 JUH가 불만 있는 젊은이들에게 다가가 '테러가 지하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키기 위해 배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데오반드 스승들의 영향력이 종교계와 빈곤 계층에는 막강하지만,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많은 이슬람 교도들은 교전해석가들이 '속인법(personal law)' 개혁을 위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유감을 표하고 있다. '속인법'은 가정사(이혼, 결혼, 상속)와 관계된 모든 문제에 대해 이슬람법이 적용될 수 있게 허용해주는 개인의 지위법이다5). 수많은 여성들이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예를 들어 이혼 절차가 흔히 남성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6).
 
 '불공정과 빈곤'이 진짜 테러 원인
 극단주의를 상기시키는 타블리기 자마트와 자마트 이슬라미 힌드(JIH)라는 두 개의 다른 종교단체도 존재한다. 타블리기 자마트는 국외에서 극단주의로 의심받지만 사실은 정치와 무관한 순수 종교 세력이다.
 자마트 이슬라미 힌드는 1941년 8월 26일 파키스탄에서 압둘 알라 마우두디가 설립한 이슬람 근본 운동단체의 인도 지부다. 이 조직은 전국에 2만 5천 명 밖에 안 되는 신봉자들이 가입하고 있지만, 주요언론에 자주 등장하며, 상당수의 이슬람 유명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최근 이 조직은, 비록 데오반드 출신 이슬람 교도들이 정부의 모든 이슬람정책을 위협으로 간주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조직의 노선을 완화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JIH는 테러리즘에 대한 2008년의 이슬람 공동행동에서 배제되었다. 10월에 JIH는 테러에 대해 독자적인 선언을 발표했고, 한달 후 '테러 반대투쟁을 위해' 평화의 카라반 2대로 전국을 누볐다. 케랄라 주에서는 훨씬 과격한 단체인 민족민주주의 전선(NDF)이 JIH에서 분파되어 탄생했다. 이 단체는 힌두교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무장 투쟁을 주장한다.
 진짜 위험은 공동체 사이에 널리 퍼진 불공정과 빈곤 때문에 생겨난다. 사실 인도의 중요 소수파로 전체 인구의 13,4%를 차지하는 1억5천400만 명의 이슬람교도 대부분이 그처럼 찬양받는 '인도의 기적'에서 소외되어 있다. 라젠드라 사샤르 법무부 장관이 주도하는 위원회의 보고에 따르면7), 이슬람교도들이 "대부분의 인적자원개발 지표에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이 연구는 2006년 11월에 정부 주도로 수행된 것이지만, 연구 보고서의 어떤 권고 사항도 시행되지 않았다.
 
 사회 최하위 계층, 이슬람교도
 공식 자료에 따르면, 빈곤층 이슬람교도들이 빈곤층 힌두교도들보다 훨씬 더 곤궁하다. 이슬람교도들은 힌두교도의 가장 낮은 계층 또는 불가촉천민 수준이거나, 때로는 그보다 더 낮은 수준에 처해있다. 그 비참함은 뭄바이 서부 골리바르의 빈민굴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이곳의 이슬람교도들은 2층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만 하는 임시 쪽방에서 산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세입자 조합이 존재하고, 백신(장티푸스와 B형 간염 백신을 포함)을 주사해주는 임시 보건소도 있다. 심지어 거리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분리된 영어수업'을 받을 수도 있다.
 사샤르 위원회에 따르면, 이슬람교도들이 가장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6-14세 어린이의 4분의 1이 전혀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학교를 떠났다. 이슬람 공동체의 문자해독 비율은 국가평균 65%에 비해 59%다. 최고 대학들의 4%를 점유하는 이슬람교도들은 그 가운데 5% 만이 정부 부서에서 근무한다.

뭄바이의 이슬람 여성 우체국장인 후메라 아흐메드가 우리에게 확인해 준 사실은 이슬람 여성이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에서' 힌두교도들이 관용적이고 이슬람교도들이 배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슬람교도들이 차별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말한다. "나는 25년간 살았던 힌두교도 소유의 건물에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사회적 지위와 국제도시에 산다는 사실로 인해 이슬람공동체의 폐쇄된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있다."
 뉴델리의 힌두교도 기자인 쇼마 샤우드후리가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고 있다. "우리 공동체들은 항상 게토에서 살았다. 그러나 우리들은 대중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다시 만난다.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거래한다. 우리들은 격리되었지만 함께 살고 있다. 이 균형이 오늘날 위협받고 있다."
 
 이슬람 '차별속 평화', 위협받아
 시디키 가족이 이런 변화의 실례를 보여준다. 시디키 가족은 모든 사회 계층이 모여 사는 뉴델리의 이슬람 지역 자미아 나가르에서 살았다. 작은 동네에 불과했던 이곳은 1930년대 자미아 밀리아라는 명문 대학이 개교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정원이 딸린 식민시대 스타일의 아름다운 빌라들과 안락한 아파트들 옆에 상당수의 노숙자들이 거주하는 더럽고 복잡한 골목들이 함께 펼쳐져 있다.
 오바이드 시디크는 여기서 오랫동안 편안함을 느끼며 살았다. 그러나 독실한 시크교 신자인 부인을 맞고서, 특히 시크교 원칙으로 길러지는 딸이 출생한 후 모든 것이 복잡해졌다. 그래서 공해가 심하고 교통체증으로 인해 이동하는 데 2시간이 걸림에도 불구하고, 시디크 가족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위성도시로 이사했다. "운전수가 있어서 매일 그 여정을 소화해 낸다."고 시디크 가족은 말했다.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서 몇 킬로 떨어진 그하지하바드에 근접한 바이살리에는 피자헛과 맥도날드 매점이 많이 있다. 디왈리(인도의 설날) 기간에는 꽃 장식, 조명, 음악이 넘치는 도시에 쇼핑객들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쇼핑에 열중하고 있지만, 2008년 내내 전국을 뒤흔들었던 테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장벽 뒤에 잘 보호된 시디키 가족의 건물은 제법 근사하고(비록 엘리베이터는 말썽이지만), 수영장과 체육관을 갖추고 있다. 75가구 중 2가구만이 이슬람교도이다.
 현재의 불편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947년에 분단, 독립, 강제이주라는 상흔을 경험한 사람들은 여전히 증오심을 갖고 있다8). 1920년대부터 '민족자원자 조직,'(인도 파시스트 정당, RSS)이 대두하면서 힌두교 우파가 힌두 '민족'이란 개념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힌두 민족의 영광스런 과거는 무굴제국의 통치시기에 중단되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인도인민당과 그 지지자들이 이슬람공동체를 소외시키려고 노력했다. 역설적으로 미국과 다른 곳의 힌두교도 집단 거주지가 이런 목표 달성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쇼마 샤우드후리에 의하면, "사람들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분리를 문명 단절로 간주한다. 상당 기간 동안 모한다스 크람찬드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 같은 건국의 아버지들은 화합 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그런 분리를 억제했다."
 
 이슬람·힌두, 반목과 균열 심화
 그러나 독립 후 34년 동안 '폭력사건들'이 계속 목격되었다. 1948년 1월 30일 힌두교 과격파에 의해 마하트마 간디가 암살되었고, 1984년 10월 31일 두 명의 시크교 경호원들에게 인디라 간디가 살해되었다. 1992년 아요디아(ayodhya)의 바브리 모스크 사원 파괴는 인도전역에 폭력 물결을 일으켰다9). 10년 후 구자라트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카시미르 분쟁 때문에 공포가 가중됐다. BJP는 이슬람교도들이 파키스탄 편을 든다고 비난했다. 인도 전역이 이 말에 동의했다.
 약 2천 명의 사상자를 낸 2002년의 폭동은10)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 폭력 행위는 경찰과 공모한 구자라트 주(州) 고위 간부들, 특히 나렌드라 모디 총리를 포함한 힌두 민족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탐방기사에 의하면 이 이슬람교도 사냥은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 범인들이 처벌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족들이 허락을 못 받아 자기 집에 돌아가지도 못했다. 비정부기구 '사파르'의 설립자인 소피 칸 여사는 여성만 집계해서 15만 명이 경찰의 차별정책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고 말한다.
 450만 명의 주민이 사는 주도 아마다바드는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서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는 힘겹게 공존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도시 서부의 주하푸라 같은 구역에 모여 산다. 주하푸라는 극빈층 이슬람교도 35만 명이 사는 거대한 게토가 되었다. 
 앞으로 공동체들 사이의 이런 분열이 전국으로 퍼져나갈까 봐 사람들은 염려한다. 확실히 BJP의 '온건 힌두주의'란 개념이 널리 먹혀들었다. 그러나 사실상 BJP 지도자들은 점진적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슬람교도에 대한 증오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BJP는 역사를 조작하고, 이슬람이 말라바르(케랄라 주) 해안에 온 아랍 상인들 덕택에 7세기에 상륙한 사실을 무시한다. 이슬람 수피교도의 성지 순례지에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인도의 풍요로운 혼합문화를 구성하는 성인들과 성소들이 함께 존재한다.
 
 불안한 '공존', 불투명한 미래
 뉴델리 남부의 메흐라울리에 위치한 성지(聖地) 하즈라트 크화자 쿠타부딘 바크티야르는 축제 기간에 노란 꽃 화환으로 장식되어 있다. 중산층 출신의 힌두교 노인 다사무이프 베르마는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 그는 26년 간 매일 그곳에 갔는데, 앞으로는 1주일에 4번 방문할 예정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소에 모인 빈자(貧者)들의 상당수가 이슬람교도들이었다.
 성소 밖에서는 전통 수피교도 모자를 쓴 남자들이 땅바닥에 앉아, 팀파니와 북 연주자와 더불어 '카알리'라는 종교 음악을 노래하고 있다. 주변은 향 냄새로 가득 차 있다. 뮐러(종교지도자의 경칭)는, 종교와 상관없이 메흐라울리의 모든 빈민들이 음식을 얻기 위해 온다고  말했다.
 그곳으로부터 수백 킬로 떨어진 뭄바이에서 가장 큰(어쩌면 아시아에서 가장 큰) 빈민굴인 드하라비에는 적어도 주민 100만 명이 거주한다. 이 구역의 몇 군데에서 이슬람교도들이 힌두교도들과 나란히 살고 있다. 미로 같은 길과 작은 구멍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이 '도시'에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소규모 수공업 공장에서 같이 일한다. 이런 공존도 1993년의 인명 살상 폭동을 막지 못했다. 그 후 화해가 중요한 원칙이 됐다. 케랄라에서도 마찬가지로 두 공동체가 아무런 문제없이 함께 살고 있다.
 이슬람교도들은 앞으로 나랏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다. 선거일 몇 달 전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재고할 것이다. 만약 국민회의파가 약속을 저버렸다면, 이슬람교도들은 지역정당들과 새로운 동맹을 모색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슬람 정당들은 케랄라, 카시미르, 안드라 프라데시에서 활동하며, 안드라 프라데시의 주도(州都) 하이데라바드에서 권력을 장악했다(40%가 이슬람교도).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서 이슬람교도들은 불가촉천민 정당인 BSP와 성공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이슬람교도들은 더 멀리 나아갈 것인가?

 번역|고광식

 


 

각주

1)'세속 민주주의를 위한 이슬람' 참조, www.mfsd.org.
2) 말레가온 테러는 현세의 삶을 포기하는 '사드후'와 '사드흐비' 단체를 포함한 힌두교 극단주의자들과 정보국의 중령, 퇴역 군인이 공모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3) 발췌문 이용가능, www.mfsd.org/fatwaenglish.htm.
4) 윌리엄 달림플, "최후의 무굴제국", 블룸스버리, 런던과 뉴욕, 2006. "세포이 폭동",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07년 8월.
5)'속인법'은 영국인들이 제정했고, 1974년 그 내용이 강화되었음.
6) 두 개의 다른 영향력 있는 수니파 단체가 존재한다. 하나는 '살라피스트(선구자 종파)'이고 또 하나는 모든 개혁에 반대하는 더 엄격한 '수피 바렐비스' 종파다.
7)"인도 이슬람인의 사회, 경제, 교육적 지위", 인도정부, 2006년 11월.
8) 쿨디프 나야르와 아시프 누라니,"두 도시 이야기", 롤리 북스, 뉴델리, 2008.  살만 루시디, "자정의 아이들", 포쉬판, 파리, 1989년.
9) 야오디아 모스크 사원은 1992년 12월 6일 힌두교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들은 힌두왕인 람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그 자리에 힌두교 사원을 건립하고자 했다. 이 모스크 사원의 파괴로 인해 다양한 공동체들 사이에 유례없는 폭력이 발생했다.
10)'정의와 평화를 위한 시민들' 같은 비정부기구의 평가에 의한 것임, www.cjponlin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