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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2     사빈 블랑

이제 주변에서 수리공을 보기 힘들어졌다. 고장난 가전제품을 들고 애프터서비스센터에 가면 대부분 새 제품을 구입하는 편이 낫다는 말을 듣는다. 이를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팹랩'은 프리 소프트웨어와 마찬가지로 공장에서 제조된 상품의 수동적 소비를 지양하고 사용자에게 주체성을 되돌려주려는 운동이다.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을 갖는 것은 카를 마르크스의 꿈이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한 연구자가 그 꿈을 실행에 옮겼다. 1998년 미국의 물리학자 닐 거셴펠드는 '무엇이든지 (거의 다) 제작하는 법'이라는 제목의 수업을 개설했다. 수강생들의 연구 프로젝트 진행을 돕기 위한 시제품 디자인 실습도 포함됐다. 수강생들은 모든 종류의 디지털 제작 도구, 특히 3D프린터(플라스틱층을 쌓아올려 컴퓨터 파일 데이터를 실물로 찍어내는 디지털 기계), 나무나 금속 절단이 가능한 레이저 절단기, 디지털 프레이즈반 등 컴퓨터 지원 공작기계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수업은 대성공이었다. 학생들은 수업이 없는 시간에도 연구실에 와 원하는 작업을 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거셴펠드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2002년 이 첨단기술을 이용한 수공업 방식을 '팹랩'(Fab Lab·Fabrication Laboratory)이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로고와 헌장, 커뮤니티도 만들어졌다. 마케팅의 외관을 살짝 입힌 이 방식 덕분에 팹랩은 하나의 표준 '브랜드'로 자리잡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공작기계 사용을 용이하게 해주기 위해 문을 연 첫 번째 팹랩은 학생 전용이었다. 그러나 곧 이용 대상이 확대되면서 전세계의 개인화된 디지털 제작 대중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이제 개인들도 산업체나 디자이너의 전유물이던 시제품을 제작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따분하게만 여겨진 수작업이 이제 매력을 되찾게 되었고, 잠재적으로 (생산·소비 관계의) 전복 가능성까지 지니게 되었다.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 이것이 가셴펠드의 신조다. 그는 성장과 소비를 절대적 신조로 삼는 경제 논리에 반대한다. 무언가를 스스로 제작하는 행위는 대상을 재전유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변형이 불가능하거나 금지된, 사유화된 기술로 만들어진 폐쇄적 형태의 완제품을 구입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는 혁명에 가깝다. 보통 제품들은 수리하기 어렵게 돼 있다.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 이론이 주장하듯,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제품의 일부가 쓸모없게 돼버려 (제품 전체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도록 예정돼 있는 것이다.

기존 산업을 위협하는 새로운 경제 형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세탁기 버튼 하나가 망가졌다고 가정해보자. 우선 컴퓨터지원설계(CAD)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설계도를 그린다. 그런 뒤 3D프린터가 도면대로 부품을 인쇄한다. 가구 상점에 진열된 선반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없다면 목재를 직접 구입해 레이저 절단기로 원하는 모양의 선반을 제작할 수도 있다. 일단 제작에 성공하면 인터넷을 통해 설계도를 공유하고, 변형이나 개선을 위한 제안을 교환할 수도 있다. 그렇게 제품은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팹랩 프로젝트는 MIT의 '비트와 원자 센터'(Center for Bits and Atoms)에 의해 추진 중이다. 센터 이름만으로 이 프로젝트의 잠재력을 상상해볼 수 있다. 팹랩을 'Fabulous Laboratory'(굉장한 연구소)의 약자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실수로만 볼 일도 아니다. 포스트 인터넷 시대는 물질적 세계가 될 것이다.

디지털 공작 시대를 여는 팹랩, 내 서재로 들어온 공장

팹랩은 충분한 시장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든, 아니면 그런 영역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든 산업이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우리의 욕구를 해결해준다. 무엇보다 지역 차원에서 효과가 두드러진다. 가령 가나에서는 일상생활에 유용한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기계가 제작돼 요리와 냉장에 쓰이고, 무선 통신 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안테나와 라디오도 제작됐다. 노르웨이의 순록 사육자들은 가축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값싼 위성항법장치(GPS) 칩을 개발했다. 네덜란드의 '와그 소사이어티'(Wagg Society)에서는 한 장애인이 모든 지형에서 구동이 가능한 휠체어를 만들었다.

팹랩에서는 제한된 수단으로 실현 가능성을 즉시 확인해볼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 이노베이션이 촉진된다. 거셴펠드가 만든 헌장은 영리 목적의 프로젝트 개발을 (일정 한계 내에서) 허용하고 있다. "비즈니스: 팹랩에서는 상업적 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개방적인 접근권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상업적 활동은 랩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이뤄져야 하고 그 성공에 기여한 개발자와 랩, 네트워크에 이득이 돌아가야 한다. 보안: 팹랩에서 개발된 콘셉트와 프로세스는 개인적 차원에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반면 그것들을 보호하는 방식은 각자가 선택할 수 있다."(1) 툴루즈에 있는 프랑스 최초의 팹랩 '아르틸렉트'에서는 학생 3명이 채소 재배자들을 위한 벌초 로봇의 시제품 제작에 성공한 뒤 소량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 와그 소사이어티에서 한 자전거광은 만능 흙받기를 발명했다. 현재 전문 상점들에서 판매되고 있다.

각각의 팹랩이 가진 잠재력을 구현해주는 것은 바로 3D프린터다. 가장 대중적인 모델 중 하나인 렙랩(RepRap)은 자기복제 기계다. 다시 말해, 스스로 자기 부품을 제작할 수 있다. 영국의 수학자 겸 엔지니어인 아드리안 보이어가 이 기계를 발명한 것은 소비사회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철폐하기 위해서다. "상상해보라. 어떤 마을에서 10가구의 가족이 모여서 가정용 3D프린터를 함께 사용한다. 그중 한 가족이 소유한 자동차의 도면을 인터넷의 오픈 소스 사이트(2)에서 내려받아 약 일주일간 부품들을 인쇄한다고 해보자. 이런 게 가능하다면 자동차 산업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3)

영국의 공상과학(SF) 소설가 J. G. 밸러드(1930~2009)는 단편 '최후의 도시'(The Ultimate City)에서 석유가 고갈된 이후 사람과 상품의 이동이 사치가 돼버린 시대의 사회상을 그려냈다. "가든시티에는 상점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은 (중략) 직접 수공업자에게 주문하면 그들이 고객의 요구에 정확히 맞춰 제품을 설계하고 제작했다. 가든시티에서는 모든 물건이 너무도 잘 제작돼 영원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4)

물론 아직 SF적 상상에 머물러 있긴 하다. 현재 대중적으로 사용되는 3D프린터는 플라스틱으로 물건을 인쇄한다. 그중에는 초콜릿을 인쇄하는 것도 있다. 엑세터대학 연구원 량하오가 부활절에 공개한 이 기계는 '쇼크 에지'(Choc Edge)라는 브랜드로 시판 중이다. 현재 꽃병을 인쇄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에 도달하긴 했지만 자동차를 인쇄할 수 있으려면 앞으로도 거쳐야 할 단계가 많이 남아 있고, 각 단계마다 상당한 지식이 요구될 것이다.

팹랩은 근본적으로 교육적 차원을 내재하고 있다. 처음부터 대학에서 교육적 목적으로 탄생한 팹랩은 헬스클럽처럼 단지 일정 시간 동안 기계를 대여해주는 개념인 테크숍(Tech shop)과 구분된다. 팹랩의 이용자는 아직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했을 경우 우선 DIWO(Do It With Others·다른 사람들과 함께 제작하기) 단계를 거친 뒤 DIY(Do It Yourself·스스로 제작하기)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배움은 팹랩 헌장의 가장 중요한 열쇳말이다. "접근: 당신은 팹랩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거의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 당신은 스스로 제작 방법을 학습해야 하며, 랩을 다른 이용자들과 함께 공유해야 한다. 교육: 팹랩에서의 교육은 프로젝트와 동료 간 교육에 기초한다. 당신은 지식 축적과 이용자 교육에 참여해야 한다."

참여자를 돕기 위한 모든 종류의 수단이 동원된다. 현재 80여 개 단체들을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는 팹랩 국제 네트워크는 지식 공유와 상호 협력을 촉진하고 있다. 국제 협력을 통해 몇 가지 공동 프로젝트가 탄생하기도 했다. 가령 아프가니스탄에서 개발된 저가 무선망인 팹파이(FabFi)는 현재 미국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현대판 직인조합, 팹포크(Fabfolk)는 CAD만큼 능숙한 솜씨를 자랑한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기량을 발휘해 전세계의 지역 공동체 발전을 위해 일하고 있다. 팹랩은 온라인상에 프로젝트 관련 문서를 업로드하도록 권장한다(의무 사항은 아니다). 오픈 소스 소프트웨어처럼 제품의 재생산·변형·개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다. 팹아카데미는 실습이 포함된 원거리 교육을- 현재는 영어로만- 실시하고 있다.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MIT가 인정하는 학위도 받을 수 있다.

이 분야에 이미 진출한 회사들에는 겉으로 내세우는 멋진 가치와 상업적 측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팹랩 헌장이 득이 된다. 평가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애매함은 더욱 커졌다. 헌장보다 더 유연한 이 시스템은 대중에 대한 개방, 장비, 헌장 준수, 네트워크 참여 등 4개의 기준에 대한 자기평가로 운영된다. 이동식 작업실 '팹랩 트럭'을 만든 네덜란드의 얍 베르마스는 미소 띤 얼굴로 말한다. "비영리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든 가끔은 먹고살 걱정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경제적 모델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팹랩 헌장을 얼마나 잘 준수할 수 있는지도 결정된다. 공공기금과 개인기금, 개인적 용도와 공동체 개방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초심을 지킬 수 있는 재정 조달 방식을 찾는 게 관건이다.

포스트 인터넷 시대는 물질적 세계가 될 것이다

세르지퐁투아즈대학(발두아즈)의 파크랩(Fac Lab)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로랑 리카르는 이 주제와 관련해 벌어졌던 논쟁을 기억한다. "국가 보조금이 줄고 있다.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수입원은 어떤 게 있을까'라는 질문이 제기됐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현실을 회피하려고 눈감아버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돈을 찾아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파크랩은 대학 재단 협력사인 통신회사 오랑주의 지원금을 받기로 했다. 그들은 이것이 긍정적 협력이 되기를 희망한다. 파크랩에 참여 중인 에마뉘엘 루는 "오랑주에 협력과 개방적인 이노베이션의 정신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면- 이 협력을 통해 일하는 방식에 혁신을 가져오고 회사와 사회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양자 간 합의에 따라 오랑주는 교육 내용에 대해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

'개방'과 '무상'이라는 원칙이 강조되는 만큼 예외도 많다. 가령 학교들에서 운영하는 팹랩은 우선적으로 학생들에게 이용권을 주고 대중에게는 한시적으로만 개방된다. 때로 개인이나 기업에 기계를 대여해주거나, 개인교습 등을 위해 일부 공간을 임시로 임대해주는 방식으로 운영비를 조달하기도 한다. 기업과 대학들로부터 예산을 지원받는 자선단체 '매뉴팩처링 인스티튜트'가 운영하는 맨체스터 팹랩은 일주일에 단 하루만 대중에 공개되지만 팹랩 레벨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유행을 좇는 기업들은 해커스페이스(Hackerspace)보다 덜 위험하면서 더 세련돼 보이는 팹랩의 개념에 주목하고 있다. 일상적인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는 '수선공들'(5)이 모여드는 해커스페이스는 언론에서 '해킹'이라는 말을 남용하는 바람에 기발함이나 융통성을 평가받기보다 마치 불법적 활동이 벌어지는 장소인 양 오해를 사기도 한다. 더욱이 해커들은 독립성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단체나 기업들과 협력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전력회사 '에네르지아스 드 포르투갈'(EDP)은 2010년 팹랩을 설립했고, 프랑스에서는 공작기구 및 가구 판매 회사인 르루아메를랭이 팹랩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업들은 이 개념을 자기 것으로 가로채기도 한다. 가령 오랑주는 지난해 '싱잉'(Thinging)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 프로젝트는 팹랩이라고 소개됐지만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공개됐다. "정보기술(IT), 전자, 인터랙션 디자인, 인간공학 등을 전공하는 전세계 학생들의 '사물 인터넷'(IoT·Internet of Things) 관련 프로젝트 진행을 돕는 것"(6)이 목적이라고 한다.

본래적 의미의 팹랩에서도 개인 제작의 대중화는 실패 위험을 안고 있다. 현재로서는 최신 유행을 좇는 도시인들이 할아버지 세대가 하던 목공 작업의 섹시한 디지털 버전으로서 팹랩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팹랩이 정말 필요한 곳은 따로 있다. 특히 산업적 노하우가 소멸되는 탈산업화 지역에 절실하다. 센생드니나 크뢰즈 지역의 각 도시 혹은 마을에서, 민중교육이 활발한 모든 지역에서 팹랩을 볼 수 있는 날은 언제쯤일까?

글•사빈 블랑 Sabine Blanc owni.fr 기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팹랩 헌장, http://fablab.fr/projects/project/charte-des-fab-labs.

(2) 사용자들이 자신이 고안하거나 변형한 모델들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인터넷 사이트.

(3) '일상으로 들어온 실물 프린터', Owni.fr, 2011년 9월 15일.

(4) James Graham Ballard, <단편 전집>, vol.3, Tristram, Auch, 2010.

(5) Jean-Marc Manach, '정보화 사회의 수선공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9월호.

(6) 'Thinging! 미래의 소통하는 사물들을 상상하라', www.generation-nt.com, 2011년 6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