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공산당과 가톨릭

2012-06-12     자네트 하벨

군중이 흔들고 있는 수백 개의 플래카드에는 하나같이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를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독립전쟁의 역사적 보루였던 산티아고데쿠바에 모인 군중 20만 명 앞에서 교황은 미사를 집전한다. 역사에 길이 남을 쿠바의 지도자를 파문했던 가톨릭교회의 최고 사제 교황이 지난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쿠바를 14년 만에 다시 방문한 것이다.

쿠바에서 성직자는 유일하게 정부에 예속되지 않은 자유체제에 속한다는 점에서 다른 교섭 상대들과는 다르다. 외교관 필리프 레트리이라르가 '보편주의들의 경쟁'(1)- 가톨릭교회와 카스트로주의- 이라 규정했던 것이 점차 평화적 공존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제 정치와 종교가 서로 합의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산티아고데쿠바에서 미사를 집전할 때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장은- 그는 이미 경제자유화와 개혁이라는 어려운 과정에 착수했다- 자신의 임기 중 기본 방향을 교회와의 화해로 잡았다. 이 정책에 대해 쿠바공산당 진영뿐만 아니라 기독교도들과 반체제 인사들까지 분노하고 있다.

공산당과 교회, 공존과 경쟁

쿠바 교회를 이끌고 있는 하이메 오르테가 추기경은 "4년 전 대통령이 바뀐 뒤부터(2) 새 장관들과 공직자들이 등장했고 농업과 주택 건설, 자영업 관련 체제, 대출, 주택과 자동차 매매, 소기업 창설 등과 관련된 중요한 경제 개혁이 진행되고 있다"(3)고 평한다. 이는 교회가 간절히 촉구해왔던 것들이다. 민감한 정치적·이념적 토론이 한창이던 때(2010년 10월) 가톨릭 잡지 <에스파시오 라이칼>(Espacio Laical)의 한 사설은 "우리는 오래전부터 사회·경제·법률·정치 모델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해왔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개혁들로 인해 부각되는 불평등과 빈곤 심화 문제에서 교회는 유용한 방패가 되고 있다. 빈곤 지역에서 인도주의 단체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는 교회는 이미 의약품 배급과 서민들을 위한 급식소를 조직화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경제 개방에 호의적인 교회는 이제 향후 쿠바에 탄생하게 될 소기업가들을 대상으로 회계 및 정보처리 강의를 개설할 예정이다.

공산당과 교회의 화해는 1986년에 열린 쿠바 성직자 전국회의 때부터 시작된 가톨릭 위계질서 현대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가톨릭 신도이면서 종교사를 전공한 엔리케 로페스 올리바 교수는 "이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대립과 충돌에 참여하지 않았던 신세대 협상 지지자들이 쿠바 주교단을 장악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반체제 인사들이나 체제에 대항하는 기독교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오르테가 추기경에게 "교회의 임무는 쿠바에 없는 야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에스파시오 라이칼>의 젊은 부편집장 레니에르 곤살레스는 "교회에 대한 신뢰는 쿠바 정부, 내부의 반대파, 망명 쿠바인, 그리고 미국 정부와 거리를 둘 줄 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 신도들 사이에서는 혼란, 다시 말해 불협화음이 뚜렷이 느껴진다. '바렐라 계획'(헌법 개정을 요구하기 위해 1만1천 명의 서명을 받았다) 주도자이자 2002년 사하로프상 수상자이기도 한 오스왈도 파야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정부를 지지하는 <에스파시오 라이칼> 때문에 교회의 목소리가 사라져버렸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서로 다르다. "하이메(오르테가 추기경)는 나의 목자다. 그를 존경한다. 하지만 그는 나와는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라울을 믿고 현재 진행 중인 변화를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정치적 입장이다."(4) 사실 주교단은 온건한 입장을 되풀이해왔다. 아바나 거리에서 흰옷을 입고 글라디올러스를 흔들며 '자유'를 외치는 반체제 여성들은 베네딕토 16세와의 면담을 요청했지만 단 1분도 만나지 못했다. 반면 반체제 인사들에게는 '저주받은 영혼'인 피델 카스트로는 교황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교황에게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아바나 교회를 점거한 야권의 시위를 종결지어달라고 경찰에 요청한 이가 바로 추기경이었다.

그렇지만 쿠바 성직자들은 여러 가지 난관에 봉착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신도들의 참여가 미미하다는 것이다. 쿠바 국민의 1%만이 정기적으로 일요일 미사에 참석한다. 두 번째는 아프리카-쿠바 종교의 발현이다. 카리다드 델 코브레 성모(쿠바의 수호성인)의 날 예배 행렬을 보면 혼합종교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가톨릭 책임자들은 그들을 가톨릭과 통합, 다시 말해 가톨릭에 가입시키고 싶어 하지만 그 예배는 수용하려 들지 않는다. 세 번째 문제는 복음주의 교회의 입지가 커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쿠바 예수회의 고위 성직자이자 라틴아메리카 예수회의 의장이던 호르헤 셀라는 교회가 "과거의 특권을 되찾기 원치 않는다"고 단언한다. 교회는 그들의 위상이 더 높아지기 원할 뿐 아니라 "신도들이 다원사회에서 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회는 이미 많은 것을 얻었다. 쿠바 정부는 1959년 혁명 때 몰수된 부동산을 교회에 돌려주었다. 2010년 11월, 오르테가 추기경은 카스트로 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점점 더 그 수가 늘어나는 신부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산 카를로스 신학교 개교식을 했다. 신학교에는 펠릭스 바렐라 센터도 들어서 있는데, 이곳에서는 때때로 반체제 인사들도 참여하는 토론이 벌어진다. 열성 지지자들이라 하더라도 쿠바공산당에 비판적인 경우 당 기관지에 논설을 펴내지 못하는 나라에서 교회는 주교구와 본당과 관련된 출판 네트워크(약 250만 명이 구독)와 20여 개 디지털 미디어를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교회는 더 나아가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정기적으로 나오기를 원한다. 타르시시오 베르토네 교황청 국무원장은 "학교라는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5)고 주장한다. 대학에서 신학과 인성을 가르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는 주교단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은 공공서비스에 가톨릭 교육을 통합시키는 것이다. 펠릭스 바렐라 센터 요슈바니 카르바할 교장신부는 "국가는 사회에서 교회가 맡아야 할 역할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카스트로 의장은 이제부터 성 금요일(부활절 직전의 금요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을 공휴일로 정하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교회의 위상에 대해서는 공산당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는 카스트로 의장의 전략이 공산당의 힘을 약화시켰다고 생각한다. 사회학자인 아우렐리오 알론소는 쿠바 대통령이 교회를 합법적 중재인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쿠바 정부가 "가능하지만 어려운, 직접적인 방법으로 감당하기에는 대단히 어려운 양보들"을 수용하게 만들었다고 요약한다.(6) 한 가지 예로, 반체제 인사 올란도 자파타가 85일간의 단식 끝에 사망한 뒤 75명의 수감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2010년 언론들이 벌인 국제적 캠페인에 직면한 쿠바공산당은 또 다른 반체제 인사가 위험한 단식을 시작하면서 더욱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때 교회는 스페인 외교단과의 협상에까지 참여하면서 '쿠바인들끼리' 앞서 언급한 수감자들의 석방 문제를 해결하도록 해 정부가 궁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플로리다 디아스포라의 비난

쿠바공산당 간부들은 그런 사실을 잘 이해했고, 일부는 불안해한다. 이런 교회의 위상을 두고, 쿠바의 정치 상황 내에서 과연 유일 정당의 위상은 어떤 것인지 자문하게 되었다. 지난 1월 열린 공산당대회는 지도부 혁신과 기능 현대화, 공산당 위상 강화, 1년 전에 예고된 경제 개혁이라는 과제에 대처하기 위한 '전투태세' 확립을 목적으로 했다. 물론 회의는 정치적 임기를 5년 중임으로 제한하고 차기 대회(정확한 날짜는 정해지지 않음)까지 중앙위원회 구성 인원을 20% 교체할 것임을 확인했지만 예고된 충격적 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현 대통령은 81살인데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 후계자, 정부 서열 2위인 마차도 벤투라는 이제 곧 82살이 된다. 카스트로 의장은 2011년 열린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계승 세대가 부재하는 상황'에서 '당 지도부 교체'는 까다로운 임무라고 논평했다. 2009년 그는 자신의 뒤를 이을 수 있는 50대의 중요 지도자 2명, 카를로스 라헤와 펠리페 페레스 로케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는 당을 통하지 않은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쿠바공산당과 쿠바 국민,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는 큰 단절이 있다. 쿠바공산당은 '국민의 정당'으로서 자신들이 국민을 대변한다고 자처한다. 그런데 국민의 이름으로 쿠바공산당이 제기하는 문제는 사실 대다수 쿠바인들이 걱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당은 '사회주의 현대화'를 말하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수많은 삶의 방식을 요구한다.(7) 공식 언론들은 상투적인 정치 구호를 늘어놓는 반면, 잡지와 접근이 제한적인 인터넷 사이트에서는(지난해 베네수엘라와 쿠바 사이에 해저 케이블이 설치됐음에도 인터넷 접근이 원활치 않다) 토론이 활발하게 벌어진다. 카스트로 의장은 당의 '주도적' 위치를 환기시키는 데 유념하고 있지만 체제 민주화를 장려할 능력이 없는 당 기구는 당에 대한 신뢰가 실추된 것을 느끼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로베르토 베가는 '국가와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관료주의'를 비판하지만, 가장 신중한 성직자들은 유일정당 체제를 문제 삼지 않는다. 아바나의 주교총대리이자 <에스파시오 라이칼> 편집자문위원이기도 한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8)는 "복수정당제가 반드시 훌륭하게 작동한다는 보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당체제가 민주주의와 반목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일정당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려면 투명하게 기능해야 하고, 모든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이미 자신들의 잡지들을 통해 시행하고 있는 다원주의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체제를 개혁하는 것, '혁명을 구하는 것'은 이념적·정신적 재창당을 전제로 한다. 공산당 청년신문 <후벤투드 레벨데>의 기사 제목 '조국과 신앙'은 그 새로운 신조가 될 것이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혁명사상과 신앙, 신도들 사이의 동질성은 국민이라는 기반 자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국에 대한 사랑, 더 공정한 사회를 위한 투쟁은 투명성을 확신하는 생활이라는 개념과 모순되지 않는다". 쿠바 영화산업 및 예술 연구소 전 소장이자 역사적 혁명가인 알프레도 게바라는 한 술 더 뜬다. "조국이라고 하는 이 거대한 성당 안에 양심을 촉구하기 위한 의례를 마련해야 한다." 그가 보기에 "교회는 지성을 만들어내는 중심이자 (…) 국가 발전에 필요한 다양성의 씨를 뿌리기 위한 훌륭한 파트너"(9)다.

쿠바의 변화는 플로리다해협 저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모든 상황으로 미뤄 정부가 이주자들의 변화 참여를 호의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르테가 추기경은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쿠바에 대한 제재 완화를 요청했다. 지난 3월 25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쿠바 추기경은 라울 카스트로의 사실상 협력자로 변했다"고 평했다. 마이애미 소재의 반(反)카스트로 라디오 <라디오 마르티>는 오르테가 추기경을 '하인'으로 취급한다(2012년 5월 5일자). 베가는 "디아스포라의 지배집단은 쿠바가 붕괴해 그들이 쿠바에서 일할 수 있기 희망한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쿠바에서 추방된 사람들은 쿠바가 조종하는 변화를 돕는 모든 것이 불만인 것이다. 바티칸은 쿠바 성직자들을 지지한다. 그들은 쿠바의 성직자들이 박애와 국민주권 수호의 상징인 종교적 혁신을 구현할 것으로 생각한다. 바티칸이 보기에 쿠바 교회는 프로테스탄트파나 펜티코스트파와의 경쟁에서 다른 교파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과도기'라는 말이 언급되지 않았지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디아스포라와의 관계가 정상화될 것이라는 전망 속에서, 경제의 핵심 분야를 장악하는 군부와 교회가 협력하는 상황을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막스 베버의 말처럼, "정치권력과 종교권력 사이의 적절한 관계는 공동 지배를 목적으로 그들의 영역을 상호 한정하는 타협과 동맹의 관계다".(10)

글•자네트 하벨 Janette Habel 파리 라틴아메리카 연구소 교수

번역•김계영 canari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Philppe Lenillart, <쿠바, 교회 그리고 혁명>, 라르마탕, 파리, 2005.

(2) 라울 카스트로는 그의 형 피델 카스트로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2006년 7월 31일 임시로 권력을 이양받은 뒤 2008년 2월 24일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3) <오세르바토레 로마노>, 바티칸시국, 2012년 3월 25일.

(4) Fernando Raysberg의 블로그 카르타스 데스데 쿠바에서 인용, 2012년 3월 27일, www.cartasdesdecuba.com.

(5) <라 에스탐파>, 로마, 2012년 3월 22일.

(6) <에스파시오 라이칼>, 아바나, 2010년 10∼12월.

(7) Renaud Lambert, "그렇게 쿠바인들은 살고 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4월호.

(8) 고조부와 이름이 같다. 그의 고조부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는 쿠바의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 지배에 대항하기 위해 노예를 해방한 조국의 아버지다.

(9) <에스파시오 라이칼>, 28호, 2011년 10∼12월.

(10) Max Weber, <종교의 사회학>, 갈리마르, 파리, 1996년. 필리프 레트리야르의 앞 책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