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정보부의 냉혹한 시나리오
이집트 사막으로 강제이주될 가자지구 사람들
하마스가 이스라엘 땅에서 자행한 학살에 대해 이스라엘이 무차별 보복으로 대응하면서 가자지구가 초토화됐다. 수천 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더해, 이제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할 상황에 처했다.
전쟁은 시작하기가 끝내기보다 쉽다고 한다.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이야말로, 이런 통념을 확실히 증명하는 사례가 될 것이다. 2022년 말 베냐민 네타냐후가 집권한 정부는 이스라엘 극우 세력이 장악했다. 이들에게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개시한 ‘알아크사 홍수’ 작전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아우르는, 그러니까 영국 위임통치령(1920~1948) 팔레스타인을 통합하는 ‘대(大)이스라엘’ 계획을 실행할 절호의 기회였다.
나크바: 이스라엘의 영토 강탈, 팔레스타인의 재앙
이스라엘 최대 우파 정당 리쿠드의 1996~1999년 첫 당수를 역임한 네타냐후는, 2005년부터 계속 이 정당을 이끌어왔다. 리쿠드를 탄생시킨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긴장은 1~2차 세계 대전 사이에 탄생한 ‘수정주의 시오니즘’으로 알려진 한 파시스트 분파에서 생겨났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이 분파는 영국 정부가 하심 가문에 양도한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을 포함해, 요르단 곳곳의 영국 위임통치령 전체를 시온주의 국가 프로젝트에 통합하려 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노린 이 분파는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끄는 시온주의 노동당이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하지 않고 1949년에 전쟁을 중단했다며 비난했다.
벤구리온과 그의 지지자들이 볼 때 전쟁은 중단된 것이 아니라 연기된 것에 불과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는 1967년 결국 이스라엘에 점령됐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리쿠드는 그들의 운명에 대해 시온주의 노동당과 그 지지자들보다 경쟁적인 조건을 끊임없이 제시했다. 1948년에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주민들은 전쟁을 피해 떠났지만, 1967년에는 이 일을 교훈 삼아 대다수가 자신들의 땅과 거주지를 떠나지 않으려 했다. 1949년에 마침내 이스라엘국가가 건립된 영토에 살던 팔레스타인 거주민의 80%, 즉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거주민의 78%는 임시 거처를 찾아 도망쳤다. 그리고 새로 들어선 국가가 팔레스타인 거주민의 귀환을 막자, 그들의 임시 거처는 결국 영구적인 거처가 됐다. 이 강탈이 아랍인들이 ‘나크바(대재앙)’라고 부르는 사태의 핵심이다.
1967년 팔레스타인 탈출의 양상은 과거와는 달랐기 때문에(그럼에도 대부분이 1948년의 난민인 24만 5,000명의 팔레스타인인은 요르단강 우안으로 피신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인구학적 요인으로 인해 합병을 향한 뜻을 접어야 하는 딜레마에 직면한다. 즉 두 영토의 거주민에게 이스라엘 시민권을 부여해 이곳을 점령한다는 것은 이스라엘국가 유대인의 정체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을 귀화시키지 않고 합병한다면 아파르트헤이트를 공식화해 민주주의의 성격을 위협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사회학자 사미 스무하는 이를 ‘민족적 민주주의(Ethnic democracy)’라고 표현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모색한 방안이 ‘알론 계획’이었다. 1967~1968년 심사숙고 끝에 이 계획을 구상해낸 부총리 이갈 알론의 이름을 딴 알론 계획은 장기적으로 요르단 계곡과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인구가 적은 지역을 점령하고, 인구 밀집 지역의 통제권을 하심 가문에 반환한다는 방안을 검토했다.
이 계획에 반대한 리쿠드는 알론 계획에서 검토한 유다와 사마리아(성경에서 요르단 서안지구 일부가 속한 곳을 일컫는 지명)에 국한하지 않고, 1967년 점령한 두 영토를 합병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완전한 식민지화를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리쿠드는 1977년 선거에서 승리했고, 이스라엘 국가 건국 후 30년도 안 돼 시온주의 극우파가 정권을 잡았다. 이후 극우파는 거의 46년 내내 정권을 유지했고, 16년 이상 네타냐후가 당을 이끌면서 더욱 극단적인 우파로 기울었다.
1987년 말, 제1차 인티파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가 일어나면서 리쿠드의 헤게모니와 ‘대이스라엘’에 대한 전망도 불투명해졌다. 1992년 이츠하크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이 재집권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1967년의 알론 계획을 재개하려는 단호한 움직임을 보였다.
1988년 요르단 왕조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행정에서 공식적으로 물러났고, 인티파다가 한창이던 때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대신 교섭 상대자로 나섰다. 팔레스타인 중앙 지도부는 1967년에 점령된 팔레스타인 영토 전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최종적 철수와, 유대인 정착촌 확장을 중단하는 것에서 시작해 궁극적으로는 정착촌 해체를 위한 필수 조건을 잠정 포기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중재로 1993년 9월, 라빈과 야세르 아라파트가 워싱턴에서 서명한 오슬로 협정이 체결됐다.
1996년 리쿠드는 네타냐후의 지휘 아래 재집권했으나, 3년 뒤 에후드 바라크가 이끄는 노동당에 또다시 패했다. 네타냐후는 물러나야 했고 당대표는 아리엘 샤론으로 교체됐다. 2000년 가을 아리엘 샤론이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 알 아크사 사원을 방문하자 이를 계기로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고, 그는 2001년 리쿠드를 승리로 이끌었다. 2005년 샤론은 가자지구에 건설된 정착촌 몇 곳을 해체하고 이곳에서 이스라엘의 일방적 철수를 단행했다. 인구가 밀집한 이 지역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 조치에 만족했다. 샤론은 알론 계획이 그리는 옵션을 극단적이고 일방적으로 추구하면서,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가능한 한 넓게 병합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이스라엘, 나치의 만행을 재현하려는가?
샤론 총리 내각에서 재무장관에 임명된 네타냐후는 그 후 가자지구 철수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그는 리쿠드의 가장 이념화된 기반과 정착민 운동을 살살 자극하면서 안보상의 이유를 들먹였다. 소속 정당과 관계가 껄끄러워진 샤론은 네타냐후에게 당대표 자리를 넘겨주고 2005년 가을에 당을 떠났다. 2009년 총리가 된 네타냐후는 2021년 6월까지 총리를 연임하며 벤구리온의 종전 기록을 갱신했다. 그는 쇼아(홀로코스트) 역사학자인 다니엘 블라트만이 이스라엘의 주요 일간지 <하레츠〉에서 심지어 ‘신(新)나치’라고 규정한 두 시온주의 극우 종교정당과 연정을 구성해 2022년 12월 다시 총리에 올랐다.
이타마르 벤그비르가 이끄는 오츠마 예후디트(유대인의 힘) 당은 초민족주의자인 메이르 카하네가 세운 극우정당 카흐의 사상적 후계로 여겨진다. 메이르 카하네는 아랍인을 ‘이스라엘 땅’ 밖으로 즉각 ‘이동’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지중해와 요르단 사이에 있는 영토 전체에서 인종 청소를 하겠다는 뜻이었다. 종교적 시온주의 정당 대표인 베잘렐 스모트리치는 크네세트(이스라엘 최고 권력기관) 소속 두 아랍 출신 의원에게 다음과 같이 발언함으로써 2021년 10월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벤구리온이 일을 끝내지 않고 1948년에 당신들을 추방한 것은 실수였다.”
이처럼 현 이스라엘 정부는 1967년에 점령한 영토를 합병하고 원주민을 추방해 대이스라엘 계획을 실현하려는 열망에 들뜬 자들이 장악하고 있다. 정상적인 시기라면 이 계획이 성공을 보장할 수 없는 장기적인 절차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요르단강 서안지구는 정착촌 확장과 원주민 학대를 통해 서서히 합병 수순을 밟고 있다. 이 두 현상은 극우 정부가 들어서고 가자지구의 경제 상황이 마비되면서 눈에 띄게 심해졌다.
클린턴에게 이라크를 침공하라고 촉구했으나 이 계획을 냉정하게 실현할 수 없었던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던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처럼, 극우 세력에는 어떤 강력한 정치적 기회가 필요했다. 지난 2023년 10월 1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연대 차원에서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한 연설 내용 중 네타냐후가 강조한 것처럼, 2001년 9월 11일 테러와 10월 7일 하마스가 개시한 작전 사이의 유사성은 정치적 기회라는 점에서 관련이 깊다. 극우파 전체는 그들의 팽창주의 구상을 밀어붙이기 위해 즉시 ‘알아크사 홍수’ 작전을 활용했다.
이스라엘 군대는 이 돌발사건에 대비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10월 7일 작전에 대응하는 전쟁 계획은 틀림없이 서둘러 수립됐을 것이고, 그 때문에 가자지구 내 지상공격 개시가 지연됐을 것으로 보인다. 하마스 작전과 10월 27일 공격 개시 사이 3주라는 시간은, 지상공격 시 이스라엘 군인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 도시에 집중폭격을 가하는 데 사용됐다. 그 결과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가장 많이 희생됐고, 그중에서도 단연 아동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10월 11일에 수립된 전쟁 내각과 더불어 민간인의 운명에 대해서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공유했고, 정부의 이런 의도는 리쿠르의 ‘온건파’ 당원이자 네타냐후의 라이벌인 요아브 갈란트 국방부 장관을 통해 극히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적을 ‘인간 짐승’이라고 표현하며 10월 9일 가자지구에 대한 완전 포위 명령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이후 정부 인사와 이스라엘 정계 및 학계의 유력 인사들 쪽에서 비슷한 유형의 발언이 쏟아졌다. 주로 프랑스 및 유럽 출신 변호사 300명으로 구성된 한 단체는 지난해 11월 9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이스라엘을 의도성이 내포된 ‘가자지구 학살 범죄’로 제소했다.
가자지구 민간인에 대한 세 가지 시나리오
이 제소는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 내 가자 주민의 대규모 이동으로 촉발된 ‘인구 이동’과 관련이 깊다. 의도성은 여기서 더 분명해진다. 지난 2023년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 첩보부(또 다른 리쿠드 소속 의원인 길라 감리엘이 이끌고 있으며, 모사드의 국외 활동과 샤바크의 국내 활동 조율을 맡고 있다)는 가자지구 관련 계획 구상에 착수했다. 10월 13일 마무리된 이 계획은 2주 뒤, 이스라엘 내 반체제 언론 〈메코미트〉에 “가자지구 민간인에 관한 정책 옵션”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됐다.
여기에는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첫째, 가자지구 주민은 지구 내에 남아 팔레스타인 당국의 통치를 받는다. 둘째, 그들은 지구 내에 남되 이스라엘이 설치한 임시 지방 당국의 통치를 받는다. 셋째, 그들은 가자를 비우고 시나이반도의 이집트 사막으로 대피한다.
이 문건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옵션에 상당한 단점이 있고, 둘 다 장기적으로는 충분한 ‘억제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본다. 세 번째 옵션은 “이스라엘에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전략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정치적 단계’에서 국제사회의 압력에 맞서 결단력을 보여주고 미국 및 다른 친이스라엘 정부들의 지지를 확보한다면 ‘실행 가능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어서 문건은 세 가지 방안 각각을 상세히 설명한다.
정보부에서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 세 번째 시나리오는 가자지구 민간인을 전투지역 밖으로 이동시킨 뒤 이들을 이집트의 시나이반도로 이주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선, 국경 양쪽에 보안 구역을 유지하고 난민들은 텐트에서 지내게 될 것이다. “그다음 단계에는 가자지구 민간인을 지원하기 위한 인도주의 구역을 만들고 그들이 이주해 정착할 시나이반도 북부지역에 도시를 건설하는 계획이 포함될 것이다.”
이어서 문건에는 가자지구 주민을 이주시킬 방법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가자지구 전체를 점령할 때까지 북부에서 시작될 지상공격 루트를 열기 위해 가자 북부를 집중 공습하는 동시에, 무력 충돌 지역에서 비전투원을 대피시키라고 권고한다. 그러려면 유일하게 이집트 국경초소가 위치한 “라파 쪽으로 민간을 대피시킬 수 있도록 남쪽 루트는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문건은 이 옵션이 특히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처럼 대규모 인구 이동이 일반화되는 전 세계적 상황의 일부라고 언급했다.
이 정보부 문서가 완성된 지난해 10월 13일,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남쪽으로 대피할 것을 촉구했다. 10월 30일 <파이낸셜타임스>는 난민들이 가자에서 시나이반도로 넘어가는 길을 열어주도록 이집트에 압력을 가하기 위해 네타냐후가 유럽 정부들과 접촉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이 관점은 10월 26~27일에 열린 유럽 정상회담의 일부 참석자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나, 프랑스, 독일, 영국 정부는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보부에 따르면, 이집트는 국제법에 따라 민간인 통과를 허용할 의무가 있다. 이집트는 협력의 대가로 현재의 경제위기를 완화할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의 10%에 맞먹는 엄청난 부채를 떠안고 있으면서도, 이집트 대통령 압델 파타 알시시는 이집트 영토로 가자지구 주민이 이동하는 것을 완강히 반대해왔다. 그의 정부는 “이집트를 희생해 팔레스타인이라는 원인을 청산하는 데 반대한다”라고 주장하는 포스터 캠페인까지 조직했다.
이집트가 주민 이주를 거부하는 이유는 물론 이런 명분을 고수해서가 아니다. 이집트 대통령은 10월 18일 독일 총리 올라프 숄츠가 그의 의사를 묻기 위해 카이로를 찾았을 때 그 이유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알시시 대통령은 가자지구 주민의 시나이반도 이주가 이집트를 “이스라엘에 맞서는 작전 개시의 전초 기지”로 만들어 양국 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집트 정부는 현재 전쟁으로 팔레스타인 문제가 달아오른 만큼,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10월 7일 이후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정착민에 의한 학대와 이스라엘군 작전의 강도가 심각해지자, 이에 놀란 요르단 정부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요르단강 너머로 이동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가자지구 주민 이주를 지지하는 이스라엘인들은 침략군의 압박을 피해 도망치는 주민 대규모 인구가 이집트 국경으로 몰려 이집트 국경수비대도 어쩔 수 없이 통과시킬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더욱이 이집트의 거부로 11월 19일 정보부 장관 감리엘은 이스라엘 내 가자지구 재건축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는 대신,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을 받아들이고 전 세계에 ‘자발적 재정착’을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해달라고 국제사회에 호소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지지는 왜 무책임한 짓인가?
그러나, 미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인을 가자지구 밖으로 이주시키는 것에 단호히 반대해왔다. 미국의 관료들은 이스라엘이 벌인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한편, 팔레스타인 주민을 이집트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을 포함해 팔레스타인을 장기 재점령하는 방안에 대해 동맹들에 경고하는 성명을 수차례 발표했다. 10월 15일 미국 CBS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대통령은 하마스를 소탕하려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자지구 재점령에는 반대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이런 이유로 몇몇 서방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미국 정부는 하마스 소탕이라는 이 마지막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휴전 요구를 거부했다.
요약하면, 미국 정부와 그 동맹들은 하마스를 뿌리 뽑기 위해 가자지구의 임시 점령을 승인했으나, 이후 이스라엘 군대가 철수하기를 원한다. 미국 정부가 지지하는 방안은 오슬로 협정으로 시작됐고, 세기 전환기에 일어난 제2차 인티파다 이후 중단됐던 절차를 재개하는 것이다. <CBS> 방송에서 바이든 미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국가는 존속해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라말라에 있는 팔레스타인 당국이 가자지구의 권력을 다시 손에 쥐기를 희망한다.
11월 18일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한 기사에서, 미국 대통령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지구가 ‘되살아난’ 팔레스타인 정부 아래 통합되기를 촉구하는 ‘두 국가 해법’을 선호한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이 해법은 서구의 대다수 정부들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 및 대부분의 아랍 국가도 환영한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내 안보를 ‘무기한’ 책임질 것이라는 네타냐후의 발언을 승인한 일부 이스라엘 야당도 이 해법을 지지한다. 전쟁 내각 참여를 거부한 현 이스라엘 야당 대표 야이르 라피드 역시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오슬로 협정의 절차를 재개하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는 방안은 이스라엘의 발표와 명백히 모순된다는 점에서 실효성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더욱이 오슬로 협정이라는 틀 안에서 수립된 팔레스타인 국가는 이스라엘의 뜻에 복종하는 블랙스테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 내 흑인 분리 거주지역-역주)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 국가는 1967년에 점령된 영토에서 이스라엘이 완전 철수하고, 정착촌을 해체하며, 난민 귀환을 위한 조치를 취한다는 최소한의 조건과는 거리가 멀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이 조건이 아니면 어떤 평화적 규칙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조건들은 이스라엘 감옥에 투옥된 팔레스타인 수감자들이 2006년에 작성한 문서에 명시돼 있으며,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를 포함한 거의 모든 팔레스타인 정치조직의 승인을 받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일찍이 예상했고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처럼, 현재 진행 중인 전쟁이 결국 이집트 영토로 들어오는 난민 문제나 적어도 가자지구 남부 난민촌에 있는 ‘국내 이주민’ 문제와 더불어, 실제로 새로운 나크바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훨씬 크다. 더욱이 가자지구에 있는 하마스처럼 민간인 사이에 뿌리 내린 조직을 근절하려는 목적 자체가 대규모 학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상황으로 봤을 때, 서구 국가들이 앞 다투어 이스라엘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표명하는 것이 얼마나 무책임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이런 행보는 그들의 이익과 안보에 반드시 해를 끼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가자지구의 실제 최종전은 지상전의 전개와,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글·질베르 아슈카르 Gilbert Achar
런던대학교 SOAS 국제관계 및 개발학 교수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완곡어법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는 지난해 11월 18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전화 통화에서, 이스라엘 정부의 무차별 폭격으로 1만 2,0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가자지구에서 “인도적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틀 전 미국 채널 <CBS 뉴스>의 질의에 대해 네타냐후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가 하려는 일은 민간인 희생자 수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번역·조민영 |
“강제수용소는 국제법으로 금지돼 있으며, 강제수용소를 만드는 자는 반인류 범죄자가 된다.” 콜롬비아 최초의 좌파 대통령 구스타보 페트로가 한 이 말은 2023년 10월 9일 X(트위터의 새 명칭)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틀 전 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대하는 서구 강대국들의 온도 차를 지적했다. 10월 8일 아침 발표된 콜롬비아 외교 관련 첫 보도자료 도입부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화”에 호소하고 있다. 콜롬비아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공격을 비난하면서도 그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동시에 콜롬비아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공격도 규탄했다.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요아브 갈란트가 10월 9일 “인간 짐승에 맞서 싸우고,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면서 가자지구 포위 공격을 발표하자, 페트로는 이렇게 반박했다. “그것은 바로 나치가 유대인에게 한 말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은 나치즘이 국제정치 무대에 다시 나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은 국제법의 적용을 받는 인간이다. 이런 야만적인 발언은, 홀로코스트를 부를 뿐이다.” 보고타 주재 이스라엘 대사 갈리 다간은 페트로 대통령에게 자신과 함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방문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중남미의 대통령은 이번에도 트위터를 통해 “나는 이미 그곳에 다녀왔고 (...) 지금은 가자지구의 강제수용소를 살펴보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총리가 콜롬비아 국가원수를 ‘적대적’이고 ‘반유대주의적’이라고 규정하며 콜롬비아 대사를 위협적으로 소환한 일에 대해 그는 이렇게 경고했다. “우리가 이스라엘과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면 우리는 단절할 것이다. 콜롬비아 대통령은 모욕당하지 않는다.”(X, 10월 15일). 11월 10일 학살의 강도와 규모가 심화되고 가자지구 내 병원들이 폭격을 당하자, 페트로는 콜롬비아 정부 법무팀이 모든 국제법원에서 이스라엘을 기소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11월 13일 그는 X에서, 콜롬비아는 유엔 총회에서 비회원 옵서버 자격에 그치고 있는 팔레스타인이 “정당한 권리를 누리는 국가로 인정받아야 한다”라는 내용의 제안서를 제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번역·조민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