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 아메리카, 평화를 위한 비동맹
우크라이나 분쟁 해결을 자처하고 나선 룰라 대통령
2023년 4월 14일, 국빈으로서 중국을 방문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미국은 전쟁 선동을 중단하고 평화를 위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미국의 패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분쟁에 대한 이런 발언은 상징적이다.
2022년 2월 3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푸틴과의 비공개 회담 후 “러시아가 라틴 아메리카에 더 활발히 진출하도록 아르헨티나가 관문 역할을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라고 밝혔다. 페론주의(페론 전 대통령을 계승한 아르헨티나의 정치 이념-역주) 성향의 중도좌파 출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때만 해도 러시아가 불가침, 무력을 동원한 분쟁 해결 금지, 타국의 영토 보전 침해 금지 원칙을 포함한 국제법을 무시하고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
1997년, 러시아와 중국은 이 원칙들을 천명한 첫 공동 선언문을 유엔(UN)에서 발표했다.(1) 이후 러시아는 ‘다극화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장려하며 이 원칙들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르헨티나도 항상 이런 관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19세기 말부터 전통적으로 미국의 영향권이었던 라틴 아메리카는 미국과 유럽의 미 동맹국들의 영향력에서 탈피한 새로운 국제 질서 재건 의지를 환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 지역에 수립된 진보 정부 대부분은 이런 의지를 로드맵으로 삼았다. 라틴 아메리카는 러시아가 미국의 패권주의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국가라고 분석했다.
2022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 개막식 참석 전 모스크바에 들른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유일한 관심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더욱 악화된 아르헨티나의 심각한 경제·사회 위기 해소였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이 위기가 심화될 경우 2023년 10월 대선에서 페론주의 진영이 승리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2018년, 보수진영의 마우리시오 마크리 전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차관 협정을 체결하고 고강도 긴축 정책을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는 아르헨티나를 옥죄는 부채의 부담을 완화하는 것이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IMF가 곧 미국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러시아산 백신, 에너지, 무기의 위력
따라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15년 아르헨티나와 “포괄적 전략 제휴” 협정을 체결한 러시아로 눈을 돌렸다. 코로나19 위기가 절정에 달했던 2020년 12월, 아르헨티나 국민이 코로나19 백신 1차 접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로부터 공급받은 백신 (스푸트니크V) 덕분이었다. 이 시기 다른 12개 라틴 아메리카 국가도 러시아산 백신을 공급받았다. 당시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와의 보건 협력에 매우 신중한 입장이었다. 이처럼 러시아의 관계를 회복 중인 상황에서 모스크바를 방문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기자들 앞에서 “아르헨티나가 더 이상 IMF와 미국에 너무 의존하지 말고 다른 길도 모색해야 한다는 내 생각은 확고하다. 이 점에서 러시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밝혔다. 미국 행정부를 향한 메시지가 담긴 발언이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모스크바에서 보여준 외교는 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2000년대 초 이후 러시아 및 중국과 유지 중인 관계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남반구의 다른 많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목표는 무역, 정치, 군사, 기술 분야의 협력관계를 다각화하는 것이다. 다양한 협력관계 간 경쟁을 유발해 국제 체계 내에서 자신들에게 더 유리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현 국제 체계에 특히 불만을 품고 있는 부분은 경제적 구조보다 권력의 위계질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러시아는 유리한 점이 많다. 러시아는 제정 시절 이미 신생 독립국 브라질(1828)을 필두로 우루과이(1857), 아르헨티나(1885), 멕시코(1890)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20세기 냉전 한가운데 벌어진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2)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소련의 관계 개선은 절정에 달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이런 관계는 일부 단절됐다. 2000년대 들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대부분 미국의 역내 개입에 반대하는 지도자들이 이끄는) 좌파 정부들이 들어섰고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에서의 전쟁으로 수렁에 빠진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를 상대적으로 방치했다.
그 사이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고 러시아에서는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점진적인 세력 회복을 꿈꾸는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대(對)러시아 교역 규모는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지만(라틴 아메리카의 국제 교역량 중 1% 미만) 푸틴은 (인프라, 광업, 에너지(석유, 가스, 민간 원자력), 항공, 대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에 나섰다. 이 네 가지 요인 덕분에 2000년대 이후 러시아와 라틴 아메리카 국가 간에는 새로운 관계가 형성됐다.
러시아의 라틴 아메리카 무기 판매량 80%를 차지하는 베네수엘라는 쿠바, 니카라과와 함께 러시아의 전략적 무기 구매국이다. 브라질, 콜롬비아, 페루를 비롯한 역내 다른 국가들 역시 러시아산 군사 장비(헬리콥터, 전투기, 방위 시스템)를 수입한다. 러시아의 대(對)라틴 아메리카 교역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브라질과 멕시코는 러시아의 주요 교역 상대국이다. 브릭스(BRICS,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의 틀 안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발전시킨 브라질은 라틴 아메리카 최대 대(對)러시아 수출국이다. 브라질은 러시아에 대두, 설탕, 육류, 광물을 수출하고 대신 자국의 전략적 농업 분야에 필요한 비료 대부분을 러시아에서 수입한다. 2015년, 러시아는 라틴 아메리카·카리브해 국가공동체(CELAC) 및 33개 회원국과도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아르헨티나 또는 브라질이 러시아산 비료에 의존하듯, 많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이제 특정 분야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유엔 라틴 아메리카·카리브해 경제위원회(CEPAL)가 “120년 만의 최악의 경제 위기”(3)로 평가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러시아 의존 현상은 더욱 강화됐다. 세계적 보건 위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야기한 인플레이션 압력 및 원자재 가격 상승까지 겹쳤다. 그 결과 농업 생산 비용이 증가했으며, 탄화수소를 수입에 의존하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 남아메리카(칠레) 국가들의 에너지 소비도 증가했다. 반면 탄화수소와 원자재를 생산 및 수출하는 국가들(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칠레, 콜롬비아, 페루,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은 조금 더 유리한 입장에 놓였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수차례 금리를 인상하자 국제 자본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 시장으로 후퇴했다.
라틴 아메리카 내 우크라이나의 입지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우크라이나의 (경제적) 영향력과 (정치적) 명성은 적국 러시아에 비해 심각한 열세에 놓여 있다. 단, 우크라이나와 라틴 아메리카 좌파 정부들의 관계 개선에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하는 쿠바 관련 문제에서는 예외다. 2019년 이후,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1962년 미국이 쿠바에 부과한 금수 조치 해제를 촉구하는 유엔 총회 투표에서 매번 기권표를 던졌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정부는 하나뿐이다. 바로 알레한드로 잠마테이 과테말라 대통령의 우파 정부다. 2022년 7월 25일, 잠마테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키이우를 방문했다. 그는 볼로디미르 젤린스키 대통령을 지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찾은 최초이자 유일한 라틴 아메리카 지도자다. 잠마테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은 미국에 보내는 충성의 메시지였다. 과테말라 정부는 부패 등 여러 문제로 미 행정부와의 관계가 냉각된 상태며 2023년 6월 총선을 앞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잠마테이 대통령은 미국의 화답을 바라고 미국에 대한 ‘동조’를 표한 것이다. 미국이 부과한 대(對)러시아 제재를 적용하거나,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겠다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는 없다.
역시나 미국의 영향권인 중앙아메리카 국가들도 미국에 대한 동조를 거부하고 있다. 미국 정부의 눈 밖에 난 포퓰리즘 성향의 독재자 나이브 부켈레 대통령이 이끄는 엘살바도르는 러시아를 규탄하는 유엔 결의안에 자동적으로 기권표를 던졌다. 전통적으로 미국에 적대적인 볼리비아, 쿠바의 뒤를 따르는 행보다. 니카라과는 2022년 2월 28일 유엔 결의안 표결에서 기권 후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국가 대열(벨라루스, 북한, 에리트레아, 말리, 시리아)에 합류했다. 유엔 분담금 체납 때문에 결의안 표결에 참여하지 못한 베네수엘라는 글로벌 에너지 위기가 만들어 낸 새로운 정세를 관망하며 동맹국 러시아에 대한 충성과 미국과의 대화 재개 및 관계 정상화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표심은 여러 논리의 조합으로 결정된다. 라틴 아메리카는 국제법, 국경 보전, 국가 주권 존중, 일방주의와 무력을 동원한 분쟁 해결 거부,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비동맹주의라는 전통적인 외교적 입장을 고수한다. 미국과 서구 열강에 대한 경제적 불신의 정도도 라틴 아메리카의 표심에 영향을 미친다. 라틴 아메리카는 또한 중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불확실한 국제 질서 속에서 실용적인 방식으로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추구한다. 이처럼 다양한 논리를 바탕으로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규탄하지만, 대(對)러시아 규제에 연대하는 유엔 문건 채택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런데,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이 러시아를 직접 지지하기는 어려워졌다. 러시아가 미국처럼 역사적으로 자국의 영향권에 있는 지역에서의 분쟁을 해결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의 국제 정책을 담당하는 세우수 아모링 특별 고문은 “나토의 확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구실을 제공했지만, 이 점이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군사적으로 침략하는 행위를 정당화해서는 안된다”라고 설명했다. 아모링 특별 고문은 또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휴전 및 협상을 통한 해결책 모색을 지지하는 ‘평화를 위한 국가 그룹’ 창설을 제안했다.
룰라 대통령이 2023년 2월부터 라틴 아메리카, 미국, 유럽(특히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우크라이나, 인도, 중국, 아랍에미리트에 제안한 이 이니셔티브는 중국뿐만 아니라 브릭스 회원국인 남반구 국가들, 우크라이나 분쟁과 관련된 (서구 및 비서구) G20 회원국 전체가 참여하는 다자 프로세스 구축을 목표로 한다. 여러 국가의 대대적인 참여를 통해 우크라이나 분쟁의 평화적인 해결을 찾겠다는 의도다. 브라질은 인도네시아, (2023년 G20 의장국) 인도, (2023년 브릭스 정상회의 개최국이자 2025년 G20 의장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동참을 촉구했다. 브라질은 이 외교 프로세스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2024년 브릭스 의장국, 브라질이 2024년 G20 의장국, 2025년 브릭스 의장국을 맡을 예정이라는 사실도 고려했다.
룰라 대통령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우회하는 이 평화 이니셔티브는 궁극적으로 (기후, 평화, 경제, 디지털, 민주주의 등) 다양한 국제 문제를 담당하는 “정치적 G20”을 탄생시키고 남반구 국가들에 더 유리한 새로운 논의 형식의 출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룰라 대통령의 계획은 서구 열강의 관심을 모을 수 있을까? 일단 현재로서는 어려워 보인다. 미국과 EU는 룰라 대통령의 제안이 너무 순진한 발상이며, 브라질이 러시아 및 중국과 너무 친밀하다고 비난하며 브라질의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룰라 대통령의 계획은 의미가 있다. EU, 유럽 국가, 미국, 우크라이나, 러시아에서 만연하며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는 극단론과 구분되는 유일한 이니셔티브이기 때문이다.
글·크리스토프 벤투라 Christophe Ventura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선임연구원. 주요 저서로『Géopolitique de l’Amérique latine 라틴 아메리카의 지정학』(Éditions Eyrolles, Paris, 2022)이 있다.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Déclaration commune russo-chinoise sur un monde multipolaire et l'instauration d'un nouvel ordre international 다극화된 세계와 새로운 국제 질서 수립에 대한 러시아-중국 공동 선언문’, 1997년 5월 15일, https://digitallibrary.un.org/
(2) Danielle Ganser, ‘Retour sur la crise des missiles à Cuba 미사일 위기로 회귀한 쿠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2년 11월호. Peter Kornbluh, ‘Missiles, mensonges et diplomatie 미사일, 거짓말 그리고 외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1월호.
(3) Eva Vergara, ‘Pandemia es peor crisis en América Latina en 120 años, Cepal’, <Associated Press>, New York, 2020년 12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