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그 섬에서 비롯됐다

다시 읽는 고전 로빈슨 크루소의 '재해석'

2012-06-12     스티븐 하이머

영국 작가 대니얼 디포는 1719년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을 창조해냈다. 영국인 로빈슨은 여행 중에 배가 난파돼 베네수엘라 오리노코강 하구의 한 섬에 표류하게 된다. 경제학자 스티븐 하이머는 로빈슨의 섬 생활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구축하는 메커니즘, 즉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에 대한 완벽한 알레고리를 보았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고독한 인물 로빈슨 크루소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의 튼튼한 체력, 효율성, 높은 지능, 검소함 등은 자연을 통제하는 인간의 능력을 상징한다. 대니얼 디포(1660~1731)가 풀어놓는 이 모험담은 정복과 노예, 포식과 살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약육강식의 세계다. 이 소설에 대해 논할 때 이런 측면들이 은폐돼온 것은 카를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이) 온건한 경제학에서는 처음부터 목가적인 곡조가 넘쳐흐르기" 때문이다.(1) 경제학자들이 총애하는 로빈슨과 소설 속 실제 로빈슨 사이에는 경제학 교과서에서 미화하는 자유무역과 실제 현실 사이의 간극만큼이나 큰 차이가 존재한다.

자유주의적 관점의 자유무역 이론은 이를테면 사냥꾼과 어부가 평등·호혜·자유가 보장되는 조건 속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노동 대가를 교환하는 모델에 기초한다. 그러나 국제무역 혹은 지역 간 무역은 사실상 평화와는 거리가 먼 종속적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교역은 본토와 배후지,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주인과 노예 사이에 이뤄진다. 자본이 자신의 증식을 위해 노동을 필요로 하듯이, 무역은 체계적으로 조직된 역할 분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한쪽에는 설계·계획·조직의 임무와 이윤이 주어지고, 다른 한쪽에는 노동 의무가 부과된다. 이윤 분배의 구조적 불평등에 기초한 이 관계는 사회적(빈곤), 상징적(강요된 사회화), 물리적(전쟁) 폭력에 의해 성립되고 유지된다.

자본주의적 축적 과정은 두 종류 인간의 만남에서 출발한다. 한쪽에는 자신이 소유한 자본을 타인의 노동력을 구입해 증식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노동력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는 일단 자리를 잡고 나면 이 두 종류의 사람들 사이의 분리를 유지하며 확대재생산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자신의 두 다리로 일어서려면 우선 본원적 축적 단계를 통해 기본 형태를 갖춰야만 한다.

<자본> 1권 후반부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이 자본의 손아귀에 집중되고 노동자들이 그 지배 아래 놓이는 역사적 과정을 분석한다. 마르크스는 농촌 인구가 토지에서 쫓겨나면서 점차 임노동이 확대되는 과정과, 산업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여명이 밝아오는 시대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약탈을 통해 탄생하게 되는 배경을 설명한다.

<로빈슨 크루소>에서 대니얼 디포는 이 탄생 과정을 17세기 한 영국인을 통해 형상화한다. 로빈슨은 처음에는 자신의 브라질 농장에서, 다음에는 카리브해의 섬에서 인부들의 노동으로부터 부를 축적한다. 물론 로빈슨이 도입한 시스템은 훗날 영국에서 부상하게 될 경제체제와 달랐고, 비유럽 지역에서 초기 자본가들이 운영한 식민지 농촌경제에 더 가까웠다. 그런 의미에서 로빈슨의 이야기는 후진적 경제의 탄생 과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흔히 로빈슨은 살아남기 위해서는 의지할 것이 자신밖에 없는 환경에서 기지를 발휘해 생존한 전설적 인물로만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 소설에서 로빈슨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당히 의존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난파를 당한 뒤에도 로빈슨은 타인의 도움과 협력을 받는다. 그의 모험은 모든 생산 속에 근본적으로 내재된 사회적 성격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는 전혀 모순이 아니다. 고립된 개인의 생산도 사회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생산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일 수 있다.

소설의 뒷부분에서 로빈슨은 난파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엄청난 부를 소유하게 된다. 로빈슨은 그가 부재하는 동안에도 세심하게 관리된 브라질 농장과 함께, 그가 '자신의' 섬에 도입한 경제 시스템 덕분에 엄청난 자원을 재산으로 소유하게 된다. 물론 그러기까지 오랜 기간 고독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이 겪는- 보잘것없는 보수를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들뿐 아니라, 로빈슨처럼 끝없이 축적을 거듭하는 자본가들도 겪는- 소외에 비해 그의 고독이 더 힘겨운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 고독의 시기에 로빈슨은 지배적 경제이론과 반대로 교환이 아닌 개인적 목적을 위해 섬을 이용한다. 그는 자신에게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혼자 지내는 동안 그의 눈에 노동은 조금씩 가치를 상실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추동력인 축적에의 열망은 사라진다. 관리하거나 지배할 대상이 없어지자 탐욕도 자취를 감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에게서 뽑아낸 잉여가치가 자본주의의 번영을 가져온다고 했다. 따라서 노동력이 사라지면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체계는 곧바로 무너져버린다. 잉여가치에 대한 광적인 추구는 중단되는 것이다. 로빈슨이 세운 농업경제는 자족적인 체계다. 효율성과 능력, 축적 등의 기준은 더 넓은 가치체계 속에서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고독에서 벗어나자마자 로빈슨은 지배와 축적의 욕망에 다시 사로잡힌다. 오직 자신의 노동력으로만 살던 때에는 그는 노동을 기준으로 사물을 측정하지 않았다. 화폐와 자본은 권력 위에 구축된 사회적 관계다. 자본가들은 자신의 재산을 둘러보며 흡족해하는 것을 넘어 타인에 대한 권력을 확장하고 축적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로빈슨처럼 완전히 고독한 상태가 된 뒤에야 그런 자신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대니얼 디포는 소설 속 인물을 통해 단지 우연히 무인도에 표류하게 된 한 영웅의 모험담만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는 로빈슨을 통해 자본주의체제 속에 사는 인간들의 삶, 즉 고독·궁핍·불확실성·불안으로 점철된 삶을 알레고리화한다. 로빈슨의 고독은 실제 현실 속에서보다 그의 머릿속에서 더 강하게 체험된다. 그는 섬에서 누군가와 맞닥뜨릴 때마다 두려움과 의심에 사로잡힌다. 그의 본능적인 경계심은 소유에 기초한 개인주의의 소외 상태를 완벽히 보여준다. 외부는 벙커처럼 짓고 내부는 쾌적하게 꾸민 오늘날의 주택단지를 보라.

로빈슨은 총을 갖고 있었지만 프라이데이에게 일을 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인에게 자신의 열등한 지위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는 주인은 그의 환심을 살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로빈슨은 프라이데이의 목숨을 구해준 일로 결정적 이점을 얻은 셈이다. 그럼에도 로빈슨은 여러 단계의 계획을 신중하게 진행해나간다. 하인으로 하여금 주인이 강요하는 종속관계를 완전히 내면화한 채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로빈슨이 해변에서 우연히 발자국을 발견한 날로부터 프라이데이와 처음으로 대면하는 날까지 무려 10여 년이 걸렸다. 그 기간에 로빈슨은 공포 속에서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못한다. 그는 생산활동을 급격히 줄이고, 외부로의 출입을 자제한다. 그리고 마침내 프라이데이가 그의 삶 속에 출현하자 그는 사업가의 재능을 발휘해 경영하고, 건설하고, 축적하기 시작한다. 소설 속에는 로빈슨이 회계 장부를 썼는지 분명하게 묘사되지 않지만, 그의 눈에 노동은 이제 온전한 가치를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목표를 설정하고, 명령을 내리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로빈슨은 프라이데이에게 온갖 종류의 임무를 맡긴다. 로빈슨은 그에게 일하는 요령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용기를 북돋워주고, 혼을 내거나, 같은 설명을 반복한다. 하인이 생긴 덕분에 로빈슨은 다시금 호모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가 된다. 노동은 프라이데이, 자본은 로빈슨의 몫이다. 한 제국의 조직과 건설, 혁신이 로빈슨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본원적 축적 시기가 끝난다. 로빈슨은 이제 대규모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동안 투입된 양질의 노동뿐 아니라 운 좋게 손에 넣은 무기들 덕분이다. 현재의 자본을 구축하기까지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 자본의 소유권을 문제 삼는 이는 없다. 프라이데이는 열심히 일했다. 게으름을 피우거나 향락에 빠진 적도 없다. 그러나 노역의 대가로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로빈슨이 엄청나게 불어나는 재산을 바라보며 놀고 먹는 동안, 프라이데이는 예전과 똑같이 가난한 상태로 살아간다.

새로운 사람들이 하나둘 섬으로 들어온다. 로빈슨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섬의 생산수단에 대한 독점권을 이용해 새로 온 사람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한다. 로빈슨은 제국이 확대됨에 따라 그만큼 첨예한 문제들을 만나게 되지만 공포와 종교, 경계 불가침, 왕실 사절단의 원칙을 차례로 이용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고 자기재생산의 질서를 유지해나간다.

로빈슨 크루소의 알레고리는 대부분의 현대 경제학자들이 선호하는 아동용 모험담보다 경제사와 경제이론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시장과 가격에 집착하는 이 경제학자들은 주인공이 입고 있는 옷의 가치를 그의 브라질 농장에서 재배한 사탕수수 양으로 측정하는 방법을 가르쳐줄지는 모르지만, 로빈슨과 프라이데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자본이 어떻게 구성되고 운영되는지 이해하고 싶다면 모든 것이 표면에서만 진행되는 시끌벅적한 시장이 아니라 회사의 은밀한 뒷방을 살필 필요가 있다.

디포가 묘사한 자본가는 시장의 바깥에 존재하는 무인도에 표류한다. 그러나 세계의 바깥은 아니다. 이 섬에서는 자본이 자신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자본은 무력과 환상에 의해 구축되고, 타인의 노동으로 증식한다. 로빈슨이 소유한 자본의 출생증명서는 대규모 상업자본만큼 피로 얼룩져 있지 않다. 그러나 강압적 본성에서는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다.

*이 글은 스티븐 하이머가 <먼슬리 리뷰> 1971년 12월호에 쓴 글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자매지 <마니에르 드 부아>(5월호)에서 요약한 것이다.

글•스티븐 하이머 Stephen Hymer 1934~74. 미국의 경제학자로, 1960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기업의 국제 생산활동에 관한 신고전학파의 이론을 비판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자본 I·2>, 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