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마리브의 부족들이 연합한 이유

“후티 반군 때문에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어”

2023-12-29     캉탱 뮐러 l 기자, 마리브 특파원

예멘 중앙 정부가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북부 도시 마리브. 이곳에서 부족들은 오랜 대립의 역사를 접고 후티 반군에 맞서고자 힘을 합쳤다. 이런 화합은 알리 압둘라 살레 전 예멘 대통령의 주도로 이뤄졌으며, 부족 간의 대립은 공동의 적 처단이라는 대의를 위해 잠시 미뤄졌다.

 

족장들이 한두 명씩 카펫과 긴 의자들이 있는 넓은 공간으로 들어온다. 터번을 쓴 남성들이 이번 회의의 주최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주최자는 모두에게 카트(Qat) 잎이 들어 있는 젖은 수건을 나눠준다. 카트는 환각 물질이 들었다고 알려진 허브다. 족장들은 마즐리스 곳곳의 의자에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카트잎을 동그랗게 말아 입안으로 넣는다. 이들은 오른쪽 볼에 카트잎을 밀어 넣고 불룩하게 만들면서 전선에 관한 소식들을 나눈다. 이곳에 온 셰이크(cheikh)들은 마리브주의 여러 부족들을 대표한다. 예멘 정부의 마지막 보루인 마리브를 후티 반군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이 부족들은 현재 마리브 주변을 지키고 있다.

부족 중에 인구가 가장 많은 무라드 부족과 바니 압드 부족은 남쪽을 맡고 있고, 알 자단 부족은 북서부 사막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있으며, 술탄 알 아라다가 속한 아비다 부족은 전선 뒤쪽을 책임지고 있다. 후티 반군이 2014년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북부로 진격하기 시작하자 마리브의 부족들은 힘을 합쳐 마리브의 수호에 나섰다. 부족 간의 대립과 사나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이처럼 마리브의 부족들은 9년 전부터 후티 반군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고 있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 이 부족들 간 갈등은 심각했다. 이는 알리 압둘라 살레 전 예멘 대통령이 부족들이 단합해 자신의 세력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부족들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전략을 펼치면서 더 악화했다. 그는 마리브의 부족들이 각자의 영토에 대한 독립권을 획득하지 못하게 막았고(예멘 전역에서는 독립권 요구 시위가 상당히 자주 일어났다), 마리브 주에서 생산되는 가스와 석유에서 나오는 수익을 배분받을 수 있는 권리도 박탈했다.

셰이크 아마드 알리 알자미는 잠 부족의 일원이다. 회의 내내 말이 없던 그는 후티 반군이 자신의 부족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일을 씁쓸하게 털어놓았다. “우리의 영토 대부분이 후티 반군에게 넘어갔습니다. 현재 부족민의 3/4이 고향을 떠나 마리브 주변이나 난민 캠프에 삽니다.(1) 고향에 남은 이들은 후티 반군한테 억압을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거대한 감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멘 통치는 뱀들 위에서 춤을 추는 것”

마리브의 부족 대부분은 수니파의 샤피학파로, 수니파의 4개 법학파 중 하나다. 그러나 잠 부족은 후티 반군과 같은 자이드파다(종종 샤피학파와 동일시되는 자이드파는 오랫동안 수니파의 5번째 학파로 여겨져 왔다). 알리 압둘라 살레 전 예멘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잠 부족의 일부는 2000년대 초반에 후티 반군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는 2014년 후티 반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 잠 부족이 후티 반군과 대립하게 되면서 복잡한 상황을 초래했다. “우리 부족민의 일부가 후티 반군에 가담했던 것은 종교적인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중앙 정부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습니다.” 알 자미가 설명했다. 

부족들 간의 관계, 약탈자이면서도 수익 배분에는 관심이 없던 중앙 정부에 대한 증오, 연합과 반목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예멘인들에 관해, 살레 전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예멘을 통치하는 것은 뱀들의 머리 위에서 춤을 추는 것과 같다.” 

1978년 대통령이 되고 2012년 강제 사임할 때까지 살레 전 대통령은 끊임없이 부족들을 괴롭혔고, 특히 그들의 영향력을 약화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살레 전 대통령은 본래 후티 반군의 적이었으나 그들과 잠시 동맹을 맺었다가, 다시 적이 되면서 2017년 후티 반군에게 살해됐다.(2) 

자신의 독재적이고 중앙집권적인 정부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살레 전 대통령은 부족의 셰이크들을 정계로 끌어들였다. 이에 알 이슬라(무슬림 형제단), 예멘 사회당, 국민전체회의(GPC), 나세르주의자 연합기구, 그리고 북부의 많은 부족들은 전통적인 조직 운영 방식이 통째로 뒤바뀌는 경험을 했다. 각자의 영향력과 권력에 따라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던 부족장들의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이제는 정계 활동에 따른 새로운 관계가 형성됐다.

사나전략연구소 연구 센터에서 발표한 보고서에서, 예멘의 정치학과 교수이자 연구원인 아델 다쉴라는 이렇게 썼다. “살레 대통령은 부족의 심리, 셰이크의 사고방식, 부족의 사회적 구조, 부족 일원들의 역할과 능력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3) 어떤 셰이크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면 살레 대통령은 그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의 부하들에게 무기와 돈을 지원하고 정치적인 힘도 주었다. 그러면 그 부하들은 야망을 갖게 되고 곧 새로운 세력이 형성돼,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편이 늘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방법으로, 살레 대통령은 부족민들, 때로는 어린이들과 입대 계약을 맺고 가스와 원유에서 비롯되는 수익을 그 대가로 지급했다. 이렇듯 돈으로 충성심을 매수하는 방법은 자신에게 쉽게 복종하지 않는 부족들을 포섭하는 데에도 효과적이었다.

 

살레 전 대통령의 인기 전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예멘 관련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었던 페르난도 카르바잘은 살레 대통령의 인기 전술에 관해 잘 알고 있었다. “2014년 이전에 어린 병사들은 다양한 군부대에 소속돼 있었습니다. 실제로 활동하는 군인이든 아니면 ‘유령’ 군인, 즉 군인 목록에 이름만 올라가 있는 경우이든 말입니다. 이런 계약은 가난한 부족에게 상당한 수입원이 돼주는 동시에 셰이크와 중앙 정부 간에 일종의 충성 관계가 형성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정부의 입장에서는 부족의 아이들을 병사로 등록하는 것이 국부를 부족들과 나누는 것보다 훨씬 더 저렴했습니다.”

미성년자들에게 일자리를 나눠주는 정책으로 살레 전 대통령의 인기는 치솟았고, 이는 부족민들의 충성과 복종으로 이어졌다. 자녀를 군대에 등록시킨 가족은 추가 수입과 함께 훈련을 명목으로 탄약과 무기도 제공받았다. 이는 개인적으로 보관할 수도 있고 암시장에 내다 팔 수도 있었으며, 내부 갈등이나 다른 부족과 분쟁이 생겼을 때 유용하게 사용됐다. 사실, 살레 전 대통령은 예멘의 부족들이 물 부족, 영토 확장, 가족 간의 갈등, 유산 분쟁 등의 다양한 이유로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런 부족들의 호전성이 자신과 중앙 정부를 향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몸을 사리다 보니 주민들을 위한 개발은 거의 없었다. 30년이 넘는 살레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에 마리브주는 풍부한 광물 자원, 거대한 수원, 발전소, 농업과 양봉 산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낙후된 상태에 머물렀다. 병원, 의료 인력, 학교, 교사, 도로의 만성적인 부족 문제는 마리브 거주민들에게 소외감과 함께 중앙 정부에 대한 분노를 심어주었다. 따라서 살레 전 대통령에게는 민심을 달래는 조치가 필요했다.

그가 구사한 인기 전술 중에는 몇몇 부족장들에게 원유수송관, 가스수송관, 전선의 감시 업무를 맡기는 것도 있었다. 자기 몫이 충분하지 않다며 불만을 가진 부족들이 이런 인프라를 훼손하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에 마리브는 도로 절단, 관광객 납치, 난투극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 때문에 중앙 정부는 억압과 타협의 카드를 번갈아 가며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알 카에다 아라비아반도 지부(AQAP)라는 새로운 세력이 예멘에 등장하면서, 살레 전 대통령에게는 부족들을 억누를 구실이 하나 더 생겼다. 

 

 

알카에다의 입성, 부족민의 희생

마리브 주에서 테러 공격은 간헐적으로만 일어났고 또한 이것이 예멘인들과 알카에다 간의 이데올로기적인 동맹을 의미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살레 전 대통령은 미국과 손을 잡고 대대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무라드 부족의 부족장인 셰이크 압둘라와히드 알 키블리는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알카에다는 현실에 불만이 많던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접근해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즉, 마리브의 부족들은 알카에다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살레 전 대통령은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며 우리를 궁지로 내몰았습니다. 우리는 테러리스트들과 전투까지 벌여야 했고, 그 결과 많은 부족민이 희생됐습니다.”

이 셰이크와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은 마리브에 알카에다가 입성한 것이 살레 전 대통령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고 믿고 있다. 살레 전 대통령은 이를 빌미로 마리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부족들의 사회적 및 경제적인 요청을 무시했다. 게다가 ‘테러리스트’로 판단되는 무장 단체들과의 투쟁에 미국이 개입하면서 이 지역의 힘의 균형에도 변화가 생겼다. 2010년 5월에는 마리브의 부주지사인 자비르 알 샤브와니가 미국 드론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중앙 정부의 상징, 즉 수도 사나를 위한 원유수송관과 전력 인프라에 대한 보복성 공격으로 이어졌다.

2012년 이전에는 마리브에 경찰서 한 곳과 법원 한 곳만 운영되고 있었다. 공무원들은 봉급이 적어 종종 뇌물을 요구했기 때문에 마리브의 주민들은 분쟁이 생겼을 때 주로 종교 지도자나 부족장을 통해 해결했다. 2012년 아랍의 봄 혁명 중에 시위대의 요구로 강제 퇴진한 살레 대통령을 대행하던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는 술탄 알 아라다를 마리브 주의 주지사로 임명했다. 이에 따라 이전 주지사와 친하던 셰이크의 영향력은 줄었고 새로운 인물들이 부상했다. 

 

몰려드는 난민, 마리브 인구 3배로 증가

그러나 전임자들과 달리 신임 주지사는 공공 서비스와 치안 회복에 공을 들였다. 부족 간의 빈번한 갈등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그는 대화의 자리도 마련했다. 내전이 일어나고 1년 뒤인 2013년에 마리브 주의 부족장 대표들은 헌법을 제정하는 전국 대화 회의에도 참석해 새로운 헌법에 지역적이고 종교적인 특성을 더 많이 반영될 수 있도록 도왔다. 헌법 제정을 위한 협상은 1년 넘게 이어졌고, 비록 걸프만 국가들과 미국의 입김도 크게 작용하기는 했지만, 셰이크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부족들이 단합해야 마리브 주의 정치적인 독립성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로부터 1년 뒤, 후티 반군이 수도인 사나를 점령하고 예멘 영토의 남부를 거쳐 아덴까지 진격해오자, 장관, 고위 공무원, 정치 기관들은 마리브로 피신했다. 예멘 전역에서 온 수천 명의 난민도 마리브로 몰려들었다. 사나전략연구소에 따르면, 예멘 내전이 발발한 첫해에 마리브에 들어온 난민은 135만 명으로 마리브의 인구는 내전 전(약 41만 1,000명)의 3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는 마리브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내무부는 마리브에 사무소를 열고 치안 강화에 주력하고, 몇 개 없는 공공 보건시설과 교육기관으로 몰려드는 난민들을 관리했다. 학교, 병원, 도로, 주거지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정부군과 국방부를 위한 군사훈련소도 서둘러 지어졌고, 후티 반군이 점령한 지역들의 재탈환 작전을 지휘하는 군사령부도 마련됐다. 2015년부터 예멘 내전에 개입한 사우디아라비아는 마리브주에 동맹 캠프를 열고 자국 군대를 주둔시켰다. 걸프만 국가의 수장들이 마리브를 방문했고, 프랑스 의원 8명으로 구성된 사절단도 사우디아라비아의 후원을 받아 2018년 마리브 현장을 돌아봤다. 오늘날 마리브는 명실공히 예멘의 비공식 수도다. 사나에서 쫓겨 나온 중앙 정부의 생존 여부는 이제 마리브 부족들의 저항에 달렸다.

 

‘인민 저항’ 슬로건 아래 후티 반군에 맞서 

마리브의 부족들은 굉장히 오래전부터 지속돼 온 부족 간의 갈등을 잠시 미루고 힘을 합쳤다. 2014년 9월부터 마타레(matareh), 즉 부족 연합은 ‘인민 저항’이라는 슬로건 아래 중앙 정부와 후티 반군과 투쟁하는 동맹 세력과 연합해 후티 반군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고 있다. 특히 모든 부족은 부족 간의 갈등을 중단하기로 서약했다. 이 문제를 더 알아보기 위해 우리는 비공개 장소에서 알 아라다 주지사를 만났다. 그는 후티 반군으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고 있던 터라 삼엄한 경호를 받고 있었다. 

“부족들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정부의 지휘에 따라 정부군을 지원하면서 후티 반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부족들이 없었다만 마리브는 벌써 함락됐을 겁니다.” 예멘의 전통 단검인 잔비야를 손에 쥔 채로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이런 평화는 한시적이다. 갈등의 씨앗은 여전히 존재하고, 부족들 간에 불화가 일어나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 한다. 2022년에는 알 가님 부족민과 알 자나 부족민 간에 싸움이 일어나 무장 공격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우리는 지금 마리브 남쪽의 전선인 알 주바에 와 있다. 제26 보병여단의 수장이면서 무라드 부족의 영향력 있는 셰이크인 65세의 무파라 부하이베는 대원들을 산으로 둘러싸인 거처로 불러 모았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대원들은 말이 없다. 후티 반군과의 투쟁에서 희생된 ‘순교자’들의 얼굴이 카라슈니코프 자동소총의 개머리판을 장식하고 있다. 부하이베가 엄숙한 목소리로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우리는 예멘인들의 희생을 더는 원치 않지만, 반군 때문에 투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습니다, 후티 반군은 무력과 억압을 사용해 우리를 통치하고 자신들의 종교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려고 합니다. 그들이 이슬람교를 해석하는 방식은 우리에게는 생소합니다. 자이드파 이맘이 통치하던 때(9세기~1962년)처럼 우리를 다스리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북쪽의 라그완으로 가면 완만한 지형이 펼쳐진다. 바니 샤다드 부족은 엘 삼라 와디(wadi)와 광활한 사막을 지키며 살아왔다. 픽업트럭을 타고 몇 시간을 달리면 자우 마을이 나오는데,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후티 반군이 있어서 이 마을에는 수호대가 주둔하고 있다. 테라코타로 만들어진 집 안으로 들어가니 셰이크 살레 알리 자세르가 벨트에는 잔비야를 차고, 등에는 카라슈니코프 자동소총을 멘 상태로 우리를 맞았다. 그는 심복들로 둘러싸인 채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후티 반군은 악마의 민병대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은 부족들끼리 똘똘 뭉쳐서 잘 버티고 있습니다. 부족들이 분열되는 순간 적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들 간의 단합에도 불구하고 라그완은 방어하기 어려운 곳이다. 현재 후티 반군이 점령 중인, 대부분이 사막으로 이뤄진 알자우프 주와의 경계선을 따라 전선이 끝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사다와 사나의 산지에서 전투를 벌이는 데 익숙한 후티 반군은 상대에게 위치를 쉽게 간파당할 수 있는 평지에서는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곳 지형에서는 상대의 위치가 훤히 보입니다. 이 사막은 후티 반군의 지옥이 될 것입니다.” 셰이크 자세르의 지시를 받은 한 병사가 말했다. 

 

 

글‧캉탱 뮐러 Quentin Müller
기자, 마리브 특파원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Quentin Müller, ‘Survivre au Yémen 예멘에서 살아남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6월호.
(2) Laurent Bonnefoy, ‘Les déchirures du Yémen 예멘의 상처’, <마니에르 드 부아르> ‘De l’Arabie saoudite aux émirats, les monarchies mirages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아랍에미리트까지, 신기루 같은 군주국들‘편, n°147, 2016년 6~7월.
(3) Northern Yemeni Tribes during the Eras of Ali Abdullah Saleh and the Houthi Movement : A Comparative Study, 사나 전략연구소, 2022년 2월 16일, https://sanaacenter.org/

 

 

철의 후티 반군

1990년대 초에 결성된 후티 반군은 오늘날 예멘의 정세를 좌우하는 핵심 세력들 중 하나다. 물론 알카에다 또는 남예멘의 분리파도 무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후티 반군은 2014년에 예멘의 수도인 사나를 점령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의 지원을 받는 예멘 정부군의 주적으로 떠올랐다. 대부분 부족민과 지역민들로 구성된 후티 반군은 이제까지 예멘 북동부의 소외 현상을 투쟁의 명분으로 삼아 왔다. 

또한 자신들이 믿는 소수 종교인 자이드파를 수호하려는 목적도 있다. 자이드파의 경우 시아파의 분파로 주로 알려졌지만, 일부 이슬람 학자는 수니파에 가깝다고 말하면서 법적으로나 교리적으로나 수니파의 5번째 분파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주장인데, 자이드파가 수니파의 분파가 된다면 후티 반군과 이란(시아파) 간에 종교적인 연결성이 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멘 영토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있는 후티 반군은 사우디아라비아(수니파)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적개심을 표현한다. 민간인들도 공격하는 이란 연합군에 대항해, 후티 반군은 당한 대로 갚아주겠다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이에 어린아이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고, 후티 반군이 관리하는 구역 내에서는 기자를 비롯한 그 어떠한 반대의 목소리도 나오지 않도록 공포감을 조성한다.  

 

 

글·아크람 벨카이드 Akram Belkaïd

번역·김소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