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료들과 함께합니다!

방데의 파업 노동자들과 함께

2023-12-29     피에르 수숑 l 기자

시위 지지자들의 수는 엄청난 반면, 정작 현장 참여자 수는 적다. 이 두 가지 수치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연금개혁 반대 노동운동가들의 당면 과제다. 그러나 운동가들은 이 시위를 장기전으로 보고, 상당히 긍정적으로 이 상황을 수용하고 있다. 프랑스 서부 노동조합의 경우를 보자.

 

“나무판을 어디에다 뒀죠?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요.”

2023년 3월 21일, 방데주 에르비에 산업구역의 원형교차로. 이른 봄 새벽의 어둠과 추위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방데주의 노조 활동가들이었다. 그 전날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됐음에도, 이들은 연금개혁 반대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도로 위에 나무판을 쌓고 있었다. “우리만이라도 도로 폐쇄에 참여하기로 했어요. 방데주의 노조연합 태도가 소극적이어서요. 누군가는 우리의 활동을 과격하다고 하겠지요.” 프랑수아가 말했다. 그는 CGT(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 노동총연맹)의 라 로슈-쉬르-용(La Roche-sur-Yon)지부 소속 활동가다.(1) 나무판들이 곧 불타올랐다. 덤프트럭 한 대가 연대의 의미로 경적을 울렸다. 

“노조원이신가요?” 자가용을 몰던 한 50대 여성이 멈추고 물었다. 

“맞습니다. CGT 소속입니다.”

“그렇군요. 제 위치를 추적하는 사람이 있어서 간단히 말씀드릴게요. 노조에 가입하고 싶은데요. 저는 주부이고 형편이 안 좋아요. 여기저기 돈 들어갈 데가 많은데 연금 받는 걸 64세까지 기다릴 수는 없어요.”

상호공제조합의 노조원인 발레리는 자신의 연락처를 휘갈겨 쓴 종이를 급히 건넸다. “이 한 분을 만난 것만으로도 오늘 우리의 활동은 성공한 셈입니다.” 

‘경제를 마비’시키겠다는 목표로 시작된 이 활동은 오전 내내 도로를 지나는 이들에게 전단지를 배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30여 명에 불과한 활동가들은 도로 통행을 완전히 마비시키지는 못했지만, 공권력을 성가시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더 이상 나무판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지역 헌병대가 동원된 것이다. “우리는 동료들과 함께합니다!” 에네디스(Enedis)의 직원인 카멜이 외쳤다. 이 ‘동료들’이란, 이 도로에서 몇 미터 떨어진 산업구역 노동자들을 말한다. 그 5,000여 명들 중 파업에 동참한 사람은 1명도 없었다. 다만 ‘동료들’은 전단지를 받으면서 활동가들에게 격려와 감사를 표현했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지쳤다. 여러 차례의 시위에(한 활동가는 방데주에서 이번 겨울만큼 많은 시위가 일어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지지와 축하의 메시지에, 도로의 경적 소리에, 절대로 활동이나 파업으로는 전환되지 않는 이 모든 것에 지쳤다. 포기, 체념, 개인주의, 재정적인 어려움 등 활동가들이 꼽은 피로의 원인은 각기 달랐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나무판을 가져오고, 나뭇가지를 모아오고, 전단지를 제작하고, 보온병에 커피를 담아 오고, 웃고 있다. 저마다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CGT 라 로슈-쉬르-용 지부의 철도원들도 이처럼 모순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 그들은 사무실에 우리를 초대해 풍성한 음식을 대접했다. 현재 철도원 노조는 무기한 파업에 들어간 상태다. 그러나 무기한 파업에 모두가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파업 중인 동료들은 의지가 굳은 핵심 인물들입니다.” 올리비에가 말했다. 모두가 더 많은 직원을 파업에 동참시키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최악은 파업에 전혀 무관심한 경우입니다.” 

올리비에가 한숨을 내쉬었다. “파업에 참여한 직원은 소수이지만, 일부 동료는 태업으로 지지 의사를 표현했습니다. 근무시간에 온종일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는 식이지요.” 올리비에는 직원들의 “정치적 의식과 노조 활동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하다”라고 비판했다. 사실 프랑스 국민 대다수가 이번 개혁안이 불공정하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는 모든 여론조사 결과로 확인되고 있다. “맞습니다.” 세바스티앙이 말했다. “하지만 그 인식은 소파 위에서만 요란하게 표현됩니다. 집에서 TV를 보며 분노하는 단계를 벗어나 실제로 일터에서 작업을 중단하고 정부를 압박하는 단계에 이르기는 쉽지 않지요.” 그럼에도,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투쟁하고 있다. 

 

자본의 시간 vs. 투쟁의 시간

에리크도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어도 활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낭트(루아르-아틀랑티크)의 에어버스 CGT 노조원인 에리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에리크와 그의 동료 지미에게, 최근 노조원 150명을 동원해 원형교차로를 몇 시간 동안 완전히 폐쇄했던 것도 성과가 아닌지 물었다. 지미가 대답했다. “우리의 치부를 고백하는 것 같네요. 노조 대표 선거에서 우리를 지지해준 동료들만 모였어도 아마 1천 명 가까이 됐을 겁니다.”

에리크가 덧붙였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죽기 전에 성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생각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변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활동을 계속해야 합니다. 특히 속도에 연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공장에 갓 입사한 청년들은 대개 속도에 민감한데, 사회적 전복은 신속하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에리크가 덧붙였다. 

지미도 ‘속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공장에서는 작업 속도가 정해져 있습니다. 시간에 비례해 완수해야 할 작업량이 있지요. 자본의 시간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 긴 시간, 바로 우리의 시간에 재적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해결할 문제가 또 있다. 바로 디지털 제어 시스템이다. “우리는 그것을 ‘버튼’이라고 부릅니다.” 에리크는 자신이 육체노동자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사실 공장 일을 하다가 노조 일로 옮겨오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작업실에서는 종일 일하면 제 손으로 만든 결과물이 남습니다. 그런데 노조 활동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당장 보이는 성과가 없습니다. 이 일의 특성이지요.” 

그럼에도 에리크와 지미는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노조연합이 단결할수록 노조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직원이 많아질 것이다. CGT 회원들은, 에어버스의 최대노조인 FO(Force Ouvrière, 노동자의 힘)가 노조연합에 협력하는 것만으로도 활동가와 파업 노동자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여겼다(에어버스 내 노조 순위는 FO, CFE-CGC(프랑스 관리자–간부총연맹), CFTC(기독노동자연맹), CGT이다-역주).

“3일 걸렸어요. 공장의 전 직원이 3일 동안 파업해 임금 인상을 얻어냈습니다.”

노조원이 2,000명이 넘는 방데주 CGT 플뢰리미숑 지부의 장마리가 말했다. 그 정도면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은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장마리는 펄쩍 뛰었다. “파업 3일은 너무 길지요! 그전에 몇 개월, 몇 년간 직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려 노력했던 시간을 감안하면요.” 

장마리의 옆에 있던 미카엘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공장 입사 초기를 떠올렸다. 미카엘이 현실에 눈을 뜬 것은, 동료가 부당 해고를 당했을 때였다. 미카엘은 당시 공장 내에서 지지율이 가장 낮았던 CGT에 노조원으로 가입했다. 그로부터 15년 뒤 CGT는 직원의 거의 절반이 가입한 노조로 성장했다. 이 “긴 시간” 덕분에 플뢰리미숑 CGT 회원의 10%가 연금개혁안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미카엘은 연금개혁이라는 사안의 중요성에 비해서는 참여율이 낮았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 비율은 지역 노동자들 전체 가운데 시위에 참여한 비율보다는 훨씬 더 높았다. 이렇게 장마리와 미카엘은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투쟁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는 이길 것”

“노예 생활이 따로 없었습니다.” 베아트리스는 신중한 사람처럼 보였다. CGT 소속의 재택 돌봄 서비스 노조를 이끄는 베아트리스는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던 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단어 하나 허투루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베아트리스는 부당한 근무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털어놓았다. “다행히도 곧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어요. 모두들 일이 끝나면 제 방으로 모여 가볍게 술과 안주를 먹으면서 저의 반려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회사에서는 그녀가 노조를 결성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 베아트리스는 웃으면서, 당시에는 노조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다고 말했다. 이렇게 매일 밤 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언젠가는 노조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매일 일상과 고충, 다과를 나누던 그들은 결국 한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0년대 말, 베아트리스는 노조 대표로 선출됐다. “사측과 처음 협상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저는 불만스러운 항목들을 사장에게 조목조목 따졌습니다. 우리는 명백하게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제 의견을 관철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사장도 인간이니, 제 말을 이해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히려 사장이 우리의 말을 너무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알겠어요. 당신도 힘드시겠지요. 하지만 원래 그런걸요. 당신이 만족하지 못한다 해도 바뀌는 건 없어요.’”

“그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베아트리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어갔다. “그때까지 저는 계급투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서로의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요구를 거절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거든요.” 헌법 제49조 3항(긴급 상황에서는 국무회의를 통과한 법안을 총리의 책임 아래 의회 투표 없이 통과시킬 수 있다-역주)을 이용해 연금개혁안을 날림으로 통과시킨 사건이나, 대중의 극심한 반발에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현 정부의 모습이나, 베아트리스는 모두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스의 사장은 해당 분야에서는 드문 일이었던 파업이 일어나자, 결국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노조 결성 20년이 된 지금, 엘리자베트 보른의 연금개혁안에 반발해 일어난 방데 파업에 베아트리스가 속한 재택 돌봄 서비스 노조원의 10%가 참여했다. 베아트리스는 눈에 띄는 성과가 없는데도 노조 활동을 오랫동안 계속해 왔다. 그 오랜 시간을 기꺼이 감내했다. 그녀는 이 10%라는 숫자가 엄청난 승리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연금개혁안이 철회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계급 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투쟁에서는 질 수 있어도 전쟁에서는 질 수 없지요.” 베아트리스는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베아트리스의 옆에 있던 드니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드니가 수학을 가르치는 기술 고등학교에서는 파업이 아주 짧게 일어났지만, 전례 없는 일이었기에 승리나 마찬가지였다. 드니의 동료 중 한 명이 숲에서 나무를 직접 베어다가 학교 건물의 입구를 모조리 막아버렸다. “사실 그 친구가 2018년 우리 학교로 부임해 왔을 때 대놓고 싫은 티를 냈어요. 그는 마크롱의 광팬이어서 마크롱이 나오는 토론 방송을 5시간 연달아 보기도 했거든요. 안 본 방송이 없을 거예요. 프랑스 어디에도 그런 사람은 없을걸요.”

그러나, 드니는 마음을 열고 ‘마크롱의 광팬’을 일과 후 술자리에 초대했다. “매주 금요일, 우리는 학교 근처 술집에 모이곤 했습니다. 맥주를 마시며 카드놀이를 했지요. 그리고 다양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했어요. 물론 정치 이야기도 했고요. 그렇게 계속 함께했더니, 그 친구는 마크롱의 광팬에서 시위용 나무를 가져오는 사람이 됐네요. 5년이 걸렸습니다.” 5년은 긴 시간일까? “아니요. 5년이면 빠른 거지요!” 드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드니는 앞으로도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글·피에르 수숑 Pierre Souchon
기자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우리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모두 이름으로만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