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엘리트 권력의 해부

다시 읽는 고전 파워 엘리트

2012-06-12     찰스 라이트 밀스

냉전이 한창인 1956년 미국의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는 <파워 엘리트>를 출판했다. 당시 신랄한 비판을 받은 이 연구서는 서로 대립하는 다양한 이해가 건전한 경쟁을 유도한다는 '다원주의 사회' 이념을 부정했다. 그는 오히려 경제·정치·군사적 이해의 대립을 부각시켰다. 밀스는 이를 통해 주요 기관에서 힘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반대할지라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개인의 집단을 보여줬다.

미국 사회 내부에서 국가권력의 핵심은 경제·정치·군사 분야에 있다. 다른 기관은 현대사에서 소외되거나, 때로는 앞서 말한 세 분야에 부속된 것처럼 보인다. 어떤 가족도 대기업만큼 국가의 일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어떤 종교도 군부만큼 미국 젊은이의 삶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어떤 대학도 국가안전보장회의만큼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종교·교육·가족 분야는 더 이상 국가권력의 독자적 축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독자적이던 이 분야들은 점차 중대하고 직접적 결정을 하는 유일한 기구인 경제·정치·군사 주요 기관의 권력에 동화되고 있다.

가족, 종교, 학교는 현대 생활에 적응 중이다. 현대 생활을 만든 정부, 군대, 기업은 이제 자신보다 약한 기관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교회는 군대에 종군목사를 공급하고, 군대는 그들을 통해 살해 욕구를 정당화한다. 학교는 향후 기업이나 군대의 요직을 차지할 만한 인재를 선별해 육성한다. 오래전 산업혁명으로 이미 대가족은 사라졌지만, 이제 국가의 부름이 있을 때면 가족은 아버지와 아들을, 때로는 강제로 빼앗긴다. 하위 기관의 모든 표상은 3개 상위 기관의 권력과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된다.

현대사회에서 한 개인의 인생은 자신이 태어난, 또는 결혼으로 꾸린 가정뿐만 아니라 점차 가장 꽃다운 시절에 왕성한 활동을 하며 보내는 기업의 영향을 받는다. 어린이와 청소년 시절에 가르침을 받은 학교뿐만 아니라 일생 동안 그를 좌지우지하는 국가의 영향을 받으며, 가끔씩 신의 말씀을 들으러 가는 교회뿐만 아니라 규율을 가르친 군대의 영향도 받는다. (중략)

경제·정치·군사 분야에서 결정권자가 지닌 권력 수단은 엄청나게 늘었다. 중앙집행권도 확대됐다. 각 분야의 내부에서 한층 완고해진 현대적 관리 체제가 마련됐다. 이 세 분야가 점차 확대되고 집중되면서 그들의 활동이 미치는 영향력은 증가했고, 한 분야가 다른 두 분야와 맺는 관계도 더욱 많아졌다. 소수의 민간기업이 내린 결정이 세계경제는 물론이고 군사·정치적 사건에도 영향을 미친다.

군사 행정부의 결정은 정치·경제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정계에서 내린 결정이 경제활동과 군사계획을 확정한다. 더 이상 한쪽에는 경제, 다른 한쪽에는 정권이나 기업과 무관한 군사기구를 포함한 정치로 구분되는 세상이 아니다. 군사적 결정 및 기구와 수많은 관계로 연결된 정치·경제가 존재한다. 중앙유럽을 통과해 아시아의 경계를 지나는 경계선 양쪽에서 경제·정치·군사적 구조가 점점 얽히고설키고 있다.

기업 경제에 정부가 개입한다면 기업도 정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 개입한다. 구조적 측면에서 경제·정치·군사라는 권력의 삼각형은 지도부가 서로 교차하는 원인이며, 상호 교차된 지도부는 현재 역사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략)

경제·정치·군사 각 분야가 확대되고 고도로 집중되면서 그 정점에는 경제·정치·군사 엘리트가 등장한다. 경제 분야에서는 기업의 부호 중에 최고경영자(CEO)가, 정계에서는 정치지도자 구성원이, 군사기구에서는 참모총장과 지휘체계 상부 주위에 밀집한 군정치 엘리트가 최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 분야가 서로 겹치고 그들이 내린 결정의 파급력이 커지면서 세 분야의 수장인 전쟁의 지휘자, 기업 운영자, 정치지도자는 서로 뭉쳐 미국의 파워 엘리트를 형성하고 있다. 흔히 이런 권력자들을 상위계층으로 여긴다. 그들이 누리는 것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재물과 경험을 다른 이들보다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엘리트는 단순히 가져야 할 것, 다시 말해 통상적으로 돈, 권력, 명예, 그리고 이것으로 가능한 모든 라이프스타일을 누리는 개인으로 구성될 것이다. (중략)

그러나 엘리트란 단지 다른 사람보다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주요 기관에서 차지한 지위가 없었더라면 혜택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기관은 사실상 권력·부·명예에 필수적 기반인 동시에 권력을 행사하고, 부를 획득해 유지하고, 우리가 추구하는 높은 명성을 얻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유력자라고 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을 연상한다. 결과적으로 주요 기관의 지도부에 있지 않다면 진정으로 힘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진정으로 힘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권력의 제도적 수단을 바탕으로 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중략)

미국에서 가장 힘있는 100명과 가장 부유한 100명, 가장 유명한 100명에게서 그들이 주요 기관에서 차지한 지위를 빼앗고, 인맥은 물론 자금원을 제거하고, 지금까지 그들에게 모든 관심을 집중하던 매스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등을 돌리게 한다면, 그들은 힘없고 가난하고 이름 없는 이가 될 것이다. 권력이란 인간 고유의 소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는 부자에게만 집중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세란 인격에 내재된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명하고 부자인데다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주요 기관에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들이 그토록 애착을 갖는 가치를 얻고 간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그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부자·유력자·유명인들의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을 하나 짚고 넘어가야겠다. 그들이 어느 분야에서 활동했든 간에 상위계층의 인사들은 서로 겹치는 '그룹'에 속해 있고, 복잡한 관계로 엮인 파벌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그들끼리는 서로 끌리는 게 있는 모양이다. 비록 경계선을 그을 필요성이 있거나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서로 공통점이 있음을 깨닫고 외부인에게 문을 걸어 잠글 때만 그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눈에 이 사실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중략)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권력·부·명예를 가진 사람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또한 심리적·도덕적 기준으로 정의하기도 하고, 그들에게서 선택된 인간의 유형을 찾기도 한다. 이렇게 정의된 엘리트는 간단히 말해 우월한 특질이나 힘을 타고난 사람들의 집단이다. (중략) 사실상 엘리트라는 개념은 사회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는 사람도 있다는 식의 생각에 기인한다. 특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단지 특혜를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내재적으로 지금 지닌 것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는 존재라 생각하고, 자신을 '태생적' 엘리트로 간주하며, 소유한 재물과 특권을 자신의 우월한 자아가 확장한 것으로 생각한다. (중략)

그렇지만 사회계급으로서 또는 지도부에 자리잡은 집단으로서 엘리트가 번성함에 따라, 엘리트는 어떤 유형의 인물을 선정해 형성하고 그 외의 인물은 거부한다. 인간의 도덕적·심리적 태도는 대부분 자신이 속한 세계의 가치와, 그에게 주어지고 요구되는 제도적 역할로 결정된다. 전기 작가의 관점에서 볼 때, 상류층 인물은 자기 계층의 다른 인물들과 맺은 관계를 바탕으로 그들과 소규모 모임을 여러 개 만들어 시간을 보내며 성장한다. 그들은 평생 언제라도 이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엘리트는 그 구성원을 선정하고 교육하며 검증해 현대사회의 이름 없는 제도적 위계질서의 상부에 접근이 허락된 상류층 집단이다. 엘리트의 심리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있다면, 이는 엘리트에 속하는 이들은 결정 과정의 비정의성을 인지하면서도 동일한 내면의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계층으로서 엘리트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대면하는 소규모 집단을 연구해야 한다. 이 중에는 역사적으로 가장 명백한 집단인 상류층 가족이 있지만 최근 들어 더욱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할 집단은 '우수한' 교육기관이나 대도시의 클럽들이다.

'미국 엘리트'는 애매하거나 혼돈스러운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하이클래스', '석유부자', '백만장자 클럽', '힘있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막연하게 짐작하며 대부분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개별적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와 연결해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의식 속에서 엘리트에 대해 전반적으로 일관성 있는 이미지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끔 우리가 그런 노력을 하더라도 결국에는 한 명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엘리트가 존재하고 그들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분명히 알아둬야 할 점은 우리가 엘리트를 한 집단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면 엘리트에 대해 갖는 인상은 단지 부족한 분석 능력과 사회학적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중략)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사건"이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기자는 운, 우연, 운명 또는 '보이지 않는 손' 같은 역사 이론을 차용한 것이다. 사실상 '사건'이라는 단어는 인간과 역사를 분리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강구하는 오래된 사상을 표현하기 위한 현대적 용어일 뿐이다. 이 사상은 우리를 역사가 등 뒤에서 진행된다고 믿게 만들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 말대로라면 역사란 키 없이 표류하는 한 척의 배이고, 인간의 행위는 의식이 배제된 행동이 되며, 역사는 그 누구도 바라지 않던 순전한 사고와 사건이 될 것이다.

오늘날 사건의 흐름은 불가피한 운명보다는 인간이 내린 일련의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 '운명'의 사회학적 의미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셀 수 없이 많은 결정을 내릴 때, 모두 개별적으로 내려진 결정 하나하나는 막대한 결과를 야기하지 않지만, 그 결정이 모이면 그 누구도 바라지 않던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이 운명으로서 정해진 역사다. 그러나 모든 시대가 동일한 숙명을 가진 것은 아니다.

결정을 내리는 인물의 집단이 축소되고, 결정 수단이 집중되며, 결정으로 인한 결과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면서, 짐작 가능한 일부 집단이 내린 결정에 따라 주요 사건의 흐름이 달라진다. 그렇다고 동일한 집단이 사건 흐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좌지우지해 전체의 역사가 그들이 모의한 산물이라는 말은 아니다. 엘리트의 권력이 반드시 신중하게 고려해 내린 결정이 아닌 사소한 결정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도 아니며, 현재 집행되는 정책과 펼쳐지는 사건이 수많은 조정·타협·적응 과정에서 독립적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파워 엘리트'라는 개념은 결정 과정 자체를 내포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과정이든 그것이 진행되는 사회 분야의 범위를 규정하려는 시도이자, 그 과정에 연루되는 인물에 대한 탐구다. (중략)

역사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그 의미는 '우리'가 행위를 통해 부여한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 역사 속 일원이라 할지라도 개개인이 역사를 형성하는 데 동일한 힘을 가지고 있진 않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사회학적 측면에서 불합리하고 정치적 측면에서 무책임한 일이다. 불합리한 일인 이유는 무엇보다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라도 이미 보유한 기술·제도적 권력 수단으로 인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모두가 현존하는 권력 수단에 동일한 접근권이나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만든다는 주장이 정치적 책임감 부족인 이유는 이를 인정하면 권력 수단에 접근한 이들이 내린 주요 결정에 책임을 질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피상적으로나마 서구사회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결정권자의 권력은 우선 주어진 사회의 기술 수준, 권력·폭력·조직 수단에 의해 한계가 정해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동일한 관점에서 보면 서방세계의 역사 전반에 걸쳐 이어져온 계보를 알 수 있다. 바로 억압·착취·폭력·파괴의 수단은 물론 생산·재건 수단이 점진적으로 확대되고 집중됐다는 점이다.

상호 연계된 권력의 제도적 수단과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점점 효과적일수록 이를 지배하는 이들은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지배 기구의 정점에 서 있게 된다.

*이 글은 <파워 엘리트>(재판본·아곤·마르세유·2012) 프랑수아 드노르 서문에서 발췌한 내용을 <마니에르 드 브와>(5월호)에 기재한 것이다.

글•찰스 라이트 밀스 Charles Wright Mills 1916~62. 미국의 사회학자.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