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 원조로 변신 시작한 동폴란드
2007~2013년 유럽연합(EU)이 폴란드 동부의 낙후 지역을 현대화하기 위해 660억 유로의 구조기금을 제공했다. 이 뜻밖의 '은총'에 힘입어 폴란드 동부는 새로운 변신에 나섰다. 하지만 솅겐 장벽으로 인해 배후 지역과 단절된 탓에 이 지역은 여전히 폴란드의 '경제 기적'에서 뒤처져 있다.
오후 4시가 지나자 일찌감치 포들라스키에주(州) 수풀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바이알로비에자 보호구역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원시림에는 여전히 들소 수백 마리가 자유롭게 뛰놀며 산다. 카우보이나 인디언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EU의 '동쪽'(Far East)이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 남쪽으로는 카르파테스산맥, 그 너머에 우크라이나 평원이 드넓게 펼쳐진 폴란드의 동부 지역이었다. 바르샤바를 지나면서 비아위스토크와 루블린을 제외하고 대도시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철도망도 점차 듬성듬성 성글어졌다. 고속도로는 어느새 국도로 변했다. 국도를 따라 달리는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행 트럭들의 움직임이 힘겨워 보였다. 안제이 차프스키 비아와포들라스카 시장은 "우리 지역은 바르샤바와 물리적으로 단절돼 있다. 일자리도 없다. 수년에 걸친 이행기 동안 지역 내에 자리했던 수많은 대기업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서방언론이 그토록 우쭐대던 폴란드의 '경제 기적'(2010년 3.8%, 2011년 4%의 경제성장률 달성) 시기에도 동부의 농촌 지역은 낙후의 길을 걸었다.
빅토르 보이치에호프스키 바르샤바 경제대학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폴란드 동부는 20년 전부터 서부와 격차가 더욱 크게 벌어졌다. 투자자의 관심을 불러모으기에 동부 인프라는 너무 열악했다". 2000년 포드카르파츠키에주의 평균임금은 폴란드 평균보다 12% 낮았다. 하지만 2012년 이 격차는 17%로 더 벌어졌다. 루블린주의 국내총생산(GDP)은 폴란드 GDP의 3.9%에 불과했다. 1995년까지만 해도 4.5%에 달하던 수치였다. 2008년 폴란드 동부 3곳(포들라스키에, 루벨스키에, 포드카르파츠키에)의 평균 GDP는 폴란드 평균보다 여전히 30% 더 낮은 상태였다.
차프스키 시장은 "비아와포들라스카시(市)에선 대부분 공공 일자리다. 젊은이들이 바르샤바나 서유럽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2004년 5월 1일 폴란드가 EU에 가입한 이후 고학력 청년층을 주축으로 200만 명에 가까운 폴란드인이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빠져나갔다. 국립통계청에 따르면, 현재 영국에서 일하는 폴란드인은 55만 명에 달한다. 아일랜드는 14만 명, 이탈리아는 9만 명, 스페인은 8만 명, 프랑스는 5만 명, EU 외 국가는 7만 명에 이른다. 이들은 폴란드 정부로부터 '버림받은 세대'로 통한다. 정부는 자국민의 해외 이탈을 막기에 너무도 무능하다. 30대 남성 토멕은 아주 드물게 해외에 진출했다가 다시 비아위스토크로 되돌아온 사례다. 결연한 목소리와 달리, 차분히 한 곳을 응시하지 못하는 시선이 몹시 불안해 보였다. "중국에서 5년 동안 영어를 가르치며 지냈다. 비로소 집에 돌아와 기쁘다. 일자리 구할 일이 막막하지만 말이다."
이류 국민 '폴스카 B'
비아위스토크의 실업률은 13%를 넘지 않는다. 폴란드의 최대 빈민가 비아와포들라스카 같은 음울한 도시의 실업률도 15%에 불과하다. 이게 모두 '해외 이주'라는 완충장치가 존재하는 덕분이다. "농촌 주민들은 일단 소도시로 이주한 다음, 다시 바르샤바로 빠져나간다. 덕분에 농촌 인구가 줄어들어도 소도시 인구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 차프스키 시장의 설명이다. 포들라스키에주의 인구밀도는 폴란드 평균 인구의 절반 수준인 ㎢당 59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앞으로 폴란드인의 해외 이주 현상은 더욱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 2011년 5월 1일 이후 독일이 인력난 해소를 위해 중앙유럽과 동유럽 8개국에 자국의 노동시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독일 정부는 향후 수년간 매년 10만여 명의 이주민을 받아들일 예정이다. 이미 국경 너머에 터를 잡은 다른 40만 명의 동포를 따라 많은 폴란드인들이 앞다퉈 독일로 달려갈 것이다. 폴란드는 마을별로 선호하는 이주 국가가 가지각색이다. 몬키 마을 주민들은 주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로 떠난다. 소쿠우카 사람들은 런던을 찾는다. 반면 시에미아티체의 젊은이들은 벨기에로 향한다.
폴란드 동부는 흔히 '폴스카 B'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린다. 집단적 무의식 속에 동부는 '폴스카 A'인 서부와 상반되는 곳으로 인식된다. 역사적으로 폴란드 서부 지역은 1918년까지 독일 영토에 속했다. 반면 동부는 소련이 점령했다. 프랑수아 바푸알 연구원에 따르면, 일각에서는 이런 역사적 차이가 동·서부 지역의 격차를 초래한 원인이라고 본다. "폴란드 서부의 발전된 산업지대는 손바닥만 한 작은 농지들로 이뤄진 폴란드 동부의 농촌 지대와 대조를 이룬다. 동부 지역이 3대 전통적 가치인 '신·명예·조국'을 중요시한다면, 서부는 항상 개방과 역동성을 강조해왔다."(1) 이런 사실은 2011년 10월 군(포비아트)별 총선 결과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서부 사람들은 대부분 2007년 이후 집권한 친EU 성향의 자유주의 정당 '시민강령당'(PO)을 지지한 반면, 동부 사람들은 2010년 4월 10일 스몰렌스크 항공기 사고로 사망한 민족주의자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이 속한 '법과 정의당'(Pis)을 지지했다. 비아위스토크에서 정보기술을 개발 중인 젊은 공학자 파베우 마코비에츠키는 "이 지역 주민은 모두 땅으로 먹고사는 충직하고 근면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주민들의 의식구조를 바꾸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EU의 지원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호기다"라고 말했다.
'중·동유럽 국가에 대한 EU 지원 프로그램'(PHARE)과 'EU 예비가입국에 대한 구조조정 프로그램'(INSP)이 시행된 이후, 그리고 특히 2004년 5월 1일 비로소 중·동유럽 국가가 EU에 최종 가입하면서 폴란드 동부에는 자금 지원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최근 몇 년 동안 폴란드 동부는 EU에 가입한 덕분에 경이로운 변화를 경험했다. 비로소 이 지역만의 잠재력을 활용해 폴란드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으로 거듭나기 위한 재정적 수단을 갖출 수 있게 된 것이다." 비아위스토크 거리를 거닐던 사회학자 타데우시 포플라스키가 말했다. 비아위스토크시는 최근 EU의 재정 지원에 힘입어 잿빛 빈민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안개가 자욱이 내려앉은 도심에는 보도 포장을 한참 마무리 중인 노동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보수 공사가 끝난 장터 광장에서는 하절기 콘서트가 열렸다. "세련된 분위기의 카페와 서점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학생들이 만나 교류할 수 있는 사교 공간이 탄생했다. 도시가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시골길에는 아스팔트가 깔리고, 폴란드 동부 도시에는 공사가 끝나거나 진행 중인 건물마다 파란색 배경에 동그랗게 작은 별들이 촘촘히 새겨진 EU 깃발이 내걸렸다. 루블린에서는 1986년 일어난 화재로 20여 년간 폐허 속에 방치돼 있던 옛 극장(Teatr Stary)이 다시 문을 열 채비를 했다. 루블린에서 가장 오래된 이 극장은 마지막 페인트칠을 마치고 조만간 다양한 연극과 영화를 선보일 예정이다. 루블린 시청 개발 전략 담당 크리스토프 라트카는 "옛 극장 개축은 상징하는 의미가 남다르다. 이는 루블린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2007~2013년 폴란드 동부의 개발 사업비로 지원된 자금은 총 26억7천만 유로에 달한다. 그 가운데 85%가 유럽연합기금이다. 이 거액의 지원비는 폴란드 동부 5개 주(포들라스키에, 루벨스키에, 포드카르파츠키에, 바르민스코마주르스키에, 시비엥토크시스키에)에 경제지원, 인터넷망 보급, 교통, 지속 가능한 관광 지원 등 핵심 사업별로 배분됐다. 보제나 루블린스카 카스프르자크 폴란드기업청(PARP) 청장은 "이같은 전략은 낙후한 동부 대지역권 개발을 선결 과제로 삼으려는 정부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밝은 미래를 꿈꾸는 사업가들이 동부로 향하고 있다. 우리가 지원에 나서면서 많은 사업가들이 그동안 잠재돼 있던 이 지역의 다양한 가능성을 널리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말했다. 소도시 시에들체에 사는 청년 그제고르스 코신스카(25)는 최근 EU에서 5천 유로를 지원받아 웹사이트 개발 회사를 창업했다. 그는 "EU에서 받은 이 자그마한 지원금 덕택에 장비를 사고 사무실을 빌려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 고객을 찾는 것은 내 몫이다"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쏟아지는 EU 지원 자금
폴란드 정부는 이 농촌 외곽 지역이 지닌 잠재력을 개발하느라 분주하다. 포들라스키에주는 모래가 많이 섞여 있어 토질이 척박하다고 했는가? 그렇다면 목초지로 활용하기에 딱이다. 오늘날 포들라스키에주는 폴란드 전체 우유 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이 지역이 산이 많고 도시 개발 정도가 낮다고 했는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스웨덴의 유수 기업 '이케아'가 2011년 6월 오를라에 가구 제조 공장을 세운 것이다. 물론 이 사업에는 EU 지원금을 포함해 1억4천만 유로가 투자됐다. 폴란드 동남부의 포드카르파츠키에주는 고립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그 이유 때문에 미국 군수회사 '시코르스키'가 전투 헬기 '블랙호크' 를 조립하고 시운전하는 장소로 이 주에 속한 미엘레츠를 선택했다. 덕분에 2천 명의 고용 효과가 창출됐다.
폴란드 동부는 숲·호수·늪지대가 어우러진 외딴 고장으로 다양한 동물종의 서식지 노릇을 하고 있다. 이는 녹색관광을 발전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연환경이다. 지역행정기관에서 농촌 지원 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야드비가 보구츠카 스코로호츠카도 "포들라스키에주에는 국립공원이 3곳이나 있다. 또 지역의 70%가 '나투라 네트워크 2000'(생물다양성 유지를 위한 EU 프로그램) 프로그램에 속해 있다. 물론 이는 생산적 투자를 하는 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관광을 개발하거나, 농촌 지역에 서식하는 다양한 생물종을 보호하기에는 아주 좋은 환경이다"라고 말했다. 나무 오두막, 말떼,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나는 호수. 이 모든 걸 바르샤바에서 자동차로 몇 시간만 나가면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보츠나비에스 마을에 자리한 자그로다 쿠바시 호텔은 연중 내내 손님을 받고 있었다. 가전제품 회사의 영업사원인 자렉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한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이 지역을 방문했다. 그는 목소리가 쉬고 걸음걸이에서도 피곤이 잔뜩 묻어났다. 그날 밤 마침 세미나 종강 파티가 한창이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놀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다." 호텔 입구에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EU의 지원을 받았다는 내용의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이런 지역 개발 바람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피요트르 스테츠 폴란드 지역개발청(PAPP) 청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동부 지역은 폴란드 개방 정책에서 소외돼 있었다. 오늘날 이 지역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폴란드에 투자하려는 해외 기업 대다수가 이미 브로츠와프, 포즈난, 바르샤바 등에 진출해 있는 상태다. 굳이 이 지역으로 재이주하려는 기업은 없을 것이다." 경제학자 보이치에호프스키에 따르면, 대규모 구조기금 유입은 오히려 인위적으로 폴란드의 성장률을 부풀리고 있다. "지원금은 대체적으로 생산적 투자가 아닌, 사회기반시설이나 소비재에 투자되는 경향이 강하다." 폴란드 남동부에 위치한 자모시치시는 최근 구조기금 지원에 힘입어 도심을 새롭게 단장했다. '북쪽의 파도바'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자모시치시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의 요람으로 통한다. 하지만 하절기가 지나자 거리는 텅 비어버렸고, 새롭게 칠한 건물 외벽은 생기를 잃었다. 주민들도 일거리가 없어 놀고 있다. 2011년 가을 자모시치시의 실업률은 13%에 달했다. 자모시치시는 도시 개발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투자를 유치하는 데 실패했다.
차프스키 시장은 "유럽이 기금을 지원하는 한, 우리는 부족한 인프라를 계속 확충해나갈 것이다. 빚이 늘더라도 말이다"라고 말했다. 현 시스템에 따르면, EU가 1유로를 지원할 때마다 시와 지자체도 함께 1유로를 부담해야 한다. 대부분은 채권을 발행해 이를 충당한다. 하지만 유럽 국채 위기가 한창인데다 2014~2020년 유럽 지원금이 삭감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런 시스템이 계속 존속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지원금 삭감은 큰 충격을 안겨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에 무너질 우리가 아니다. 우리 지역민은 생존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보구츠카 스코로호츠카의 말이다. 하지만 지역이 오랜 침체기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EU의 투자가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 폴란드는 EU에서 대대적인 금융 지원을 받았지만, 솅겐 지역 가입으로 인해 다른 동유럽 이웃국가와는 관계가 단절됐다.
비아위스토크에서 30km쯤 들어가자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사이로 안개에 잠긴 직선 도로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 지역은 유난히 경찰 경계가 삼엄했다. 2007년 12월 21일 폴란드가 솅겐 지역에 가입한 이후 벨라루스인에게 국경선은 진짜 장벽으로 돌변했다. 폴란드행 입국비자를 발급받으려면 복잡한 행정 절차를 거쳐야 함은 물론, 평균 월급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60유로를 수수료로 내야 한다. 러시아인은 35유로만 내면 그만인데 말이다. 타데우시 트루스콜라스키 비아위스토크 시장은 "국경선은 이 지역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다. 이 지역은 분명 벨라루스로 향하는 유럽의 관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아위스토크 접경지대에는 '오샹' 할인매장 2개와 '르루아 메를랭' 점포 2개가 입점해 있다. 요즘도 벨라루스인들은 이곳으로 장을 보러 건너온다. "하지만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단지 비자를 가진 사람이나 소규모 밀수를 일삼는 사람들만이 접경지대의 혜택을 누리고 있을 뿐이다."
밀수꾼들만 설치는 접경지대
보브로브니키에서는 세관 통과를 기다리는 트럭들이 6km에 걸쳐 긴 행렬을 이뤘다. 때로는 국경검문소를 지나는 데 12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테레스폴 검문소 주차장은 벨라루스의 브레스트시에서 불과 수km 거리에 있어 벨라루스산 보드카와 담배, 폴란드산 기저귀의 밀거래가 성행하는 온상이 되고 있다. "물론 우리가 부정부패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라고 비아와포들라스카 지역 통관검문소 공보 담당관 마르친 챠이카도 시인했다. "2008~2009년 재판정에 선 공무원 수가 무려 100여 명에 달한다.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바꾸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폴란드 당국에 따르면, 2010년 폴란드에서 소비된 밀수 담배는 80억 개비가 넘는다. 서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받아 최신식 검색 장비를 도입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밀수품의 50%가 루블린 지역을 무사히 통과했다. "대개 밀수꾼들은 차량 내벽이나 타이어에 담배와 의류를 숨겨 들여온다." X선 검색대 모니터에 비친 벨라루스 트럭 내부를 유심히 살펴보던 세관원들이 말했다. 2011년 상반기 동안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접경지대 검문소에서만 무려 2만1천 건에 달하는 밀수가 적발됐다. 이처럼 밀수품은 버젓이 솅겐 장벽을 뚫고 지나다니고 있었지만, 정작 사람들은 장벽 안에 갇혀 꼼짝도 못했다.
차프스키 시장은 "솅겐 지역에 가입한 이후 폴란드에는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의 발길이 뜸해졌다. 1945년처럼 유럽이 분단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2008년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접경지대 주변 30km 권역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2) 벨라루스도 그와 유사한 협정을 비준했다. 하지만 2010년 12월 대통령 선거와 함께 600명 이상의 반체제 인사가 줄줄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 뒤로 시행이 연기됐다. 바르샤바 '동방연구센터'에서 일하는 보이치에흐 코몬츠크 연구원은 "대선 이후 반정부 탄압이 심해지면서 EU는 벨라루스 정부와 관계가 악화됐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은 자국민의 폴란드 체류를 금지하는 한편, 이런 긴장 국면을 정치 선전에 이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벨라루스 독재정권은 20만~4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벨라루스 거주 폴란드 소수민족을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한다. 벨라루스는 2005년 폴란드 민족문화 진흥을 위해 투쟁하는 '벨라루스 폴란드인 연맹'(ZPB)의 국내 활동을 전면 금지하는 한편, 정기적으로 연맹 회원들을 체포하고 있다. 코몬츠크 연구원은 "정권의 수사법은 아주 단순하다. '대애국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일컫는 러시아 표현)의 정신을 계승한 벨라루스 정부와 루카셴코 대통령만이 1920년 벨라루스를 무너뜨리려 시도했던 '파시스트'와 폴란드인에 대항해 싸울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1920년 러시아-폴란드 전쟁이 발발하고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에 패배한 이후 소련은 빌뉴스, 그로드노, 브레스트, 르피프를 비롯한 민스크 서쪽의 영토를 폴란드에 내줘야 했다. 하지만 1945년 이 도시들은 다시 소련 손으로 넘어왔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커즌 라인'(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 국경선을 제안한 영국 외무장관 조지 커즌의 이름을 따서 지은 명칭)을 기준으로 새로운 국경을 획정했던 것이다. 수세기 동안 대제국에 속했던 폴란드 동부 영토는 오늘날까지 이 선에 따라 구분되고 있다. 16세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오스만제국처럼 발트해와 흑해로 나가는 무역로 한복판에서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는 장으로 자리했다.
비아위스토크 소재 라디오 방송사 <라이카>에서 일하는 언론인 야로스와프 이바니우크가 "국경선이 지속적으로 바뀌었다. 이 지역 토박이인 우리 증조부께서는 일생 동안 5개 나라에 사는 희한한 경험을 하셨다. 처음에는 러시아 제국에서 출발해 폴란드, 소련, 독일을 거쳐 결국 다시 폴란드 사람이 되셨다"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날 비아위스토크 주민의 친척으로 벨라루스에 사는 사람은 무려 150만 명에 달한다. 이바니우크는 "우리는 분단된 가족을 서로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지역 정체성이 희미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라이카>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폴란드어,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등으로 이야기해도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다. 인류학자 토마시 술리마는 "우리에게 국경선은 존재한 적이 없다. 옛날에 지역민은 언어와 종교에 따라 구분됐다. 하지만 모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왕의 충성스러운 시민이었다"고 설명한다. 술리마는 요즘 사라져가는 포들라스키에어를 보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포들라스키에어는 요즘도 비아위스토크 접경지대에 위치한 양국 농촌지대에서 사용되는 벨라루스어 계열의 지역어다. "우리는 음악회와 전통축제를 여는 등 지역민이 자신의 뿌리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작은 노력이 무색하게, 오늘날 폴란드는 이웃 벨라루스와 그다지 교류가 활발하지 않다. 비아위스토크 주민은 단호하게 서쪽을 향해 등을 돌렸다. 타데우시 트루스콜라스키는 "우리는 그동안 그로드노시와 교류를 계속해왔다. 하지만 2010년 대선 이후 모든 교류가 중단됐다. 오늘날 우리 지역은 바르샤바나 발트해 연안 국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말했다.
국경 통과 규제완화 빨리 이뤄져야
하지만 좀더 남쪽에 자리한 대학도시 루블린은 2009년 폴란드 발의로 추진된 '동파트너십'의 일환으로, 동쪽을 향해 개방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지역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루블린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미하우 카라푸다는 "루블린은 르피프 등 서우크라이나 도시들과의 교류를 확대해나가고 있다. 우리는 광활한 중앙유럽 한복판에 자리한다는 지리적 이점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1969년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와 연방을 맺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안타깝게도 '2016년 유럽문화수도' 선정에서 최종 탈락(3)한 루블린은 요즘 2017년 도시 탄생 7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준비로 분주하다. 특히 음악과 연극 부분의 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뼈대로 한 '국경을 통한 만남'(Connect by the Border) 등 다양한 초국경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다. 카라푸다는 "최고의 문화 거점 도시가 되어 루블린의 특수성을 만방에 알리고, 역내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시로 자리매김하겠다"며 포부를 밝혔다.
EU의 지원 덕분에 오랫동안 EU에서 소외돼 낙후의 길을 걷던 이 지역은 오늘날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다. 하지만 소외 지역이 과거의 지역적 정체성을 되찾고 지속적으로 번영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국경 통과 규제 완화가 시급하다. 차프스키 시장은 비아위포들라스카 시청에 자리한 사무실에서 미래 유럽의 청사진을 그리느라 분주했다. "비아위포들라스카에는 리스본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철도가 관통하고 있다. 언젠가 이 도시도 이런 여건에 걸맞은 만남과 교류의 장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옛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들이 과거 영예로운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회복하려면 일단 러시아가 지배하는 세계를 불안하고 적대적인 존재로 인식하며 끊임없이 방어요새(4)를 구축하는 것부터 중단해야 한다. 또한 미래 EU의 지형도가 어떻게 바뀌든 간에 만남과 교류를 위한 열린 공간의 중심으로 자리해야 한다.
글•로랑 제슬랭 Laurent Geslin 세바스티앵 고베르 Sébastien Go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프랑수아 바푸알, '폴란드: 2005년 10월 선거에 관한 연구', CERI/CNRS, 2005년 11월, www.ceri-sciences-po.org.
(2) 라리사 티타렌코, 아나이스 마랭, '솅겐 장막의 희생자가 된 벨라루스인', <Regard sur l'est>, 2011년 11월 15일, www.regard-est.com.
(3) 2016년 유럽문화수도에는 브로츠와프와 세인트세바스티안(스페인) 등의 도시가 선정됐다.
(4) 로마제국 시절 국경선을 따라 야만국가와 사막 앞에 구축한 요새 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