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독립 남·북 수단, 쓰디쓴 내부 분열

2012-06-12     장바티스트 갈로팽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남·북 수단 분쟁지역인 아비에이에서 군대를 철수하라고 하르툼에 권고하는 동안, 아프리카연합의 중재자인 타보 음베키는 남·북 수단 간의 협상을 재개시키기 위해 계속 노력했다. 하르툼과 주바 사이의 불신의 골이 깊고, 지역 민병대들의 농간이 심해 협상 시도가 점점 더 불확실해지고 있다.

 

지난 1월 살바 키르 남수단 대통령은 의회에서 "남수단의 모든 석유 관련 활동을 즉각 중단하고, 남수단의 원유를 더 이상 북수단 공화국으로 보내지 않을 것을 내각이 만장일치로 결정했다고"(1)고 발표했다. 이 조치는 하르툼(북수단의 수도)이 남수단의 석유 일부를 몰수한 사건에 대한 응수였고, 탄화수소의 수익 배분에 대한 양국 간 갈등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2011년 7월 독립한 신생 공화국인 남수단에 석유는 중요한 수입원이다.(2) 석유가 신생 정부 수입의 98%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유 생산의 장기 중단은 이미 연약해진 국가 시스템을 붕괴시킬 우려가 있고, 수십 년간 계속된 내전으로 이미 불안정해진 지역을 안정화하려는 희망에 찬물을 끼얹는 셈이 되고 있다.

2011년 7월 9일 남수단이 독립을 기념하는 순간, 오마르 알바시르 북수단 대통령이 다른 많은 국가의 지도자들과 함께 신생 국가의 수도 주바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참석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반대해왔지만 결국 남수단이란 국가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미해결 상태로 남은 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석유 수익과 공공부채의 배분, 국경선 합의 문제가 그것이다. 지역 안전기구 문제도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었다.

북수단과 남수단은 합의를 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북수단과 남수단에서 석유는 세금수입과 외화벌이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특히 석유는 두 국가가 절대적으로 서로 의존해야 하는 분야다. 북수단이 수출 인프라를 장악하고, 남수단이 매장량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르툼이 통행권과 원유 정제권을 합의해주지 않으면 두 나라 모두 심각한 경제위기에 노출될 것이다.

2010년 8월부터 양쪽 협상가들은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정기적으로 모여 협상을 벌였으나 결국 지루하고 헛된 협상이 돼버렸다. 양쪽 관계는 지도적 엘리트들의 내분, 더 이득을 얻어내려는 성향, 국경지역 분쟁에 대처할 수 없는 무능력 때문에 점점 악화됐다.

남수단의 공식적인 독립이 선언되기 2개월 전인 2011년 5월, 북수단 군대가 분쟁 지역인 아비에이를 점령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이 국경 지역의 지위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음에도 남수단의 분리투표와 더불어 실시된 지역 주민투표에 의해 그 운명이 결정돼야 했다. 그러나 하르툼은 투표 진행을 방해하고 해당 지역 전체를 점령해버린다. 양쪽 군대 사이에 발발한 전투는 2005년 평화협정 이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된다. 그 메시지는 명확하다. 북수단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군사적으로 우월한 힘을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다.

이제 북수단 군대는 자신의 영토 내에 존재하는 '수단인민해방군'(SPLA·나중에 주바에서 권력을 잡는다)과 대립하게 된다. SPLA는 남코르도판주(북수단과 남수단 경계 지역에 위치한 북수단의 한 주)(3)에 3천 명, 청나일주(4)에 4천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다. 두 주는 남수단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주민들은 아랍인보다는 아프리카인으로 구성돼 있어 문화적·정치적으로 남수단과 가깝다.

2011년 6월 5일, 북수단군과 동맹 민병대들이 남코르도판에 거주하고 있는 SPLA 전사들을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한다. 2011년 9월 1일, 분쟁은 청나일주까지 확대된다. '수단북부인민해방군'(SPLA-N)을 지휘하는 말리크 아가르는 자신의 거주지가 집중 폭격을 당하자, 우선 몸을 은닉한 뒤 하르툼 체제를 전복하라고 명령한다. 9월 8일 그는 자신이 지휘하는 단체와 주바에서 권력을 잡은 파벌과의 분리를 선언한다. 새로운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석유이권을 둘러싼 대립

그사이 하르툼과 주바는, 치열한 경제전쟁을 치르면서도 계속 협상을 진행한다. 2011년 5월부터 북수단은 남수단과의 국경무역에 제재를 가하는데, 국경의 무역활동은 대부분 북반구에서 오는 수입과 관계된다.(5) 2011년 7월 양쪽 정부는 협의도 하지 않은 채, 각자 새로운 통화를 유통시킨다. 남수단의 파운드와 북수단의 새로운 파운드의 교환비율이 긴장으로 인한 불확실성과 재정위기 때문에 널뛰기를 한다. 결국 양국의 중앙은행은 환율가치가 대폭 하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렇지 않아도 얼마 남지 않은 외환보유고를 탕진한다.

양쪽은 상대편을 무릎 꿇게 하기 위해 직간접적으로 폭력을 사용한다. 북수단은 남수단 정부(6)와 싸우는 반군들에 무기와 병참을 지원하고, 2011년 11월부터 여러 차례 남수단의 영토에 폭격을 가한다.

주바의 정부는 SPLA-N 반군들과 결별하려 애쓰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SPLA-N 반군들은 '정의·평등 운동단체'(JEM)의 반군들처럼 제멋대로 남수단을 후방기지로 사용한다. 이들 반군의 일부는 다르푸르 지역에서 남코르도판을 향해 떠났다. 지난 5월 말, 남수단 군대인 JEM과 SPLA-N은 긴밀한 협력관계를 과시하며 국경 유전지대인 헤글리그를 함께 공격한다.

'수단혁명전선'(SRF)의 지원하에 동맹을 맺은 SPLA-N과 다르푸르 전사 그룹들의 목표는 하르툼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다. 남수단이 SRF에 대해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파간 아문(SPLA-N 지도자들의 측근) 같은 남수단 협상가들이 타협할 줄 모르기 때문에, 주바의 일부 정치 엘리트들이 이 목표에 찬성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바는 1955년부터 남수단 반군들과 연계한 이스라엘에 의지할 수도 있다.(7)

서방국가와 중국은 석유수송권에 대한 쌍방 간 협정이 맺어져 남·북 수단 간에 새로운 전쟁이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초강대국들은 그런 타협을 강요할 능력이 없는 듯하다. 전통적으로 남수단을 지지하고 북수단과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타협을 강요할 능력이 별로 없는 워싱턴은 하르툼에 적대적인 자국의 여론 때문에 운신의 폭이 제한돼 있다. 북수단이 남코르도판에서 저지른 인권침해에 대해 미국 미디어와 의회가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북수단이 남수단과 평화협정을 맺는 대가로, 북수단이 테리리즘을 지원하고 다르푸르를 진압한 잘못 때문에 1997년과 2006년에 채택된 미국의 제재들을 부분적으로나마 해제해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워싱턴은 여러 해 동안 남수단에 호의를 베풀어왔음에도, 지난 5월 2일 남수단과 북수단 양쪽 모두에 제재를 가한다는 결의를 가결해 주바에 압력을 넣었다.

베이징 역시 수단의 주요 인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도 그 영향력이 불확실하다. 전쟁 중에 하르툼을 편들어 개발에 참여했던 석유 분야의 주요 참여국인 중국은 2008년부터 주바와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중국의 중재 노력은 허사였다. 중국 외교관들은 서방 외교관들에게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했다. 남·북 수단 양쪽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베이징의 균형 유지 정책은 점점 더 곤란에 빠지게 된다.

협정에 장애가 되는 국지적 요인은 다양하다. 2011년 6월 SPLA-N이 북수단 정치에 참여한다는 타협안과 두 국가가 각각의 영토에서 남·북수단 주민들의 지위를 인정한다는 타협안이 성립됐지만, 끝내 실행에는 이르지 못했다.(8) 알바시르의 오른팔인 나피 알리 나피와 SPLA-N의 아가르가 협상해 만들어낸 첫 번째 타협안은 서명하고 3일 뒤에 북수단 대통령에 의해 폐기 통고됐다. 두 번째 타협안은 국경에서 여러 차례 충돌이 발생함으로써 폐기됐다. 사람들은 SPLA-N과 일부 북수단 군대가 남·북 수단의 접근을 막기 위해 공동으로 조작해 일으킨 것으로 의심한다.

석유에 대한 권리 협정만으로는 결코 상황이 진정되지 않을 것이다. 권리 협정은 남코르도판과 청나일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종지부를 찍지 못할 것이다. 폭력의 원인이 무엇보다 국지적 문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북 수단 사이의 국경은 앞으로도 몇 년간 불안정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글•장바티스트 갈로팽 Jean-Baptiste Gallopin 국제인권단체의 수단 문제 전문연구원.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1) ‘오일 위기에 대한 살바 키르 마야르디트 남수단 대통령의 의회 연설’, www.sudantribune.com, 2012년 1월 23일.
(2) 제라르 프뤼니에, ‘Le régime de Khartoum bousculé par la sécession du Sud 수단의 기적 같은 분리, 휘청이는 독재정권’, 마르크 라베르뉴, ‘Chronique d’une indépendance annoncée 종교·종족 대립…수단의 길었던 여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1년 2월호.
(3) ‘전쟁 중인 수단의 남코르도판 인권상황 보고서’, 유엔수단평화임무단, 내부 보고서, 2011년 6월.
(4) ‘재고 요망: 2006∼2010년과 그 이후에 SPLA가 변화할 가능성’, Small Arms Survey, Geneva, 2010년 11월.
(5) ‘물자 부족을 야기하는 남수단 국경 분쟁’, www.bbc.co.uk, 2011년 5월 18일.
(6) ‘약탈을 위한 싸움: 청나일 지역에서의 무장봉기’, Small Arms Survey, 2011년 11월.
(7) ‘남수단은 왜 이스라엘의 전략적 동맹국인가?’, www.slateafrique.com, 2012년 3월 20일.
(8) ‘북수단은 남수단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데 필수불가결한 반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고 발표한다’, www.sudantribune.com, 2012년 3월 30일.


갈등의 역사

1956년 1월 1일: 수단의 독립 획득. 1955년 8월, 반군이 남수단에 이미 모습을 드러냄.

1964년 10월: 1958년에 들어선 군부체제가 대중봉기에 의해 종말을 맞음.

1969년 5월 25일: 가파르 알네메이리에 의한 쿠데타.

1972년 3월: 남수단에 자율권을 부여하기 위해 아디스아바바에서 반군과 협상에 서명.

1983년: 알네메이리 체재가 이슬람법을 적용하기로 결정. 남수단에 존 가랑이 지휘하는 새로운 반군과 '수단인민해방군'(SPLA)이 창설됨.

1985년 4월: 대중봉기와 군사독재의 종말.

1989년 6월 30일: 오마르 알바시르가 지휘하는 이슬람 장교단이 권력 획득. 남수단과의 전쟁이 격화됨.

2005년 1월 9일: SPLA와 협정에 서명. 협정에 의해 5년 뒤 자주권을 결정하기 위한 남수단의 국민투표가 예고됨.

2011년: 1월의 투표에서 대다수 남수단 주민들이 독립에 찬성함. 7월 9일 독립 선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