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원칙에서 제도와 대안까지

Corée | 6월항쟁 25주년 특집 | 개헌을 말한다

2012-06-12     박명림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전체 성격을 관통하는 핵심 중의 핵심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산업화·도시화·정보화·사회간접자본·정보기술(IT)·자동차·철강·전자를 포함해 이미 '세계 선두 수준'에 도달한 기술과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살률, 출산율, 정부의 공적 지출, 형평, 복지, 남녀 임금 격차, 비정규직 비중, 자영업 비중 등 인간적 문제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 수준'이라는 점이다. '인간 조건'의 급속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존'은 너무 불안하고 불공정한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 조건의 급속한 발전'과 '인간 실존의 급격한 악화'가 공존하는 변종 공동체, 괴물 공화국을 만든 것일까?

둘째, 지속적인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이념적·사회경제적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갈등의 제도화를 통한 갈등 해결 수준 역시 매우 낮다는 점이다. 민주화가 진전됐음에도 갈등은 왜 줄어들지 않고, 기존 국가제도들은 갈등을 수렴·해결하는 데 실패하는가? 민주주의의 발전은 갈등의 제도화를 통해 개인 삶의 평안성과 전체 사회의 안정성이 증대되는 것을 의미하나, 한국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한국 사회의 빛과 그늘, 밝음과 어둠을 동시에 보여주는 이 상반되는 현실 모습은, 인간적인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우리 모두의 발본적인 지혜를 기다리고 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는가? 문제를 사실적 객관성과 실현 가능성의 범주로 좁혀볼 때 우리는 우선 제도 요인에 착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사회에서 반복되는 현상들은, 인간적 요인을 제외할 경우 거의 전부 제도 요인에서 발원하기 때문이다. 특히 임기를 갖는 특정 지도자나 정부를 넘어 지속되는 현상들은 대개 제도에서 산생된다고 봐도 틀림없다.

제도는 어원 그대로 인간 개개인을 일정한 틀 속에 집어넣어 성품의 차이와 능력의 고하가 초래할지 모를 편차와 오류의 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를 말한다. 인간들이 반복되는 동일 문제에 직면했을 때 제도 개혁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를 통해 예측 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인류의 발전이 제도 변화에서 초래된 연유는 이로부터 비롯된다.

모두(冒頭)의 두 가지 극적인 상반 현상들은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 현실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인물 요인, 정책 요인과 함께 거기에는 명백히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 경로와 제도 요인이 존재한다. 즉, 이런 현상은 다섯 번에 걸친 민주정부 및 대통령들 개별 차원을 넘는 요소와 관성의 산물임이 명백하다. 제도 문제의 중심에는 정부 형태, 공직 구성 방법, 경제체제를 포함하는 헌법 요인이 존재한다. 이때 말하는 헌법 요인은 한 사회를 근거짓는 헌법철학, 헌정제도, 헌정 절차와 헌법 개혁 사안을 모두 포함한다. 무엇보다 먼저 민주화 이후 모든 대통령들은 헌법 개혁에 합의했거나 헌법 개혁을 직접 제안했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모두 헌법 개혁을 약속하거나 제안한 바 있다. 국정을 담당한 모든 대통령이 헌법 개혁을 약속·제안·추진했다는 점은 헌법 개혁이 특정 정부나 개인의 정략을 넘는 본질적인 문제임을 보여준다. 국가 운영의 기본 틀로서 현행 헌법이 지닌 문제가 분명하다. 즉, 헌법 개혁 문제는 한두 대통령과 정부에 한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현행 대통령제는 대통령 무책임제

둘째는 현행 6월항쟁 헌법이 초래하는 대통령 무책임제와 정당 무책임제의 문제다. 정책 무책임제와 정부 실패로 직결되는 이 점은 근대민주주의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현행 헌법은 정부를 담당한 대통령과 정당에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구조이다. 현행 헌법하의 현임 대통령들은 전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탈당해 정치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한다. 민주국가에서 유례없는 반민주적 통치 유형인 무정당 통치를 반복하는 대통령 무책임제이다. 게다가 대통령을 배출한 모든 정당은 집권 시기 내에 전부 소멸했다. 민주정의당(노태우), 민주자유당(김영삼), 새정치국민회의(김대중), 새천년민주당(노무현), 한나라당(이명박)이 모두 같은 운명이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선거 당시' 정당의 '임기 중의' 예외 없는 소멸은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인 정당정치와 책임정치를 근저부터 차단한다. 정당 책임을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 부정으로서 정당 무책임제가 현행 헌법체제인 것이다. 또한 모든 대통령은 재임 중 '제왕'에서 '식물'로 그 위상이 급변한다는 점도 동일했다.

셋째는 '민주헌법'인 현행 헌법 제정 시점의 문제가 존재한다. 1987년 6월항쟁 헌법을 제정할 때 '민주헌법' 쟁취 운동을 주도한 시민들의 참여는 철저히 배제됐다. 운동 국면(독재 타도)과 제도 국면(헌법 개혁)의 완전한 분리였다. 더욱 큰 문제는 '대통령 직선'을 제외하면 당시 시민사회와 야당의 의견은 헌법 구조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의 헌법 협상을 정밀 분석하면 '직선제'를 제외하면 다른 부문에서는 전두환·노태우 세력의 요구가 관철됐다. '3김'과 전두환·노태우의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 교환의 산물로 등장한 현행 헌법은, 대통령 직선을 제외하면 거의 '전두환 헌법'이라고 할 정도로 집권 군부의 의도가 반영됐다. 이는 현행 민주헌법을 개혁해야 할 중대 사유로서, 헌법개혁운동은 사실 제2의 민주화운동 성격을 갖는다.

넷째는 현행 6월항쟁 헌법의 핵심 정신과 구조는 여전히 '박정희 헌법'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우선 박정희는 유신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건국 이래 유지돼오던 국가 근간으로서 '민주주의' 규정을 왜곡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로 축소했다. 독재정부를 수립하면서 거꾸로 자유민주주의 요소를 삽입하고는 이를 국시로 주장해왔다. 현행 헌법에도 지속되고 있는 이 조항은 건국정신과 건국헌법의 부정이자 유린이었다. △박정희는 국가경제의 근본 원칙을 역전시켰다. 1948년 건국헌법 이래 경제원칙은 5·16 쿠데타 헌법과는 정반대였다. 건국헌법 제84조는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 각인의 경제상 자유는 이 한계 내에서 보장된다"이다. 이것이 1962년 5·16 쿠데타 헌법에서는 다음과 같이 역전됐고, 이는 현재에도 거의 그대로다. 제111조 제1항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제2항 "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한다". 현재의 경제민주화 조항들은, 재벌들의 요구처럼 완화돼야 하는 것이 아니라, 건국헌법과 정신으로 돌아가 더욱 강화돼야 한다. △5·16 쿠데타 헌법은 의회민주주의의 중심인 의회 규모를 대폭 축소해- 5대 국회 291명, 6대 국회 175명. 즉, 인구 10만 명당 의원 1명에서 20만 명당 1명으로 축소- 대통령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의 결정적인 약화를 초래했다. 우리나라 건국 시기와 현재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의 의회 절반 규모에 불과한, 박정희 시기의 급격한 의회 규모 축소로 인한 '대통령 권력 강화-의회 권력 약화' 구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갈등을 제도로 수렴·반영·해결하려면 의회 규모를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현행 헌법은 '박정희 헌법'

근본 원칙과 구조에서 현행 6월항쟁 헌법이 여전히 '박정희-전두환 헌법체제'라고 할 때, 민주화된 한국 사회가 25년 동안이나 근본적 문제제기 없이 이를 지속해온 점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이제 한국 사회의 질적 발전과 온전한 민주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박정희-전두환 헌법을 넘어 헌법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중요한 몇몇 헌법 개혁의 원칙과 방향을 고민해보자.

첫째는 권리장전으로서의 헌법을 지향한다. 이제 대한민국 헌법은 단순히 국민을 넘어 영토 내 모든 인간이 사람으로서 존엄과 권리를 누리는 권리장전이 돼야 한다.

둘째는 생명·생태 헌법을 추구한다. 인간 조건의 급속한 발전이 인간 실존과 인간 본질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재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생명·생태 가치와 병행하는 체제를 지향해야 한다.

셋째는 평화헌법, 통일을 준비하는 헌법이 되어야 한다. 1987년 헌법을 제정할 때는 여전히 냉전시대였기에 냉전 해체와 남북관계 발전, 북한의 쇠락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이제 급속한 환경 변화에 맞춰 평화·영토·통일 조항에 대한 전향적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넷째는 복지국가와 사회국가를 지향해야 한다. 박정희 시기에 실종된 국가경제 체제의 근본 원칙인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복원해 공정하고 정의로운 복지국가, 형평국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섯째는 자치헌법·자율헌법이 되도록 한다. 과도한 중앙집중의 폐해를 넘기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권능을 재배분해 명실공히 분권국가가 되도록 노력한다.

국가 구성의 원칙과 방법의 전면적 혁신 요구

특히 강조하고 싶은 점은 국가 구성의 원칙과 방법의 전면적 혁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폴리비오스, 마키아벨리, 매디슨, 그리고 막스 베버에 이르기까지 지혜로운 정치사상들은 이상적인 국가 형태로서 혼합정체를 제시해왔다. 이제 한국 사회는 숱한 문제를 야기하는 현재의 대의민주주의 국가체제를 뛰어넘어,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크게 강화한 바람직한 혼합정체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국가-대표-시민 사이의 새로운 3권분립이다. 또는 국가(권력)-화폐(시장)-시민(사회) 사이의 3권분립이라고 해도 좋다. 시민권력의 대폭 확대를 통해, 공동체 전체가 시장이나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현재의 상황을 극복하고 3자 균형을 달성해야 한다.

둘째는 중앙과 지방 사이의 확고한 권력분립이다. 지방은 중앙의 하위 요소가 아니라, 지방의 연합으로서 중앙권력이 존재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즉, 지방의 자치와 자율이 국가권력 구성과 일상 민주주의의 근본 원칙이 돼야 한다.

셋째는 확고한 수평적 중앙권력의 분립이다.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3권분립을 넘는 4권분립을 주장해왔다. 즉 입법부·행정부·사법부에 더해 감독부를 독립 설치해, 국가권력의 획기적 분립 및 견제와 균형을 추구한다. 감독부에는 감사·검찰·공정거래(시장감독)·금융감독·선거관리처럼 국가기구와 공동체에 대한 감독과 관리 기능을 하는 부서들을 배치해 대통령 및 행정부로부터 독립시킬 필요가 있다. 이 기관들을 분리하면 이들에 대한 임면과 통제를 통해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던 대통령 권력은 크게 약화돼 자연스레 분권정부가 될 것이다. 물론 분권정부 수립에는 의회의 획기적인 확대 역시 필수적이다.

넷째는 정부-시민의 이중 거버넌스의 구축이다. 즉 입법부·감독부·행정부·사법부 외곽에 각각 반(半)시민조직·공공조직으로서 시민의회, 시민감독위원(시민공정위원·시민검찰위원), 시민호민관, 시민(국민)배심원을 병렬 배치해 정부조직에 공공-시민 이중 거버넌스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예컨대 의회의 경우 국회 내 결정이 일정한 비율 이하로 통과된 사안에 대해서는 시민의회의 재의에 부치는 방안이 있다. 법원 판결에서의 국민배심제와 유사한 시민조직을 주요 국가 거버넌스에 전부 병렬 배치해 시민의 참여를 제고하고, 국가·대표·시민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힌다.

다섯째는 선거 주기의 문제로서 2개의 순환주기를 설정해 '대통령 무책임제'와 '정당 무책임제'를 극복한다. 이를테면 대통령, 국회의원(지역대표와 비례대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주기를 일치시켜 대통령 임기 4년 동안, 예컨대 대통령 중임제로 할 경우 대통령과 지역대표 의원 선거를 제1조합으로, 비례대표·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제2조합으로 삼아 2년마다 선거를 실시해 확고한 책임정부를 구현하도록 한다.

일부 공직의 추첨제 도입 필요

끝으로, 국가 공직 구성의 방법 자체를 혁명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의 정부 공직 구성의 원리는 '선거'와 '임명' 두 가지였다. 그러나 이젠 전면 혁신이 필요하다. 근대 선거가 등장하기 이전 고전 고대와 중세 도시공화국 시기에는 오랫동안 '추첨'이 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정부 구성의 원리였다. 따라서 대법원장, 검찰총장, 각급 법원장 및 지검장, 감사원장, 공정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을 포함해 사법부와 감독부의 주요 직위는 자격을 갖춘 일정한 인재풀에서 단계별로 전부 추첨제를 통해 선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 권력을 크게 약화시킴은 물론, 권력집중·부정부패·금권유착·인사비리·줄서기의 각종 폐해를 낳은 구조적 문제점을 거의 해결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현재 우리의 지혜를 기다리는 많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헌법 개혁은 결코 만병통치약일 수 없다. 그러나 드러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제도 개혁을 미루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문제가 크고 반복적일수록 근본을 혁신해야 한다. 헌법 개혁이야말로 근본적 개혁의 요체 중의 요체일 것이다. 헌법 개혁을 필두로 한 제도 혁신을 통해 한국 사회가 더 바람직한 인간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게 지혜를 모으자. 그리하여 인간 조건의 개선이 인간 실존의 안녕과 평안으로 연결되는 이상적인 대한민국을 건설하자.

글•박명림 연세대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교수. 고려대 정치학 박사. 미국 하버드대학 하버드-옌칭연구소 협동연구학자 역임.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 <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다음 국가를 말하다> <역사와 지식과 사회>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