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율민주주의로

Corée | 6월항쟁 25주년 특집 | 개헌을 말한다

2012-06-12     최배근

주요 국가의 시장 시스템들이 붕괴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일본형 네트워크 시장 시스템, 영미형 자기 조정적 시장 시스템, 독일형 사회적 시장 시스템 등이 갈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나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유로존 위기 등은 충격의 깊이와 규모 등이 보여주듯이 시스템과 구조의 위기다. 즉, 주요 선진국의 위기는 시스템과 구조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위기는 시스템의 붕괴일 뿐만 아니라 지적 체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했을 때 유럽인은 이를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부르면서 유럽과 직접 관계없기에 미국과 같은 처방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유럽인들은 유로존 위기가 표면화되기 전까지 유로존 구조의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주요 국가의 시장 시스템 붕괴와 방황은 기본적으로 산업화 종료와 산업화 이후 새로운 사회질서의 부재에 따른 산물이다. 예를 들어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는 단순한 금융위기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산업화 이후 구조조정의 실패에서 비롯한 금융경제화의 산물이다. 산업의 구조조정보다 경제에 대한 금융의 헤게모니가 확립되면서 미국 경제는 1980년대 이후 고용 창출 능력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과잉금융은 금융 시스템을 파괴시킨 그림자 금융 시스템을 만들어냈고, 국가 이해에 대한 금융적 관점은 사회보장 시스템을 붕괴시켰다. 고용 창출 역량의 약화가 1990년대 초 침체부터 '고용 없는 성장'으로 나타나자 정치권과 월가는 무주택자와 저소득층에 주택금융을 지원하는 '신자유주의 포퓰리즘'으로 대응했다. 게다가 '닷컴 버블' 붕괴 이후 혁신 시스템까지 작동하지 않자 포퓰리즘식 주거 정책은 강도가 강화됐고, 그 결과가 금융위기였다. 이처럼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는 기본적으로 산업화 이후 영미형 자기 조정적 시장 시스템의 생명력 소진에 따른 결과였다.

한계에 이른 시장 경제 시스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 역시 1980년대 말 산업화 이후 산업 구조조정에 직면한 일본형 네트워크 시장 시스템의 무력감을 보여준다. 미국이 주도한 금융 자유화는 일본의 산업화를 가능케 한 관계형 은행 중심 시스템과 원자형 시장 중심 금융 시스템의 충돌을 의미했고, 그 결과는 리스크 공유 메커니즘 붕괴로 나타났다. 그러나 '자산 버블' 붕괴가 장기간 지속된 이유는 산업구조 업그레이드와 산업체계 다양화에 대한 일본형 네트워크 시장 시스템의 무능력 때문이었다. 1960년대 후반 이래 선진국 중심으로 제조업 기술의 평준화가 확산되면서, 제조업 중심의 모노컬러 산업구조의 국가일수록 제조업에서 경쟁 압력 증대에 따른 비용 절감과 수익성 압박에 대응해 기업은 임금 인상 억제, 비정규직 노동력 사용 증대, 자동화 및 해외 이전 등으로 대응하고, 국가는 환율정책 등으로 지원한다. 이런 대응은 국가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기업과 가계 간 소득의 불균등 배분, 고용 불안정 및 질의 악화, 저출산, 내수 취약성을 심화시킨다. 즉 제조업 중심의 모노컬러 산업구조의 함정이 만들어낸 노동자의 소득, 내수 약화, 인구 오너스(Onus) 전개, 그리고 '수출에 죽고 사는 경제'라는 악순환 구조에서 일본형 네트워크 시장 시스템이나 독일형 사회적 시장 시스템 모두 무력감을 드러내고 있다. 독일과 일본의 '근본적' 차이는, 독일의 경우 유로존 체제라는 방어막이 있다는 점이다. 유럽 경제가 호황일 때는 유럽 국가에 대한 수출 증대로, 유럽 경제가 침체될 때는 유로화 약세로 유럽 이외 지역으로 수출 증대의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류 세계는 지난 수세기 동안 경제발전을 주도한 주요 국가의 시장 시스템 붕괴 속에 새로운 사회질서와 시스템을 만들어내야 하는 이행기에 살고 있다. 대변환의 진행은 한국 경제라고 예외일 수 없다. 한국 경제는 제조업 중심의 모노컬러 산업구조라는 점에서 일본이나 독일 등과 유사하지만, 제조업의 자기 완결성이 부족한 점에서 상대적으로 산업구조가 취약하다. 가계소득과 내수의 취약성, 높은 대외의존도, 비정규직 노동력 문제, 저출산·고령화 등에서 일본이나 독일보다 심각하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인구 요인으로만 볼 때, 향후 40년(2010~2050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주택 가격 하락률이 가장 클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잠재성장률 하락이 빠르게 진행되어 2030년 이후에는 OECD 국가 중 성장률이 두 번째로 낮은 국가가 될 것이다. 인구와 성장 요인을 결합한 것이 핵심 노동력을 비생산인구(연소인구+노년인구)로 나눈 '역부양인구비율'인데, 이 비율은 (주택)자산시장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 국가들의 경우 역부양인구비율이 하락하는 시점과 자산시장의 붕괴가 정확히 일치했다. 한국은 2010년 이후부터 역부양인구비율이 하락하고 있는데, 가계 부채와 깊은 연관성이 있는 주택시장이 침체되기 시작한 배경이다. 이처럼 한국 경제는 일본이 20년 전에 겪던 자산 버블의 붕괴와 인구 오너스의 결합이 막 도래해 장기 불황이나 침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기업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따라서 산업구조의 업그레이드와 산업체계의 다양화, 그리고 청년층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 창출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경제와 공동체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주요 선진국의 경험에서 보듯이 산업구조의 조정은 새로운 사회질서와 시스템의 구축을 요구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과 철학, 그리고 가치 체계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을 의미한다. 이행기 상황에서 헌법이 시대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고, 심지어 시대 흐름에 맞지 않을 경우 사회와 경제 발전이 지체될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기존 헌법은 새로운 변화에 질곡으로 작용한다. 현재 헌법은 기본적으로 산업사회의 비전과 철학, 그리고 가치 체계에 기초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헌법 개혁 논쟁은 산업사회의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헌법의 경제 조항과 관련해 '경제 민주화' 대 '국가 개입의 축소'라는 이분법적 대립인 것이다. 모두 현실과 시대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시장 강화나 경제 민주화만으로 산업구조의 조정이나 한국 경제의 주요 과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인식의 근본적 변화가 요구된다. 주지하듯이 산업사회에서 경제적 부의 창출은 유형 가치가 중심이었다. 시장 이론이 자원의 희소성을 경제 문제로 보고, 희소한 자원의 효율적 배분을 경제 목표로 설정하는 이유다. 이 문제와 목표를 시장 이론이 경쟁의 원리와 사유재산권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시장 이론이 만들어진 영국이 개인주의 문화가 발달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지난 40년간 경제의 새로운 흐름은 아이디어의 산물인 무형가치로 경제적 부가 이동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비소모성을 특성으로 갖는 아이디어와 무형가치는 제조업처럼 희소성의 문제가 작동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합할수록 가치가 증대하는 속성으로 공유와 협력이 가치 창출의 원동력이다. 그 결과 단순히 뛰어난 기술과 극소수의 베스트 인재, 자본의 조합으로 신제품을 만들어내고 기술과 성능을 최우선시하던 산업사회의 혁신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산업사회에서 혁신을 주도하던 연구개발(R&D) 투자가 혁신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R&D 지출과 기업의 재무적 성과 간의 관계 약화에서도 확인된다. 애플의 경우 매출액 대비 R&D 투자의 비중이 컴퓨터와 전자산업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가장 높은 수익을 내고 있다. 가장 혁신적인 기업의 가치 창출 키워드는 '협력'과 '공유'와 '호혜성'이다. 생태계 전반의 상생을 도모하는 앱스토어(App Store)의 '이타자리(利他自利) 경영', 협업제조(Collaborative Manufacturing)나 크라우드소싱(Crowd Sourcing) 등의 '공동창조'(Co-creation), 그리고 소셜커머스(Social Commerce)나 트랜스슈머(Transsumer) 등 '협력적 혁신'과 '협력적 소비'의 부상 등이다. 이 흐름에서 중요한 시사점은 가치 창출에서 기업 내부 자원의 역할이 약화되고, 기업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업 중심에서 사람 중심의 일자리 창출로 변화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유재산권 원칙에서 해방돼야

생산과 소비에서 협력·공유·상생이라는 생태계 개념, 즉 '서로 살리는' 호혜성의 원리가 부상하고 있다. 거래에서 '관계'가 복원되고, 경제활동에서 인간성과 호혜성이 부활하는 것이다. 새로운 경제 흐름과 한국 경제의 당면 과제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할 때 가장 시급한 사항은 우리 사회와 경제의 운영을 협력과 호혜성의 원리로 전환하는 일이다. 협력은 다양성과 자율을 전제로 한다. 차이가 없는 사람들 간에 협력은 의미가 없고, 공동체의 질서를 해치는 이기심의 과잉이 스스로 억제되도록 해야 한다. 즉, 경쟁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를 협력에 기초한 자율민주주의로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이는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의 완수'를 요구하는 헌법 전문의 정신에도 부합한다. 자율성 신장과 협력 강화의 중심에 교육이 있다. 무형가치의 창출이 혁신의 핵심이기에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나 상호보완 관계에 있는 분야와 협력·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 육성이 개인과 공동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다. 산업화 단계에서는 (설비) 투자의 성장 유발 효과가 높기에 물적 자본 주도의 성장과 고용 창출이 가능한 반면, 지식 기반 경제에서는 역으로 양질의 아이디어를 보유한 인재의 존재가 투자를 유발한다. 따라서 경쟁 원리에 따른 교육을 협력 원리에 따른 교육으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 협력 원리에 기초한 교육은 최고(Best)보다는 특별함(Unique)과 차이를 갖는 인재 육성을 목표로 한다. 이는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한다'는 헌법 전문의 지향성과 부합한다. 인구구조의 변화 속에 양질의 인재 육성이 최대 목표로 부상한 사회에서 교육은 물론 주거와 의료 등은 복지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실질적 기초 권리로 보장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헌법을 사유재산권 절대의 원칙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산업구조의 업그레이드와 다양화를 위해서는 소유권의 다원화가 필요하다. 시장 시스템이 다양한 소유권과 결합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론적으로뿐만 아니라 역사적·경험적으로도 입증된다. 협력의 문화 속에서는 사유재산권보다 공동 소유가 경제적 효율성을 보장해준다는 것이 서구 학계의 주장이다. '협조적 문화'와 공동 소유의 결합은 한반도 통일에 중요한 뜻을 내포한다. 통일 과정에서 북한의 공동체적 소유 제도(협동적·국가적 소유)의 골간을 유지하면서 시장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안을 시사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헌법은 다양한 유형의 공유를 적극 보장해주어야 한다.

글•최근배 경제사학자. 미국 조지아대학 박사. 현재 대안경제 이론과 대안경제 시스템 문제에 연구 및 관심을 쏟고 있다. 한국 경제사학회장. 교육·지역자치·통일운동 분야의 사회활동에도 관심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