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 확대와 통일의 전제조건
Corée | 6월항쟁 25주년 특집 | 개헌을 말한다
좋은 헌법은 시대적 변화를 충분히 수용하고도 남는 적당한 추상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가치질서에 대한 구체적 지침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추상성과 구체성을 갖추고 있는 국가에서는 헌법 해석의 변화를 통해 시대적 요구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다. 헌법이 시대적 요구를 담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와 사회 발전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 개정을 필요로 한다. 현행 헌법이 제정되던 1987년의 상황은 오늘날과 달랐다. 헌법의 기초가 된 시대적 배경은 엘리트 중심의 산업사회와 닫힌 국경의 민족국가였다. 산업사회에서는 강력한 중앙정부와 엘리트 관료에 의한 일사불란한 일극(一極) 중심의 국가 동원 체제가 필요했다. 오늘날 지식정보 사회에서는 다양성과 창의성이 요구되고, 이를 위한 국가 경영 체제로서 공간적인 다극(多極) 분산 구조로서 지방분권 체제를 필요로 한다. 또한 국경이 폐쇄된 민족국가와는 달리 세계화 시대에는 개방성·창의성·다원성이 요구된다. 많은 국내적 문제가 국가 내에서 결정되지 못하고 국제적 영향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따라서 대외적으로 독립이라는 주권 개념은 근본적인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또한 국가는 대내적으로 최고라는 수직적 주권 개념도 오늘날 지방화 시대에 지방주권에 의한 수평적 협력과 경쟁관계라는 개념으로 변화되고 있다. 국가 형성 단계에서 통합질서로서 연방제도를 채택한 나라에서는 이런 시대적 요구를 수용하는 데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에서는 지방분권적 수직적 권력분립 구조로서 지방분권을 위한 헌법 개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방분권은 시대적 요구
현행 헌법은 제117조와 제118조에서 지방자치를 보장하고 있으나, 헌법이 예정하고 있는 지방분권의 종류와 수준은 중앙정부가 결정한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적 분권에 그치고 있다. 지방이 독자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이에 근거해 입법과 사법을 독자적으로 수행해 지방 주도로 다양성과 창의성을 발휘하고, 지역 간의 정책 경쟁을 통해 혁신이 일어나게 하는 시대적 요구에는 현저히 미치지 못한다. 반대로 헌법은 지방 주도로 다양한 정책을 개발하고, 지방의 힘으로 지역을 발전시키는 데 발목을 잡고 있다. 예컨대 기업 유치나 지역 교통정책을 위한 조세정책이나 도시계획의 독자적 추진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독자적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거나 문화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불가능한 실정이다. 한마디로 지방의 활력은 중앙정부에 의한 지침에 의해 질식당하고 있으며, 이 질곡의 원인이 헌법에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헌법이 지방의 독자적이고 창의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이제 헌법 개정을 통해 지역 발전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지역 발전의 디딤돌을 확보해야 한다.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통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현행 헌법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 물론 평화통일에 대한 헌법 제정권자의 의지는 확고하지만 그뿐이다. 통일 후 평화 체제를 구축하고 공존을 보장하는 데 현행 헌법의 중앙집권적·하향적 국가 운영 체제는 장애로 작용할 것이 명백하다. 서로 이질적이고 특수한 북한과 남한 지역이 공존할 수 있는 여유와 포용 공간을 현행 헌법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 그릇에 담기 어려운 이질성과 다양성을 억지로 한 그릇에 담아두면 내부적 갈등과 대립으로 인해 실질적 통합은 어렵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나라들은 통일 해법으로서 연방제도를 채택해왔다. 미국연방제도·호주연방제도·스위스연방제도 등 각국의 연방제도는 분리된 국가를 통합하는 집권과 분권의 균형원리로서 채택되었다. 만약 현행 중앙집권적 헌법 체제하에서 통일하는 경우에 흡수병합을 하는 쪽과 흡수합병을 당하는 쪽 간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통일 전제조건으로서의 헌법
북한의 특수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전체로서 가치질서의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는 연방제도 내지 고도의 지방분권적 헌법 체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이 경우 '연방제'라는 표현을 꼭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 지역의 다양성과 특수성, 독자적인 정치 결정의 과정과 내용이 보장되는 고도의 분권적 질서를 헌법에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북한에서 주장하는 고려연방제 통일 방안처럼 남한과 북한을 각각의 지역단위로 하는 연방제 통일 방안은 두 지역의 극단적 대립과 갈등을 야기할 수 있고, 다양한 정책적 실험을 어렵게 할 우려가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 남한과 북한 지역에 각각 적어도 3~5개의 지역단위를 인정하고, 각 지역단위에 고도의 자치권과 재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현실적 방안일 수 있다. 남한과 북한은 양극 체제 대신 다극적 분산 체제를 도입하고, 각 지역의 경영을 각 지역의 주민과 지역정부에 맡기고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한 권한과 재원의 배분 문제를 헌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이 통일 헌법 체제는 국경이 붕괴된 이후에는 도입하기 어렵다. 통일이 초래되기 전에 미리 통일 체제를 담은 헌법 질서를 남한에서 먼저 실현하고, 통일 상황에서 북한의 여러 지역에 대해 남한 지역과 대등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 정치에서 지역주의 문제는 제거 대상으로서만 거론된다. 지방색이나 지역주의를 '망국병'이라고 저주한다. 영호남·충청 지역의 투표 성향은 다분히 감정적이며 비이성적 지역주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합리적인 정책은 실종되고 지역 간에 서로 뺏고 빼앗기는 제로섬의 소모전을 초래하는 지역주의는 분명 극복되어야 한다. 중앙정치인들이 이를 이용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어느 지역에 어떤 우대 조치를 하겠다는 특혜성 개발 공약을 내걸고, 전 국토를 감당하기 어려운 토목 국가로 변질시키고 있다.
지방주의 문제 해결을 위한 분권적 질서 필요
한편 지방색이나 지역주의를 나쁜 것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바탕에는 지역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있다는 점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순기능할 수 있는 정치 체제가 필요하다. 오늘날 새로운 국가 경영 체제로서 지역주의(Regionalism)가 강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주의의 역기능을 하고 미래지향적 정치를 무력화하는 원인은, 중앙정부가 자원 배분과 지역 발전을 주도하면서 특혜 지역과 차별 지역으로 달리 차등 대우하기 때문이다. 이 폐단을 극복하려면 그 지역 문제는 그 지역에서 결정하도록 자원과 권한을 배분하고, 지역 발전에 대한 책임은 그 지역에서 지게 한다. 그러면 지방색이나 지역주의는 당해 지역을 발전시키고, 지역 간 선의의 경쟁을 유발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지역주의가 순기능을 하고 지역 발전을 위해 선순환하기 위해서는 지역 발전을 지역 주민과 지역 정부가 결정하고 책임지도록 고도의 분권적 헌법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이는 통일 뒤 지역주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시대적 요구와 통일 질서, 지역주의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분권 질서로서 헌법 내용에는 무엇이 포함돼야 하는지 명확한 정답은 없다. 다른 나라들도 다양한 분권 질서를 헌법에 담고 있다. 결국 정치적 흥정과 타협을 통해 분권의 수준과 유형이 정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분권 헌법을 실현하는 국가의 헌법에서 공통적 요소를 찾아내 우리나라에 맞게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에 속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분권적 헌법 개정의 방향과 내용
먼저 행정적 분권뿐만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에 정치적 분권이 헌법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지방의 정책을 입법화할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한다. 현재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제정권은 법률 범위 안에서만 제정할 수 있고, 권리 제한이나 의무 부과는 국가 법률에 의한 위임이 없으면 제정할 수 없어 지방의 독자적 정책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헌법에 특정 사항에 대해서는 지방의 독자적 입법권을 보장해, 지방 간 정책의 경쟁과 정책의 다양성이 보장돼야 한다. 입법권의 배분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중앙정부만 행사할 수 있는 입법권, 지방정부만 행사할 수 있는 입법권,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모두 입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경합적인 입법권을 헌법에 각각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국방·외교·금융·통상·통화·도량형 등과 같은 전국적 사항에 대해서는 국가의 배타적 입법권이 필요하나, 그 밖의 사항에 대해서는 경합적 입법권이나 지방정부의 배타적 입법권을 헌법에 도입하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정치적 과정에서 정치적 논의와 타협을 통해 다양하게 결정될 것이다.
다음으로 재정분권에 대한 헌법 규정이 필요하다. 재정적 뒷받침이 없는 지방분권은 공허한 것이다. 재정분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면 헌법에 지방자치단체가 세율과 세목을 정할 수 있는 지방세와 재원의 보장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재원 배분에서는 국가에 의한 재정 조정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지방의 자체 수입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방의 자율성이 중앙정부에 대한 재정적 종속성에 의해 발목 잡힐 우려가 있다.
또한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지방의 이익을 반영할 수 있는 국가기관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즉, 현행 헌법의 단일 국회 원칙을 수정해 양원제 도입을 필요로 한다. 상원 혹은 지방원을 설치해 지방의 이익을 중앙정책의 결정 과정에 반영해 지방분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상원제도 내지 양원제도를 취하는 것은 입법권의 분권과 지방의 이익을 중앙정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방어하려는 취지가 있다.
글•이기우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독일 뮌스터대학에서 '독일과 한국의 지방자치단체에 대한 국가감독'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방자치와 분권 문제에 대해 연구 및 관심을 쏟고 있다. 대한교육법학회회장, 경실련 분권국가본부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