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PD에서 진보당 내홍까지

Corée

2012-06-12     김윤철

통합진보당 사태의 핵심에는 당권파와 비당권파 간의 치열한 갈등이 놓여 있다. 이들은 왜 협력과 경쟁이 아닌 갈등 관계를 맺고 있는가? 힘겹게 통합을 성사시켰고 총선에서 선전함으로써 제도정치 내 입지를 강화하자마자, 왜 극심한 갈등에 빠져들었는가? 이런 물음과 관련해 최근 주목받고 있는 것이 당권파와 비당권파 내 주축 세력의 정파적 기원이다. 1980년대 반독재 민주변혁 투쟁에서 생성돼 민주노동당의 분당 때까지 다툼을 반복해온 민족해방(NL)-민중민주(PD)가 바로 그것이다.

NL-PD라는 정파적 기원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념적 간극과 세력 다툼의 역사성 때문이다. 서로 이념적 간극이 깊고 세력 다툼이 오래 지속된 것일 경우, 목도하는 갈등의 극심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념적 간극의 깊이와 세력 다툼의 오랜 역사성 그 자체가 현재 겪고 있는 갈등의 원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 하필 지금 정파적 기원이 갈등적 요인으로 작동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별도의 요인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내홍을 정파 갈등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타당한지도 검토해야 한다. 비당권파에는 과거 당권파인 경기동부연합과 함께했던 인물과 세력이 가세해 있고, 국민참여당 계열이라는 과거 정파운동적 맥락에서 벗어나 있는 세력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파운동적 기원을 살펴보는 것의 의미는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정파적 기원을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다. 현재의 상황을 가져온 직접적 요인을 제거함으로써 그들 간의 갈등이 완전 소멸될 수 있는지, 또 직접적 요인의 해소 자체가 가능한지 가늠하는 데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경우에 따라 통합진보당은 물론, 전체 진보정치 세력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가 달라진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진보정치를 주도하는 세력들의 정파적 기원을 두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려 한다. 하나는 1980년대 반독재 민주변혁운동을 통해 NL-PD가 형성된 과정이며, 다른 하나는 NL-PD가 2000년대 들어 민주노동당이라는 정파연합정당을 만들었다가 결별한 과정이다.

진보정치의 정파들은 학생운동이 주축을 이룬 1980년대 반독재 민주변혁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90년대 초반을 넘어서면서 영향력을 상실했지만, 학생운동은 한국의 정치·사회 운동에서의 이념 논쟁과 활동을 주도해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학생운동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입장으로 나뉘어 다투어왔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 이후 학생운동의 역할, 정치투쟁의 방향, 사회변혁의 이념과 목표와 전략 설정 등을 둘러싸고 형성된 1980~83년 무림-학림과 야비-전망, 1984~85년의 MC-MT, 1986년 이후의 NL-CA, NL-PD 그룹 간의 논쟁과 경쟁과 갈등이 그것이다. 특히 진보정치의 정파적 기원은 1980년대 초·중반기의 논쟁, 그리고 이것에 바탕한 중·후반기의 조직적 분화와 경쟁과 갈등이라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1. 1980년대 반독재 민주변혁운동과 NL-PD

무림-학림, 야비-전망 논쟁은 주로 학생운동의 역할을 둘러싸고 전개됐다. 무림은 장기적 관점에서 민주변혁 투쟁의 주력군인 학생운동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림은 무림에 대해 조직보존론, 준비론, 당면투쟁방기론, 대기주의에 빠졌다는 비판을 가하고 학생운동이 정치투쟁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양 그룹 모두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전두환 정권의 공안 당국에 의해 핵심 인자들이 검거·구속되는 무림 사건과 학림 사건을 겪는다. 이 사건 이후 무림-학림 논쟁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된 것이 바로 야비-전망 논쟁이다. 무림을 계승한 학생운동가들은 <야학비판>(야비)이라는 소책자를 통해 기층 민중세력의 역량 강화를 위한 노동 현장으로의 존재 이전을 강조했다. 학림을 계승한 쪽도 이에 동의해 존재 이전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소책자 <학생운동의 전망>(전망)을 통해 학생운동이 반독재 투쟁에서 선도성을 발휘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무림-학림, 야비-전망

MC-MT는 각각 무림과 학림을 계승한 그룹을 가리킨다. MC는 '주류'(Main Current)의 영문 약자고, MT는 학림을 계승한 그룹이 결성한 민주화투쟁위원회와 민주화투쟁학생연합의 약자인 '민투'의 영어식 표기다. MC-MT 논쟁은 전두환 정권의 임기가 끝나가는 1987~88년 시점의 정세 상황과 대처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MT는 정치·경제적 위기가 조성된다면서 변혁운동 세력이 적극적으로 공세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MC는 변혁운동의 주체 역량이 미약한 방어기라면서 대중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논쟁에서 눈여겨볼 것은 MC와 MT 각 그룹이 자신들의 입장을 발전시켜나가면서 정파 조직적 실천으로 외화해낸 것이다. 즉 MC 그룹은 대중 노선을 정립하고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론(NLPDR)을 받아들여 민족해방(NL) 그룹으로, MT 그룹은 제헌의회소집투쟁론을 주장하면서 제헌의회 그룹(CA)으로 발전해갔다.

MC-MT 논쟁 이후 1986년 상반기를 거치면서 학생운동은 NL-CA, NL-PD 그룹으로 나뉜다. 특히 이 시기 이후 그룹 간 논쟁·경쟁·갈등은 학생운동에 국한되지 않고 전체 반독재 민주변혁운동 세력 전반으로 확산됐다. 각 그룹은 이제 독자적인 이념·조직·투쟁 노선을 갖춘 명실상부한 정치세력, 즉 정파를 지향한다. 학생운동 경험에 바탕해 많은 사회운동가들이 배출됐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주도로 사회운동단체들 간의 연합체와 많은 부문운동단체들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1980년대 초·중반의 논쟁을 거치면서 이론·실천적 역량이 강화됐다.

NL-CA 구도의 형성은, 1986년 초 개헌 투쟁과 반외세 투쟁의 향방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1986년 2월 4일 서울대에서 열린 파쇼헌법 철폐 투쟁대회 및 개헌서명추진본부 결성식 사건으로 238명이 연행돼 그중 180명이 구속된 뒤, 서울대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기존 투쟁 방향에 대한 대대적인 비판이 제기되면서 반외세자주화투쟁 우위론을 주장한 세력이 주류를 점했다. 이들은 4월 개헌 투쟁보다는 반미 투쟁을 중심 과제로 표방하는 비합법 공개 대중투쟁 기구인 반미자주화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자민투)를 결성한다.

자민투는 구국학생연맹(구학연)이라는 비합법 조직의 공개 투쟁 기구였는데, 구학연은 반제그룹(AI그룹)의 핵심인 서울대 단재사상연구회(단사)를 모태로 태동했다. 단사는 1985년 말부터 반제 투쟁의 의의와 필요성에 대한 선전·선동 작업을 주요 과제로 삼고, NLPDR론의 기초가 될 이론적 문건을 생산해 1985년 말과 1986년 초 겨울방학 동안 집중적으로 배포했다. 이를 기반으로 단사 그룹은 구국학생연맹을 결성했다. 구학연은 과거에 비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정치조직 노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구학연은 이에 입각해 투쟁의 3대 영역으로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조국통일촉진을 설정하고, 1986년 초부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그런 선상에서 자민투를 발족하고 이를 앞세워 팀스피릿 반대투쟁, 양키용병화, 전방입소 반대투쟁을 위시로 반미 자주화 투쟁의 대중화 시도를 본격화했다. 구학련의 활동은 타 대학에도 전파돼 고려대의 애국학생회(1986년 9월 8일), 연세대의 구국학생동맹(1986년 9월 15일) 등이 결성됐다. 구학연은 활동이 당국에 의해 감지되고, '서울대 대자보' 사건을 계기로 집중 수사를 받아 와해됐다. 서울대 대자보 사건이란 1986년 10월 10일 서울대 인문회관 벽에 북한의 <민주조선> 10월 5일자에 실린 내용을 그대로 옮긴 대자보가 부착됨으로써 일어난 국가보안법 사건이다. 바로 이들이 이후 학생운동과 전체 반독재 민주변혁운동 세력의 주류를 점하게 되는 이른바' NL 그룹'으로 자리잡아 나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반미자주화'를 기치로 하고, '민족해방'이라는 목표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민투와 민민투

자민투에 앞서 1986년 3월 서울대 인문대 중심으로 반파쇼 투쟁을 중심 과제로 설정하는 쪽은 반제반파쇼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를 결성했다. 민민투의 주류 그룹은 5월께 제헌의회소집투쟁을 제기하면서 제헌의회그룹(CA 그룹)을 형성한다. 1980년 5월 결성돼 1981년 6월 검거된 전국민주학생연맹(학림 사건)에 관여했던 인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다. 학생운동조직이라기보다는 선배 지도 그룹의 위상과 역할을 하던 조직이라 할 것이다. CA 그룹의 조직원들은 직업적 혁명가로 자처하고 비합법적인 지도 그룹을 목적의식적으로 결성하려 했다. 당시 직선제 개헌을 슬로건으로 하고 있던 NL 그룹에 대립해 '파쇼하의 개헌 반대, 혁명으로 제헌의회 소집'을 내걸고, 개량적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대표한다며 신민당을 비판하고 약 6개월 동안 민민투를 지도하며 반파쇼 투쟁을 수행했다. 이 조직은 본격적인 전위조직 건설의 물적 토대가 사상적 통일성 확보에 있다고 보고, 전국적 정치신문의 발간을 통해 이런 과제를 수행하면서 전위조직 건설을 구체화하려 했다. 하지만 1986년 11월부터 1987년 1월까지 대대적인 검거를 받아 파괴된다. CA 그룹은 이후 노동해방투쟁동맹(노해동)이라는 조직으로, 나중에는 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이라는 조직으로 계승된다.

자민투와 민민투는 각기 <해방선언>과 <민족민주선언>이라는 선전 매체를 제작·배포하면서 독자적인 조직 확장을 통해 내부 투쟁을 벌여나갔다. 이로부터 두 세력에 의해 주도된 학생운동의 흐름은 반전반핵투쟁·전방입소거부투쟁 등의 반외세 투쟁과 신민당 개헌현판식과 개헌논의 공방전을 계기로 전개된 뒤에는 제헌 투쟁의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이후 1980년대 학생운동은 조직적 분화 속에서 각기 변혁론과 실천 노선에 입각한 경쟁과 갈등에 빠져들었다. 경쟁과 갈등은 이후 같은 캠퍼스에서 함께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 때도 자기 조직의 깃발을 세우고 사전에라도 독자 집회를 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때문에 '종파주의 비판', '대동단결주의' 같은 주장이 등장했다.

이때 주의를 기울일 만한 것은 이 시기를 전후로 한 NL-CA의 구도 형성에 이미 학생운동이 존재 이전 등을 통해 대학 밖에 나가 전위조직 건설을 시도하던 선배 '직업운동가'들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1985~86년에만 제헌의회그룹 말고도 반제동맹당,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 맑스·레닌주의 당, 반제구국노동자동맹당 사건 등이 터지는데, 대중정치 조직을 표방한 서노련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합전위조직의 다양한 시도였다. 이 모든 조직이 조직적으로 학생운동과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지만, 1970~80년대 학생운동을 통해 성장한 인자들이 학생운동 밖에서 조직적 실천을 수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NL-CA, NL-PD의 분화

CA 그룹이 바로 그 전형이다. 이 때문에 CA 그룹은 민민투 이외에 전국 반제반파쇼민족민주학생연맹(민민학련, 1986년 4월 29일 결성) 같은 별도의 학생조직을 건설한다. 민민학련은 결성식에서 CA 그룹의 입장에 의거해, '파쇼헌법철폐와 민족민주헌법 쟁취투쟁', '보수대연합', '신식민지 권력재편음모 분쇄투쟁', '개량주의적 재야·신민당의 타협성·기회주의·사대주의 폭로투쟁' 등을 전개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자민투와 민민투, 즉 NL-CA의 구도가 형성되는 가운데 변혁론 논쟁이 재개되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 사회성격 논쟁'이다. 변혁운동론을 과학적으로 정립하고 체계화하려는 노력이 더욱 본격화된 것이다. 이를 우리는 NL-CA 구도 아래 경쟁이 가시화되면서 나타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NL 그룹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식반론)을, CA 그룹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신식국독자론)을 제시했다. 바로 여기서 과학적 변혁론을 내세운 정파운동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NL-CA 구도는 1987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이후 NL-PD로 다시금 분화된다. PD 그룹은 CA 그룹이 러시아 혁명을 기계적으로 적용했고 한국의 독점자본주의 발달 및 제2차 세계대전 뒤 신식민지에서의 변혁운동 경험 등을 무시했다는 점을 비판하며 새롭게 형성됐다. 이 시기 이후 각 그룹은 '정파'라는 이름의 많은 조직들을 잉태하면서(특히 PD 그룹) 스스로 과학적 변혁론의 담지자임을 주창한다.

하지만 이 시기 이후 학생운동은 주로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학생회 공간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대중노선을 강조하고 학생회 강화론을 주창하면서 실제로 학생회 공간의 다수를 점하고 있던 NL 그룹의 입장이 그러했다. 이에 비해 소수인 CA나 PD 그룹은 주로 투쟁위원회, 특별위원회 등 학생운동 참여 인자를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이것은 이들 그룹이 약한 대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학생운동의 공개적 지도자는 학우들의 투표로 뽑은 학생회장들로 표상됐다. 일반 학우들은 자신이 뽑은 학생회장이 NL인지 PD인지를 알고 있었으며, 그가 소속된 학생운동 정파 조직의 후원을 받으며 출마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NL적 구호와 공약, PD적 구호와 공약은 차이점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특히 각 그룹은 (총)학생회 앞에 자신들이 표방하는 정치조직 노선에 입각해 이름을 지었는데 '전투적 학생회', '자주적 학생회', '민중민주학생회' 등이 그것이다. 학생회장 후보 진영이 학생회에 어떤 이름을 붙이는지 보고 어떤 그룹에 속하는지 알 수 있었다.

NL-CA, NL-PD는 적어도 학생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인자들에게까지는 꽤 '단단한' 충성 관계를 형성해냈다. 적어도 NL-PD의 구도 형성 이후에는 그룹 간 이동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것은 각 그룹 내에서 다양한 입장으로 분화할 수 있고, 정기적으로 선거경쟁 체제에 들어가게 됨으로써 정파적 정체성 역시 주기적으로 강화되는 계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정치가 왜 25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파적 친소관계 등에 바탕해 활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2. 정파 연합과 민주노동당의 생성

1980년대 반독재 민주변혁운동 과정에서 형성된 NL-PD가 민주화 이후 25여 년이 지난 지금의 진보정치에서 다시금 거론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창당 4년 만인 2004년 국회 의석 확보에 성공함으로써 진보정치의 새로운 장을 연 민주노동당이 NL-PD라는 정파 연합적 기반에 바탕해 생성됐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1990년대에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전반에 걸쳐 포진해 있던 NL-PD 성향의 사회운동조직들과 개별 활동가들의 참여에 의해 만들어졌다.

PD가 이끈 민노당 창당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직후인 1980년대 말 시작돼 민주노동당으로 귀결된 진보정치는 애초에는 PD 세력이 주도해왔다. 1980년대 말 이후 민주노동당 창당 이전까지 진보정치의 명맥을 이어온 민중의 당, 민중당, 한국사회주의노동당, 국민승리21 등이 모두 그러하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추진해온 민주노총 역시 PD 성향의 노동운동가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현재 통합진보당의 비당권파(신당권파)의 핵심 인사인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이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기 이전까지 NL 성향의 사회운동조직과 활동가들은 진보정당운동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들은 진보정당 무용론, 시기상조론 등을 주장하며 김대중으로 상징되는 야당 세력과의 제휴·협력을 선호했다.

하지만 2000년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함께 NL 성향의 사회운동조직과 활동가들이 지역조직 혹은 개별 차원에서 참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최근 통합진보당의 (구)당권파로서 정치·사회적 이목을 끌어낸 경기동부연합도 민주노동당에 가세했다. 지금 당권파(구당권파)와 비당권파(신당권파) 간의 갈등관계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하는 울산연합 역시 이 시기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다. 이후 경기동부연합의 중앙조직으로서 1991년 만들어져 1990년대 내내 NL 성향의 사회운동조직과 활동가들이 주도하고 결집해 있던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이 공식적으로 합류한다. 2001년 9월 민족민주전선 일꾼전진대회를 열어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하여 연방통일조국 건설하자'는 결의를 하고 난 뒤였다. 지금 비당권파(신당권파)의 한 축인 인천연합은 이때 민주노동당에 참여했다. 2002년 말에는 전국연합의 모든 지역 조직이 민주노동당에 참여했고,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도 가세했다. 2003년 10월에는 현재 통합진보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인 강기갑이 소속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민주노동당과 조직 대 조직의 협상을 통해 합류했다. 이로써 NL 성향의 주요 세력이 모두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독자적인 진보정당 건설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던 NL 성향의 세력이 민주노동당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또 이들에 비판적이던 PD 성향의 세력이 그들의 참여를 적극 추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NL-PD 가릴 것 없이 1990년대 들어 민주변혁운동 세력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김영삼-김대중 자유주의 개혁 정부를 거치며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 제도 정치권으로의 진입, 즉 국회 의석 확보라는 정치권력의 획득을 통해 그런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민주노총이라는 대중조직의 결합과 정당명부비례대표제 도입이라는 제도 변화는 진보정당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즉, 민주노동당은 1980년대 형성된 민주변혁운동 세력의 정치적 생존을 위한 '총동원 체제'와 다름없었다.

뒤늦게 합류한 NL이 당 장악

민주노동당이 총동원 체제였다는 사실은 전국연합을 포함한 NL 성향의 주요 세력이 민주노동당에 합류함으로써 당원 수가 빠르게 증가했다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 당원은 국승21 시절 2천 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2000년 창당 무렵에는 6배가 넘는 1만1천 명으로 늘어났고, 2001년 말에는 1만6천 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정당명부비례대표제가 도입돼 전국 동시 지방선거가 있은 2002년 말에는 2만4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2003년 말에는 3만5천 명으로 늘어났고, 17대 총선이 실시된 2004년 말에는 4만6천여 명, 그다음에는 7만 명 정도로 증가했다. 당원 수의 빠른 증가는 기성 정당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정치세력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직적 차원에서 집단 입당의 효과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민주노동당에선 NL과 PD를 각각 상징하는 '자주'와 '평등'이 당의 공식 이념으로 채택됐고, 주요 당직과 공직 후보자의 선출에서도 정파 간 균형이 중시됐다. 이념적 통합성과 민주노동당 자체에 대한 충성심이 그다지 높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국회 의석 확보라는 분명한 목표 아래 정파 간 이념 갈등과 당권 경쟁은 되로록 자제됐다. 하지만 국회 의석 확보를 전후로 사정이 달라졌다. NL과 PD 모두 당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직 대오를 정비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의 이념과 정책을 당의 노선으로 관철하려 했다. NL은 경기동부연합-울산연합-인천연합-민주노총 국민파 등 주요 지역 세력과 노동운동 세력이 결합한 '자주파' 대오를 형성했고, PD는 '청년사회주의그룹'으로 불린 화요파와 민주노총의 중앙파, 그리고 친PD 성향의 개별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평등파' 대오를 출범시켰다. 당직과 공직 후보자 선출 제도도 정파 간 경쟁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전 당원 투표를 통해 선출함으로써 '다수의 경쟁'을 하게 되었고, 이 경쟁에서 이긴 다수파는 당직을 독점할 수 있는 절차적 정당성을 획득했다.

자주파와 평등파의 대립

자주파와 평등파의 경쟁은 결국 수적 다수를 점한 자주파의 독주를 가져왔다. 당권을 장악한 자주파는 내부의 강경파 경기동부연합의 주도로 NL 이념과 정책을 당 노선으로 관철해나갔다. 가장 대표적인 게 바로 북핵의 자위권 인정과 일심회 사건 연루자 보호, 그리고 2007년 대통령 선거 슬로건으로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추진한 것이다. 당 대표와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번번이 소수파의 한계를 절감한 평등파는 이 과정에서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또 평등파는 2007년 대선에서 자주파의 지지로 대선 후보가 된 권영길이 신참 후보 문국현(5.82%·137만5498표)과 국회 진출 이전인 16대 대선 득표력(3.9%·95만7148표)에도 한참 뒤지는 부진한 성적(3.02%·71만2121표)을 보이자 정파연합 정당의 효용성에 대한 깊은 회의에 빠져들었다. 결국 조승수와 평등파 고참 활동가들의 주도와 노회찬·심상정이라는 진보정치를 대표하는 인사들의 가세로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분당을 감행해,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3. 통합진보당의 앞날

통합진보당은 진보신당을 창당했던 노회찬·심상정·조승수를 비롯한 평등파 중 일부가 자주파와 다시 손잡음으로써 만들어졌다. 유시민-국민참여당(국참파)도 함께했다. 18대 총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의 한계를 절감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지난 4·11 총선이 끝난 직후만 해도 이들의 결정은 옳고 그름을 떠나 합리적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착시였다. 정파 연합 정당이던 민주노동당보다 낮은 이념적·조직문화적 차이, 분당 과정에서 만들어진 감정적 앙금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정당이었음을 드러냈다. 실제 통합진보당의 창당을 추진하던 때부터 급조된 선거정당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야권 연대라는 정치적 기회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술 정당일 뿐이었다. 그 비판에는 정당은 얻을 것을 얻은 다음에 곧 분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는 우려를 담고 있었다. 민주노동당 사례를 통해서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아마 이것이 바로 작금의 통합진보당 내홍의 직접적 요인일 것이다.

정파 혹은 개인들의 권력욕?

그렇다면 한국의 진보정치를 주도하는 이들은 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것일까? 모르고 그런 것인가, 알고 그런 것인가? 모르고 그랬다면 미약한 정치적 판단력 때문이고, 알고 그랬다면 정치적 판단력의 기준인 정파 혹은 개별 정치인 차원에서의 권력욕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제는 진보정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정파적 기원이 아니라, 시행착오의 기원이 도대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것이 진보정치의 부활을 가져다줄지 아닐지 불확실한 상황에 놓여 있지만 말이다.

글•김윤철 서강대 정치학 박사. 대안지식연구회 연구위원. 저서로 <인문정치와 주체>(공저), <정당>이 있다. '민주화 25년 한국 정당정치의 평가와 개혁과제', '민주화 이후 한국 운동정치의 역할과 한계', '민주노동당의 분당' 등의 글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