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선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Corée

2012-06-12     서용순

막 총선을 치른 처지에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것도 두 나라의 선거 결과가 엇갈린 마당에, 프랑스 대선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지난 4월에 치른 우리 총선을 보며 허탈감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지난 5월 프랑스 대선을 보고 부러움을 표한다. 한국에서는 야권 연대가 기대와 달리 완패한 반면, 프랑스 대선에서는 17년 만에 좌파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도 정치적으로 선진 국가라고 알려져 있다. 프랑스대혁명의 나라, 68혁명의 나라인 프랑스는 항상 정치적으로 선진적이었다는 인식이 상당히 일반적인 수준에서 공유된다. 게다가 이번 대선 결과는 얼마나 고무적인가? 다시 좌파가 승리했으니 말이다. 좌파 정권이 유럽연합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해,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주도하는 긴축정책을 견제하리라는 기대는 전혀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사태가 그리 단순한 것 같지 않다. 오히려 그런 기대는 환상에 가깝다. 외관상 프랑스의 대선 결과가 좌파의 승리로 나타났지만, 그것이 정말 좌파의 승리인지 무척 불투명하다.

과연 좌파의 승리일까?

프랑스 좌파가 최근 겪은 부침에 대해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14년 동안 대통령직(1981~95)을 수행한 프랑수아 미테랑 이후 프랑스 좌파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자크 시라크 대통령(1995~2007) 아래서 좌우 동거 정부를 구성한 리오넬 조스팽 내각 이후로 프랑스 좌파는 권력의 중심에서 완전히 밀려난다. 결정적인 것은 바로 총리직을 수행하던 조스팽이 2002년 대선의 1차 투표에서 3위로 밀려나 결선 투표에 진출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당시 1위는 대통령인 시라크였고, 2위는 극우파 정당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이었다. 2차 투표의 전형적인 대립 구도였던 우파와 사회당 후보의 대립이 우파와 극우파의 대립 구도로 바뀐 것이다. 사회당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극우파의 승리를 막기 위해 좌파 정당인 사회당이 시라크를 지지해야만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사회당은 시라크를 지지했고, 좌파의 정체성은 위기에 빠졌다. 결국 총선의 승리는 우파 것이었고, 사회당을 비롯한 좌파는 긴 침체기로 들어서게 된다. 2007년 대선은 잔뜩 위축된 사회당의 완패로 끝났다. 사르코지는 특유의 선동적 정치술을 동원해 사회의 위험요소를 부각시켰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2005년에 일어난 수도권 위성도시 젊은이들의 반란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충분했다. 프랑스 국민은 이 선동에 호응해 안전과 안정을 선택했다. 2002년 대선이 극우파에 대한 공포가 지배한 선거였다면, 2007년 대선은 낙후된 위성도시의 젊은 실업자와 이민노동자들에 대한 공포로 점철된 선거였다. 이어진 총선에서 낙승한 이후, 좌파 진영의 베르나르 쿠슈네르가 외교부 장관으로 입각하면서 사회당을 위시한 좌파의 정체성은 다시 동요한다. 사회당은 난파선이었고, 실제로 많은 선원이 배를 포기하면서 사회당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니콜라 사르코지 정권은 실제 정치적으로 승리하고 있었다. 그의 임기 중에 사회당을 비롯한 좌파는 대안적인 정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 집안에 산적한 문제들을 처리하기에도 버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르코지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 밀어닥친 금융위기였다. 갑자기 밀어닥친 2008년의 금융위기는 전세계를 강타했고, 그 여파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금융위기의 영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고, 유럽연합의 재정위기로 이어졌다. 이 국제적 악재는 사르코지가 내건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에 큰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르코지는 실업률을 감소시키지 못했고, 재정 건전성을 높이지도 못했다. 국가 경쟁력은 하락했고, 신용등급은 추락했다. 그는 정치에선 승리했지만, 경제에선 패배한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2012년의 대선을 지배한 공포는 경제위기에 대한 공포였다. 결국 사회당 후보 프랑수아 올랑드의 승리는 좌파의 정치적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사르코지 자신의 패배였을 뿐, 승자는 없다. 그래서 프랑스 언론들은 이 승리를 가리켜 당연하지만 너무나 허약한 승리라고 표현했다. 대선에서 표차가 적은 탓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선거에서 진정한 승자가 없었다. 이번 프랑스 대선에서 승리에 가까운 결과를 얻어낸 이는 다름 아닌 극우파 후보 마린 르펜이다. 장마리 르펜의 딸로서 20%에 육박하는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이후 프랑스 정치의 주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경제적 파탄에 대한 공포와 함께, 이민노동자와 변두리 도시의 젊은 실업자들(사르코지는 내무부 장관 시절 이들을 '인간 쓰레기'라고 지칭한 바 있다)에 대한 공포는 여전히 프랑스 선거판을 지배하는 요인이었다. 사실상 또다시 승리한 것은 '공포'인 셈이다.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의 승리를, 그리스 총선에서 급진좌파의 부상을 유럽의 좌선회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오늘날 유럽에서 좌파와 우파의 구분은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 내거는 이념이 무엇이든, 오늘날의 유럽 각국은 유럽연합이라는 큰 틀에 점차 종속돼가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유럽연합이라는 느슨한 공동체를 움직이는 동력은 실제로 신자유주의적 세계경제 시스템이다. 현재 유럽의 의회주의적 정치 정당은 모두 이 시스템에 철저히 결박당한 상태에 있다. 결국 그들의 문제는 이 시스템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이다. 시스템이야말로 각 정당, 특히 집권당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저울이다. 이 시스템을 부정하는 정치는 당분간 유럽의 무대 중앙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현재의 의회주의적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정치에서 좌파와 우파는 교대로 정권을 차지할 것이다. 약간의 속도 조절은 있을 수 있지만, 유럽연합의 현행 시스템은 지속될 것이다. 유럽의 긴축정책이 어떤 식으로든 계속될 것이라고 많은 경제학자들이 전망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섣부른 예상이 난무하지만, 그저 예상일 뿐이다. 유럽연합의 미래, 나아가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유럽에서 좌우 구분 큰 의미 없어

물론 좌파의 정책과 우파의 정책은 절대 같을 수 없다. 사르코지와 올랑드가 서로 다른 전망으로 세상을 보는 것 역시 사실이다. 물론 정치인 특유의 제스처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대통령 취임 이후 올랑드의 행보는 부지런한 일꾼이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부지런함이 얼마나 가시적 성과를 가져올지는 불투명하다. 근본적인 변화는 차치하고, 국내 정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의 노력이 유럽연합이라는 큰 틀에서도 성과를 거둘지는 미지수이다. 당장 그가 주장한 신재정협약의 재협상이 가능하려면 올랑드는 거친 시험대를 통과해야 한다. 그것은 유럽연합의 판도를 바꾸는 일대 모험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 모험에 다른 유럽연합 지도자들이 발을 들여놓을지 의문이다. 국내 정치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린다고 해도 유럽연합이라는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올랑드는 그저 그런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프랑스인들은 다음과 같은 아주 오래된 정치 혐오성 발언을 되풀이할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다'(C'est le blanc bonnet et bonnet blanc). 올랑드로 대표되는 프랑스 좌파의 미래는 사르코지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의해 결정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 안에서 혁명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시들 대로 시든 좌파 사회당에서도 가장 오른쪽에 서 있는 것으로 여기는 올랑드가 그런 시도를 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작하기도 전에 실패를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불평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근본적 정치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오늘날의 의회민주주의 체제, 특히 좌우의 구분이 타협을 전제하는 제도적 대립으로 자리잡은 유럽 내 의회민주주의 체제에서 좌우의 구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다른 정치적 대안이 없는 현 시점에서, 그런 구분은 요식행위에 가깝다. 또 그저 선거에서의 편의적 구분에 불과하다. 그들은 모두 의회 정치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했다. 어떤 점에서 이는 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리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제도 안으로 들어가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는 그 제도를 혁파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제도 밖에서 온다. 오늘날 의회민주주의는 '밖의 힘'을 철저히 배제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 오로지 의회민주주의의 원칙을 수용하고, 그 규칙 안에 머무르려는 세력만이 오늘날 그 제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결국 의회주의 안에서 벌어지는 정치세력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권력의 교대라는 결과 이외에 다른 것은 상상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와중에 좌파의 승리가 무슨 효과를 낳을 수 있을까? 과연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좌파의 기본 이념이 현재의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다. 세법을 개선해 고소득자에게 중과세를 하고 동성애자의 결혼을 합법화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시스템을 바꾸기에는 턱없이 약한 것이 의회주의 좌파다. 물론 운 좋게 지금의 시스템이 위기에서 벗어나 좌파가 반사이익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변화로 나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철저한 의회제도의 당사자로서, 유연한 보수주의자들일 뿐이다.

실험정신 투철한 액티비스트가 되자

오늘날 시급한 것은 임박한 선거 결과를 두고 기대에 부풀거나, 남의 선거 결과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그런 기대나 부러움이 무엇 때문인지는 잘 알고 있다. 답답한 정치 현실, 정치가 외면하는 사람들의 삶, 짓밟히는 권리,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성공의 기회, 그럴수록 시들어가는 삶. 그러나 선거는 그런 현실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수단일 수 없다.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분명 자기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다. 그러나 심각한 것은, 그 결과에 실망한 수많은 사람들이 무기력증에 빠지는 점이다. 지난 총선 결과에 실망한 나머지 허탈감에 빠지거나, 역시 정치는 안 된다고 체념하는 순간 그 정치는 우리의 뒤통수를 더 세게 후려갈긴다. 그저 멍하니 다음 선거를 기다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우리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결코 '다음 선거'가 아니라, 다양하고 창조적인 정치적 실험이다. 이미 수많은 사례를 통해 철저하게 증명된 것처럼 선거는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삶의 결에 약간의 변화는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선거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깨끗이 인정해야 한다. 선거는 정치에서 지극히 부차적인 수단이다. 정치의 가장 중요한 계기는 전혀 다른 곳에 있다. 의미 있는 정치는 현재 상태를 뛰어넘는 정치적 시도, 과감한 실험, 미증유의 모험들 속에서 나온다. 시도와 실험, 모험이 시작되는 지점은 다름 아닌 협력과 연대다. 경쟁을 통한 적자생존만이 유효한 삶의 원칙으로 간주되는 오늘날, 협력과 연대의 실험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 협력과 연대가 바로 자유와 평등을 가능하게 하기에, 이는 우리가 다시 출발해야 하는 지점이다. 그 과정을 통해 삶을 고민하는 모든 사람은 가장 열정적인 액티비스트가 된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유권자이기보다는 실험에 투철한 정치적 액티비스트가 될 때, 새로운 희망은 비로소 우리 앞에 솟아오를 것이다.

글•서용순 성균관대 강사.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알랭 바디우의 지도 아래 마르크스주의와 프랑스 현대 철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청소년을 위한 서양철학사>(두리미디어)를 썼으며, <철학을 위한 선언>(알랭 바디우·도서출판 길)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