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창(窓), 세계박람회

2012-06-12     주강현

'2012 여수세계박람회'가 열리고 있다(5월 12일~8월 12일). 산업혁명 이후 세계 산업자본주의 발전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세계박람회의 탄생 동기와 이데올로기를 다음호까지 두 차례에 걸쳐 짚어본다.

세계박람회가 현재 여수에서 열리고 있다. 박람회장을 향해 하행 열차를 타기 전에 도대체 세계박람회란 무엇이며, 왜 전세계를 돌며 개최하는지, 그 정체는 무엇인지 등을 잠시 생각해본다.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세계박람회의 뿌리·족보·원조에 관한 역사와 궤적이다.

세계박람회가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을 만든 사람들조차 놀라고 말았다. 세계박람회란 형식과 내용은 고스란히 자본이란 진정한 '괴물'이 만들어낸 것이지, 어떤 기획가나 연출가의 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계박람회는 국가가 조직한 조직위원회에서 준비하고 총괄해나가는 것으로 여기지만, 여전히 자본이란 괴물이 버티고 있다. 세계박람회야말로 '자본의 꽃'이다. 19세기 백과사전에서 산업(Industrie)은 '욕구'를 의미했다. 월터 베냐민은 근대성에 관한 지적 탐험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에서 '산업-욕구'를 지적하며 욕구를 통한 근대 프로젝트를 그려냈다. 산업-욕구는 달리 말하면 자본의 욕구며, 자본주의의 사적 전개 과정이었다.

세계박람회를 만든 자본이라는 근대의 괴물

산업이 욕구와 결부되어 있음은 지당했다. 자본주의는 욕구, 그것도 역사상 유례없는 물질에 대한 욕구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욕구는 자본주의 물질문명을 빚어낸 동력이었다. 페르낭 브로델의 표현을 빌리면 물질생활 혹은 물질문명은 불투명한 영역, 흔히 기록이 불충분해 관찰하기 힘든 영역이 시장 밑에 펼쳐져 있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으며 어마어마한 규모로 존재하는 기본 활동의 영역이었다. 세계박람회을 조직·전시·구경하는 일련의 행위는 바로 자본적 활동이었으며, 욕구를 매개로 한 근대적 프로젝트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흥분을 이어받아 최초로 '파리산업박람회'가 개최된 이래 파리에서는 거듭 산업박람회가 열렸다. 박람회 형식의 유럽 등판은 파리 샹드마르스에서 개최된 국내 산업박람회(1798)였다. 그러나 이웃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동안 프랑스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뒤처지고 있었다.

작지만 비교적 장기 지속적으로 이어진 '영국박람회'의 끈끈한 지속력은 마침내 박람회의 결정판을 만들어냈다. 그 결정판은 건축가 조지프 팩스턴의 수정궁으로 유명한 '1851 런던만국박람회'였다. 열강에 의한 '박람회의 정치학'이 세계 체제 지배와 운영을 위한 특별한 형태로 제시되던 절묘한 시점에, 박람회란 제전 못지않게 대영제국의 위상을 내외에 과시하는 제전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제 세계박람회는 상품과 생각의 교환에 기초한 당대적 희망의 횃불이 되었다. 당대를 풍미하던 희망은 자본주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다. 전세계에서 상품·문화·생각 등을 한 장소에 모아놓다보니 세계가 더욱 좁혀졌다. 상품은 더 이상 국지적·국내적 범주에 머물지 않았으며 세계로 소통했다. 박람회는 세계를 한 장소에서 현현시키는 자본주의 제의 공간이 되었다.

박람회는 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사람들은 세계를 직접 가보지 않고도 상품을 통해, 나중에는 다양한 볼거리와 각국의 전시관과 전시 기법을 통해 세계 여행을 대체하는 대리만족이 가능해졌다.

세계박람회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명을 하나의 구상으로 하여 인류에게 제시하는 새로운 문명의 미디어로 변모해갔다. 자본주의의 물질문명은 분명히 이전 시대와는 다른, 질과 양 면에서 다른 차원이었다. 유럽은 세계박람회라는 근대적 형식으로 당대의 세계 체제를 표현하려 했다.

이같은 박람회의 미래적 속성은 자본주의의 속성에 기인한다. 자본은 언제나 미래의 확신과 사회진보의 불멸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수세계박람회 현장에서 '살아 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이란 슬로건을 하나의 미래적 유토피아로서 글로벌 어젠다로 외치지만, 정작 바다가 죽어가고 인간의 탐욕이 그칠 줄 모르는 현재 상황에서 디스토피아의 그림자는 박람회장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세계박람회는 (늘 그렇듯) 희망을 노래하게끔 되어 있고, 그 바탕에는 자본주의가 노래하는 미래 비전의 유토피아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박람회의 구경꾼, 즉 박람회를 관람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대체로 박람회 연구에서 노동자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간과함은 잘못되었다. 노동자와 구경꾼, 노동자와 소비자, 노동자와 노동운동의 관계야말로 박람회의 또 다른 재인식이기 때문이다.

최초였던 1798년 파리 샹드마르스 박람회는 '노동자계급을 즐겁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에서 개최되었으며, 실제로 노동계급에게는 '해방의 축제가 되었다. 노동자계급이 상품의 고객으로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박람회가 개화될 당시에는 도시에서 오락산업의 틀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산업혁명은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도시 환경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런던에서 첫 박람회가 열리던 1850년대에 불안해 보이는 철교와 넓은 터널 시스템,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공장지대 등 새 체제의 징조들이 영국의 도시 전역에서 확연히 나타났다. 19세기 중반 낙관주의가 확산됐고, 이제는 영국의 서민조차 기계화의 혜택을 누리기 시작했다. 먼저 노동조합이 성장해 임금이 올랐다. 노동계급 소비자들은 이전에는 구입하고 싶다는 희망조차 품을 수 없던 스타킹이나 조리기구를 구입하게 되었다. 여전히 하늘은 오염되어 있고 추하고 끔찍한 빈민굴이 존재했지만, 황량한 도시는 인류의 운명을 개선하는 발명품 덕분에 지성의 온상으로 변했다. 세계박람회는 이같은 절묘한 시점에 개최되었다.

동력의 양대 축,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1851년 런던만국박람회 반대론자들은 사회적 선동가가 몰려오고 외국 도망자와 도적, 부랑자가 생기는 것을 걱정했다. 직공계급이 잠재적 소요자로 예상되었으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오히려 전시장에 매료당했다. 노동자들은 박람회장에서 근대를 예감했다. 도쿄대의 요시미 순야는 런던만국박람회가 열리던 때를 '혁명은 먼 옛날의 일이 되는 순간'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수정궁의 전시품 사이를 걸어다니는 600만 명의 군집은 런던만국박람회 직전인 1848년의 반란하는 혁명적 군집이 아니었다. 런던에는 초과밀 빈민가가 확산돼가고 있었다. 거리 모퉁이 곳곳에 날품팔이와 예인, 항만 노동자, 철도 인부, 방랑자, 거지, 매춘부, 도둑들의 세계가 숨가쁘게 헐떡이고 있었다. 그런데 일부라 하더라도 상층계급과 중산층계급이 아닌 분명히 상당수 노동자가 수정궁을 찾았다는 점에서, 그들은 머지않아 계급의 경계선을 넘어선 소비자로서 비록 맹아적이지만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혁명하는 군중'은 경제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소비 대중'으로 변모해갔다. 런던만국박람회와 그 상징적 기념물인 수정궁은 이런 국민 생활의 전환기에 등장해, '풍요로움'을 어슴푸레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의 신체를 새로운 욕망의 메커니즘 속으로 접속시킨 것이다.

이런 시대적 조건에서 국제 노동운동, 즉 영국과 프랑스 노동자의 선험적 접촉이 이루어졌다. 1851년 런던만국박람회의 1차 노동자 파견단, 1862년 런던세계박람회에서는 750명에 달하는 2차 노동자 파견단이 박람회를 참관했다. 런던만국박람회에는 기업가가 추천한 노동자도 몇 명 국비로 런던에 파견됐다. 독립적인 파견단도 있었다. 1855년 제2차 파리세계박람회 때는 수도에서든 지방에서든 노동자 파견단을 보내는 것을 전면 금지했다. 박람회를 기화로 노동자들이 조직을 결성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1862년에 이르러 프랑스 국내 정치 정세의 변화에 따라 다시 노동자 파견을 허용했다.

혁명하는 군중에서 소비하는 대중으로

그런 조건하에서 국제노동자협회는 1862년 런던세계박람회에서 최초로 창립되었다. 박람회장이 국제노동자협회의 산실이었음은 '산업-노동-노동자-노동운동'이란 관계에서 볼 때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영국과 프랑스 노동자가 처음 만나서 대화하고 상호 계몽을 도모했다. 런던에서 가진 최초의 대집회에서는 폴란드 해방을 지지하는 선언문도 채택한다. 노동자들이 노동문제 이외에 폴란드의 민족해방까지 거론해 세계 노동운동사의 극적인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그러나 자본의 공세는 강고했다. 1867년 파리세계박람회에 뿌린 40만 장의 무료 입장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계급에게 박람회를 보이는 것은 산업 계몽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들은 단순 구경꾼에 머물지 않았다. 1867년 7월 21일에서 1869년 7월 1일까지, 세계박람회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파견단들은 여전히 논의를 계속했으며, 노동자 의회도 여전히 회기를 이어갔다. 그럼에도 박람회를 통한 대중의 자본적 교화는 조직적으로 강화돼나갔다.

세계박람회는 우주를 근대화한 것으로 불리기도 한다. '근대화된 우주'란 물론 상품의 세계이다. 우주는 당연히 넓고 많고 크다. 그런 우주의 삼라만상을 잘게 쪼개고, 분류 짓고, 규격을 나누고, 등급을 평가해 상품이란 세계를 탄생시킨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류가 중요했다. 마침내 1851년 런던만국박람회는 전시물을 6개 범주로 나누어 30개 전시실에 진열했다.

전시와 분류의 필요성을 명료하게 드러낸 것은 1867년 파리와 1873년 오스트리아 빈세계박람회의 대회장 구성 계획이다. 1867년 파리박람회 기획자 르플레는 유토피아적 비전에 이끌렸다. 그는 국제적인 상품과 지식의 교환이 인류에게 보편적 조화를 가져다줄 것으로 믿었다. 레이는 샹드마르스 주전시관을 거대한 백과사전으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방문객으로 하여금 인간이 이룩한 업적의 모든 요소를 마주하게 배려했다.

박람회가 이끄는 자본의 글로벌 스탠더드

세계박람회는 상품이라는 '물신'(物神)을 위한 순례지이자, 19세기 대중이 근대의 상품 세계와 만난 장소가 되었다. 상품이라는 '물신의 영장(靈長)'은 다양하게 연출되었으며, 이런 디스플레이는 백화점 쇼윈도 속으로 확산돼갔다. 근대적 상품과 근대적 욕망을 전시하는 공간인 박람회를 통해 살포된 상품의 소비 욕망이 백화점을 통해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박람회의 오락장, 유원지, 군집장소 등의 성격도 백화점과 동시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리의 새 대로변 보도에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신흥 백화점과 카페로 인해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늘어난 술집과 서커스, 음악회장·극장·오페라극장은 대중오락에 열광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상품 자체가 볼거리가 되는 위력이 잘 드러나는 곳이 신흥 백화점과 박람회였다. 세계박람회는 상품의 교환 가치를 끝없이 미화했다.

박람회와 더불어 본격화한 오락산업은 인간을 상품 높이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쉽게 기분전환해주었다. 사람들은 나 자신으로부터의 소외와 타인으로부터의 소외를 즐기는 가운데 오락산업의 조작에 몸을 맡겼다. 상품을 옥좌에 앉히고 상품을 둘러싼 빛이 기분전환을 가져다주었다. 대중은 유원지의 롤러코스터나 회전목마, 무한궤도 등을 타고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하지만, 이들의 태도는 순수한 반동에 불과할 뿐이다. 그들은 정치 선전뿐만 아니라 산업적 선전에 복종하는 훈련을 받는 것이다.

박람회가 상품 순례지로 기능하는 가장 큰 변화는 박람회장의 신상품인 과학기술과 기업관에서 두드러지게 확인되었다. 여수 박람회장에서 만나게 되는 기업관의 우월함과 자본의 탄탄한 흐름을 만끽하면서, 지난 박람회의 역사가 아직 종료되지 않았음을 감지한다.

글•주강현 민속학자, 제주대 석좌교수. 최근 <세계박람회 1851~2012>를 펴냈다. <유토피아의 탄생: 섬 이상향 이어도의 심성사>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