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민족운동의 아버지 메살리 하지의 비극

2012-06-12     알랭 뤼시오

알제리 민족주의 역사에 한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알제리 민족운동의 아버지 아메드 메살리, 일명 '메살리 하지'는 어찌하여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들로부터 반박과 부정의 대상이 되었을까? 식민체제를 개혁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독립투쟁이라는 목표를 최초로 제시한 그였거늘.

튀니지의 하비브 부르기바와 모로코의 무하마드 벤 유수프(무하마드 5세)는 독립투쟁의 빛나는 주역으로 집단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 알제리의 아메드 메살리 하지의 존재는 오랫동안 은폐의 대상이 돼왔다. 최근 10~20년 전부터 그를 뒤덮고 있던 어두운 비밀의 장막이 조금씩 걷히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1926년 봄, 프랑스 '식민지 이주노동자' 조직 결성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던 프랑스 내 알제리 공산주의자들의 주도로 '북아프리카의 별'(ENA)이 창설됐다. 당시 압델카데르 하지 알리라는 인물이 프랑스공산당(PCF)의 식민지위원회에서 활발히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를 돕는 젊은 조직원 가운데 한 명이 메살리 하지였다.(1) 청년 메살리는 1927년 2월 브뤼셀에서 열리는 '세계피압박민족 반제국주의대회'에서 ENA의 활동을 소개하는 일을 맡았다. 국제회의 연단에 오른 연사가 식민지 알제리와 보호령 튀니지·모로코에 대한 독립을 요구하기는 그것이 처음이었다.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이 세 나라 중 한 나라가 독립을 이루려면 다른 두 나라가 그 나라의 해방운동을 지원해야 한다"고 메살리는 외쳤다.(2)

자치 획득이냐 무장투쟁이냐

ENA는 서서히 지지 기반을 확대해나갔다. 특히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알제리 이민자 사이에 폭넓은 지지자를 확보했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ENA는 공산당과의 결속 관계가 약화되기 시작했다. 메살리를 위시한 ENA 지도자들은 PCF와 대립하지 않으려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동안 전략적 차원에 의거해서만 민족주의 조직과 교류해온 PCF는 인민전선(1936~38년 집권한 프랑스 범좌파연합)의 등장 이후 국제보다 국내 차원에 더 역점을 두고 전략을 펼쳤다. 그때까지 PCF와 ENA는 자신들의 목적에 따라 상대를 이용하고 있었다.

인민전선이 등장하면서 PCF와 ENA의 갈등이 본격화됐다. PCF와 ENA는 사실상 추구하는 목표가 서로 달랐다. 식민지 문제에서 프랑스 좌파는 신중한 개혁 노선을 표방했다. 2만5천~3만 명의 알제리인이 무슬림 종교를 포기하지 않아도 시민권을 부여받을 수 있게 한 그다지 급진적이지 않은 성격의 블룸-비올레트 법안(1936년 레옹 블룸과 전 알제리 총독 모리스 비올레트가 입안)마저 의회 통과가 좌절됐다. 1939년 PCF는 '아직 형성 중에 있는 완성되지 않은 국가'라는 개념을 창안해냈다. 유럽민과 아랍·베르베르 민족이 융합된 용광로 속에서 한참 주조 중인 멜팅포트(Melting-pot) 국가라는 주장이었다. 한편 ENA는 알제리 민족이 자결권을 지녀야 한다는 기존의 화법을 고수했다. 메살리 하지는 "형제동포 여러분, 두 발 뻗고 잠들지 마십시오. 모든 투쟁이 끝났다고도 생각지 마십시오. 진정한 투쟁은 지금부터입니다"라고 경고했다.

프랑스 정부의 ENA 탄압이 시작했다. 본래 은밀했던 탄압 움직임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노골화됐다. 급기야 1937년 1월 26일 레옹 블룸 내각은 이적단체금지법에 의거해 ENA 해산 조치를 단행했다. PCF에서 알제리 문제를 담당하던 로베르 들로슈는 2월 12일자 <뤼마니테> 지면을 빌려 ENA 해산 조처에 대해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이것으로 ENA와 PCF는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메살리 하지와 동지들은 알제리인민당(PPA)을 창당했다. ENA와 달리 PPA는 프랑스에 그치지 않고 알제리까지 활동 영역을 확대했다. 그 결과 1937년 8월 27일 메살리 하지는 '해산 단체를 재조직'한 혐의로 체포됐다. 전형적인 식민지 통치 방식에 따라 재판이 집행된 뒤 PPA 창당의 주역 메살리 하지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이후 인생 37년 가운데(체포연도인 1937년에서 1974년 사망할 때까지의 기간) 무려 22년을 옥살이나 가택연금 상태로 보냈다. 제3공화국 말의 비시 정부, 제4공화국,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네 정권이 연이어 그의 신병을 묶어두다시피 했다.

메살리 하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피식민지 민족주의자들에게 내민 손길을 번번이 뿌리쳤다. 덕분에 그의 도덕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라도 되는지, 나치 정권이 패망한 바로 그날 알제리 콩스탕틴에서 비극적인 대학살(세티프 대학살)이 발생했다. 1945년 5월 8일, 연합군 승전 축하 행사를 틈타 벌어진 알제리인들의 독립 요구 시위를 프랑스 식민지 경찰이 과격 진압하는 과정에서 학살극이 발생했다.(3)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낸 콩스탕틴 대학살은 메살리가 이끄는 알제리 민족주의 조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직 내 소장 그룹들은 콩스탕틴의 대학살로 사실상 알제리 독립전쟁이 선포됐다고 판단했고, 무력항쟁을 위한 준비 태세에 돌입했다. 반면 메살리(당시 그는 알제리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는 여전히 자치 중심의 점진적 개화라는 전통적 시각을 고수했다. 그는 민중반란에 대한 호소를 '흰소리' 내지는 '어리석은 극좌 모험주의적 행태'로 치부했다.(4)

이같은 시각차는 1954년의 역사적 단절로 이어졌다. 알제리 민족주의 운동이 분열된 것이다. PPA(1946년 프랑스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된 PPA는 '민주자유 승리를 위한 운동'(MTLD)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를 창당한 메살리 하지 '당수'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제리 민족주의 운동은 메살리파와 중앙파(중앙위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중앙파로 불렸다)로 분파가 갈렸다.

특수조직(OS·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한 비밀조직) 출신의 강경 소수파가 당을 장악하고는 구체적인 무장봉기 계획을 밀어붙였다. 1954년 3월 23일 통일투쟁개혁위원회(CRUA)를 창설하고 무장봉기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그보다 앞선 2월 CRUA 창설자 9명 가운데 1명인 무스타파 벤 불라이드가 메살리를 찾아와 의견을 타진했다. 하지만 메살리는 이 '아마추어들'의 계획을 천시하듯 물리쳤다. 오늘날에야 당시 메살리 역시 1954년 11월 15일 무장봉기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대체 그는 어떤 신념에 근거해 무장봉기를 계획했던 것일까?).

본격화된 파벌투쟁

두 분파 사이에 경쟁이 본격화됐다. 양쪽 모두 추구하는 이상과 전략은 흡사했지만 시기적인 면에서 견해가 엇갈렸다. 두 분파의 이견은 그렇게 극복하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 가지 요인이 두 분파의 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먼저 프랑스는 당시 알제리 독립운동 정황을 파악한 프랑수아 미테랑 내무부 장관이 9월 당시 프랑스 사블르돌론 지역에 머물던 메살리에게 가택연금 조처를 내림으로써 그를 더욱 고립 상태로 몰아넣었다. 다음으로 CRUA의 근거지가 자리하고 있던 이집트에서는 1952년 7월 23일 집권한 가말 압델 나세르가 메살리 축출을 획책했다. 메살리가 아메드 벤 벨라를 비롯한 다른 젊은 민족주의자들에 비해 다루기가 수월치 않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벤 벨라는 1962년 독립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드디어 11월 1일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민족해방전선(FLN)이라는 낯선 이름이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순간이었다. 메살리는 알제리민족운동(MNA)을 창당해 금세 FLN과 경쟁 구도를 형성했다. 이는 사상 초유의 비극적 사건으로 이어졌다. 모든 역사 연구가에 따르면, 양 분파의 충돌을 먼저 야기한 쪽은 FLN이었다. 수십 년간 메살리파가 누려온 패권을 탈취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 FLN은 알제리 내 MNA 근거지들을 공격했다. 그 가운데 한 곳인 멜루자 마을에서는 1957년 5월 주민 315명이 학살됐다. 물론 프랑스는 이 사건을 정치적 선전에 이용했다.

프랑스에 있던 노쇠한 지도자 메살리는 이빨 빠진 고립 신세가 되었지만, 40년간의 오랜 활동 덕에 메살리파는 여전히 이민자 사회에서 높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FLN은 혁명이란 구상을 밀어붙이기 위해 1957년 이후 MNA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메살리의 엄숙한 호소(1957년 9월 1일, 메살리는 "우리 동포는 모두 동일한 목표를 위해 투쟁하고 있으면서도 나날이 암살과 범죄가 늘어나고 있다"고 경고했다)(5)에 따라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MNA도 결국 대응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역사가 질베르 메니에에 따르면, 알제리 전쟁(1954~62, 프랑스가 촉발했다)의 와중에 일어난 이 내전으로 프랑스에서만 4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6) 희생자는 세 부류에 똑같이 발생했다. FLN에 의한 MNA 희생자가 3분의 1, MNA에 의한 FLN 희생자가 3분의 1, 둘 중 어느 편도 들지 않은 알제리인 희생자가 3분의 1에 달했다.(7)

깨진 꿈, 마그레브의 단결

메살리파는 알제리에서는 1957년, 프랑스에서는 1959~60년을 기점으로 세력이 약화됐다. MNA가 더 이상 전투에 동원할 조직원이 없을 정도로 심하게 와해된 뒤에야 비로소 양 분파의 전쟁이 중단됐다. FLN이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1959년 드골 정권은 메살리에 대한 알제리 추방령을 풀기로 결정했다. 당시 파리 수도권의 샹틸리시 한 자그마한 집에 은신 중이던 메살리는 초라한 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자신의 민족을 파괴하기 위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프랑스 정부의 은밀한 보호 덕에 그는 목숨을 부지했다.

메살리가 생전에 추구한 두 가지 주요한 정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알제리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독립투쟁을 벌이는 과정과 더 나아가 평화를 회복한 뒤에도 마그레브의 세 민족이 함께 단결하는 것이었다. 1962년 그는 쓰라린 고통에 휩싸였을 것이 분명하다. 알제리는 독립을 쟁취했지만, 메살리 자신은 역사에서 소외되는 대가를 치렀다. 또한 메살리는 강력한 노동자 조직을 기반으로 한 이민자들에 의해 축적된 정치적 경험과 정치투쟁에 단련된 알제리를 건설하기를 꿈꾸었지만, 그가 꿈꾸던 알제리는 결코 실현되지 못했다. 아마 자신도 예감했겠지만, 메살리는 군사관료 계급이 권력을 독차지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생생히 지켜봤다. 1965년 6월 19일 우아리 부메디엔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알제리의 군사관료 독재 경향은 더욱 강화됐다. 현재 기록 중인 공식 역사는 새로운 지배자에게만 열광할 뿐, 메살리파가 알제리 민족주의 운동에 중대한 기여를 했다는 사실은 부인한다.

메살리 하지는 마그레브(알제리·튀니지·모로코 등의 지역을 지칭) 세 민족의 단결을 꿈꿨지만, 그가 꿈꾼 비전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독립을 쟁취한 부르기바의 튀니지, 무하마드 벤 유수프의 모로코, 벤 벨라의 알제리는 각자 제 갈 길을 갔다. 그리고 때로는 대립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메살리 하지는 두 번 다시 알제리 땅을 밟지 못한 채 1974년 6월 3일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글•알랭 뤼시오 Alain Ruscio 저서로 <백인의 신조: 프랑스 식민주의 의식구조에 관한 에세이>(콩플렉스 출판사·브뤼셀·1995)가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1) Messali Hadj, <회고록, 1898~1938년>, 장클로드라테스 출판사, 파리, 1982. Benjqmin Stora, <메살리 하지>, 르시코모르 출판사, 파리, 1982.

(2) <리크람>, 1927년 10월. Mahfoud Kaddache, <알제리 민족주의 역사>, 제1권, 파리메디테라네/EDIF 출판사, 파리-알제, 2003년 인용.

(3) Mohammed Harbi, '전쟁은 세티프에서 시작됐다', '알제리, 1954~2011년: 역사와 희망', <마니에르 드 부아르>, 2011년 2·3월.

(4) Benjamin Stora, op cit.

(5) Ibidem.

(6) Gibert Meynier, <FLN의 내부사>, 파야르 출판사, 파리, 2002.

(7) Paul-Marie Atger, '리옹 알제리 민족주의 운동: 알제리 전쟁 동안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 <Vingtième siècle, Revue d'Histoire>, 104호, 2009년 10~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