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주도권을 노리는 하마스

10월 7일 이스라엘 공격, 그 후

2024-01-31     레일라 쇠라 | 아랍정책조사연구소(ACRPS) 연구원

시간이 흐르면서 하마스(Hamas)는 군사력 강화, 해외 지도부를 뛰어넘은 가자지구 지도부의 세력 강화라는 두 가지 큰 변화를 겪었다. 10월 7일 하마스가 감행한 유혈 공격은 팔레스타인 민족의 유일한 수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전투가 끝난 후 정치적 핵심 역할을 차지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에서 가장 놀라운 점이자, 가장 간과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분쟁이 다름 아닌 가자지구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지난 10년 동안,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의 주요 전장이 아니었다. 이스라엘군은 2014년 ‘프로텍티브 엣지(Protective Edge)’ 작전을 비롯해 가자지구를 반복적으로 공격했고 하마스는 철저히 방어에 집중했다. 산발적인 로켓포 공격은 유지했지만 하마스는 2010년 이스라엘이 도입한 고도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인 ‘아이언 돔(Iron Dome)’을 뚫지는 못했다. 가자지구는 완전히 봉쇄됐고 세상과 단절됐다. 

 

이스라엘이 판단착오를 한 가자지구

분쟁이 가장 두드러진 지역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인 듯했다. 유대인 정착촌이 확장되고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대가 팔레스타인 마을을 공격하면서 서안지구는 성지 예루살렘과 함께 세계 언론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하마스와 여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단체들은 서안지구를 저항의 중심지로 여겼다. 이스라엘 당국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10월 7일 오전 하마스가 공격을 개시했을 때, 이스라엘군은 오로지 서안지구만 주시하고 있었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마스의 공격은 이런 가정을 철저히 뒤엎었다. 가자지구의 하마스 부대는 에레즈 국경 검문소를 폭파하고 보안 철조망을 뚫은 후 치명적인 급습을 감행했다. 민간인과 군인 수백 명을 사살하고 240명을 인질로 잡은 하마스는 물론 대대적인 이스라엘의 군사적 대응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보복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이스라엘이 펼친 ‘아이언 소드(Iron Sword)’ 작전으로 최소 2만 명이 사망했다. 그중 대다수는 민간인이었다.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인 가자지구는 폐허로 변했다.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으로 세계 언론과 국제사회의 관심이 다시 가자지구에 쏠렸다. 수년간 잊혀졌던 가자지구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중심으로 복귀했다. 

가자지구가 구심점으로 떠오르면서 하마스 지도부에 관해 많은 의문점이 생겨났다. 하마스에서는 최근까지도 전통적인 지도자들이 핵심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들은 요르단, 시리아를 거쳐 2012년부터는 카타르에 피신 중이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이제 옛말이 됐다. 야히아 신와르가 하마스의 가자지구 지도부를 장악한 2017년 이후 하마스의 무게 중심은 가자지구로 이동했다. 해외 지도부들로부터 더 큰 독립성을 확보한 신와르는 전략을 수정해 하마스를 전투조직으로 변화시켰다. 신와르의 목표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고 가자지구를 전반적인 팔레스타인 투쟁과 재연계하는 것이었다. 

즉, 서안지구와 예루살렘, 특히 긴장감이 고조되는 알아크사 모스크 주변의 상황에 더욱 단호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는 가자지구를 지도에서 사라지게 하기는커녕 다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여건을 조성했다. 정치 및 군사조직인 하마스에는 네 개의 권력의 축이 존재한다. 가자지구, 서안지구, (다수의 고위급 인사가 수감되어 있는) 이스라엘 교도소 그리고 정치국을 좌지우지하는 해외 지도부를 말한다. 

1989년 제1차 인티파다(Intifada, ‘봉기’를 뜻하는 아랍어로 팔레스타인의 반이스라엘 투쟁을 지칭) 당시 이스라엘의 탄압으로 하마스 지도자들은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로 흩어졌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가 하마스의 주요 본부 역할을 했다. 이들은 해외 피신 중에도 가자지구에 본부를 둔 하마스의 군사조직 이즈 알딘 알카삼 여단(IDQB)에 대한 통솔권을 유지했고, 외국 지도자들과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많은 기부·자선단체들의 후원을 받았다.

1990년대 초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이후 이란 역시 하마스의 해외 지도부를 지원했다. 이 시기 하마스에서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던 이들은 해외 체류 지도자들이었다. 정치국 수장 칼리드 마슈알을 비롯한 일부 하마스 지도자들은 해외 망명 생활 중 세력을 키웠다. 이들은 요르단과 시리아에 머물며 하마스의 의사결정 과정을 지배했다. 팔레스타인 영토 전역의 하마스 부대와 대원들은 해외 지도부의 전략 방침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를 수긍해야 했다.

 

하마스 창시자의 피살 … 알카삼 여단의 부각 

2004년, 하마스의 창시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셰이크 아흐메드 야신이 이스라엘에 의해 암살됐다. 이 사건 이후 해외 지도자들의 우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가자지구 지도부는 몇 가지 요인에 힘입어 영향력을 확대했다. 2006년 가자지구 선거에서 승리한 하마스는 2007년 6월 가자지구 전역을 장악하고 정부를 구성했다. 하마스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봉쇄를 한층 더 강화했다. 가자지구의 새 ‘주인’이 된 하마스는 불법 지하터널을 활용한 무역으로 수입원을 확보했다. 이로써 가자지구 지도부는 해외 지도부의 재정 지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수 있었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중 시위 그리고 특히 시리아 봉기로 하마스 지도부 간 권력 이양에 가속도가 붙었다.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자 다마스쿠스의 하마스 지도부는 우선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과 수니파 반군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다. 시리아 정권을 전적으로 지지하라는 이란의 명령을 거부한 이들은 2012년 2월 결국 시리아를 떠나야 했다. 하마스의 2인자 무사 아부 마르주크는 이집트 카이로로 옮겨갔다. 카타르 도하로 이동한 칼리드 마슈알은 알아사드 정권과 결탁한 이란 정부, 헤즈볼라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 결과 2012년 여름 그리고 2013년 5월 알카삼 여단이 충성파 시리아군, 헤즈볼라와 쿠사이르 전투에서 맞붙었을 때 이란은 하마스에 대한 재정 지원을 축소했다. 연간 1억 5,000만 달러에 달했던 이란의 하마스 지원금은 7,500만 달러 미만으로 반 토막 났다. 

이란과 불화를 겪고 역사적인 지도자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해외 지도부의 영향력은 약화됐다. 가지 하마드 하마스 대변인은 2013년 5월 가자지구에서 진행한 인터뷰 당시 “시리아와의 단절은 가자지구 지도부에 상당히 이롭게 작용”했음을 인정하며 “가자지구 지도부가 해외 지도부를 전복시켰다는 말은 아니지만 양측의 관계가 이제 좀 더 동등해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가자지구 지도부가 가진 또 다른 이점은 시리아와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견고한 관계를 유지해 온 점이다. 특히 마르완 이사 부사령관을 비롯한 몇몇 알카삼 여단 지휘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란을 방문했다.

알카삼 여단의 독립성 확대는 2006년 이스라엘 군인 길라드 샬리트 납치 사건 때 이미 입증됐다. 당시 납치 작전을 주도한 이는 알카삼 여단 총사령관 아흐메드 알자바리였다. 그는 2011년 하마스 대변인 가지 하마드와 함께 샬리트의 석방을 협상했고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된 팔레스타인인 1,027명을 샬리트와 맞교환하기로 이스라엘 정부와 합의했다. 다수의 근동지역 정세 관측통들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 합의를 하마스의 승리로 평가했다. 1년 뒤 이스라엘은 알자바리를 사살하고 ‘방어 기둥’으로 명명한 새로운 군사 작전을 개시했다.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가자지구 공격은 알카삼 여단의 세력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알카삼 여단은 전장과 단절된 채 카타르에서 호화로운 삶을 누리는 것으로 의심되는 해외 지도부와 달리 대(對)이스라엘 항전의 최전선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2017년 하마스 내부 선거 결과 알카삼 여단의 영향력을 증명하듯 소속부대원 3인이 정치국에 입성했다. 

이스라엘의 가혹한 봉쇄 역시 가자지구에 저항과 희생이라는 상징적 가치를 부여했다. 하마스 지도자들은 가자지구의 상징성을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화하는데 이용했다. 2012년 하마스 창설 25주년을 기념해 칼리드 마슈알은 생애 최초로 가자지구를 방문했다. 그는 ‘영광스러운 순교자들’과 ‘영원한 가자’의 어머니들에게 바치는 연설에서 “가자를 처음 방문했지만, 나는 가자로 되돌아왔다고 말하고 싶다. 마음은 항상 가자와 함께였기 때문”이라고 외쳤다.

 

하마스 지도자 신와르, 민중 시위 적극 활용

하지만 가자지구가 하마스 내부의 권력 구도에서 핵심적인 입지를 차지하게 된 것은 2017년부터다. 2017년, 칼리드 마슈알은 가자지구 지도부의 이스마엘 하니예에게 정치국장 자리를 내줬다. 정치국 수장 교체로 하마스는 이란과의 관계를 회복했다. 이때부터 이란은 해외 지도부를 거치지 않고 가자지구와 직접 대화하기 시작했다. 전적으로 이집트의 선의에 의지해야 하는 가자지구 출입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하니예도 결국 2019년 12월 카타르 도하로 옮겨갔다. 하니예가 가자지구를 떠나자 그와 영향력 다툼을 벌이던 야히아 신와르 전 알카삼 여단 사령관이 빠른 속도로 부상했다. 

신와르는 1980년대부터 알카삼 여단의 존경을 한몸에 받아 온 인물이다. 이스라엘 감옥에 22년간 투옥됐던 그는 하마스의 새로운 옥중 지도부 구성에 기여했다. 2011년 10월, 길라드 샬리트와 팔레스타인 죄수 맞교환으로 석방된 신와르는 팔레스타인 무장 투쟁의 사전 예방적 개념, 즉 이스라엘이 협상에 임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것은 무력행사뿐이라는 신념을 구현했다. 가자지구의 강자로 부상한 그는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는 가자지구를 장악한 하마스의 영향력을 이용해 이스라엘 정부의 양보를 받아내기로 결심하고 알카삼 여단의 힘을 키워나갔다. 일부 분석가들에 의하면, 2000년대 1만 명에 불과했던 알카삼 여단의 전투 대원은 2020년 3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하마스 내부에서 신와르의 입지 강화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한 인물은 이스마엘 하니예의 고문을 맡았었던 아흐메드 유세프 뿐이다. 유세프는 하마스의 의사결정권이 전적으로 팔레스타인 국내로 이양될 경우의 파장을 우려하며 해외 지도부가 최종 결정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세프는 또한 신와르와 알카삼 여단의 밀접한 관계가 전반적으로는 하마스에 해로운 요소로 작용하고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테러리스트들의 소굴로 간주하는 추가적인 구실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신와르는 현실감각을 지닌 지도자임을 입증했다. 2018~2019년, 그는 가자지구 국경 철조망 앞에서 ‘귀환 행진’ 시위를 조직해 이스라엘의 봉쇄를 일부 완화시켰다. 하마스는 매주 수만 명의 가자 주민이 국경에 모여 봉쇄에 항의하는 이 민중 시위를 전략적으로 활용했다. 이스라엘군 저격수들이 비무장 시위대에게 총구를 겨누는 동안 알카삼 여단은 이스라엘 영토를 향해 로켓포를 쏘고 방화 풍선을 날려 보냈다. 이런 전략적 압박에 굴복한 이스라엘 정부는 마침내 국경 일부를 제한적으로 개방하고 카타르가 가자지구 공무원 급여용으로 지원한 자금의 동결을 해제했다. 

이런 성과에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거주하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들은 하마스가 권위주의적인 통치에 대한 비판을 잠재울 목적으로 ‘귀환 행진’을 이용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무력을 사용한다고 비난했다. 2021년, 신와르가 신뢰를 회복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해 동예루살렘의 셰이크 자라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추방당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에 항의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폭력 진압했다. 

5월 20일, 알카삼 여단은 아슈도드, 아슈켈론, 예루살렘, 텔아비브를 향해 로켓포 수천 발을 발사했다.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에서는 많은 아랍인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몰려나와 추방당한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했다. 이를 계기로 하마스는 가자지구 외부의 팔레스타인인들과의 관계를 재건하고 예루살렘의 수호자를 자처할 수 있게 됐다. 이때부터 예루살렘과 서안지구에서 열리는 모든 집회에서는 알카삼 여단의 대변인 아부 오베이다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모로코, 수단 등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착수하면서 가자지구 국경 너머에서 하마스의 영향력이 강화됐다.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합병 위협이 점점 더 현실화되는 분위기 속에서 미국이 중재한 중동 화해 협력 전략인 아브라함 협정 프로세스에 동참한 아랍 국가 지도자들은 서안지구의 운명에 일말의 관심도 없음을 입증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랍 국가들의 이런 선택을 배신으로 간주하며, 서안지구와 예루살렘 점령 피해자들의 유일한 수호자는 하마스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마스의 언론 캠페인, 외부세계에 참상 전달 

2021년 이후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알아크사 모스크 위협에 분노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편에 서기도 했다. 예루살렘에 있는 이 모스크는 팔레스타인의 국가적 상징이다. 이런 맥락에서 ‘알아크사 대홍수’ 작전으로 불리는 하마스의 유혈 공격은 가자지구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영토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한다는 논리와 일치한다. 이런 점에서 지난 10월 7일 특공대를 투입해 이스라엘을 공격한 하마스의 결정이 해외 지도부의 개입 없이 오직 가자지구 내부 지도부에 의해 내려졌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하마스는 이번 전쟁 초기부터 가자지구가 팔레스타인 투쟁의 주축임을 강조하고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도 외부세계와 소통하는 미디어 전략을 전개했다. 이스라엘군의 대대적인 가자지구 폭격, 지속적인 인터넷 차단, 통신 인프라 파괴에도 불구하고 하마스는 이스라엘군의 성명을 반박하는 방송을 멈추지 않았다. 하마스는 폭격의 참상이 담긴 영상을 연일 내보내고 민간인을 ‘인간 방패’로 사용하거나, 병원 내부에 ‘테러 기지’가 숨겨져 있다는 이스라엘의 발표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이스라엘의 반(反)팔레스타인 선전에 제동을 걸었다. 

가자지구 지도부가 주도한 이런 언론 캠페인에 도하의 하마스 지도부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008~2009년 이스라엘의 ‘캐스트리드(Cast Lead)’ 공세 때 시리아 지도부의 정치국장이 언론 발표를 담당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다. 이제 이 역할은 가자 현지의 아부 오베이다 사령관의 몫이 됐다. 신와르를 비롯한 가자지구 지도부는, 자신들이 포격 세례를 받는 동안 카타르에서 호사스러운 삶을 누리는 해외 지도부를 경멸했다.

하지만 레바논의 하마스 지도부만은 예외였다. 이들은 가자지구 지도부의 정보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마스 외교부장을 역임한 현 정치국 핵심 인사, 우사마 함단은 베이루트에서 연달아 기자회견을 열고 이스라엘의 담화를 반박했다. 신와르와 알카삼 여단의 밀접한 관계를 우려한 하마스 지도자들과 달리 함단은 정치와 군대의 융합을 당연한 것으로 평가하며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진전시킬 유일한 방법은 무력 동원이라는 신념을 공유했다. 함단은 2017년 베이루트에서 본지와 인터뷰 당시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라빈, 바라크, 페레즈 총리 모두 군벌 출신 정치인”임을 지적하며 이 점에서는 하마스와 이스라엘 지도자들 간에 공통점이 있다고 조롱 섞인 어조로 말했다. 

성명을 발표할 때마다 함단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하마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팔레스타인인 해방을 위한 보편적 투쟁으로 인식시키려 공을 들였다. 그는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군을 공격함으로써, 다수의 팔레스타인 수감자가 석방되고, 이스라엘 지상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레바논 접경 도시와 가자지구 인근 일부 지역에서 이스라엘 주민이 철수하는 등의 성과도 거뒀다는 것이다. 함단은 또한 이스라엘이 휴전, 이스라엘 인질과 팔레스타인 수감자 맞교환에 합의한 것도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에서 펼친 작전이 난관에 부딪혔기 때문이며, 12월 1일 이스라엘이 폭격을 재개한 것은 이스라엘군이 전쟁 초기에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일부 아랍 국가들의 관영 매체, 특히 전통적으로 하마스에 적대적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매체는 이런 발표에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아부 오베이다와 함단의 성명들이 팔레스타인인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의 아랍인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현재 이들은 전쟁 전보다 훨씬 더 하마스에 공감하고 있다. 10월 7일 공격으로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무적이 아님을 입증했으며 무기력한 모습으로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비난을 받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더욱 약화시켰다. 

‘알아크사 대홍수’ 작전은 하마스의 잔학 행위와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렸다. 이스라엘의 파괴적인 침공을 유발한 10월 7일 공격은 가자지구에 다시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 실상을 국제사회에 상기시켰다. 이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나크바’ 트라우마를 자극한 가자지구 참사

가자지구 주민이 겪고 있는 시련은 팔레스타인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공보부는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 주민을 남부 해안지대로 강제 이주시킬 계획을 발표하며 이를 인도주의적 보호 조치로 포장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또한 시나이반도 강제이주 계획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가자지구 주민들은 1948년 시작된 오랜 추방 생활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폭탄 세례를 받을 것인가, 강제이주를 받아들일 것인가? 너무나 잔인한 선택이다. 

더군다나 가자지구 주민 대부분은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가족 출신이다. 난민 2~3세대인 이들의 눈에는 역사의 반복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이들 중 수십만 명은 가자시티를 떠나길 거부했다. 이들에게 제2의 나크바(Nakba, 대재앙이라는 뜻의 아랍어.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선언 후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추방당한 사건-역주)를 피할 방법은 가자에 남는 것뿐이다. 그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말이다. 

7일간의 휴전 후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폭격을 재개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다양한 ‘전후’ 시나리오들을 계속 검토해 왔다.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참여하는 시나리오를 비롯한 여러 사안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은 서로 다른 견해를 보였지만, 단 하나 ‘하마스 박멸’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목표는 하마스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세계 최강의 군대인 이스라엘군이 학살에 가까운 공격을 두 달 넘게 퍼부었지만, 하마스가 완전히 제거됐다는 증거는 없다. 

하마스는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해외 지도부와 아랍 동맹국 그리고 이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특히 이란의 경우 10월 7일 공격에 대한 사전 경고조차 받지 못했다. 10주간의 침공과 폭격에도 살아남은 하마스의 능력, 여전히 건재한 지도부, 미디어를 활용하는 전략, 하마스 지지 네트워크의 존재는 향후 가자지구 통치 관련 논의 석상에서 거론된 주장들을 무색하게 했다.

이스라엘은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그리고 서안지구에 대한 군사적 탄압을 강화했다. 연일 치명적인 공습, 대규모 체포, 각종 수탈 행위를 이어가며 말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또한 가자지구를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 거주지역과 분리하기 위해 수년간 노력해 왔다. 이런 상황은, 이스라엘이 두 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전쟁으로 변질될 위험을 보여준다. 또한, 가자지구를 전반적인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과 연계하려는 하마스의 계획에, 이스라엘군이 오히려 계속 도움을 줄 가능성도 시사한다. 

 

 

글·레일라 쇠라 Leila Seurat
아랍정책조사연구소(ACRPS) 연구원, 프랑스 형사법제사회학연구소(CAREP) 객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하마스와 세계(Le Hamas et le monde)』(CNRS Éditions, Paris, 2015)가 있다. 본 기사는 2023년 12월 11일 <Foreign Affairs>에 실린 영문 기사 ‘Hamas’s goal in Gaza. The strategy that led to the war – and what it means for the future’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영불 번역·올리비에 시랑 Olivier Cyran

불한 번역·김은희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