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총통선거, 중·미 대결의 대리전
지난 1월 13일, 대만 총통 선거에서 친미·반중 성향인 라이칭더 민주진보당 후보가 당선됐다. 이에 따라, 당분간 중국과 대만, 중국과 미국 사이에 긴장 국면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갈등이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총통 선거와 동시 시행된 입법위원(국회의원과 동격) 선거에서 집권 민진당이 친중 성향 제1야당인 중국국민당(국민당)에 다수당 자리를 내줬기 때문이다. 선거 직전에 중국이 해상 무력시위를 펼치자 미국은 무기 조달로 응수했고, 시진핑 주석의 호전적인 발언이 나온 후에는 미 의회도 도발적인 반격으로 맞섰다. 그런데, 이 지역을 둘러싼 지정학적 갈등은 대만 내부에서 ‘국가 정체성’ 논란이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누군가는 동상에서 물리적인 형태만을 보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 안의 상징적인 의미를 읽어낸다. 어디에 초점을 맞출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중정(장제스) 기념관의 한 담당자는 동상의 주인공에 관한 논란을 상대적으로 바라보려 했다. 1948년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취임한 장제스는,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한 후 타이완섬으로 중화민국 정부를 옮겼다. 이후 1975년 87세로 사망할 때까지 오랫동안 최고 지도자로 군림하며 정부 권력을 독식했다. 이렇게, 대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장제스에 대해, 기념관 담당자는 상세한 소견을 밝히려 들지 않았다. 이름을 밝히지 않던 그는 “현재 중정 기념관 문제가 매우 민감한 사안”이라면서 “익명을 보장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장제스는 영웅인가, 독재자인가?
수도 타이베이의 랜드마크인 중정 기념관은 타이베이 행정 지구의 한복판에 국립도서관을 마주 보며 우뚝 서 있다. 본당으로 가려면 우선 ‘자유광장’이란 현판이 세워진 패방(기념으로 세운 중국식 관문의 일종)부터 통과해야 한다. 이어 두 개의 웅장한 중국식 건축물(국가희극원 및 국가음악청)이 양쪽에 위치한 광장을 지나면 그 수가 100에 살짝 못 미치는 계단이 나오고, 이를 오르면 이윽고 거대한 장제스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본당 건물은 광장 전체를 굽어보고 있으며, 내부에선 근위병 두 명이 늘 동상을 지키고 서 있다. 교대 공백이 생기지 않게끔 매시간 교대식이 거행되는데, 외국인 관광객이라면 흥미로운 볼거리겠지만 이를 보러 오는 대만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기념관 내부의 전시 구성에 변화가 생겼다. 장제스의 주요 행적을 살피고 그의 개인 물품을 훑어보는 공간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에게 할애된 공간 자체가 반으로 줄었다. 대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침해나 계엄령하에서의 국민 탄압과 관계된 전시 공간이 새로이 마련됐다. 기념관 건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야당 인사 숙청이나 비밀경찰 동원 등 장제스가 전횡을 휘두른 공포 정치 기간에 대해서는 늘 함구해왔기 때문이다.
다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20년 이상 전시 안내를 담당해온 인타이(73세)는 “이런 내용의 전시는 중정 기념관 측이 아니라 특정 전시관 쪽에서 기획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분개했다. 팀원 가운데 일부와 마찬가지로 이젠 그 역시 전시 안내 봉사를 거부하고 있다. 그의 가족은 국공내전 당시 중화민국 군대와 함께 본토를 빠져나왔는데, 따라서 그 역시 장제스의 정당인 국민당을 지지한다. 장제스 부자와 함께 장기 집권해온 국민당은 2016년 민진당(민주진보당) 출신 차이잉원 총통이 집권한 이후 야당으로 밀려났다.
현재 대만에서는 민주주의 전통의 두 정당이 장제스의 역사적 유산에 대한 평가를 두고 서로 반목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 본토와의 관계로 인한 상처가 큰 만큼 본토와 갈라선 지도자를 내세운 정당이라면 으레 본토 쪽에 적대적일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장제스는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상징적 인물이기도 하지만, 중국과 대만이 하나의 민족이라는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국민당의 인식도 이와 비슷한데, 그래서 혹자는 국민당이 과거의 적에 대해 고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반면 중미 갈등에서 서방 쪽을 지지하는 민진당은 중국인과 대만인의 본질적인 차이를 내세우며 대만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한다.
이를 의식한 듯 인타이 씨는 “그래도 장제스가 대만에 나쁜 일보다는 좋은 일을 더 많이 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그가 독재자를 두둔한 배경에는 필경 그의 가족사가 있을 것이다. 국공내전 후 대만으로 건너온 사람들의 후손은 대부분 아직도 중국을 잃어버린 조국이라 생각한다. 중국 본토에서 왔다고 ‘외성인(外省人)’이라고도 부르는 이 사람들은 신고자료 기준으로 오늘날 대만 인구의 14%를 차지한다. 그리고 원래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 인구가 2%, 이어 ‘본성인(本省人)’, 즉 일제강점기(1895~1945) 이전인 명·청대에 타이완섬으로 이주해온 한족이 84%를 차지한다. 본성인들은 대부분 대만이 중국 본토와 별개인 독립 국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들 중 상당수는 민진당을 지지한다. 중국과 완전히 다른 행보를 걸어온 대만 고유의 정체성을 부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성인 상당수가 그러할 뿐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중정 기념관의 한 ‘본성인’ 여직원도 대만의 정체성은 중국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직원의 말에 따르면, “장제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물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사회적 공헌을 완전히 배제해선 안 된다. 2차대전 당시 그는 수많은 나라를 도왔고, 동맹국과 협력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이후에는 공산당에 맞서 싸우기도 했다.” 장제스를 두둔하던 그는 최근 기념관 내의 전시 구성이 바뀐 것을 애석해했다. “방문객에게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狗去豬來)”
하지만 대만 독립 지지자들의 눈에는 중정 기념관의 존재 자체가 거슬린다. 예술가 셰이크(45세, 여성)도 “중정 기념관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전시 구성을 이렇게 바꿔놓은 것이 민진당의 타협안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셰이크는 중국 본토에 뿌리를 둔 외성인 집안 출신임에도 베이징 정부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는 2019년 6월에는 천안문 참사 30주년 기념으로 중정 기념관 광장에 탱크 모양의 대형 풍선을 설치하여 이목을 끌었다.(1)
“코로나19가 퍼지기 전이었고, 따라서 중국인 관광객이 아직은 대만을 자유로이 왕래하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중정 기념관은 필수 방문 코스다.”
셰이크에게 장제스는 ‘독재자’일 뿐이다. “대만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다”라는 것이다. 권위주의 체제를 혐오하는 셰이크는 중국과 결부되는 것을 꺼리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대만의 성장이 일제의 식민 지배 덕분이라 생각했다. “일제강점기에 과도한 탄압과 학살이 자행된 건 사실이다. 당시 대만 사람 대부분은 일본인에 동화된 상태였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국민당 세력이 섬으로 건너왔고, 대만 사람들은 느닷없이 중국 내전에 휘말렸다.” 셰이크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에겐 장제스의 전횡이 더욱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일제의 식민 지배가 외려 긍정적인 이미지로 인식된다.
대만 담강대 소속 사학자 블라디미르 스톨로얀은 “대만의 민족주의가 이 시기에 형성됐다”라고 설명한다. “당시 대만 민족주의자들의 1차 목적은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는 것이었다. 대만인이 2등 시민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독립운동이라 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대대적인 탄압 시기가 있었고, 이후 상당한 근대화 작업이 이뤄졌다. 일제강점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일제의 탄압이 가장 적은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게다가 국민당은 일본 식민 정권을 몰아낸 뒤 그보다 더 권위적인 전제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니 사람들이 느끼기엔 세간에 유행하던 말대로 “(괴롭히던) 개가 떠나니 (욕심 많은) 돼지가 온 격(狗去豬來)”이었다.
따라서 대만 내에서의 논란이 비단 중정 기념관 하나만을 두고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만 정계를 양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대만의 역사와 국가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다. 국민당과 민진당이 비록 지금은 현상 유지에 합의하고 있으나, 기본적으로 둘은 조국에 관한 생각 자체가 다르다.
국민당은 타이완섬에 도착한 직후부터 ‘탈일본화’를 시도했고, 이어 빠른 속도로 섬을 중국화했다. 1945년부터 ‘반공 문학’과 ‘반공 예술’의 원칙을 표방해온 국민당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 한발 더 나아가 현지 원주민 문화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다. 런던 대학 동아시아·아프리카학 연구소 창비유 교수는 “학교와 공공장소에서 지역 방언의 사용을 금지했다”라고 설명했다. “타이완섬 토착 원주민의 전통연극이나 민중예술은 엉성하고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되고 타이완섬의 자체 역사가 거의 통째로 교과서에서 누락됐다.”(2)
사실 타이완에서는 일제가 1937년부터 이와 동일한 사회문화 동화 정책을 실행했었는데, 국민당 정권 이후 중국 문화가 기존 일본 문화의 자리를 꿰찼다. 따라서 “중국적인 것은 위대하고 아름답고 세련된 것으로, 반면 대만적인 것은 촌스럽고 상스러운 것으로 취급됐다.” 따라서 국민당은 본토 수복에 대한 희망을 계속 키워갔으며, 장제스 사망 후, 특히 1987년 계엄령 해제 후에야 비로소 이 같은 중국 우월주의 기반의 문화정책이 완화됐다. 학계에서는 차츰 타이완섬 자체의 과거사도 조망했으며, 민주화와 함께 학교에서도 이를 다뤘다.
그르노블 알프 대학의 다미앵 모리에주누 조교수는 “국민당이 타이완섬 내 병력을 축소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현재와 미래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론을 섬 전체로 퍼뜨렸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대만에 관한 역사 연구는 물론 역사 교과서와 교과 과정 모두가 수천 년 역사의 통일된 ‘위대한 중국’ 신화를 뒷받침해주어야 했다.” 아울러 “중화 민족의 국수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민당의 이 같은 교화 정책에 반기를 든 야당 세력이 1970~1980년대를 기점으로 섬의 과거에 대한 새로운 서사에 집중했고, 곧이어 학계의 일부도 이에 동참했다.”
맹목적 친미주의와 친중적 반미주의 갈등
일제 치하에 대한 인식을 둘러싼 논란도 주기적으로 제기된다. 199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일제 ‘점령’이라 표현하던 책들이 이제는 일본 ‘정권’이란 용어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1960년대 대만의 기록적인 경제 성장에 대해서는 정부 주도의 계획 덕분에 대만의 기적이 가능했다고 이야기하던 기존 평가와는 달리 노동자들이 치러낸 대가가 부각되고 있다.
2016년 취임 연설에서 차이잉원 총통은 “대만이 더는 그 역사로 인해 분열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는 1995년 리덩후이 전 총통이 시작한 특별 사법 절차를 지속함으로써 국민 통합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1947~1992)의 피해자와 ‘228사건’ 이후 우익 세력에 의한 ‘백색 테러’ 피해자에 대한 법적 보상 절차를 마무리하겠다는 뜻이었다. ‘228사건’이란 1947년 2월 28일 국민당 정부가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면서 빚어진 유혈 사태를 말한다. 당시 밀수 담배를 팔던 한 여성 판매원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당국의 폭력이 개입됐고, 이를 계기로 독재 정권에 반발하는 민중 봉기가 일파만파로 확산되자 장제스 정부가 이를 무력으로 과잉 진압하면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셰이크는 “무수한 사망 건수가 제대로 규명되지도 않은 채 방치됐다.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며 유감을 표했다. 그는 특별 사법 절차만으로는 제대로 된 사건 규명을 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미앵 모리에주누 교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위원회 덕분에 중요 기록 자료 일부가 기밀 해제되는 소기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활용하면 장제스와 그 아들 장징궈 정권의 비밀경찰이 자행한 흉책을 낱낱이 밝혀낼 수 있다. 다만 이 작업에는 불가피하게 시간이 꽤 소요된다. 법과 헌법의 틀 안에서 작업이 이뤄져야 하는 문제도 있지만, 그뿐만 아니라 과거의 증언 기록들을 천천히 꼼꼼하게 복원하고 되짚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영 채널 <France5>의 한 방송(2023년 4월 11일, ‘C ce soir’)에서 프랑스 주재 대만 대사 프랑수아 우(중국명 우치충)는 대만이 고유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며 그 독립적인 성격을 내세웠다. “보통 대만의 역사가 장제스와 마오쩌둥으로부터 시작된 줄 알지만, 대만은 사실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온 나라였다. 맨 처음 이 섬에 정권을 수립한 이들은 중국인이 아니라 유럽인이었다. (...) 대만은 중국이었던 적이 없다. 청나라도 순수 한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3)
‘하나의 중국’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나 대미 우호 전략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 같은 발언은 위험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반대 입장에서 보면 이는 다분히 ‘친중 성향’의 분석이다. 민진당의 주력 정치인 린파이판과 리이웬은 동맹인 미국을 믿지 못하면 이는 곧 ‘모반자’로 비춰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격월간지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에서 두 사람은 “대만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회의적으로 바라보거나 경계하는 담론들이 대중들 입에까지 오르내리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4) 둘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반미적인 시각은 중국이 구상하고 국민당이 퍼 나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중국 이외에 전 세계 그 누구도 미국의 이타주의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글‧알리스 에레 Alice Hérait
타이완 주재 언론인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Everington Keoni, ‘Photo of the day: inflatable tank man “pops up” in Taipei’, <Taiwan News>, 2019년 5월 21일.
(2) Chang Bi-yu, ‘De la taïwanisation à la dé-sinisation, la politique culturelle depuis les années 1990, 1990년대 이후의 문화정책: 대만화에서 탈중국화로’, <Perspectives chinoises>, Hongkong, 2004년 9~10월호.
(3) 대만을 정복한 청나라(1644~1912)는 한족이 아닌 만주족이었다. 수십 개 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에서 다수 민족을 차지하는 한족은 간혹 역사적으로 인정받는 중화 민족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4) Lin Fei-fan & Lii Wen, ‘Skepticism toward US support for Taiwan harms regional security’, <National Interest>, Washington, DC, 2023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