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리 투아레그족, 험난한 반란의 길
말리 키달 점령 이후 동맹의 재구성
투아레그족(아프리카 5개국에 걸쳐 사는 베르베르족)은 1990년대 초부터 아자와드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며 말리 북부에서 꾸준히 반란을 일으켰다. 평화협정은 맺는 족족 무용지물이 됐고, 전쟁은 갈수록 격화됐다. 설상가상 지하디스트가 준동하고 적대적 외세까지 개입하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2023년 11월 22일, 러시아 바그너 용병단이 투아레그 반군 거점인 말리 북동부 키달에서 검은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2012년에 빼앗긴 키달을 탈환하는데 성공한 말리군도 의기양양하게 용병단과 함께 마을로 전진했다. 10월 초, 말리군은 러시아 용병단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하게 가오를 출발했다. 유엔 말리평화유지군(MINUSMA)이 곧 철수할 군사기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다. 투아레그 반군은 알제 평화협정을 근거로 유엔기지에 대한 권한을 주장했다.
그러나 아네피스 마을과 테살리트 마을에 잇따라 격렬한 전투가 발생했다. 투아레그족은 이곳 지형에 정통했지만, 항공기와 드론으로 무장한 말리군과 러시아 용병단의 우월한 화력에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키달에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철수했다. 말리 북부 전쟁은 사실상 50년이나 지속됐다. 이 분쟁을 이해하려면, 역사를 돌아봐야 한다.
정전협정을 깬 민간인 학살
1996년 3월 27일 말리 중부 통북투, 투아레그 반군과 아랍계 무어인이 버린 수천 개의 무기가 말리 당국과 반군 대표들 앞에서 불태워졌다. 분쟁의 종결을 상징하는 의식이었다. 이때 세워진 평화의 불꽃 기념비는 여전하지만, 평화는 무너졌다. 1990년, 리비아에서 돌아온 투아레그 청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리비아-차드 전쟁에서 무아마르 카다피의 용병으로 차출됐던 이 청년들은, 1963년 반란 이후 심해진 말리 북부 투아레그족에 대한 폭압을 피해 도망쳤다. 그러다가 리비아 야영지에서 니제르 출신 투아레그족을 만났다. 이들 사이에는 민족의식이 형성됐고, 이는 체계화된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때 공동체 문화 ‘테슈메라(Teshumera)’가 생겨났는데, 이는 프랑스어 쇼뫼르(Chômeur, 실업자)에서 유래했다. 테슈메라의 대표적 예로 투아레그족 뮤지션 ‘티나리웬(Tinariwen)’이 있다.(1)
초기 반란군은 아자와드의 자치독립을 주장하기 위해 다양한 투아레그족 구성원과 말리 북부의 무어인을 통합했다. 그러나 말리군을 패주시킨 이후, 부족별로 분열돼 갈등에 빠졌다. 1991년 1월, 알제리 타만라세트에서 말리 정부, 키달의 이포가스(Ifoghas) 투아레그족으로 구성된 아자와드민중운동(MPA)의 이야그 아그 갈리 대표, 가오 및 통북투의 무어인으로 구성된 아랍계이슬람전선(FIAA)이 모여 제1차 3자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다른 조직들이 부재한 가운데 체결됐으며, 아자와드에는 그 어떤 특별 지위도 부여하지 않았다. 프랑스국립과학원(CNRS) 소속 인류학자인 엘렌 클로도아와드는 “이야그 아그 갈리는 알제리로부터 군사적·재정적 지원을 약속받았다”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알제리는 투아레그족이 정치·군사동맹을 결성하거나 독립을 도모하지 못하게 항상 감시했다. 알제리는 자국의 아랍계 무슬림 정체성에 부합하는 북부 말리의 정치 및 종교적 이해관계를 지지한다.” 그러나 말리군의 민간인 학살로, 정전협정은 무용지물이 됐다.
1992년, 알제리와 프랑스의 주재 하에 아마두 투마니 투레 장군이 이끄는 임시정부와 모든 반란조직 간의 새 협정이 체결됐다.(2) 파리 1대학 교수이자 역사학자인 피에르 부아예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반란조직들은 사회적·경제적 안정을 위해 최우선 과제였던 독립을 잠시 제쳐뒀다. 당시 말리는 민주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1992년 협정에 따라 전투원 일부를 다양한 제복 공무원에 편입시켰다. 국가의 보호 아래 북부 지방에 일종의 자치권 부여와 경기부양도 계획했다. 그러나 일부 투아레그족만 협정의 혜택을 누렸을 뿐, 대다수는 아니었다.”
2006년, 2009년에 차례로 반란이 일어났고, 제복 공무원에 편입됐던 전투원 일부가 탈주했다. 엘렌 클로도아와드는 다음과 같이 목격한 것을 전했다. “프랑스는 협정을 토대로 말리 북부의 자치권과 정치적 권리가 강화되지 못하게 막았다. 프랑스는 몇몇 무장단체를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독립운동, 그러나 쫓기는 신세가 되다
2011년, 카다피 군대에 합류했던 투아레그족 수천 명이 리비아 정권 붕괴를 틈타 다량의 무기를 탈취한 후, 말리 북부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아자와드민족해방운동(MNLA)을 발족했다. 그런데 MNLA는 지하드와 샤리아를 중시하는 살라프파(수니파 근본주의) 무장단체를 상대해야 했다. 알카에다 북아프리카지부(AQMI)는 인질극이 주요 임무였던 ‘설교와 전투를 위한 살라프파 그룹(GSPC)’ 소속 알제리인들이 2007년에 만들었다. 말리 북부에 자리 잡은 MNLA는 충분한 자금 덕분에 신병을 모집할 수 있었다. 모리타니와 서사하라 사람들로 구성된 ‘서아프리카 통일과 지하드를 위한 운동(MUJAO)’은 가오 지역에 정착했다. 이들은 서사하라인들을 모집했고, 밀수에 뛰어들었다.
안사르디네(‘믿음의 수호자’)는 아그 갈리가 MNLA를 탈퇴한 후 만든 조직이다. MNLA의 지도자들이 이슬람의 규범체계인 샤리아를 정책에 적용하길 거부했기 때문이다. 아그 갈리는 몇 년 전에 말리에 정착한 파키스탄 살라프파 종교를 접한 이후 극단적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피에르 부아예 교수는 “아그 갈리는 이포가스 명문세족 출신으로 명망이 높았다”라며 “그래서 수많은 투아레그족 전투원이 이념과 무관하게 그를 따라갔다. 나머지 안사르디네 인원은 돈에 넘어갔다”라고 설명했다. 안사르디네는 인질의 몸값, 인신매매, 걸프만 국가들의 지원으로 재정적으로 번성했다.
MNLA는 살라프파 그룹과 손을 잡고, 말리군 기지 중 군사력과 사기가 약한 곳들을 공격했다.(3) 특히 아구엘혹(Aguelhoc) 기지에서는 주둔군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2012년 3월, 말리 장교들은 위기관리 실패, 지하디스트 조직과의 수상한 관계, 북부에 만연한 밀거래를 이유로 투마니 투레 말리 대통령을 축출했다. 쿠데타가 벌어지고 며칠 후, 말리군은 분열되어 약화됐다. 이때를 틈타 MNLA와 살라프파 무장조직이 키달, 통북투, 가오 그리고 말리 영토의 2/3를 장악했다.(4) 그러나 투아레그 반군에게는 더 이상 주도권이 없었다. 병력, 화력, 물자 모두 살라프파 조직에 비해 부족했던 투아레그 족은 쫓기는 신세가 됐다.
2013년 1월, 지하디스트는 말리 진격을 결정했다. 말리 당국은 즉시 프랑스에 도움을 청했고, 프랑스는 ‘세르발 작전’으로 지하디스트를 막았다. 말리군은 기세를 몰아 프랑스군과 함께 말리 북부의 탈환을 노렸지만, 영토의 일부만 되찾는데 그쳤다. 피에르 부아예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군은 말리군이 통북투와 가오에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몇몇 프랑스 장교는 MNLA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그들이 도시를 점령하게 내버려뒀고, 말리군은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말리군, 지하디스트 조직, MNLA, 친정부 투아레그족과 무어인 무장조직, 지하디스트에서 분열된 조직 간의 전쟁이 시작됐다.
2015년 6월, 이 혼돈을 끝내기 위해 ‘말리의 평화와 화합을 위한 협정’, 일명 알제 협정이 이브라힘 부바카르 케이타 말리 대통령, 아자와드운동연합(CMA), 친정부 무장조직 간에 체결됐다. 살라프파는 여기서 제외됐다. 1992년 협정과 마찬가지로, 알제 협정은 재편성된 군대에 반란군 편입, 난민 복귀, 국가 통합을 준수하는 북부 지방의 자치권 확대 등의 내용을 골자로 했다. 유엔 말리평화유지군(MINUSMA)은 민족화합 지원, 민간인 보호, 중앙정부의 정상화 지원 등의 임무를 맡았다. 1만 5,000명의 군인, 경찰, 직원이 말리 북부의 12개 기지에 배치됐다. 지하디스트 소탕 관련해서, 말리군은 병력 5,000명을 투입한 ‘바르칸 작전’의 일환으로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았다. 협정이 적용될 때까지, 북부 영토에 대한 통제권은 말리군과 서명 당사자들에게 암암리에 분배됐다. 그러나 새 협정이 체결 직후 말리에서는 회의적인 반응이 쏟아졌다.(5)
지하디스트 조직은 약탈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2017년, 안사르디네, 알카에다 북아프리카지부(AQMI), 카티바 마시나, 목타르 벨목타르가 이끄는 알무라비툰 등은 알카에다에 충성하는 아그 갈리의 지시 하에 ‘이슬람과 무슬림 지지그룹(GSIM)’과 병합한다고 선언했다. 같은 시기에 MUJAO에서 분열된 ‘대사하라 이슬람국가(EIGS)’는 소외된 서사하라인을 모집했고, 메나카 마을에 세력을 넓혀갔다. EIGS는 GSIM처럼 샤리아를 중시하고, 말리의 분할에 반대한다.
“이 전쟁에는 우리의 실존이 달려있다”
2020년 8월, 케이타 말리 대통령은 북부 지역의 불안정 속에 발생한 쿠데타로 축출됐다. 2021년 5월에 두 번째 쿠데타가 발생했고, 무장단체를 지지한 프랑스와의 파트너십에 이의를 제기한 아시미 고이타 대령이 대통령이 됐다. 새로운 말리 군정은 러시아를 통해 바그너 용병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2022년 2월, 말리 군정이 프랑스 대사를 추방하자 프랑스는 바르칸 병력을 말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말리는 프랑스와 유럽 파트너국과 체결한 방위협정을 파기했다.
브뤼셀국제학교 연구원인 이반 귀쇼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말리 군정은 포퓰리즘과 민족주의를 내세워 주권을 되찾고, 말리에게 충성하지 않고 서구에게 원격조종당하는 무리에게 영토를 조금도 내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의 개입과 전쟁 재개를 위한 무기 쟁탈은 이런 이데올로기를 더욱 부추겼다.” 말리군과 바그너 용병은 말리 북부로 진격했다. 2022년 무라 마을에서 민간인 수백 명을 학살하기 까지 했지만, 결국 지하디스트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현재 메나카 마을 부근에서는 투아레그족 주민에 대한 EIGS의 수탈이 벌어지고 있다.
2023년 6월, 말리 군정은 유엔 말리평화유지군에게 즉시 철수해달라고 요구했다. 알제 협정은 말리 군정이나 서명 당사자가 공식으로 이의를 제기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무효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 해 8월 말, 바그너의 지원으로 병력 수만 명과 항공기를 보유하게 된 말리군은 유엔 말리평화유지군이 철수한 통북투 지역의 베르 기지를 장악했다. 그리고 투아레그와 무어인 반군의 새로운 동맹 조직인 ‘평화, 안보, 발전을 위한 영구 전략 체제(CSP-PSD)’를 공격했다. 상황은 급속도로 격화됐고, CSP-PSD는 정당방위라는 명목으로 말리군 진영을 공격했다.
아그 갈리가 이끄는 GSIM은 분리주의자들과의 암묵적 합의에 따라 말리군과 러시아 용병에 대한 공격을 확대했다. 그럼에도 말리 정권은 계속 승리를 선언했고, CSP-PSD를 테러리스트라고 규탄하며 협상의 길을 모조리 차단했다. 2023년 11월 말, 말리군은 키달을 수복한 후 주지사를 임명했다. 새로운 주지사는 임가드(Imghad) 투아레그족으로 구성된 친정부 자경단의 창립자, 엘 하지 아그 가무 장군이다. 임가드 투아레그족은 전통적으로 키달의 이포가드 투아레그족과 적대적 관계에 있다. 무함마드 엘마울루드 라마단 CSP-PSD 대변인은 “우리는 이 전쟁에서 끝까지 싸울 준비가 됐다”라고 경고했다.
“말리군과 바그너는 투아레그족과 무어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초토화 작전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우리 마을과 야영지를 약탈하고, 학살을 자행하므로 우리 국민은 도피할 수밖에 없다. 이 전쟁에는, 우리의 실존이 달려있다.”
글·필리프 바케 Philippe Bacqué
저널리스트
번역·이보미
번역위원
(1) Hawad, ‘Touaregs, “la marche en vrille” 투아레그족, 소용돌이 행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2년 5월호.
(2) Philippe Bacqué, ‘Nouvel enlisement des espoirs de paix dans le conflit touareg au Mali 말리의 투아레그족 반란, 평화의 조짐 또다시 사라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5년 4월호.
(3) Dorothée Thiénot, ‘Le blues de l’armée malienne 말리 군인들의 슬픈 블루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3년 5월호.
(4) Philippe Leymarie, ‘La guerre du “Sahelistan” aura-t-elle lieu? ’사헬리스탄‘ 전쟁이 터질 것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3년 1월호.
(5) Nicolas Normand, ‘L’accord d’Alger entre Bamako et les rebelles armés a créé plus de problèmes qu’il n’en a réglés 말리와 반군이 체결한 알제평화협정, 해결책보다 문제 더 많이 일으켜)’, <르몽드>, 2020년 7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