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양광자, 정확한 네티즌

2012-06-12     파블로 옌센

20세기 초 상대성 이론과 양자 메커니즘은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인 시간·공간·위치로는 더 이상 극소와 극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100년 뒤, 당황스러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984년의 베스트셀러 <양자물리학 찬송>(1)을 집필한 두 저자 스벤 오르톨리와 JP 파라보의 최신 저서 <양자의 형이상학>(2)도 이를 강조했다. 사물의 공간이 넓어지고 위치도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길이 20cm의 책 <양자의 형이상학>이 내 책상 위에 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책 같지만 내용이 남다르다. 양광자는 환경에 따라 확대 폭이 달라지기 때문에 언제나 모호하다. 예를 들어 전자 하나는 위치해 있는 원자를 따라 다소 넓은 공간의 일부를 차지한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2개의 원자를 마치 항상 붙어다니는 쌍둥이처럼 긴밀하게 연결해주는 커넥션이다. 양광자와 커넥션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던 기존 개념과 맞지 않는 것 같다. 그러면 세계관을 바꾸고 우리가 정의해오던 현실이라는 개념을 바꿔야 할까? 두 저자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러나 두 저자가 설명하는 '개념'은 지극히 피상적이라 기존에 품은 철학적 야심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

우선, 두 저자의 설명은 과학의 본질을 망각해 그저 그런 뻔한 결론을 내린다. 묘한 양광자가 몇백만 분의 1초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인위적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연구원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원자를 만들고, 니오브로 된 구형 거울을 사용하고, 모든 것을 완벽한 진공 상태와 극도로 차가운 온도(영하 272℃) 속에 놓아야 한다. 이 특별한 상황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양광자와 평범한 대상을 반복해 대조하면 양광자의 특수성을 알 수 없다. 마치 영어로 된 연설을 프랑스어로 이해하려는 것과 같다.

양광자는 위치나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파장의 역할과 힐베르트 공간과 관계된 문제다.(3) 지나치게 단순한 유추법은 기존 세상과 양자 세상 사이의 차이점을 없애기 때문에 우리는 헤매게 되고, 인위적인 패러독스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양자 메커니즘은 인간과 지식의 관계를 크게 변화시킬 것이다. 양자 메커니즘은 70년 전에 트랜지스터를 개발하게 함으로써 정보와 디지털 혁명에 기여했고, 지금처럼 인터넷에서 정보가 쏟아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양자 메커니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은가? 구글에서 양자 메커니즘을 검색하면 눈깜짝할 사이에 관련 프랑스어 사이트가 50만 개 이상 펼쳐진다. 인터넷 시대가 열린 지 20년밖에 안 되었는데 이 정도다. 교수의 발표와 기발한 요법이 섞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을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지식에 안주하지 말고 완전히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라는 다비드 바인버거의 말(4)이 설득력 있다.

예전에는 편집자나 대학교수에게 인정받고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소수만이 출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글을 올리고 접속자와 추천 수가 많을수록 권위를 얻게 된다. 그 결과 정보를 적절하게 분류하고 배치하는 능력, 사이트의 노출도를 높이는 능력이 중요해졌다. 인터넷에서는 글에 대한 코멘트, 평가, 제안, 협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지식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글•파블로 옌센 Pablo Jensen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못생긴 씨앗 하나>(2012) 등이 있다.


(1) 스벤 오르톨리, JP 파라보, <양자물리학 찬송>(Le cantique des quantiques), La Découverte, 1998.

(2) 스벤 오르톨리, JP 파라보, <양자의 형이상학>(Métaphysique quantique), La Découverte, 2012.

(3) 장마크 레브 르블롱, <반대로>(Aux contraires), NRF Gallimard, 1996.

(4) <알기에는 너무나 방대한>(Too big to know), Basic Book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