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와 한국 민주주의

르디플로 에세이 루소 탄생 300주년에 부쳐

2012-06-13     이용철

올해는 18세기가 낳은 최고의 독창성을 가진 천재, 장 자크 루소가 탄생한 지 3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루소는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칙을 주창한 <사회계약론>을 쓴 정치철학자이자 근대 교육의 획을 긋는 <에밀>을 쓴 교육철학자이다. 또한 현대적 자서전의 효시가 된 <고백록>을 쓴 작가이자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 <신(新)엘로이스>를 쓴 소설가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을의 점쟁이>라는 희가극을 작곡해 왕 앞에서 공연한 음악가이며, 탁월한 식물학자이기도 하다. 만약 루소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분야에서 엄청난 재능을 발휘한 그는, 특이하게도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다. 어머니는 루소가 태어난 지 며칠 안 돼 산욕열로 사망했으며, 시계공인 아버지는 그가 10살 때 제네바의 유력자와 싸워 아들을 홀로 내버려두고 고향을 떠나버렸다. 이후 그는 조각공 견습생으로 들어가 일을 배우다가 작업장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16살 때 제네바에서 도망쳐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한다. 17살 때 후원자이자 정부가 될 바랑 부인을 만나 30살까지 허드렛일이나 하면서 거의 백수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그는 물질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왕성한 독서 활동을 통해 이념적이고 상상적인 세계에 대한 동경을 키워나갔다. 당시 재능 있는 청년들이 그랬듯이, 1742년 청운의 꿈을 안고 파리에 입성하지만 사회적 배경 없는 시골뜨기에 불과하던 그는 쓰라린 좌절감을 맛보며 귀족들을 모시는 서기 생활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런 그가 디종 아카데미의 현상 논문에 응모해, 문명의 발전이 인간성을 도야하기는커녕 인간의 선량한 본성을 타락시킨다는 논지의 <학문예술론>으로 일등상을 받고 38살의 늦은 나이에 혜성처럼 문단에 나타난다.

밑바닥 생활을 체험한 루소는 인간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했고, '인간은 선량하게 태어났지만 사회는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자연은 인간에게 자기 보존에 필요한 욕구와 그것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능력을 부여했다. 인간은 자신의 욕구와 능력 사이의 차이가 적을수록 행복하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립적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그들을 자신의 동료라고 인식해 그들에게서 자신의 우월감을 인정받기 원하는 순간, 그는 자연적 욕구를 넘어선 정신적 욕망을 지향하게 된다. 이런 욕망이 애정이나 우정을 통해 표현될 때는 인간에게 축복일 수 있지만, 권력을 통해 표현될 때는 저주가 된다. 인간은 애정이나 우정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동정심을 통해 타인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연적 본능을 넘어서 감성과 지성을 갖춘 존재이자 도덕성을 지향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런 자아의 확장은 사회가 개인에게 줄 수 있는 일종의 지복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우월감을 타인에게 강요하기 위해 그들의 경제적 독립성을 파괴하고, 물리적 힘이나 물질을 통해 지배하려 할 때 이른바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생겨난다. 루소가 볼 때 당대의 사회란 이 갈등을 해소하기는커녕 법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갖지 못할 허구적 권리와 그에 따른 실제적 의무를 부여하는 반면, 부자들에게는 그들이 실제로 소유하는 부와 권력을 합법화하는 기만적인 제도에 불과하다. 특히 그가 살던 시대에 태동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에서 루소가 가장 주목한 것은 무한경쟁과 그로 인한 인간의 소외 현상이었다. 루소가 "사륜마차는 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필요하다"(<신엘로이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이제 사물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넘어서 자기 과시를 위한 표지로 바뀐다.

사회에서 물질의 추구는 육체적 욕구를 넘어서 자신의 우월성이라는 정신적 욕망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물질을 둘러싼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경쟁도 무제한적으로 격화된다. 인간관계를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냉혹한 이해타산이며, 이런 투쟁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기만이다. 인간은 타인을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만들어서 이익을 취하려는 은밀한 욕망을 숨긴 채 선의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자신의 본마음을 숨기고 서로를 착취하려는 사회에서 인간 사이의 진정한 소통에 기반을 둔 행복은 불가능하다. 노예는 주인에게 억압받기 때문에 불행하고, 주인은 자신의 존재를 노예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주인과 노예로 나뉜 사회 구성원들은 자신을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권력이 만들어놓은 허구적이고 불행한 삶을 살면서 진정한 자신에게서 소외된다. 루소는 인간의 모든 불행이 남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생겨나며, 사회는 이 비교에서 생겨나는 우월감과 열등감을 교묘히 이용해 권력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주장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을 통해 인간이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의 밑그림을 그리려 했다. 순수한 자연 상태의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사회에서도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데, 그 조건은 "우리 각자가 자신의 인격과 모든 힘을 일반 의지의 지고한 지도 아래 공동으로 두고, 우리 전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부분으로서 각각의 구성원을 단체로 받아들이는"(<사회계약론>)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권력은 모든 사람들에게서 나오고 의무는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각 개인은 평등하고, 타인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공동체 법을 따르기 때문에 각 개인은 자유롭다. 또한 경제적 관점에서 이 사회는 각 개인이 이익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목적을 둔다. 개인의 우월성은 권력이나 물질의 소유로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는 활동을 통해 자아를 확장시키는 능력, 즉 미덕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 이 점에서 프랑스대혁명의 기치인 '자유·평등·박애'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사는 시대는 루소가 살던 시대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명품에 대한 욕망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명품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그것을 못 가진 사람들보다 더 나은 존재라는 착각을 하게 되고, 그것을 못 가진 사람들은 명품을 갖기 위해 안달한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을 버리고 자신의 자유를 팔거나,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명품을 가지려 한다. 과거보다 훨씬 부유해진 우리는 당연히 행복해야 할 것 같은데, 자살률이 살인적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가 만병통치약이라고 선전하던 시장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이 심각한 균열을 보이는 지금, 우리는 루소와 더불어 다시 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에 대해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올해 대선에서는 인간의 연대를 통한 '행복'이라는 문제를 화두로 삼아 우리 시대가 나갈 길을 제시할 지도자가 나오기를 대망해본다.

글•이용철 한국방송통신대 불문과 교수. 서울대에서 <루소의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상상적 자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몽주의와 몽테뉴에 대해 연구와 관심을 쏟고 있다. 불어불문학회, 한국 18세기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