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퍼져가는 그람시 사상

2012-07-09     라즈미그 크쉐양 | 사회학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1930년 초반 파시스트 감옥에서 쓴 글을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자들이 '권력을 쟁취하려면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대중을 뽑아내기 위한 사상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대목을 거론하며 그람시 사상을 종종 왜곡한다. 그런 그람시가 재등장하고 있다. 유럽을 비롯해 인도, 남미 대륙에서 그의 저서가 유통되며 비판적인 사고에 밑거름이 되고 있다.

1917년 러시아에선 가능했던 노동혁명이 세계 각국에선 왜 실패했을까? 당시 독일과 헝가리의 기동전은 물론이고, 1919~20년 노동자들이 공장을 수개월간 점령한 이른바 '토리노의 공장평의회'가 주도한 이탈리아의 기동전 등 전 유럽의 기동전은 왜 실패했을까?

토리노의 기동전은 그람시의 유명한 <옥중 노트>(Cahiers de Prison)의 시발점이다. 혈기 왕성한 젊은 혁명가 그람시는 토리노 노동혁명 때 처음으로 기동전에 가담했다. 몇 년 후, 토리노 노동혁명의 후퇴 과정을 그린 20세기의 이 주요 정치서적은 유럽 혁명의 패착과 1920~30년대 노동운동의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전하고 있다. 그람시 사후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은 포기를 모른 채 또 다른 세상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꾸준히 말을 걸고 있다.

이 책은 이상하게도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막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에게도 말을 건다. 2007년, 대선 1차 투표를 며칠 앞둔 니콜라 사르코지는 이같은 선언을 했다. "나는 '권력은 사상을 통해 얻는다'는 그람시의 분석에 동의한다. 우파 인사가 이같은 (사상)투쟁을 지지한 것은 (내가) 처음이다."(1) 하지만 실제로는 극우파, 특히 파트리크 뷔송을 비롯한 사르코지 측근 자문위원 출신 극우파들은 <옥중 노트>의 저자를 꽤 오래전부터 인용해왔다. 20세기 내내 막을 수 없었던 그람시 사상이 전세계를 강타하는 혁명 기류를 타고 극적으로 복구되고 있다.

그람시는 러시아에서 가능했던 노동자 혁명이 서부 유럽에서 실패한 이유를 국가와 시민사회의 특성에서 찾았다. 제정 러시아의 권력 대부분은 국가의 손에 편중되어 있어서 시민사회, 정당, 노조, 기업, 언론, 단체 등은 거의 활성화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볼셰비키들이 그랬던 것처럼 군대·행정부·경찰·사법부 등 전 국가기관을 장악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시만 해도 시민사회는 걸음마 단계라, 그 누가 정권을 잡아도 이들을 (정부에) 예속시킬 수 있었지만, 정권을 잡고 나면 문제점이 속출했다. 정파 간 분열과 내란, 노동계급과 농민계급 간 갈등 등이 대두됐다.

반면 산업혁명의 결과로 등장한 서유럽의 시민사회는 그 수도 많고, 자율적으로 점차 생산의 중추를 담당하게 된다. 시민사회가 (정부) 권력의 상당 부분을 점유해 정부는 국가를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정부는 시민사회부터 장악해야 했다. 하지만 서유럽은 시민사회를 러시아와 같은 방식으로 정복할 수 없었다. 서유럽의 사회 변화가 러시아와는 다른 형태를 띠기 때문이었다. 서유럽에선 혁명이 불가능해서? 천만의 말씀! 다만, 혁명이 장기적인 '진지전' 양상을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람시는 러시아 혁명에 충실하고 싶었다. 레닌을 숭배하는 그는 끊임없이 <옥중 노트>에서 레닌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레닌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러시아 혁명의 방식을 바꾸는 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감지했다. 그의 헤게모니 이론은 이런 깨달음 속에서 출발한다. 이후 그람시의 계급투쟁은 문화적 차원을 도입한다. 문화적 차원이란 이른바 혁명전에 하층계급(대중)의 동의를 얻는 절차를 반드시 거치는 것을 뜻한다. '강제'와 '동의'는 현대 국가에서 행동양식의 두 가지 토대이자, 헤게모니의 두 축이다. 동의가 결여될 때는 2011년 아랍 세계에서 그랬듯, 현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하층계급이 결집하게 된다.

1940년대 말 <옥중 노트> 초판이 발간됐다. 이탈리아 공산당 서기장 팔미로 톨리아티는 1960년대 초반까지 이 초판을 관리하며, 사망한 동료들의 저서를 도맡아 유통시켰다. 이후 그람시의 저서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러시아 혁명(볼셰비키 혁명) 추종자들의 충성심과 혁명 프로세스를 사회·정치적 상황, 때로는 러시아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사회·정치적 상황에까지 적용시키려는 이들의 의지를 결집하는 장으로 쓰였다. 이로 인해 그람시의 이론은 전세계로 급속히 퍼졌고, 4대륙(아시아·북미·남미·유럽)에 그의 사상(헤게모니 이론)이 뿌리내렸다. 그래서 <옥중 노트>가 세계 최초의 비판 이론서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세 대륙에 설파되고 있는 그람시 사상의 세 가지 색깔을 살펴보자. 첫 번째 유형은 남미 대륙이다.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중반부터 그람시의 전통 사상을 연구하는 메카가 된다. 이후 브라질을 비롯한 멕시코와 칠레 등 남미 대륙의 다른 나라들도 <옥중 노트> 연구에 뛰어든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람시의 신속한 수용과 확산은 이탈리아인들의 대규모 이민으로 설명된다. 또한 그람시의 핵심 이론인 헤게모니 이론 탓도 있었지만 세자리즘(Césarisme·카이사르 정치체제, 독재정부)이나 전형적인 아르헨티나의 정치현상인 페론주의(Péronisme)를 이해하는 데 기여한 '수동적인 혁명' 탓도 있다.

페론주의, <서발턴 연구> 그리고 '신(新)그람시'

따라서 <옥중 노트>는 남미 대륙에 등장한 '진보적'이거나 '발전 지향적'인 군부독재 체제, 즉 아르헨티나의 후안 도밍고 페론, 멕시코의 라사로 카르데나스, 브라질의 제툴리우 도르넬리스 바르가스 등을 분석하는 데 이용됐다. 이들의 체제는 20세기 제3세계에서 빈번했던 혁명이나 재건이 아닌 '보수적인 근대화' 형태를 구현했다. 그람시가 19세기에 태동한 이른바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라 불리는 이탈리아 민족국가(Etat-nation)의 형성을 검토할 때, 그가 <옥중 노트>에 적시해놓은 '수동적 혁명'의 개념은 이런 정치적 과정의 유형(군부독재 체제)을 정확히 묘사했다. 때로는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같은 혁명을 이끌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세자리즘이다. 요컨대 대중과 즉각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가 혁명을 주도한 것이다. 남미에는 이런 지도자가 과거에도 있었지만 현재도 많이 있다.

또한 이들 중 호세 아리코, 후안 카를로스 포르탄티에로, 카를로스 넬손 쿠팅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등과 같은 사상가들이 출간한 혁신적인 <옥중 노트> 해설서는 남미 대륙 밖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2) 그람시를 따르는 많은 주요 인사들은 1960~70년대 남미 대륙에서 맹위를 떨친 혁명투쟁에 가담했다.

두 번째 유형은 인도다. 1960년대부터 남미 대륙과 대척점에 있는 (아시아 대륙) 인도에 이탈리아 지식인 그람시의 사상이 유입돼, 포스트식민주의 연구 참고자료로 쓰였다. 이같은 운동을 주도한 핵심 인물은 팔레스타인인 에드워드 사이드였다. 그는 그람시 사상을 빌려 자신의 비판서적인 <오리엔탈리즘>를 썼다. 이를테면 그는 서양에서 흔히 사용되던 '오리엔트'(동양)란 표현을 서양인들의 식민지 사관에서 나온 용어라며 비판한 것이다.(3) 사이드를 비롯한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과 E.P 톰슨의 영향으로, 1970년대 이른바 포스트식민주의 연구에서 인도의 '서발턴 연구'(하위 주체 연구)가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이 연구를 주도한 라나지트 구하, 파르타 차테르지,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등은 그람시의 용어 '서발턴'를 그대로 사용했다. 서발턴이란 표현은 그람시의 <옥중 노트> 제 25장의 제목 '역사의 여백에서'(서발턴 사회 그룹의 역사)에 명시되어 있다. '역사의 여백'은 '공식적인' 역사로부터 소외당한, 하지만 봉기를 통해 사회질서를 전복시킬 수 있는 사회적 그룹을 뜻한다.

20세기 초반 이탈리아에서 설파되던 그람시 사상이 1970년대 인도로 전파된 것은 이 양국의 사회적 구조가 아주 흡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양국은 농민계급의 층이 두꺼웠다. 1926년 그람시는 투옥 직전 (이탈리아) 남부 문제를 다룬 몇몇 주제로 글을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수적으론 열세지만 경제적·정치적 측면에서 성장세를 보이는 이탈리아 북부 노동계급과 당시 수적으로 우위를 유지하던 남부 농민계급 간 동맹을 권장했다. 인도의 서발턴 연구자들도 자국에서 동일한 유형의 전략을 펼쳤다.

세 번째 유형은 유럽형이다. 이들은 <옥중 노트>의 저자가 제시한 개념을 근간으로 해 지정학적 사고에 매달리는 경향을 보이며, 그 경향에 '신(新)그람시 이론'이란 명칭을 붙여 국제적으로 활동한다. 신그람시 이론 창시자인 캐나다의 로버트 콕스는 혁신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제네바 국제노동기구(ILO)의 경영진 출신이다. 그 외 인사들 중에는 키스 반 데르 비즐, 헨크 오버빅, 스테븐 길 등이 이 움직임에 동참한다. 이들은 특히 현 경제위기를(4) 이해하기 위해 '유럽 통합'을 분석했다. 현 경제위기는 유럽 국민에게서 적극적인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는 유럽 (통합) 프로젝트의 무능에서 일부 비롯됐다고 말한다. 게다가 지배자들은 헤게모니가 국가적 혹은 대륙적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정착될 수 있도록 피지배자들을 설득해, 헤게모니가 적어도 이들에게 이롭다고 믿게 했다. 또한 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의 엘리트 간 상호 교류가 증가했다. 이것은 유럽 통합이 주로 미제국의 이익을 우선시했고 자율적 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지난 세기 주요 지식인 중 한 명인 그람시는 이탈리아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 차원에서 '억압받는 진영의 건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예컨대 그는 현대 이론과 실천을 접목시켰다. 불행하게도 현대의 비판적 지성인 중에는 이런 인물이 드물다.

 

글•라즈미그 크쉐양 Razmig Keucheyan

파리4소르본대학 사회학 전임강사. 안토니오 그람시 텍스트 선집 <기동전과 진지전>(Fabrique·파리·2012)의 발행인.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 파리, 2007년 4월 17일.
(2) Raul Burgos, <Los gramscianos argentinos, Siglo XXI>, Buenos Aires, 2004.
(3)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서양이 만들어낸 동양>, Seuil, coll, <사상의 색깔>, 파리, 2005(1978년에 발행된 초판본).
(4) Henk Overbeek et Bastiaan van Apeldoorn (sous la direction de), Neoliberalism in Crisis, Palgrave MacMillan, Londres, 2012.


혁명을 위하여

안토니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 사르데냐 지방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1년 지역 장학생에 선발되어 토리노대학에서 문헌학을 공부한다. 또 그곳에서 팔미로 톨리아티, 알제로 타스카,  움베르토 테라치니 등과 친분을 쌓는다. 이 세 사람은 처음엔 이탈리아 사회당(PSI) 내에서, 다음엔 공산당(PCI) 내에서 투쟁을 주도한다. 이후엔 1919년 전설적인 노동신문 <새 질서>(L’Ordine Nuovo)를 창간한다. 그람시는 1921년 PCI 창당 때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데 이어, 1924년 당 서기장에 임명되고, 1924년 4월 이탈리아 국회의원에 선출된다. 그람시가 국회에서 가냘픈 목소리로 연설할 때면,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 강고한 반체제 인사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까봐 귀를 쫑긋 세웠다고 한다.

1926년 11월, 로마에서 체포된 그람시는 1928년 20년형을 받았다. 그람시 같은 반체제 인사가 현 정부에 어떤 위협이 되는지 간파한 파시스트 재판관은 형을 언도하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이 두뇌가 20년간 작동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1929년, 감옥에서 글을 쓸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그람시는 1935년 건강이 회복 불능 상태로 악화될 때까지 이 권리를 행사했다. 그는 20세기 후반 마르크시즘의 대변혁을 초래할 미완성 수고들을 남긴 채, 1937년 4월 27일 무솔리니 감옥에서 10년간의 험난한 수감생활 끝에 뇌출혈로 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