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필수 의약품 대란 사태의 원인은?
실종된 제약산업정책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제약 분야에 대한 산업 주권을 강화하겠다며 온갖 공약을 남발하며, 100여 개 이상의 의약품 및 백신 관련 사업을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미봉책만으로는 절대 의약품 대란이 심화되는 현실을 언제까지고 은폐할 수 없다. 정작 의약품 부족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가 자유무역을 우선시하며, 기업의 수익지상주의에 맞서 공익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전 세계 제5위의 의약품 생산 국가를 자임하고 있음에도, 최근 항암제, 진통제, 항간질제 등 각종 필수 의약품 대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여름 상원 보고서에 따르면, 의약품 재고 부족 혹은 부족 위험에 처한 의약품은 모두 3,700개 품목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1) 2019년과 견주었을 때 세 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2023년 실제로 의약품 부족 사태를 경험한 프랑스인은 전체 국민의 37%에 달했다.(2) 의약품 정책 투명성 관측기구(OTMeds)의 공동창립자이자 공동대표인 제롬 마르탱은 “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출시된 지 오래된 의약품 중심의 품귀 현상이 2017년 이후 7배가량 증가했다”면서 “국가는 장기적 비전을 잃었다. 정부가 교조주의와 미봉책에만 기댄 전술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프랑스 상원 보고서는 아시아 수입 의약품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유럽에서 정부가 의약품 재고 부족, 예방·신고·관리와 관련한 제약사의 책임감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에 실시했던 각종 정책은 매우 미흡하고 비효율적이었다고 지적했다. “정부 당국과 대형 제약사 간의 협상 구도는 구조적으로 불평등하다. 제약사는 특정 의약품의 판매 중지나 건강보험 적용 거부 혹은 동정적 사용(조기 접근) 거부라는 무기를 손에 쥐고 있다. 제약사의 금융화가 심화되면서 의약품 가격을 둘러싼 제약사의 협박 행태가 점점 심해지고 있고, 그로 인해 주로 신약 판매 위주로 의약품 가격이 폭등하는 결과가 빚어지고 있다.”
정부는 공공보건법 제 L.5121-29호에 명시된 의약품의 ‘적절하고 지속적인 수급’을 보장하기 위해, 의약품 재고 부족 관리 계획(PGP)(3) 제도를 도입하는 법령을 2021년 제정했다. 프랑스 아소 상테 협회 산하 암 퇴치 연맹 대표, 카트린 시모냉에 따르면, 이 제도는 중대한 치료적 편익을 지닌 의약품(MITM) 600개 품목에 대해 2~4개월 기간의 안정적인 재고를 확보하도록 각 기업에 강제하고 있다. 프랑스 보건총국(DGS)은 MITM 의약품에 적용되는 규제 조치로는, “재고를 확보하고, 재고 부족 관리 계획을 작성하고, 재고 부족 및 부족 위험 사실을 인지하는 즉시 정부 당국에 보고해야 할 의무” 등이 있다고 한층 더 자세히 설명했다. 또한 DGS는 2024년 사회보장재정법(LFSS)에 의거해, 특정 MITM 의약품이 목록에 빠진 경우 일정한 논의 절차를 거쳐 추가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필수의약품 목록 배후에는 관료주의적 해법
프랑스 국립의약품청(ANSM)이 규정 위반에 대해 과징금을 부과한 경우는 2018~2022년 단 8건으로, 총 92만 2000유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정작 재고 부족 사태에도 불구하고, PGP 작성 및 안정적 재고 확보 의무 등을 위반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었다.
MITM 의약품이란 투약을 중단할 경우 “중단기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혹은 잠재적으로 환자의 병이 진행되거나 혹은 아주 위중해질 위험이 있는” 치료제를 의미한다. 사실상 이는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의약품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MITM 의약품 전체를 정리한 목록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관련 법령은 약물군(therapeutic class)의 목록을 작성하도록 되어 있지만, 정작 해당 약물군에 속하는 제품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은 제약사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MITM 의약품은 말하자면 과거 ‘필수 의약품’의 최신 버전에 해당한다. 보건 분야에서 흔히 그렇듯, 이 개념은 겉으로는 상당히 과학적으로 명백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복잡하고, 논쟁을 일으킨다. 게다가 해당 의약품을 조사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알력이 작용한다. 가령 1977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최초로 186개 필수 의약품 목록을 작성했을 때도, 방법론·물류·정치적 측면에서 온갖 논란이 무성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후 필수 의약품 목록 작성은 일종의 관례로 자리 잡게 되고, 2023년 7월 26일 “최우선 질병에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수익성이 높은” 의약품을 정리한 제23번째 목록이 발표됐다.(4)
지난 12월 말 유럽연합집행위원회는 “지속적으로 우수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안전한 공중보건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필수적인” 중요 의약품 목록을 공개했다.(5) 모두 200개 유효성분(치료 효과를 지닌 물질로 여기에 보형제를 첨가해 의약품을 만든다)이와 같이 정리된 목록은 앞으로 “공급망의 취약점을 분석하기 위한 토대로 사용”될 것이라고 스테판 데 케어스마에커 집행위 대변인은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를 기반으로 유럽연합집행위원회, 유럽의약품청(AEM) 그리고 각 회원국이 “공급망 내에 존재하는 취약점을 개선할 대책을 권고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하자면 관료주의적 해법이라고 해야 할까?
최고보건청(HAS) 자문 없이 작성된 필수 의약품 목록
2023년 6월, 프랑스에서 “프랑스인의 최우선적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필수 의약품”(6) 450개 목록이 발표되자, 온갖 비난이 쇄도했다. 가령 목록 작성의 투명성이 도마 위에 올랐고, 특정 물질이 중복 혹은 제외된 반면 유해하거나 불필요한 물질이 목록에 등재된 사실이 논란을 빚었다. “심지어 안과, 일상적인 피부과 치료, 사후피임약을 제외한 모든 산부인과 약품 등 아예 한 분과 전체의 약품이 통째로 제외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놀랍고도 실망스러운 결과다. 이것이 직무 태만으로 인한 문제인지, 목록을 급하게 작성한 탓인지, 혹은 그 외 다른 요인이 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독립 의학 전문지 <프레스크리르>의 줄리앵 젤리가 지적했다. 참고로 해당 목록의 개정은 2024년 1월로 예정되어 있다.
“2023년 해당 목록을 작성할 때 최고보건청(HAS)에 자문을 구하는 일은 없었다. 엄연히 그것이 이 기관 본연의 임무임에도 말이다.” ‘독립적 의료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 프로민데프(Formindep)의 대표 크리스티앙 기쿠아샤르는 개탄했다. 카트린 시모냉도 특정 의약품이 부족할 때 대안 치료책을 마련해야 할 임무는 분명 HAS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그녀는 의약품 제조 및 유통 과정에서 재고 관리 계획이 너무 늦게 수립되는 현실을 개탄했다. “산업적 측면에서 중요한 시점이 언제인지를 파악해 사전 단계에서 재고 관리 계획을 수립해야 하지만, 대부분 급박한 상황에서 우선순위에 따라 약품을 할당하기 바쁘다.”(7)
문제는 이처럼 의약품 생산망에 대한 보다 철저하고 미래지향적 비전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프랑스 상원 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 경기회복’(포스트 코로나 경기부양책-역주) 및 ‘프랑스 2030’(미래 산업 육성을 위한 투자 계획-역주) 계획에 선정되어 재정지원을 받는 106개 프로젝트 가운데, 리쇼어링과 관련한 사업은 단 18개에 그쳤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전략 의약품 관련 사업은 5건에 불과했다. 특히 이와 관련해 파라세타몰이 차지하는 위상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분명 이 진통제는 대안 치료제가 존재하지 않아서 투약을 중단할 경우 환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의약품에 속하지 않는다. 이 약물은 오로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는 의약품이라는 이유로 리쇼어링 사업에 선정됐다. 이와 같은 리쇼어링 작업에는 총 1억 유로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되는데, 그 가운데 30~40%를 국가가 주로 지원금 형태로 책임지게 될 예정이다.
루시용(이제르) 소재 세쿠앙(Seqens) 공장은 지금부터 2025년까지 유럽 파라세타몰 소비의 3분의 2에서 절반가량에 해당하는 생산량을 책임지게 될 것이다. 유효성분을 제조하는 다른 수많은 공장이 그러하듯, 세베소 규정(유럽은 1976년 염소가스와 다이옥신 누출사고로 3천700여 명이 사망한 ‘이탈리아 세베소 사고’ 이후 ‘세베소 지침’을 만들어 토지이용규제와 함께 사업장의 유해 위험정보 제공 의무를 강화하고 화학물질의 분류 및 표시에 관한 국제기준을 도입했다-역주)의 적용을 받는 이 공장은 각종 문제를 제기한다. 15년 전 이 공장이 해외 이전에 나선 것은 모두 비용 문제 때문이었다. “이번에 탈코로나 경기부양책의 일환으로 보조금을 지원받지 못했다면, 리쇼어링을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미국계 사모펀드 ‘SK 캐피털 파트너스’에 속한 이 기업의 최고경영자 피에르 뤼조가 설명했다.(8)
한편 그 사이 이 기업은 “아시아 경쟁사들에 준하는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혁신적인 제조방식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지적했다. 사실상 세쿠앙은 중국에도 파라세타몰 및 합성매개물 제조공장 두 곳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확한 생산량에 대해서는 밝히기를 꺼렸다.
투명성이 부족한 의약품 생산구조
‘프랑스 경제회복’ 계획에 따라 재정을 지원받는 사업의 대다수는 위중성이 낮은 ‘하위’ 공정(타정 및 포장 공정)과 관련된 사업들이다. 하지만 생산 장소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정작 생산구조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결과가 빚어지고 있다. 투명성이 결여된 상황은 얼마만큼 의약품 대란의 근본적인 원인이 생산지의 리쇼어링이 아닌, 소수의 생산지에 생산이 집중된 현상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파악하기가 힘들게 한다.
“금융화 현상이 심화된 제약 분야가 대대적인 인수합병의 물결에 휩싸인 지는 이미 10년도 더 지났다. 그로 인한 생산지 집중현상은 생산 구조를 극도로 취약하게 만들었다.” 캐나다 칼튼 대학의 마르크앙드레 가뇽 교수가 설명했다. 가뇽 교수는 정부가 특히 공공 의약품 제조 허브를 조성하는 등의 방법으로 제약사와의 관계에서 힘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산업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물론 최근 덴마크 기업 노보 노디스크가 샤르트르 공장에 21억 유로를 투자하고, 영국계 기업 GSK가 아목시실린 제조공장인 마이엔 공장 등 프랑스 3개 공장에 총 2억 4,000만 유로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 리쇼어링 수준은 저조하기만 하다. 2017년 유럽의약품청(AEM)은 유럽연합에서 판매되는 의약품의 무려 40%가 역외에서 생산된 제품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겨울 소아과에 모세기관지염 환자가 쇄도하면서, 가장 흔히 처방되는 항생제인 아목시실린을 둘러싼 품귀 현상이 발생해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병원 의사는 “당시 언론은 병실 포화 상태 등 다른 중대한 이유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오로지 바이러스의 위중성, 감염병의 심각성만 강조했을 뿐이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사실상 가장 큰 문제는 대학병원의 만성적인 인력난과 병실 부족이다. 여기에 동네 의사나 소아과 전문의가 부족한 현실도 가세했다. 초기에 진료를 받으면 병이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가령 아목시실린을 조기에 투약하는 경우, 박테리아 중복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 문제는 성인이 아니라, 소아를 위한 의약품 부족에 있다.”
한 대학병원의 약사도 사태의 심각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매번 의약품 부족 및 관리부실 사태와 관련한 보건 위기가 번번이 반복되면서, 환자, 보호자, 의료진이 큰 상처를 받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현실이 빌미가 되어 다음 시즌을 위한 기적의 약이라며 새로운 약물 해법이 활개를 치기도 한다. 이러한 현실을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프랑스 정부의 소통 부족도 부채질
일례로 2003년 여름 이후 프랑스에서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시작한 니르세비맙(사노피사가 개발한 일명 ‘베이포투스’. 영유아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 예방 백신–역주)의 선풍적 인기는 결국 이 약품의 품귀 현상을 빚었고, 급기야 그해 9월 말 이 약품을 둘러싼 판매 제한 조치가 단행됐다. 물론 이 예방주사가 일부 몸이 약한 아기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이득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세기관지염은 “막달을 채우고 태어난 건강한 신생아에게서는 중증으로 진행되는 사례가 극히 드물다”고 의학전문지 <프레스크리르>는 지적했다. 그러면서 임상실험을 통해 “니르세비맙이 치사율을 감소시킨다는 사실은 결코 입증된 적이 없다”(9)고 덧붙였다.
사실 페니실린계에 속하는 아목시실린 문제에 대해 이미 2016년 국립의약품청(ANSM) 보고서도 한 차례 지적한 바 있다. 이 기관은 일찌감치 ‘유효성분 수급의 중대성’을 경고한 바 있다. 이 기관에 따르면, 유효성분 공급업체는 유럽연합(오스트리아, 스페인) 5곳을 포함해 모두 13곳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런데 이 유효성분의 원료약품은 모두 전적으로 비유럽국가에서 생산됐다. 주로 중국이 인도와 함께 전체 제약산업에 사용되는 모든 유효물질 공급의 80%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 생산공장에 대한 관리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고스란히 환자의 위험으로 전가되고 있다.(10)
더욱이 이 문제와 관련해 정부의 소통도 혼란을 부채질했다. 정부는 매번 조속한 시일 내에 상황이 정상화될 것이라고 거듭 발표했다. 하지만 2023년 12월 전체 약국의 60%에서, 특히 유아용 약물 형태를 비롯한 아목실린 약품을 둘러싸고 품귀 현상이 지속됐다고 필립 베세 프랑스제약산업협회 대표(2023년 12월 27일, BFM TV)는 지적했다. 결국 지난해 국립의약품청(ANSM)은 12세 이하 유아를 위한 약국의 맞춤 조제(컴파운딩. 약국 혹은 병원약)를 허용해야만 했다.
“프랑스 제약산업은 나랏돈으로 번영 누려”
GSK는 마이엔 공장에서 사용되는 원료의약품의 출처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는 대신, 공장의 생산능력을 강화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많은 독립적인 전문가들은 제약산업에 만연한 불투명성과 이 문제를 극복할 정치적 의지의 부족이 문제라고 주기적으로 꼬집는다. “제약산업은 흔히 신자유주의 논리를 앞세우지만, 정작 의료보험 청구, 국가 보조금 지원, 기타 다양한 세액공제 제도 등 나랏돈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대학병원에서 약사로 일하며, 그르노블알프 대학에 출강 중인 장 푸아투가 지적했다.
제약산업은 프랑스에서 연구개발 세액공제(CIR) 제도로 가장 톡톡히 수혜를 누리는 두 번째 분야라고 상원보고서 작성자, 로랑스 코엔과 소니아 드 라 프로보테는 지적했다. 가령 2020년에만 총 7억 1,000만 유로의 세액공제 혜택을 누렸다. 제약사들에게 부과된 세금에서 CIR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5년 19%에서 2021년에는 34%로 크게 증가했다. 심지어 제약사들은 미래 신약을 선점하기 위한 벤처기업 인수 비용마저 버젓이 CIR 대상 항목으로 분류했다.
“나랏돈이 제약산업의 연구개발 노력에 거의 절반 수준으로 공헌하고 있지만, 정작 신약 개발에 따른 이득은 기업들이 독식하고 있다”고 보고서 작성자들은 지적했다. 가령 코로나 RNA 백신 개발의 경우에도 대부분의 위험 부담은 정부가 떠안았다. 상원보고서는 정부가 특히 재정 지원의 방향을 국내에서 생산되는 필수의약품 쪽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또한 반드시 특정 조건(생산지의 영구적 설치, 지적재산권의 현지화, 국내 시장에서 원자재 수급)을 준수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재정을 지원하는 한편, 지원금 사용처에 대해서도 보다 투명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업계는 특히 의약품 가격 인하를 막거나, 재정 지원을 합리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혁신의 논리를 들먹이곤 한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미 30년도 넘게 가장 흔한 질병을 치료할 진정한 신약 개발은 등한시한 채, 오로지 소수의 환자를 위한 치료약 개발에만 전념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로는 생산비용에 견줘 너무나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판매되는 이 신약들은 프랑스 건강보험 제도의 존속을 위협한다. 2023년 정부는 소비가 급증하고 매출이 증가한 의약품에 대해 새로운 분담금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지만, 그럼에도 이들 의약품이 건강보험 재정에 미치는 부담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상원보고서는 일부 의약품의 경우 “독점적으로 의약품을 개발한 제약사가 사실상 환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는 형국”이라고 개탄했다.
가령 2018년 미국의 제약업체 버텍스는 특정 의약품과 관련하여 정부와의 약가 협상이 원만하게 진행되지 않자, 프랑스에서 실시 중이던 낭포성 섬유증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실험을 중단하겠다고 협박했다. ‘낭포성 섬유증 극복’ 단체는 제약사의 이러한 협박 행태를 열렬히 비판했다. 스위스 비정부기구 ‘퍼블릭 아이’의 보건정책 전문가 파트릭 뒤리슈는 “일부 항암제의 경우, 우리가 추산한 기업의 마진은 심지어 80%를 넘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3월 1일, 하원에 출석한 프랑수아 브라운 당시 보건부 장관은 이렇게 주장했다. “지난해 사회보장 예산은 전략 의약품을 강력히 지원했다. 그 결과, 2022~2023년 약 5%의 순 성장을 이루도록 뒷받침했다. (...) 가령 2023년 추가 환급액은 8억 유로에 달했다.” 하지만 로젠 르 생 기자는 2022년 1년 동안 건강보험공단이 노바티스 제약사 한 곳에만 이 액수의 무려 두 배 이상, 정확히 말해 20억 유로를 지급했다고 지적했다.(11) 노바티스는 특히 아목시실린 생산업체인 산도츠를 소유하고 있다.
한편, 매년 사회보장재정법(LFSS)은 의약품 가격 인하 등 예산 절감을 위한 목표치를 세우고 있다. 2023년 절감 목표액은 8억 2,500만 유로였다. 상원 보고서 작성자들에 따르면, 약가 산정을 책임지고 있는 보건제품경제위원회(CEPS)는 제약사가 새로운 의약품에 대해 건강보험급여 목록 등재를 신청하는 경우, 기존 의약품의 지속적 공급을 놓고 해당 제약사와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이런 자잘한 시도들이 성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보고서 작성자들은 지적했다.
제약 임상데이터 대거 은폐 … 심각한 의학 재정낭비
유럽연합은 기술 혁신을 위한 지원을 옹호하며, 아무런 실질적인 조건도 내걸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산업에 공공재정을 투입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뒤리쉬는 “결국 의약품 부족 사태의 진정한 원인인 신자유주의 논리는 전혀 탈피할 길이 없는 셈이다”라고 개탄했다. “이러한 현상은 유럽연합 의약품 법 개정 작업이나, WHO의 미래 ‘팬데믹 조약’ 입안 과정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정부의 산업 통제력 강화를 위한 그간의 진전된 조치들은 결국 로비단체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씩 철폐되고 있다.”
“각국의 정부들은 행여 산업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하며, 업계에 제대로 된 해명조차 요구하지 못하는 실정이다”라고 필수의약품의 자유로운 이용을 위해 일하는 단체, ‘헬스 액션 인터내셔널’의 정책 자문관 좀므 비달이 설명했다. “자유무역협정은 각국에 경쟁체제를 강요하고 있다. 아일랜드나 네덜란드 등 일부 국가는 기꺼이 제약사에 가장 유리한 이점을 제공하며, 경쟁의 선두를 달리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미 코로나 감염병 사태 때 제약사에 투명성을 강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제약산업의 불투명성은 현재 업계가 의약품 대란 사태를 악용하는 발판이 되고 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점을 꼬집었다가는 과학 혁신을 방해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는 제약산업과 관련한 경제·재정 정보(생산비용, 마진, 지원금 액수 등)를 구하기가 힘들다. 뿐만 아니라, 제약사들은 자신들이 실시한 임상실험 데이터의 대부분을 철저히 기밀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효능 결여나 부작용 발생 등에 관한 임상 결과는 흔히 은폐하기 일쑤다. 2017년 국제투명성기구(TI) 보고서는 매년 의학 연구에 낭비되는 재정이 1,7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12) 전 세계적으로 실시되는 연구 결과에 대한 전체적인 통합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 비추어 봐도, 거의 절반에 달하는 지원금이 얼마나 허투루 쓰이고 있는지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제약산업의 투명성 결여는 오늘날 유해 의약품이나 효능이 없는 의약품에 대한 연구가 줄기차게 반복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또한 효율적인 공조를 기반으로 우수한 신약이 좀처럼 개발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사회보장제도에 긴밀히 의존하는 프랑스 제약산업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면, 오늘날 제약업계가 일부 정부조직과의 공모 하에 얼마나 공공의 이익을 편취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글·아리안 드누아이옐 Arianne Denoyel
기자. 주요 저서로 『좀비세대. 항우울제 스캔들에 대한 연구(Génération zombie. Enquête sur le scandale des antidépresseurs)』(Fayard, Paris, 2021)가 있다.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상원, ‘Pénurie de médicaments : Trouver d’urgence le bon remède 의약품 재고난 : 긴급히 우수한 치료제 찾기’, 보고서 제828호, 2023년 7월 4일.
(2) 환자의 권리에 관한 바로미터, 2023년 3월, www.france-assos-sangé.org.
(3) 내수 시장 재고 안정성 관련 2021년 3월 30일자 법령 제2021-349호.
(4) 세계보건기구, ‘WHO model list of essential medecines, 23차 목록, 2023년’, 2023년 7월 26일, www.who.int.
(5) 유럽연합집행위원회 프랑스 대표부, ‘La Commission publie la première liste de médicaments critiques de l'Union pour faire face aux pénureies 집행위원회가 의약품 부족 사태에 맞서 제1차 유럽연합 중대 의약품 목록을 발표하다, 2023년 12월 12일, http://france.representation.ec.europa.eu.
(6) ‘Gestion des pénuries : publication de la liste des médicaments essentiels pour répondre aux besoins prioritaires des Français 재고난 관리 : 프랑스인의 우선적 필요에 대응할 필수 의약품 목록 발표, 2023년 6월 13일, http://sante.gouv.fr.
(7) 프랑스 보건총국(DGS)은 수차례 요청에도 취재진의 질문에 자세히 답변하는 대신 원론적인 내용의 메일만 보내왔다.
(8) Justin Delépine, ‘Médicaments : la France reprend-elle vraiment la main sur la production? 의약품 : 프랑스는 정말 생산을 재장악했는가?’, <Alternatives économiques>, Paris, 2023년 12월 1일.
(9) <Prescrire>, 2023년 9월 1일.
(10) Jonathan Lambert, ‘“Bottle of lies” exposes the dark side of the generic-drug boom’, National Public Radio, 2019년 5월 12일, www.npr.org.
(11) Rozenn Le Saint, 『Chantage sur ordonnance. Comment les labos vident les caisses de la Sécu 처방전 협박. 제약사는 어떻게 건강보험재정을 파탄내는가』, Seuil, Paris, 2023.
(12) Transparency International, ‘Clinical trial tansparency : A Guide for Policymaker’,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