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 롤로브리지다, 사진 예술가가 된 여배우

2024-02-28     파스칼 코라자 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로마시는 지난해 1월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나 롤로브리지다에 대한 추모전을 트레비 분수 앞에 자리한 건물 ‘팔라초 폴리’에서 진행했다. <지나의 세계(I mondi di Gina)>(1)라고 명명한 추모전에서는 고인의 발자취를 따라, 영화배우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열정을 기록한 1980년 파리 카르나발레 박물관의 전시회를 소개한다.
 

“스타 여배우는 좋은 사진작가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작가 에르베 기베르는 1980년 10월 카르나발레 박물관에서 열렸던 전시회에 대한 소감을 <르몽드>에 이렇게 전했다.(2) <팡팡 튤립>(1952), <빵과 사랑과 꿈>(195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1955), <노트르담의 꼽추>(1956), <9월이 오면>(1961) 등 영화배우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던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1970년대 초부터 사진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녀는 배우라는 직업 덕택에 오드리 헵번, 폴 뉴먼, 그레이스 켈리, 숀 코너리 등 유명 배우들의 사진을 어렵지 않게 찍을 수 있었다. 

그녀는 첫 사진집 『나의 이탈리아(Italia Mia)』 첫 페이지에 수비아코 주민들의 사진을 실었다. 수비아코는 1927년 지나가 태어난 도시다. 지나와 어린시절부터 친구였던 조르조 오를란디는 그녀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1943년 폭격으로 지나의 가족이 일했던 목공소가 파괴됐다. 그래서 가족들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 온 후, 지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술학교에 등록했다. 거리에서 영화 출연 제의를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지나가 미스 이탈리아 대회에서 3위에 그쳤을 때,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배우 아나 마냐니는 지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비록 여기에서 우승하지 못했지만, 곧 성공할거에요.” 

 

“그녀는 길을 걷는 여신이었다”

가정 형편에 도움이 되고자 몇몇 이야기 사진집(des romans-photos, 만화와 비슷하나 그림 대신 사진들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장르 - 역주)과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는 금세 영화 제작자 하워드 휴즈와 영화감독 비토리오 데시카의 눈에 띄었다. ‘파파라치의 왕’이라 불리는 리노 바릴라리는 이렇게 기억했다.

“지나가 거리를 걷고 있을 때, 우리 눈에는 그녀밖에 안 보였다. 살아있는 여신이었다. 지나가 사진 촬영에 관해 내게 조언을 부탁했을 때 나는 일단 사람들 몰래 사진부터 찍고, 허락은 그 다음에 받으라고 말해줬다.”

하지만 숨어서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나는 시사 화보 잡지 <라이프>의 의뢰로 제작한 사진집 『나의 이탈리아』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댈 때 포즈를 취하지 않은 사람들을 찍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카메라를 들이댄 사람이 지나 롤로브리지다임을 알게 되면 촬영은 더욱 어려워졌다.” 결국, 그녀는 변장을 했다. 히피 스타일의 곱슬머리 가발을 쓰고, 구겨진 청바지와 커다란 셔츠를 입은 다음 두꺼운 안경을 썼다. 또한, 너무 유명한 콧날을 감추려고 윗입술 밑에 자두 씨앗까지 넣었다. 1971년 여름,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그렇게 시칠리아 남쪽 펠라지아 제도의 작은 섬, 리노사로 향했다.

 

한편, 리노사에는 두 달 전부터 마피아 조직원 18명이 추방돼 있었다. 팔레르모 검찰총장 살인사건이 벌어진 후였다. 시사 일간지 <일몬도>의 특파원이었던 데즈먼드 오그레이디는 섬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리노사는 면적이 5㎢ 정도에 불과한 작은 섬으로, 사화산들의 작은 분화구들이 여러 개 있었다. 당시 주민은 약 400명이었다. 선인장이 많았으며 풍접초와 포도밭, 양 몇 마리가 있었다. 물만 있었다면 아주 비옥한 땅이 됐을 것이다. 섬에서 비구름은 아주 큰 소식이었고, 식수는 배를 통해 공급됐다. 우편선은 일주일에 세 번씩 도착했고, 호텔이 없어서 나와 마피아들은 섬 주민들의 집에서 지냈다.”

<BBC> 시사 다큐 프로그램 ‘파노라마’ 제작에 참여했던 데이비드 톤지는 “마피아들은 부동산부터 딸기밭까지 모든 것을 관리했다. 그중 안젤로 라바르베라라는 사람은 우리를 경계하며 거리를 뒀다”고 설명했다. 오그레이디와 함께 일했던 사진 기자 엔초 브라이도 “라바르베라는 절대로 사진에 찍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라바르베라는 사진집 『나의 이탈리아』에 세 번이나 등장한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말을 거는 듯한 모습, 경찰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모습 그리고 환히 웃고 있는 미디엄 샷의 사진이다.

 

“지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다”

일 년 뒤, 이멜다 마르코스(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부인)의 요청에 따라 지나는 필리핀에 관한 아름다운 사진집 두 권을 만들기로 한다. 세계적 명성의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이 1972년 발표한 32페이지짜리 특집 기사가 관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기사에서는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의 타사다이 부족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소개했다. 사진 기자 존 낸스와 비행기 조종사 출신 찰스 린드버그도 이 원주민 부족을 만나러 필리핀을 방문했다. 

1971년 이 부족을 처음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마르코스 대통령의 측근 마누엘 엘리살데 주니어는 이 부족이 석기시대의 생활방식에 머물러 있고, “이들의 언어에는 적대심이나 무기, 전쟁을 뜻하는 단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진집의 서문을 맡았던 기자이자 수필가 카르멘 게레로 나크필은 이 주장에 의문을 품었다. 약 4,500만 명에 달하는 대부분의 필리핀 사람들은 동굴이 아닌 건물에 살고 있다. 그런데, 책의 교정본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 동굴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결국 변호사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이후 타사다이족 이야기는 모두 조작된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나와 함께 일했던 파올라 코민은 “지나는 정치가 아니라 사람에게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반공 탄압이라는 명목으로 계엄령이 선포됐던 필리핀에서의 생활 후 지나는 이듬해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의 사진을 찍었다. 그곳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편지를 써서 주 모스크바 쿠바 대사관을 통해 쿠바로 전달했다. 지나는 해당 취재 기사를 실은 시사 잡지 <젠테(Gente)>에 털어놓았다. “위험하지 않을까 고민했었다. 하지만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최근에 인터뷰를 하거나 사진에 찍힌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나는 “카메라 8대, 필름 200통, 새 청바지 10벌, 음향 전문가 1명, 카메라맨 1명, 미국인 여자 친구 한 명”과 함께 쿠바로 향했다. 카스트로는 지프차를 직접 운전하며, 혁명의 끝 그리고 혁명가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와 체 게바라의 죽음 같은 어두운 시절이 끝난 뒤 찾아온 행복한 시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나는 사진과 영상을 직접 촬영했다. 1960년대 말, 지나와 함께 전 세계 TV쇼에서 지나의 노래를 선보인 프로듀서 아드리아노 아라고치니는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지나가 미국과 유럽 방송국에 자신의 다큐멘터리 방영을 제안했다. 그러나, 어떤 방송국도 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다큐멘터리가 피델에게 너무 호의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현재, 이 영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자동차 기업 대표 호라시오 파가니와 함께) 영상에 대한 권리를 보유한 지나의 재택 요양사 안드레아 피아촐라다. 그는 “영상에서는 카스트로가 해변에서, 시장에서, 일상에서 쿠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이야기했다. 미국의 배우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오슨 웰스가 1958년에 촬영했던 지나에 대한 다큐멘터리 역시 미국 <ABC TV>에서 거절당한 채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았다.(3)

“꽃과 동물 모형에
둘러싸인 사진들은
다소 유치한 느낌도 들지만,
천진난만함과 기발함이 만난 포토몽타주는 완벽하다”

 

어린이들, 순수함의 경이로움

다음 해 뭄바이 영화제에 초대받았던 지나는 그곳에서 인도 최초의 여성 총리 인디라 간디를 만나고, 캘커타에서는 테레사 수녀를 만나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을 함께 나눴는데, 후에 이 만남을 가장 아름다운 만남으로 기억했다. FAO(유엔식량농업기구)와 유니세프 친선대사이기도 했던 지나는 “나는 전쟁을 겪어 봤고 그래서 가난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고 말했다. 그녀의 친구 조르조 오를란디는 “지나는 어린 아이들을 좋아했다. 아이들은 지나를 스타가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했다. 테레사 수녀가 서문을 쓴 『The Wonder of Innocence 순수함의 경이로움』(1994)의 주인공도 어린이들이다. 

꽃과 동물 모형에 둘러싸인 사진들은 다소 유치한 느낌도 들지만, 천진난만함과 기발함이 만난 포토몽타주는 완벽하다. 안드레아 피아촐라의 설명에 따르면 “지나는 목수에게 부탁해서 나무 받침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유리판을 여러 장 겹쳐놓았다. 그런 다음 유리판 위에 미리 자른 사진 조각들을 배치한 뒤, 위에서 내려다본 사진을 찍었다.” 같은 해(1994) 어도비에서 이런 오버레이 기법을 디지털화해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을 출시하기도 했다.

『나의 이탈리아』 출간부터 『The Wonder of Innocence 순수함의 경이로움』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20년간,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영화감독들이 그녀를 촬영하며 가졌던 이미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1978년 <CBC/Radio-Canada> 방송에서 지나는 “사진을 찍을 때는 내가 제작자이며 카메라맨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내가 이끌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녀를 ‘베르사글리에라’(‘빵과 사랑과 꿈’에서 맡았던 당찬 성격의 여자 배역)라 불렀던 측근들은 지나가 현실에서도 홀로 일과 인생을 이끌어 갔다는 사실을 기억했다(소피아 로렌, 실바나 마냐노는 각각 유명 영화제작자인 카를로 폰티, 디노 데라우렌티스와 결혼했었다).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단호한 모습 외에도, 끝없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미지도 남겼다. 동료인 파올라 코민은 “일단 머릿속에 무엇인가 떠오르면 아무도 지나를 말릴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딱 한 번, 전쟁 중인 아프가니스탄에 가려고 했던 때를 제외하고 말이다. 아라고치니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대사관에서 비자 발급을 거부해서 떠날 수 없었다.”

 

“이 사진들은 작가의 자화상”

지나의 사진 작업에 대한 평가 중, 바릴라리는 이렇게 물었다. “지나의 사진들을 어떻게 평가하겠느냐고? 그녀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 모든 문이 열려있었으니 말이다. 출판사들은 지나 롤로브리지다라는 이름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조르자 멜로니 정부의 비토리오 스가르비 문화부 차관은, 『나의 이탈리아』서문에 등장하는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생각을 인용해 “가장 비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이 사진들은 작가의 자화상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1974년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나의 이탈리아』로 권위 있는 나다르상을 수상했다. 본 기사의 초반부에 언급한 에르베 기베르가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비교했던 세계적인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Vive la France 프랑스 만세』로 상을 수상한지 3년 만이었다. “신화에 대한 의문 없이 신화에 골몰하며 진부한 작품들을 만들어내는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진정한 예술가다.” 지나를 아는 이들은 모두 이 의견에 동의한다. 지나는 배우와 사진작가로서의 재능 외에도, 조각가의 면모도 보였는데, 카라라 인근 피에트라산타의 작업실에서 만든 조각품들이 전 세계에서 전시됐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지나는 아름다운 소프라노의 목소리를 가졌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1955)에서는 28세의 나이로 오페라 토스카의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직접 불렀다. 생을 마감할 무렵에도 부르고 싶었을지 모를 노래다. 아들인 안드레아 밀코 스코픽과 자신의 개인 비서 역할을 한 안드레아 피아촐라가 법정 싸움 끝에 아들에게 부분적 후견인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저는 예술로 살았고, 사랑으로 살았으며 살아있는 영혼에게 그 어떤 해악도 끼치지 않았습니다! 감춰진 한 손으로 제게 벌어진 모든 불행을 덜어냈습니다. (…) 성모 마리아의 방패막을 위해 보석을 바쳤고,(4) 제 노래를 별들에, 더 아름답게 빛나는 하늘에 바쳤습니다. 오, 신이시여, 이런 고통의 시간에, 왜, 왜, 왜 제게 이런 보상을 내리십니까?”

 

 

글·파스칼 코라자 Pascal Corazza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기자. 저서로 『Voyage en Italique 이탤릭체 여행』(2012)이 있다. 

번역·김자연 
번역위원


(1) <I mondi di Gina>, Palazzo Poli, 54 via Poli, Roma, 2023.6.9. ~ 10.83
(2) ‘Voir la vie et le monde deux fois. Rendez-vous avec la mort 인생과 세상을 두 번 보다. 죽음과의 만남.’, Hervé Guibert, <르몽드>, 1980.10.23.
(3) ‘Portrait of Gina-Viva Italia’, Orson Welles, 1958, 26분.
(4) 2013년 5월,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줄기세포 연구에 사용하기 위해 제네바 소더비 경매에서 보석 22개를 400만 유로에 판매했다. 그러나 지나의 아들 안드레아 밀코 스코픽이 선임한 변호사에 따르면, 판매 대금은 모나코를 거쳐 소유주가 알려지지 않은 파나마의 한 기업(Bewick International inc., 2014년 설립)으로 흘러 들어갔다.(Gina Lollobrigida, il tesoro nascosto a Panama : milioni di euro nel paradiso fiscale, La Repubblica, 2023.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