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은 왜 그리스 레지스탕스를 탄압했나

베를린에서 보는 ‘위기의 유럽’

2012-07-09     조엘 퐁텐

경제위기가 그리스에 옛 기억을 되살리게 했다. 첫째는 암울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리스를 점령해 학살과 약탈을 일삼던 독일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고, 둘째는 연합군의 내정 간섭에 대한 기억을 되살렸다. 1944년, 영국은 그리스의 독립을 돕기보다는 우파 민병대와 공조해 그리스 현지의 저항세력을 짓밟았다.

"당신의 책무는 아테네의 질서를 유지하고 아테네로 접근하는 그리스 민족해방전선(EAM)과 인민해방군(ELAS) 도당들을 무력화하고 토벌하는 것이다. 당신이 판단해 필요한 경우, 모든 조치를 취해 거리를 통제하고 불순분자들을 색출해내세요. (중략) 물론 최선책은 그리스 정부의 협조를 통해 당신의 명령을 하달하는 것이지만 (중략) 점령한 도시에서 봉기가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거침없이 행동하세요. (중략) 우리가 아테나를 장악하고 점령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당신이 무혈입성 쾌거를 이루길 바라지만, 불가피한 경우 유혈입성도 허락합니다."(1)

이 편지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그리스 주둔 영국군 총사령관에게 쓴 것이다. 1944년 12월, 연합군은 여전히 나치군과 교전 중이었다. 연합군은 독일 국방군 '베어마흐트'(Wehrmacht)의 최후 반격에 막혀 이탈리아에서 오도 가도 못하다 아르덴(벨기에 남부 지역으로서 독일과 프랑스의 국경 지역에 있다) 지역으로 후퇴했다. 하지만 처칠이 편지에서 지칭한 '도당들'은 나치 협력자들이 아니라, 지난 3년 동안 독일 점령군에게 대대적으로 저항한 EAM의 유격대원들이었다.

그리스 저항세력이 공산당·사회주의 성향의 군소정당과 동맹을 통해 급속히 팽창하자, 지중해 연안에 러시아의 침투를 우려하던 영국 외무부는 좌불안석이 된다. 처칠은 영국의 그리스 지배를 책임지고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요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의 파시스트 독재(1936~41)와 결탁한 그리스의 군주제밖에 없다고 봤다.

영국 동맹국들은 메탁사스가 이 사안, 즉 영국의 그리스 지배를 쥐락펴락하도록 가만 놔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해 전략적 요충지역, 특히 미국의 물품과 자본의 침투를 저해하는 요충지역에 대해 그동안 공식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하던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마저 처칠을 지지했다. 한편 전쟁 종식을 최우선 과제로 삼던 스탈린은 미국·영국과 맺은, 깨지기 쉬운 '대동맹' 관계를 위태롭게 할 생각이 없었다. 스탈린은 1944년 5월, 처칠의 요청으로 발칸반도 분할 협정을 맺는다. 스탈린은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러시아의 영향권에, 그리스는 연합군 특히 영국의 영향권에 편입시키자는 처질의 제안을 아주 쉽게 수락했다.

처칠은 전쟁 내내 '그리스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1941년 3월 이후, 발칸반도에 대한 독일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처칠은 중동 지역 영국군 사령부에 5만 명의 병력을 그리스에 파병하라고 명령했다. 이 조치는 리비아에서 승승장구하던 영국군 공세의 맥만 끊어놓았을 뿐, 그 다음달에 진행된 베어마흐트의 그리스 맹공은 막지 못했다. 그리스 조지 2세 국왕은 대부분 메탁사스 독재정권의 각료들로 구성된, 자신의 내각과 함께 런던으로 망명했다. 일부 그리스군은 이집트에서 군을 재편성해 영국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했지만, 영국군은 이들을 밀착 감시했다.

그리스에서 대규모 저항세력이 급속히 확장됐다. 1941년 9월, EAM이 창설됐다. EAM은 대도시에서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인 뒤, 1942년 봄 그들의 군대인 인민해방군(ELAS) 산하에 무장 항독 지하단체를 창설했다. 이와 때를 같이해, 1940년 처칠은 점령국들의 저항단체와 공조해 적의 배후에서 교란작전을 수행할 목적으로 특수부대(SOE)를 창설했다. 이 요원들은 비교적 자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EAM의 대항마 조직을 창설하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다른 정당의 당수들은 항독 활동에 거의 무심했다. 군대로서 EAM-ELAS은 명실상부한 핵심 군 기관으로 자리잡았다. 1943년 8월, EAM-ELAS는 영국군이 앞으로 수행할 군사작전에 동참을 약속하고, 대신 그리스 망명정부와 화친책을 펼치기 위해 카이로로 대표단을 파견한다.

이때 영국은 EAM의 중요성과 그리스 국민의 변화에 대한 욕구를 파악한다. 이때 처칠은 '퀘벡 쿼드런트 회담'(1943년 8월 17~24일)에서 자신의 마지막 희망인 연합군의 그리스 상륙작전이 물거품이 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이제 러시아 국경 밖에 있던 붉은 군대가 그리스로 진격해 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그는 참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든 협상의 가능성을 배제한 채, 직접 진두지휘하며 카이로로 초대한 EAM 대표단을 그리스로 돌려보냈다. 또한 독일군이 퇴각하는 틈을 노려 영국군을 파견하라는 이른바 '만나계획'(Plan Manna) 초안을 작성해 영국군 수뇌부에 하달했다.

이후 영국 특수부대 요원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ELAS 토벌에 나섰다. 그들은 ELAS 요원들을 황금값으로 치솟은 파운드 파워를 이용해 매수했다. 당시 영국 화폐 1파운드는 그리스 화폐 200만 드라크마에 해당할 정도로 그리스 경제는 하이퍼인플레이션 상태였다. 영국 요원들은 사실 독일 앞잡이지만 '민족주의' 단체를 자처하는 단체들과 ELAS에 대항하는 소규모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했다. 이들은 그리스 대독 협력 내각을 비롯해 그리스가 창설한 치안부대 내부에도 요원들을 심었다. 이런 친독 의용군(치안부대)들은 나치군이 수행하는 작전에 참여해, 학살과 도시 방화를 자행했다. 한밤중에 도시 외곽의 통행을 차단한 뒤, 두건을 씌운 독일 앞잡이들을 내세워 ELAS 요원을 색출해 현장에서 총살했다. 친독 의용군을 이용한 영국의 이같은 이중 작전, 즉 영국과 그리스 왕실의 교란작전은 그리스 내전(1943~44년 겨울)의 불씨가 됐다.

그러나 그리스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한 EAM-ELAS는 반정부 인민기관을 출범시켰다. 1944년 3월 출범한 '산악정부'(반정부 인민기관)가 총선을 실시하자, 영국 정부는 불안이 극에 달했다. 더군다나 이런 움직임은 이집트 주둔 그리스 군인들을 자각시켰다. 이들은 저항군의 즉각적인 그리스 망명정부 편입을 요구했다. 처칠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이에 맞섰다. 그는 '반역자들'(이집트 주둔 그리스 군인들)을 아프리카 전선으로 전출시킨 뒤, 그리스 왕과 영국해방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들어갈 근위대를 창설했다.

현재도 진행 중인 '그리스 내전'

그리스가 독자적인 힘으로 EAM 정부를 전복시킬 수 없자, 영국 정부는 정치적 경험이 거의 없어 까다로운 정치 현안 처리에 미숙한 '산악정부' 지도자들을 정략적으로 공략했다. 자신들의 통합 전략과 그리스 우파와 영국군이 주도하는 쿠데타 위협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산악정부 지도자들은, 결국 1944년 8월 (영국이) 용의주도하게 준비한 레바논 콘퍼런스 때 (많은 망설임 끝에) 극소수지만 어쨌든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처칠의 심복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동일 이름으로 2011년 사임한 전직 사회당 총리의 할아버지)가 이끄는 국민 통합 정부에 참여시켰다. 그 다음달, 이 지도자들은 심지어 그리스 주재 영국해방군 사령관으로 부임하기로 내정된 로날드 수쿠비를 그리스 총독으로 인정했다.

1년 전부터 준비한 만나계획이 완성된 것이다. 1944년 9월, 붉은 군대가 불가리아에서 대승을 거두자 베어마흐트는 ELAS 유격대의 공격으로 그리스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베어마흐트가 퇴각한 후, 파판드레우와 수쿠비는 영국 지원군을 이끌고 나타났다. 1944년 10월 18일, 아테네에 입성한 두 사람은 ELAS에 무장해제를 명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집트에서 창설한 영국군 근위대의 무장해제를 피하기 위해, 11월 초 근위대를 아테네로 불러들였다. 독일 앞잡이들에 대한 어떠한 재판도 없었다. 친독 의용군들이 수도를 활보하며 독립투사들을 박해했다. 친독 치안부대 요원들은 폐쇄적인 막사생활을 했지만, 양질의 삶을 누리며 정기적인 훈련을 계속했다. EAM 내각은 11월 내내 파판드레우 정부와 벌인 협상 끝에, 신분보장을 약속받고 총사퇴했다. 12월 3일, 산티그마 광장에서 파판드레우의 사임과 신정부 설립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다. 경찰이 비무장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20여 명의 사망자와 100여 명의 부상자가 속출하며, 아테네가 시민봉기에 휩싸였다. 이 사태를 빌미로 처칠은 그리스 저항세력의 토벌에 나섰다.

처칠은 수쿠비에게 반란세력의 진압을 명했다. 이탈리아 전선에 있던 영국군들이 속속 그리스로 진입했다. 영국군 수가 최대 7만5천 명에 달했다. 처칠은 EAM의 협상 제안을 묵살했다. 그는 EAM 쪽 협상 제안에 대한 영국 및 국제 언론의 견해를 무시했다. EAM과의 협상 문제를 놓고 열띤 공방을 펼치고 있던 영국 하원의원 공청회장에서 이런 말로 자신의 입장을 다졌다. "확실한 우리의 목표는 EAM의 토벌이다. EAM은 휴전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중략) 현재 필요한 것은 단호함과 힘의 균형이지, 성급한 휴전이 아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2)

비록 ELAS가 아테네를 제외한 그리스 전역을 장악했지만, ELAS 지도자들은 기력이 쇠진하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또 다른 시련을 감수케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1945년 2월 12일 '바르키자 협정'(EAM-ELAS와 망명정부가 맺은 휴전협정)을 통해, ELAS는 (정부 쪽의) 일방적인 무장해제를 수락했다. 같은 날 처칠은 엄숙한 어조로 루스벨트, 스탈린과 함께 얄타 회담에서 "해방된 유럽의 모든 국민은 자국의 정부 형태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EAM가 완전히 붕괴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합법적으로 자신들의 목표, 강력한 정치개혁을 주도하며 총선 승리도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힘을 키웠다. 1945년 7월, 처칠 정부를 계승한 영국 노동당 정부는 이에 위협을 느껴 점령국 그리스에 대한 합리적인 통치에 나선다. 영국 정부가 그리스 저항세력 토벌에 가담한 친독 세력, 특히 영국군의 임무를 돕기 위해 공들여 조직한 경찰과 군대를 이용해 그리스 통치에 나선 것이다. 시골 지역의 EAM 요원들이 체포되고 형을 언도받으며 요원들은 전례 없는 공포에 치를 떨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공정한 선거를 치른다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선거는 치러졌다. 1946년 3월, 영국 외교부 국무장관 어니스트 베빈은 명망 있는 영국 이미지가 유엔에서 훼손될까봐 그리스 정부에 총선을 명했다. EAM과 민주당은 선거를 전면 거부했다. 그러자 하는 수 없이 우파 여당은 선거를 9월로 연기하고, 런던에 체류 중인 국왕의 그리스 귀환을 약속했다.

이로써 영국은 목적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사이 많은 전직 항독 저항세력들이 박해를 피해 다시 저항단체에 합류했다. 영국은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창출한 그리스 우파 정권의 생존 보장은 고사하고, 우파가 (저항단체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조차 장담할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1947년 3월 12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봉쇄'의 그리스 첨병인 영국군 '지원'에 필요한 자금을 의회에 요청했다.

영국은 그리스 저항세력을 토벌함으로써, 그리스를 공개적 혹은 잠정적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1963~65년 잠시 잠잠했던 기간을 제외하고, 그리스에선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1974년, 그리스 군사독재 정권의 몰락과 함께 그리스 내전도 종식됐다. 군사독재 정권을 종식시킨 '아테나 쿠데타'는 근대 그리스가 역사적으로 아주 제한적인 주권만 누렸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현재도 그리스는 (경제위기로) 고통스러운 시련을 겪고 있지 않은가!

조엘 퐁텐 Jo?lle Fontaine <그리스 저항세력에서부터 내전에 이르기까지(1941~46년)>(La Fabrique·파리·2012)의 저자.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1)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기억>, Plon, 파리, 1948~54년.
(2) 위의 책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