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파농과의 재회

2012-07-09     살리마 게잘리

프란츠 오마르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처럼 한 세대 지식인 전체에 영향을 준 책은 드물다. 장 폴 사르트르는 서문에서 억압받는 이들의 폭력을 지지했다. 정신과 의사의 경험 위에 구축된 그의 사상은, 알제리의 독립과 그 후 1990년대 알제리를 황폐하게 한 내전을 통해 재조명되어야 한다.

학살된 알제리인들의 주검이 프랑스 센강에 내던져진 1961년 10월 17일, 그로부터 50년이 조금 지나고 알제리 독립 50주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프란츠 파농 서거 50주년을 기념해 몇 마디 적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니, 몇 마디 말은커녕 천마디 말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우선 인간의 삶과 존재를 더욱 생생하게 만드는 모순을 일부분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모순 속에는 우리가 파농에 대해 이야기할 때 포함시킬 수밖에 없는 폭력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국제사회의 논의로 '살상자 제로' 전쟁 개념을 들먹이는 이때 '반역자' 파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가능한 일일까? 무인정찰기가 날아다니는 전쟁터에 파농의 자리는 없다.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 사헬 지역의 사막에서도 그를 만나기는 힘들다. 시인이자 소설가 물루드 마메리가 1956년 11월 <제롬(장 세나크)(1)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듯이 폭력이 모든 것을 집어삼켜버렸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를 흔들어놓는 파농, 모든 종류의 탄압에 격렬한 분노로 맞선 파농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1990년대의 더러운 전쟁 속에서 탄압은 더욱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그 전쟁은 알제리인들 사이의 내전이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식민 지배의 잔재를 되살려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쌓인 폭력이 모습을 드러내고 증식하고 교차했다. '더러운 전쟁'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알제리 내부에서 벌어진 내전인 것은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양쪽 모두 여전히 상대방을 타자로 지목하며 거부한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아프가니스탄인'으로 묘사되고, 종교 중립을 표방하는 이들은 '프랑쿠슈'(Francouche)(2)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애국심은 끊임없이 강조되지만 한편에서는 과거의 프랑스 특수부대원들을 흉내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해방전선(FLN)에 대한 오래된 적개심을 되살리려고 애쓰는 이들도 있다. 론 알제리 민족운동(MNA)과 독립전쟁 당시 다양한 저항세력들이 이끌던 전쟁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3)

오늘날 파농은 폭력이 이편저편을 가리지 않고 폭발하는 상황에 대해 어떤 분석을 제공할 수 있을까? 파농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보다 더 안타까운 점은 그의 사후에 사람들의 관심이 너무 쉽게 다른 사건으로 옮겨건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두 시점(파리 학살과 알제리 독립) 사이에 죽어가면서 파농은 분노의 몸짓을 통해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무게를 가늠하며 말과 역사를 바라보도록 요구한 것은 아닐까? 죽임을 당해 센강에 던져진 사람들, '빛의 도시' 파리에서 쫓기던 사람들, 침묵 속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50년이 지난 후에야 조심스러운 조의를 표했을 따름이다. 그들은 폭력에 의해 폭력 속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을까? 이상화된 혁명의 신화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세울 수 없었을까? 한쪽에서 체제 선전을 위해 역사를 순화하고 거짓말의 노예가 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어제의 적이 역사적 사실을 보존하는 역설이야말로 역사가 인간을 조롱하는 좋은 예다.

식민주의자와 맞선 위대한 '반역자'

여기서 단순한 식민주의를 넘어서서 인간관계 전반을 규정하는 지배 메커니즘을 배울 기회를 발견한다. 파농이 국가 엘리트들에 대한 분석에서 잘 보여주듯이, 해방적 폭력은 탈식민화 과정 없이는 완수될 수 없다. 탈식민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더욱 복잡해지고, 새로운 관점으로 이동하거나 대립 부분으로 파편화되었다. 언어 역시 내적·외적 싸움터가 되었다. 알제리인이 프랑스인들에게서 탈식민화되는 길은 다양하다.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거나, 프랑스어 대신 영어를 사용하거나, 아랍어 혹은 베르베르어를 새롭게 배울 수도 있다. 언어·문화·종교·경제·신체적 싸움이 다양한 수준으로 전개된다. 서로 교차하고 충돌하고 북돋우는 이 일련의 투쟁은 문자 그대로 이해된 파농의 사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지형을 창조한다. 합리화의 영역을 떠나 존엄성을 되찾고, 자기 극복의 능력을 갖췄을 때 모순을 전체 속에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나 자신을 극복하려면 우선 파괴할 줄 알아야 한다.

분노와 고통, 광기, 자살, 침묵을 넘어서야 한다. 알제리 독립 이후, 특히 1990년대의 '더러운 전쟁' 이후 정신의학은 여전히 파농을 필요로 한다. 파농이 알제리 전쟁 중에 정신과 의사로서 쓴 글을 읽는 것, 각종 질병과 우울증, 저항을 위한 자살, 자신 혹은 타인을 향해 가해지는 다양한 폭력 속에서 표출되는 광기를 관찰하는 것은 5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알제리 내에도 이제 다른 곳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을 만큼 이른바 '정상적 삶'의 공간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분노와 폭력의 진원지가 아닐까?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부유한 특권층과 보수주의자들의 정상적인 삶이 문제 아닐까? 끔찍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타인 곁에서 이른바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상황이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 아닐까? 파농은 자발적으로 나치즘과 식민주의에 대항해 싸웠다. 상당수 사람들은 그보다는 안전을 도모했다. 그러나 자신의 환자들이 정신적·육체적으로 파괴되는 것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이 정신과 의사에게 지배에 대항한 급진적 분노를 자제하라고 요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싸운 그에게 현자의 신중함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그의 지리적 이동 경로를 살펴보면, 마르티니크에서 프랑스를 거쳐 알제리로 가서, 미국 병원에서 숨을 거둔 후 다시 알제리로 돌아와 묻혔다. 이 궤적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이다. 그 속에서 파농 같은 이들은 분노와 열정 속에서 온몸으로 섬광 같은 지혜를 구현한다. 파농은 노예제 유산 속에서 태어나 나치즘과 식민주의에 맞서 싸우다, 여전히 인종차별주의가 득세하던 나라에서 숨을 거둔다. 그는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혁명을 완수한 후 다시 그것을 배반한 곳에 묻혔다. 파농의 삶과 죽음은 한 인간의 참여가 얼마나 급진적인지 보여준다. 파농에게 '인간'이란 곧 고통받는 존재였다.

알제리 혁명에 대한 낭만적 열광과 알제리 독립 후 자리잡은 체제의 독재적 성격 사이의 모순만 있는 게 아니다. 파농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인들과 함께 나치즘에 맞서 싸웠지만, 알제리 전쟁 중에는 과거 프랑스 해방을 위해 싸운 영웅이었지만 알제리에 대해서는 전면전을 외치는 식민주의자 얼굴을 한 이들에 대항해 싸웠다. 파농은 이런 모순 속에서 폭력의 맨얼굴이 드러난다고 보았다.

프랑스 해방의 빛나는 영웅들이 알제리에서는 비열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그 영웅들이 박해한 것은 외국인이지 자국민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보편적' 가치의 대변자를 자임하고 '식민화의 혜택'을 들먹인다.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는 분명하게 구분되어 대립하지 않는다. 언론의 동조, 정치적 조작이 복잡하게 뒤얽히며 한쪽에서는 과장된 언사를 남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상처받는 일이 계속된다.

지금 파농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은, 폭력이 탄생하고 자리잡고 문명의 외양을 한 지배를 은폐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그 지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와 문화가 공정하게 타협하는 속에서가 아니라 기억 간의 (내적) 경쟁 속에서 가능하다. 알제리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지중해 너머를 바라보는 것보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훨씬 힘들다.

테러와의 투쟁을 이유로 "이슬람주의자들을 박멸하자"고 외치던 언론과 지식인들이 파농 서거 50주년을 기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과거에 대해 질문을 던질 때, 현재에 대해 침묵할 때 파농은 우리 곁에 있으며 생생한 현재성을 획득한다. 너무 많은 것 혹은 모든 것을 빼앗긴 이들에게 남겨진 것은 분노밖에 없다.

살리마 게잘리 Salima Ghezali 알제리 <라 나시옹> 발행인.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Jean Sénac는 알제리 독립을 지지한 시인이다. 1973년 암살당했다. ‘전쟁 중의 마메리’,  www.lanation.info, 2011년 7월 3일.
(2) 프랑스인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속어.
(3) 알랭 뤼시오, ‘알제리 민족운동의 아버지 메살리 하지의 비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참조.


시대를 초월한 인간

1925년 7월 마르티니크에서 태어난 프란츠 오마르 파농은 짧은 생을 살다 갔다. 1961년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겨우 서른여섯 살이었다. 파농은 서인도 제도 출신의 흑인으로서 인종차별을 직접 경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온갖 종류의 해악을 목격했다. 1943년 자유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한 그는 국민주권을 지키기 위해 나치에 대항해 싸운다는 이들이 여전히 인종차별과 식민주의적 신화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45년 4월, 그는 "내가 잘못 생각했다"며 아프게 반성한다. 이때 느낀 격렬한 분노는 그를 평생 '반역자'로 살게 한 힘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파농은 리옹의 의대에서 정신의학을 전공하면서 현상학과 실존주의에도 관심을 보였다. 1952년(27살) 쇠유 출판사에서 펴낸 그의 첫 작품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그를 인종차별 메커니즘에 대해 가장 섬세하게 비판한 사상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파농은 정신과 의사로서도 평범하지 않은 면모를 보였다. 1953년 알제리의 블리다-주앙빌 병원에 근무할 때는 제도화된 심리요법을 응용한 혁신적이고 해방적인 치료법을 도입했다. 그러나 1954년 알제리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입장을 정해야 했다. 결국 1956년 병원을 그만두고 튀니스에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기관지 <알 무자히둔>에 글을 기고하고, 마스페로 출판사에서 책 <알제리 혁명 5년>을 냈다. 그러나 이 책은 1959년 출판되자마자 금서가 됐다.

그에게 알제리 혁명은 식민화된 세계를 해방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독립을 쟁취한 사하라 이남 국가(가나·기니)에서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GPRA) 대사로 활동하면서, 그는 무엇보다 아프리카 혁명(1)을 위해 투신했다. 하지만 병마가 그를 덮치고 만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명저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을 완성했다. 사르트르가 서문을 쓴 이 책은 그가 죽기 며칠 전에 출판되었다.

토마 들통브 Thomas Deltombe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파농이 '아프리카 혁명'이라는 주제로 쓴 다양한 기사, 연설문, 노트 등이 사후에 책으로 묶여 나왔다. Frantz Fanon, <아프리카 혁명을 위하여>, Maspero,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