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짜인 허위의식

Special 관광, 탈출산업

2012-07-09     필리프 부르도 외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소수의 상류층만이 세계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여전히 해외 체류는 차별화라는 본연의 소명을 잃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관광이 예전처럼 부유층의 전유물인 것만은 아니다. 중국의 예에서 보듯 관광은 새로운 산업의 젖줄이 되어 인구의 대대적 이동을 초래한다. 하지만 여가시간을 정복함으로써 정말 약속한 해방이 실현됐을까?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강력한 신화에도 불구하고, 안락함을 버리지 않은 채 진정성이라는 허울뿐인 체험을 추구하는 서구인의 휴가는 여전히 저개발국의 발전이나 계절노동자의 고용 활성화에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심신 회복을 위한 여가활동(Recreation), 즉 관광·여행·레저가 긍정적인 표상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여가활동이 막 대중화하기 시작한 1960년대만 해도 사회학자 조프르 뒤마즈디에는 대중화로 인해 여가활동에 잠재된 해방의 힘이 악용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여가활동이 '민중의 신종 아편'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역사학자 모리스 도망제도 폴 라파르그가 쓴 <게으름의 권리>가 1970년 재출간된 소식을 전하면서 "시민들이 점차 강박적으로 휴가에 온 에너지를 쏟아붓는 나머지 정작 사회·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고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1963년 인민전선의 주도로 프랑스에 처음 유급휴가가 도입되면서 '여가시간'이 해방의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관광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여가가 지닌 해방의 힘은 약화됐다. 여가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생산성 경쟁이 격화됐고, 관광에도 상업적 논리가 적용됐다. 관광 역시 전세계가 시장으로 변질되는 현상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 관광객을 유혹해 발을 묶어두고 되도록 많이 소비하게 부추기는 것이 어느새 관광의 목적이 돼버렸다. 그로 인해 실제 현실에 평행하는 또 다른 새로운 현실이 창조됐다. 평행 현실은 실제 현실과의 사이에 물 샐 틈 없이 단단하고 두꺼운 벽을 쌓음으로써 관광객을 엄선된 여행코스 속에 가두고 현지인의 삶에 깊이 침투하는 것을 방해했다. 평행현실의 완벽한 예는 '파크'(Park)였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날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산악지대에서도 '고립된 파크 생활'이 가능해졌다. 산악지대에서도 마치 파크에 온 것처럼 어디서 잠을 잘지, 어디서 산책을 할지, 쓰레기통 뒤지기를 좋아하는 곰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등이 일일이 지정됐다.

파크는 인생의 즐거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의 전형이 되었다. 프랑스 지역자연공원(PNR)협회의 홈페이지에도 이런 구절이 올랐다. '여기서 또 다른 삶이 창조되다.' 사람들은 지역자연공원을 뭔가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색다른 일이 일어나는 공간으로 인식했다. 하지만 지역자원공원도 사회공학적 기법에 따라 개발된 인위적 공간이기는 매한가지였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 규격화된, 기능별로 구역이 분리되고 배치된 편리성이 배가된 공간이었다. 1970년부터 연재된 제베의 만화 <원년>에는 이런 지리적 배치의 중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 그림에서 제베는 한 나라를 철저히 분리된 여러 개의 공간으로 묘사했다. '휴양도로'와 '민영 해수욕장' 옆에는 '산업지대', '군사지역', '출입제한 개인 사냥터', '출입금지 잔디', '화학비료 기법을 이용한 농업지대' 등이 엄격히 분리돼 배치됐다.(1)

'휴양을 제공하는 외딴 세계'가 인간을 매혹하는 이유는 차별화에 내포된 긍정적 함의 때문이다. 차별화에 의해 '도시라는 이 세계'는 '자연이라는 저 외딴 세계'에 도시 생활이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제약에 상반되는 수많은 미덕을 부여한다. 이를테면 자연이라는 저 외딴 세계는 도시 생활이 수반하는 직업적 소외, 경제적 어려움, 사회통제, 교통체증, 도시 난개발, 환경오염, 소음 공해, 치안 불안, 시간의 압박감, 노사관계의 장벽을 비롯한 각종 제약에서 자유롭다. 하지만 '관광'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점차 상업적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 "고객에게 모래언덕이 도시 스트레스의 반대말이라고 설득하라. 사막의 고요함과 낙타의 느린 걸음, 매끄러운 모래언덕이 심리적 안정을 제공하는 일종의 치유법이라고 말이다."(<에코 투리스티크>·2006) 이로써 '여행의 권리'는 모든 사회문화적 해방에서의 의미가 배제된 한낱 마케팅 구호(여기서는 관광업체의 상업 문구)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런 변화와 더불어 관광지를 '꿈의 공장'으로 표현하는 현상도 일반화되고 있다. 관광에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문화산업의 논리가 고스란히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꿈의 공장'이란 표현은 단순히 산업적인 면을 내세워 관광업의 중요성을 정당화하려는 강박적 욕구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이 달콤한 말은 관광이 오락의 세계화를 선도하는 기수이자, '인간의 얼굴을 한 자유화'의 첨병 노릇과 세계관광기구가 선언한 '국제관광질서'(2)의 수호자로서 역할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신화화한 여가, 정체성의 위기

오늘날 관광이 진보에 기여한다는 신화(질 클레르 기사 참조)는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그와 더불어 태평하고 쾌활하고 자기중심적인 관광객의 이미지도 퇴색되고 있다. 오늘날 에너지, 기후, 인구, 치안, 보건, 정체성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위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위기에 직면한 시민들은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의식을 느끼거나 죄책감에 시달리며, 되도록 사회에 누가 될 만한 행동을 기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를테면 관광 혹은 그와 유사한 행위를 아예 삼가거나, 불가피하게 여행을 떠나더라도 '관광객'이라는 지위에 따른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업무·사회운동·인도주의 등 그럴듯한 동기를 찾아내려 애쓴다. 굳이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대신 가까운 도심에서 여가를 즐기거나, 마치 여행이 아닌 양 휴가지에 연 단위로 장기 체류하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악성 흑색종에 대한 위험으로 인해 자외선 차단이 중요한 건강관리법으로 자리잡으면서, 20세기 휴가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선탠에 사족을 못 쓰는 관광객의 모습도 더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관광객이냐 아니냐가 실존주의적 문제로 대두한 오늘날, 휴가지만 가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안하무인으로 돌변하는 '비도숑 가족'(소비사회의 전형을 그린 연재만화 속 등장인물)이 어찌 가당키나 하겠는가?

서구 관광객은 정체성 위기를 겪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관광객이 되기를 원치 않을뿐더러, 그렇게 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해당 주제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관계로 서구 관광객의 정체성 위기는 그저 관광의 소비지상주의적이거나 포식적인 성격에 대한 일부 중산층의 반감으로 인해 발생했을 것이라 추정할 뿐이다). 서구 관광객은 '방문자-접견자', '고객-서비스 제공자'라는 이분법적 관계와는 다른 차원의 관계를 토대로 방문국 내부의 세계관에 좀더 가까워지려고 함으로써 방문 중인 사회를 자기중심적 태도나 시각으로 판단하기를 거부한다. 비관광객이 되기를 자처하는 그들은 잠재적인 구경꾼의 지위에서 벗어나 시민의 의무를 완수 중인 일종의 목격자 지위를 부여받으려 한다. 또한 주민참여형 관광의 사례에서처럼, 단순한 소비자가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초대받은 손님이라는 느낌을 받기 기대한다. 이를테면 하룻밤 소파를 빌려주는 숙박 서비스의 제공자와 수요자를 연결해주는 국제적 네트워크 카우치서핑(Couchsurfing)이나 방문객을 접견하고 안내해주는 자원봉사자 그리터(Greeters) 등이 환대·교류·무상성을 모토로 내세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25년 전부터 관광의 의미나 실천 방식을 쇄신해 관광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관광을 둘러싼 비판을 극복하거나 수용하는 식으로 관광이 환경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려는 노력이 병행되고 있다. 관광을 개혁하기 위한 이런 시도는 '생태관광', 즉 연대성에 기초한 지속 가능하고 책임 있는 윤리적이며 공정한 관광이라고 불린다. 동일한 맥락에서 탄생한 가장 최근의 버전은 '인도주의 관광'(이른바 '자원봉사 관광')이다. 인도주의 관광이 세계를 구경하고 구원하는 두 행위를 접목시킴으로써 양자 사이에 의미 혼선을 줄 위험은 있다. 그럼에도 이런 특성이 인도주의 관광의 미래에 반드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도주의 관광이 모범적이고 진실하지만, 또 때론 기회주의적 성격을 띤다. 그럼에도 이런 태도가 기여할 수 있는 바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비록 '단축 코스가 남발'되거나 이타성과 차별성이 결부되는 과정에서 인도주의 관광의 정확한 정의나 실천 방법이 모호해지는 부작용이 생겨나고 있지만 말이다. 2010년 1월 <프랑스 앵테르> 라디오 방송의 한 프로그램은 대중관광(매스투어리즘)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조류를 거슬러 알롱만을 항해하는 법'을 설명하며 '100%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베트남 여행을 통해 관광객의 지위에서 탈피하자'고 제안했다.

기존 패러다임 극복할 '탈관광' 모색하자

일찍이 상황주의자들(3)은 '일상-비일상'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나 정치적 기획을 토대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시공간을 특별한 시간, 매혹적인 장소로 뒤바꿔놓으려는 실험을 다양하게 했다. 그런 식으로 상황주의자들은 '관광'의 개념이 폐기되는 데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 세계'(이곳)와 '외딴 세계'(다른 곳), '노동'과 '여가'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양자를 상보적 차원에서 이해하던 태도에서 벗어나면서 '관광'이라는 기존 패러다임은 무의미해졌다. 기 드보르(4)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심리지리적 표류'(5)의 목적도 도시를 '순례'(6)하는 행위를 통해 일상에 대한 인식을 뒤집는 데 있었다. 순례의 시작점이 '여기'(이 세계)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심리지리적 표류는 사회경제적 효용에 따른 기존 기능적 차원을 초월해 현실세계를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만남이다. 이런 상황주의자들의 실험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단순히 새로운 관광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관광이라는 패러다임 자체를 폐기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이라는 패러다임을 폐기하자는 이런 급진적 태도는 단순한 반순응주의적 행동과는 달리 실천 과정에 일상성을 결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아마추어 뮤직 순회공연, 자아성찰·사회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순례여행, 공예 교육 연수, 사회봉사 프로젝트를 통한 노동봉사, 유·무상 자원봉사 활동 등이다. 이런 종류의 시공간 활용 방식은 모두 사적 모험이라는 성격을 띠면서, 동시에 그동안 관광이 지니고 있던 모든 관습에서 자유롭다. 관계, 실존, 예술, 육체, 정신, 공간, 시간 등의 다양한 차원을 적절히 뒤섞는 방식을 통해 관광에 적합한 장소, 관광객에게 걸맞은 태도 등을 탈피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광의 법칙이나 형식은 무시·배격·망각·부인된다.

수십 년간 관광은 해방의 원동력이라는 식으로 휴가를 신화화하며 순응주의적 관습을 고집해왔다. 하지만 이제 비로소 '탈관광'을 모색해야 할 때가 왔다. 중요한 것은 탈관광을 모색하는 데 언제나 에른스트 블로흐가 제시한 유토피아의 방정식을 잊지 않는 것이다. 즉, '자유로운 시간=자유로운 공간'이다.(7)

필리프 부르도 Philippe Bourdeau (지리학자) & 로돌프 크리스탱 Rodolphe Christin (사회학자) <관광: 해방이냐 사회통제냐?>(Editions du Croquant·벨렁콩브엉보주·2011) 엮음.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1) 제베, <원년>, 라소시아시용 출판사, 에페를뤼에트 총서, 파리, 2000.
(2) ‘세계 관광 윤리 강령’, 세계관광기구, 1999.
(3) ‘상황주의’란 신좌파 아나키즘의 일종으로 철학·미술·정치 등의 차원에서 기존 질서와 인습에 반기를 들었다.
(4) 대표적인 상황주의 이론가로, 자본주의가 공적 활동에 활발히 참여하는 시민들을 탈정치적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볼거리를 수동적으로 구경하기만 하는 무기력한 소비자로 전락시킨다며 이른바 ‘스펙터클 사회’를 비판했다.
(5) 도시를 걸어다니는 행위를 통해 도시 공간의 잠재성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개발하고, 새로운 환경의 창출에 대한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시도.
(6) Itinérance.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구경한다는 ‘순회’의 의미를 지닌 이 단어는 관광을 의미하는 ‘Tourisme’과 차별화하기 위해 사용됐다. 일정한 코스의 여정을 친환경적 수단을 이용해 저렴한 비용으로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돌아보는, 환경과 사회적 영향을 고려한 지속 가능한 여행을 의미한다.
(7)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2권: 더 나은 세계의 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