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속에서
아이티는 지금 생지옥
갱단이 국토 대부분을 장악한 아이티의 폭력 사태가 공포와 굶주림과 살인으로 치닫고 있다. 아리엘 앙리 아이티 총리가 케냐를 방문한 사이 갱단들은 지난 3월 2일, 교도소에서 수감자 4,000여 명을 탈옥시켰고, 대통령궁과 내무부 청사를 비롯한 주요 정부 기관들에게 총격을 가하며 공격했다. 학교, 은행, 병원 등 대부분의 공공시설이 문을 닫았고, 경찰서 곳곳에 갱단이 불을 질렀다. 거리엔 시신이 나뒹굴었다. 지난해 갱단의 폭력으로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만 1,400명 이상이 납치되고 2,500명이 사망했다. 아이티에서는 지진, 폭풍우, 콜레라, 국제 구호 단체의 착취라는 재앙적 상황에 이제는 범죄 단체의 폭력까지 더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세르주 쿠아드루파니 작가가 아이티에 머물며 오랫동안 지옥이 돼가는 모습을 관찰한 시기가 1999년이었는데 이 상황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작가는 당시에 쓴 메모를 다시 보며 아래 이야기를 썼다.
고통은 끔찍했고 그는 더워서 정신이 없었다. 하수구, 짐승 사체, 썩은 채소, 상한 음식 냄새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대기 속에 그대로 쌓여 갔다. 역한 냄새로 인해 구역질이 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래쪽 바닥이 캄캄했다. 끈적이는 무언가에 발이 파묻혔다. 위도 어두웠다. 그의 위에 희미한 빛이 짧게 비쳤고 누군가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아… 아… 안 돼요! 여기선 안 된다고요!”
“가서 콧수염 좀 불러줘요…”
그러자 폴이 뒤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시몽! 그러면 일어나서 멀리 도와줄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요…. 아파 죽겠어요….”
“이러케 기… 기픈 구덩이… 안에… 도고… 두고 갈 순 없어요, 폴. 내가 내려갈게요….”
“안 돼요! 취했잖아요. 그러다 저처럼 자빠진다니까요. 여기 엄청 미끄럽고 내려온다 해도 저를 못 올려요…. 저 확실히 어디 다쳤어요. 젠장, 다리 아파 죽겠네….”
“제가 멀리 가는 건 좋은 생각이 아… 아닌데요….”
“길에 아무도 없어요…. 가세요, 시몽. 제발 도움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콧수염 좀 불러 줘요….”
폴은 앉으려 했고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 순간, 여태까지는 술기운에 혀가 꼬여도 또박또박 침착하게 말하려 했던 노력이 무색하게 정신이 무너져 내렸다.
“하라는 대로 할 거냐고요. 네?”
폴이 소리쳤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짜증 내지 마세요, 가, 가, 갈게요….”
“빨리요.”
폴은 고통과 짜증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콧수염, 콧수염을 불러야 하는데….” 그는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이티에 사는 프랑스인들은 툭하면 ‘도와줘요, 콧수염 아저씨!’라고 말했다. 폴이 헌병단을 소개받았을 때, 그는 내심 웃었다. 헌병단의 검은 콧수염이 아나키스트를 새긴 19세기 판화에 등장하는 경찰들의 콧수염과 닮았기 때문이다. 폴은 활짝 웃으며 악수하면서도 속으로는 ‘짭새와 경찰에게 죽음을(20세기 초 아나키스트들이 부르는 노래 ‘카옌’의 후렴구 가사 – 역자주)’을 떠올렸다. 이제 폴에게 이 콧수염은 아이티에 있는 프랑스인 수백 명의 눈앞에 이미 헌병단원들이 있음을, 즉 프랑스가 국가 차원에서 전 세계에 있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것을 상징하게 됐다. ‘쟁글랭도(1)’들이 프랑스 교민들의 저택을 포위했을 때. 포위되어 막 강도를 당했을 때, 인적 드문 언덕에서 지프차를 뺏겼을 때, 어려움에 처한 프랑스 교민들을 돕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그들의 급여는 높았다. 대사관에서 재외국인 보호를 맡은 ‘콧수염’은 투치족 학살 당시의 르완다, 훈센 총리의 쿠데타 당시의 캄보디아처럼 20세기 말 인권을 중시하는 프랑스의 외교가 이름을 빛냈던 다양한 장소에 있었다. 헌병은 첫 근무지에 대한 질문에 침통해했고 두 번째 근무지에 대해서는 얄궂은 표정을 지었다(캄보디아 쿠데타가 일어나 집무실에 로켓이 도착했던 순간 프놈펜에 있어야 할 대사가 자리를 비웠던 이 기막힌 타이밍에 대해 그가 무관하지 않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멋진 저택의 정원에서 바비큐를 했다. 그리고 아이티에 교민이 새로 올 때마다 언제나 핸드폰을 24시간 켜 두었다고 강조했다.
폴은 다리에 다시 통증이 느껴져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양손으로 어둠 속을 더듬는데 손가락에 축축하고 단단한 표면이 만져져 그것이 통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가 통에 앉자 다친 다리에서 느껴졌던 고통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임시 의자에 앉으니 전날 보스메탈들의 마을에 방문했던 일이 떠올랐다. 보스메탈은 드운(dwoun)이라 부르는 연료통의 뚜껑과 바닥으로 부두 사원의 인물들을 조각한 뒤 니스를 칠해 완성하는 훌륭한 조각품을 만드는 장인들을 말한다.
이런 곳에 방문을 할 땐 시몽이 폴을 안내했다. 프랑스 문화원 직원인 시몽은 아이티 문화와 “세계 시장에서 판매 가능한 다른 모든 진귀한 물품들보다 더 많은 작가와 예술가들을 육성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 아이티인들의 탁월한 능력과 창의력”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시몽은 일로서 해야 할 일 외에도, 문화원을 자주 오는 작가 지망생들 사이에서 아이티의 대표적인 작가로 활약 중인 라페리에르, 프랑케티엔, 트루이오 같은 인재를 찾으려 했고 이들을 프랑스인 편집자들과 연결하려 노력하며 때때로 그들의 중개인 역할을 했다. 이제 막 아이티에 온 관광객들에게 보일 ‘순박한 화가들’의 연작 중 파리 화랑에서 앞 다퉈 욕심낼 예술가들을 구분해 놓고 수공예 작품 중 프랑스 도시 아를이나 미국 도시 마이애미의 상점에서 10배, 100배 높게 되팔 수 있는 작품들을 찾는 데 열심이었다. 물론 자신의 노고에 대해 1%의 수수료를 받으면서 말이다. 시몽은 “상업이 예술과 문화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듯했다.
민중을 지켰던 성직자가 부패한 독재자로
폴의 심경은 복잡했지만 외교부 지원으로 여행 중인 만화가로서, 완전히 낯선 동시에 사랑스러울 만치 친숙한 나라를 다니는 데 가이드가 있다는 사실이 흡족했다. 그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아이티와 도미니카 공화국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도미니카 공화국과 아이티, 두 국가가 자리한 이 섬에서 도미니카 공화국은 섬의 2/3를 차지하며 거의 모든 영토가 푸른 숲과 들판으로 이뤄져 있었다. 나머지 1/3을 보유한 아이티에 착륙했는데 거의 모든 곳이 맨땅이었다. 폴이 택시 안에서 시몽에게 “아이티의 풀과 나무는 그래서 어디로 간 건가요?”라고 묻자 시몽은 “곧 보게 될 거예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영원히 무질서한 도로에서 십여 분 동안 수다를 떨던 도중 시몽이 말했다. “자, 아이티 목초지는 여기서 끝나요.” 폴과 시몽은 흑인들이 어두운 곳에서 고생하며 일하는 곳을 지나갔다. 그들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리고 땀을 흘려 빛이 났으며, 석탄을 담은 자루를 구부린 등에 메고 윗면을 이마에 고정한 상태였다. 화로에서 나오는 연기로 인해 상당히 어두운 시야 속으로 거무스름한 윤곽이 희끗희끗 보이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인해 폴은 완전히 새로운 불안에 사로잡혔고 해결책으로 그림 수첩을 꺼냈다. 시몽이 폴에게 아이티에서는 목탄 생산 때문에 나무를 베는데 가난한 계층, 즉 아이티 국민 대다수에겐 목탄이 유일한 연료라고 말하는 동안 폴은 크로키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폴은 더 이상 멈추지 않았다. 아이티에 대해 진심으로 애정을 갖고 있고 분명 박학다식한 시몽은 자발적으로 수다스러워졌다. 시몽이 마약의 지정학적 특성에 대한 이야기, 미국산 핑크 돼지 사육을 위해 토종 흑돼지를 멸종시킨 일, 부패한 독재자에 대항해 민중을 지킨 성직자가 부패한 독재자로 전락한 이야기(2), 1825년 프랑스가 과거 식민지였던 아이티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대신 요구한 배상금으로 인해 아직도 그 여파가 극심하다는 이야기, 메드릭 루이 엘리 모로 드 생메리(3)의 분류법에서 비롯된 피부색에 따른 계급이 현재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동안 폴은 흘려들으며 아이티인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인 토대가 되는 그들의 생활용품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불안에 빠져 몸이 마비돼
현재 폴은 다리의 통증이 약화되면서 술기운에 다시 어지러워지자 자신이 빠진 검은 구덩이 바닥에서 지루함을 느꼈다. 그는 티셔츠 안에 있는 크로스백을 더듬었다.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 행동이었다. 백에는 구르드(아이티 화폐-역자주) 한 뭉치, 신분증, 신용 카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림 수첩이 있었다. 폴은 수첩을 훑어보고 크로키를 세밀하게 보완하고 그림에 남긴 설명을 다시 읽고 싶은 듯했다.
노상에서 판매되는 기다란 비누. 인구 대부분이 개별적으로 물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강과 석호에서 씻고 세탁하는 일은 야외 활동이나 마찬가지다. 밤색 종이봉투에 담긴 설탕. 티스푼으로 30여 개 분량인데 아이티인 한 명이 마시는 커피 여섯 잔에 넣는 양이다. 낱개로 파는 통마늘과 조미료 큐브. 두 남성이 밀고 당기는 거대하고 무거운 인력거. 어쩔 수 없이 노예 지지자들의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머리 위에 물건들을 얹기 위해 놓는 작은 쿠션. 이 사람들은 머리 위에 가능한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얹어 옮긴다. 흰 플라스틱 통과 뚜껑. 도로를 따라 길게 줄을 서 물을 뜨러 갈 때 사용한다. 여자아이에게 우선적으로 맡겨진 잡일이며 여자아이가 안 되면 성인 여성이, 그도 안 되면 남자아이가 한다.
시골 한가운데 있는 무덤. 때때로 커피를 말리는 데 사용된다. 등굣길 여자아이들의 머리에 알록달록하게 꾸민 플라스틱 리본, 나비, 공 등등. 녹슨 깡통 안에 담겨 팔리는 목탄. 고독한 농민의 커다란 칼. 만화가를 태우고 지나가는 지프차를 우울하게 바라본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여성들의 모자. 이들은 각각 개보다 겨우 조금 더 큰 당나귀를 타고 있다. (두 사람씩 이동한다.) 카파이시앙 시에 위치한 호텔의 사장이 쓴 터번과 헌 신발. 새벽부터 저 신발이 바닥을 쓸고 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맛있는 주스용 오렌지로 쌓은 피라미드. 자몽처럼 크고 푸르스름하다. 오렌지 껍질로 완벽하게 공 모양을 만들어 쌓은 피라미드. 도로와 여러 시장을 따라 줄지어 있다. 오렌지 껍질은 잼을 만들 때 사용한다. 수출 상품이기도 하다. 리큐어 제조 기업 쿠앵트로가 최대 구매사다. 주문하면 껍질을 벗겨 주는 사탕수수 토막. 파리가 윙윙대는 햇볕 아래 말린 알루미늄 빛깔의 아주 작은 물고기. 과속방지턱. 아주 위험한 과속 방지기. 거기다가 차도와 인도를 아주 위험하게 하는 자갈과 구멍이 한 무더기가 있어 밤에 특히 위험하다….
술에 취한 밤에 특히 위험하다. 그날 밤 시몽은 폴을 찾으러 호텔로 가 주 2회씩 반복된 일정에 따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저녁을 함께했고 술을 몇 잔 마시며 저녁 시간을 보냈다. 매번 폴은 저녁 식사 초대를 수락하는 데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여러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자신이 운영한 아틀리에가 진행되는 동안 구상했던 그래픽노블 일을 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저녁 6시가 되자마자 까만 밤이 내려앉고 폴이 머무는 안전한 숙소에는 죽음 같은 고요가 덮쳐왔다. 소음이라고는 길가에서 강아지가 헥헥대고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수많은 벌레는 소리 없이 치열하게 모기장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로 인해 폴은 불안에 빠져 몸이 마비됐다. 시몽의 활기찬 자동차 경적에 따르는 게 나았다. 시몽은 더 이상 낮 동안 폴에게 정식으로 저녁 식사를 제안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다.
“우리 교민들은 여기에 하등 도움이 안 돼”
제레미 지역 출신 복음주의 신도인 요리사 카퓌신이 내놓은 음식의 재료는 늘 그렇듯 유엔과 비정부기구 관료 및 대사관 직원들이 이용하는 마트에서 사온 것들이다. 먼저 노르웨이산 연어와 캘리포니아산 아보카도를 곁들인 유기농 샐러드가 나온 뒤 호주산 소고기로 만든 뵈프 부르기뇽이 상에 올랐고 마지막으로 카망베르는 우리 프랑스산이었다. 식사 내내 칠레산 보르도 와인을 곁들였으며 이탈리아 브랜드의 커피를 마셨다. 현지 식음료로는 유일하게 바르방쿠르라는 아이티산 럼을 몇 잔 마셨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택 경비원은 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하는 것 같은 자세로 총신에 이마를 기댄 채 오두막으로 된 경비실에서 졸고 있었다. 경비원에게 인사한 뒤 - 민주 사회에서 통용되는 예의 바른 행동이면서 그를 깨우는 용도이기도 했다. - 폴과 시몽은 숨 막히는 더위가 이어지는 정원을 지나 외교관 차량 번호판을 단 흰색 지프차에 탔다. 그리고 바로 얼음처럼 차가운 에어컨을 쐤다. 지프차는 400미터 떨어진 페티옹빌 중심지로 가고 있었다. 차 안에서의 대화는 평소보다 화기애애하지 않았다. 시몽이 운전을 하며 마리화나에 불을 붙이는데 폴이 불쾌한 질문을 던졌다.
“아이티 음식은 전혀 안 먹나요?”
시몽이 담배를 빤 뒤 연기를 내뱉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말이죠, 토란이랑 지로몽 호박은 빨리 지겨워지거든요. 제가 아침 댓바람부터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를 먹었으면 좋겠어요?”
시몽이 말하는 어조가 상당히 공격적이라 폴은 당황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몽이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요. 우리 교민들은 우리끼리 살고, 여기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이 정도 월급이면 아이티 가족 20명 이상은 먹고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여기 사람들이 부패한 지도자들이나 쟁글랭도, 국제 범죄단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게 내버려두라는 거예요?”
폴은 대답하지 않았다. 페티옹빌의 어두운 밤거리. 아직 영업 중인 매장의 쇼윈도에 비친 난폭한 빛이 점점이 조금씩 더 멀어져갔다. 폴은 전날 경찰서에 갔던 일을 생각했다. 폴에게 멘토링을 하는 지인이 폴에게 아이티 민간 사절단 ‘미시비’의 대표 한 명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그 대표가 폴에게 경찰서에 동행할 것을 부탁했다. 대표는 어떤 단체의 간부 한 명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봐야 했다. 이 간부는 서민 주거 단지를 조성하기 위해 넓은 대지를 마련해 두었었다. 명백한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처음에 이 단체는 친‘아리스티드’계 시장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이후 시장이 사직했고 땅 주인이자 아이티 최고 부자 중 하나인 뫼즈 가는 아리스티드의 도움을 받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 간부는 누명을 쓰고 수감됐다. 구치소의 최대 구금 기간은 6개월이었다. 구치소는 밀집도가 너무 높아 재소자들이 결코 누울 수 없었으며 하루 종일 쭈그려 앉아 있었다. 수감된 흑인 모두가 쇠창살 너머로 그 간부를 보고 있었지만, 폴은 그가 백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서류도 요구받지 않고 서양의 인권 대표부 직원을 동반할 수 있게 됐음을 깨달았다. 같은 이유로 폴은 그 간부가 저지를 수 있는 법 위반이 무엇이든 그가 자신을 쳐다봤던 이들과 같은 상황에 놓이는 일은 절대 없다고 확인했다. 아이티 독립운동가 투생 투베르튀르의 저항이 있고 200년이 지난 지금 비인도적인 환경에서 수감된 검둥이들 앞에 흰 피부의 자유로운 내가 있다. (그리고 아이티인들은 내가 견딜 수 있는 한도 이상으로 탑탑이라 부르는 버스나 합승 택시에 꾸역꾸역 타는 법을 알았는데 그 모습을 회상했을 때 내 마음이 더 편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유엔에 실망한 아이티 시민들
폴은 이 모든 것을 일체 말하지 않았다. 폴은 그저 마리화나를 피웠고 프티 파리에 도착하자 일단 진토닉을 주문한 뒤 시몽에게 ‘로아(4)’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그렇지만 이내 둘은 옆 테이블로 관심이 쏠렸다. 여자 넷이 잔을 들고 발기한 남근 모양의 케이크를 둘러싸고 다른 한 여성을 축하하고 있었다. 이 젊은 여성을 위한 처녀 파티였다. 피부가 아주 하얗진 않은 이 여성들은 모로 드 생메리의 계급 분류법으로 봤을 때 명백히 아주 높은 계급에 속해 있었다. 우아한 옷차림을 보니 이들이 아이티에서 지배 계급에 속한다는 것이 확실했다. 머리숱이 많고 조금 부자연스럽게 우아한 행동을 하는 이 혼혈 여성들은 아름다웠고, 긴 손톱 사이로 웃음을 터뜨리며 폴과 시몽을 오래 쳐다봤다. 시몽이 말했다. “저 여자들은 우리를 게이라고 생각해요.” 폴은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속으로 삭였다. 그 뒤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웃긴 상황이 펼쳐졌다. 시몽이 팔을 들었고 사장이 ─ 콧수염을 기른 또 다른 프랑스인이었다.─ 여성들에게 옆 테이블에서 사는 거라며 샴페인을 담은 통을 가져다줬다. 서로 떨어진 상태에서 잔을 들었다. 합석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름다운 숙녀 다섯이 갑자기 레스토랑을 나가는데 그들 곁을 지나갈 때에서야 겨우 인사를 했다. 돌출된 두꺼운 아랫입술은 화려했고 태도는 상당히 거만했다. 두 남자는 직원이 문으로 안내할 때까지 화가 난 채 계속해서 술을 마셨다. 그나저나 내가 차를 어디다 댔지? 젠장. 아이티의 밤을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러다….
‘주님만이 희망 미용실’
그러다 이렇게 구덩이에 빠졌다고 폴은 회고했다. 이렇게 낙후된 곳에서는 핸드폰이 터지지 않기 때문에 폴의 핸드폰은 가방 바닥에 있다. 폴은 몇 시인지 알 길이 없어 지겨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유엔 표시가 붙은 차량이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져다줄 것 같았지만 이제 거리의 시민들은 더 이상 그렇게 보지 않아. 시민들은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이 폐쇄적인 집단에 속한 이들의 거만함만 볼 뿐이야.”
그는 시몽이 있다고 상상하며 말했다. 시몽의 부재로 인해 정말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불안이 밀려오자 폴은 수첩을 다시 훑어봤다. 10대 학생들 수백 명의 손에 들린 학교 노트. 이 학생들은 달달 외울 생각으로 수업 내용을 낮은 목소리로 읽고 또 읽기 위해 상점이나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불빛을 찾아갔다. 펌프 연사식 12구경 총. 은행, 상점, 개인 주택, 심지어 빵집에도 있는 경비원의 무기다. 간 얼음에 시럽을 넣어 파는 상점 주인의 빙수 컵. 여기에는 ‘주께서 구원하신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을 선포하는 글귀.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 익스프레스’라는 이름의 배, 탑탑 버스 겉에는 ‘주님만이 희망 미용실’과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이 최우선, 복사, 문서 처리, 화장품’이 쓰여 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하기 위한 MCI 카드(애틋한 통화에 1달러)….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폴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느껴졌다. 그가 울부짖으려 하는데 누군가 그를 불렀다. 그는 단번에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아봤다. 콧수염이었다! 콧수염은 침착하게 “거기서 꺼내 줄게요”라고 말했다.
비참한 상황에도 희망을?
안도감이 해일같이 몰려오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넘실거렸다. 폴은 섬의 어둡고 깊숙한 구덩이에서 구출된 뒤 대사관 지프차에 앉아 계속 상충되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아이티를 미친 듯이 사랑하는지, 아니, 증오하는지 말하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어에서는 haïtie-아이티와 haïr-증오하다의 철자가 비슷하다-역주) 생각들이 뒤섞였다. 엉덩이에 주사를 맞는데도 폴은 생각에… 많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쩌면 진통제의 영향일지도. 그렇지만 어쨌든 그는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아이티에 호의를 갖고 있는 콧수염들, 많은 콧수염들, 수많은 시몽, 그리고 인도주의 또는 평화 유지 단체들의 약어가 적힌 흰색 차량들과 함께라면 아이티는 곧 구덩이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물론 도벽이 있는 정치권이 특권을 포기하고, 국제 마피아가 영향력을 포기하고, 높은 급여를 받는 북미권 유엔 간부들이 남들보다 월급이 100배 낮은 판사들에게 부패에서 벗어나라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 농촌을 망가트렸던 세계 경제 지도자들이 해결책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은 어려울 테지만, 해낼 것이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였다. 폴은 유엔과 비정부기구가 저지른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첫 10년 동안 이 기관들의 지원이 마침내 치안이 안 좋고 비참한 상황을 완전히 몰아낼 것이라는 데 희망을 걸었다. 폴은 이 아름다운 희망을 품은 채 잠이 들었다.
글·세르주 쿠아드루파니 Serge Quadruppani
번역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최근작으로는 『Maldonnes 잘못』(Métailié, 2021)과 『Une histoire personnelle de l’ultragauche 극좌파의 개인적 이야기』(Divergences, 2023)가 있다. 이 가상의 이야기는 1999년 아이티 체류 당시 쓴 메모에서 시작됐다.
번역·김은혜
번역위원
(1) 무장 강도. 모든 각주는 집필진이 첨부했다.
(2)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신부의 이야기에서 따왔다. 그는 1991년부터 1996년까지,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아이티 공화국의 대통령이었으며 프랑수아 뒤발리에(1957~1971년)와 그의 아들 장클로드(1971~1986년) 정권 당시 민병대인 ‘마쿠트’의 폭력을 비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3) 메드릭 루이엘리 모로 드 생메리(1750~1819년)는 노예제 지지 법관이다. 그의 저서 『Description topographique, physique, civile, politique et historique de la partie française de l’isle Saint-Domingue 생도맹그 섬 내 프랑스령의 지형적, 신체적, 세속적, 정치적, 역사적 기술』(1797)은 백인과 흑인 혼혈을 128가지로 나눠 9개 카테고리로 분류해 계급을 나눴다.
(4) ‘로아(loas)’는 부두교의 신령들을 일컫는 말이다.